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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시대와 함께한 영원한 ‘청춘의 책’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특별증보판 출간! “세상이 두려울 때마다 그들에게 길을 물었다” 『죄와 벌』부터 『자유론』까지, 유시민이 다시 펼쳐 든 오래된 지도 ★ 33만 부 기념 고급 양장 에디션 ★ 15번째 책 『자유론』 원고 및 특별판 서문 신규 수록 혼탁한 정국마다 명료한 통찰을 전하며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준 우리 시대의 지식인 유시민.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2009년 처음 출간되어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청춘의 독서』가 고급 양장 제본의 특별증보판으로 독자들과 새롭게 만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관한 이야기와 특별증보판 서문이 추가됐다. 문장도 전체적으로 손봤다.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이 ‘청년 시절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시대도 변하고 나이도 들었으니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손때 묻은 책들을 다시 펴보면서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죄와 벌』, 침침한 스탠드 불빛 아래 엎드려 몰래 읽었던 『공산당 선언』,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슴 아픈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역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21세기가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 다시 자유의 가치를 떠올리게 한 『자유론』까지. 누구보다 뜨거웠던 청년 유시민을 만든 원천이자, 오늘의 유시민이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할까?”,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일까?”, “내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문명의 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운 15권의 위대한 책들. 그 안에는 앞서 살다 간 이들의 고민과 답이 담겨 있다. 『청춘의 독서』를 통해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우고 더 나은 내일을 그리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저 : 유시민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했다. 국회와 정부에서 잠시 일했고 비평가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은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산다.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란 말에 끌려 몇 해 전 유럽 도시 탐사 여행을 시작했다. 도시의 건축물과 거리, 박물관과 예술품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유럽 도시 기행》을 썼다. 여행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이 작업을 앞으로도 오래 할 생각이다. 주요 저서로 『청춘의 독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한국현대사』, 『역사의 역사』,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럽 도시 기행』 등이 있다. * 출처 : 예스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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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일에 관한 얘기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자로서 지금까지 낸 책이 적지는 않단다. '제일 애착이 가는 책이 어느 것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단다. 늘 <청춘의 독서>라고 대답했단다. 앞으로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렇단다. 왜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한단다. '제 생각과 감정을 제일 많이 표현한 책이거든요.'
그의 직업 정체성은 '지식소매상'이란다. 명함에 그렇게 쓴 적도 있단다. 그는 사람들이 알면 좋을 것 같은 정보를 최대한 재미있게 엮어 읽기 편한 문장에 담는단다. 제일 오래된 <거꾸로 읽는 세계사>부터 최근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와 <유럽의 도시 기행>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서점에 있는 그의 책 대부분 그렇게 썼단다. 그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면서 존재의 자격을 확인하는 방법이란다.
<청춘의 독서>는 '살짝' 예외란다. 널리 알려진 고전을 다루었지만 책 정보를 전달하려고 쓰지는 않았단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삶과 인간과 세상과 역사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 하려고 썼단다.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읽는 일에 관한 이야기란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려는' 목적보다는 '그를 표현하려는' 욕망에 끌려 썼단다. 어디 그만 그렇겠는가. 누구든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글에 애착을 느낄 것이란다.
<청춘의 독서>는 이미 적지 않은 독자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단다. 그런데도 편집자가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도록 한 꼭지를 보충해서 특별판을 만들자고 했단다. 권고를 받아들여 <자유론> 편을 새로 썼단다. 왜 하필 <자유론>인가? 원래 좋아하는 책이란다. 게다가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국가와 정치의 풍파를 소화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선택했단다. 대학에 막 들어갔던 딸에게 주었던 헌사(獻辭)와 집필 수기를 조금 고쳤단다. 평소 흉하다고 생각했던 본문의 문장을 여기 저기 손보았단다.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단다.
한강 선행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종이책 읽기가 '힙한 행위'로 떠울랐다는 말을 들었단다. 사실이면 좋겠단다. 유행은 오래 가지 않는다지만 잠깐이라도 어딘가. 이 특별판이 '힙한 종이책' 유행에 일조할 수 있기를 감히 기대해본단다.
2025. 4월
유시민
초판 서문
오래된 지도를 다시 보다
길을 잃었단다. 많은 친구들이 함께 여정을 떠났지만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차례차례 다른 길을 선택해 멀어져갔단다. 아픈 다리를 서로 달래며 지금까지 동행했던 사람들도, 다른 곳에서 출발 했지만 어느 곳에선가부터 함께 걸어왔던 이들도 생각이 조금씩 다르단다. 날이 저물어 사방 어두운데, 누구도 자신 있게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단다. 망연자실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단다.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지도 못한단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서 무엇이 어긋났던 것인지 살펴보는 일뿐인 것 같단다.
달그림자와 별을 살펴 방향을 새로 가늠해보고, 갈림길과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도움받았던 낡은 지도를 꺼내 살펴본단다. 이 지도에 처음부터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저자가 지도를 잘못 읽은 것일까? 온갖 의구심이 먹구름처럼 밀려든단다.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여유를 가지기로 했단다. 그리고 긴 여정을 함께했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지난 시기에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차분히 되짚어보았단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나왔단다. 이것은 문명의 역사에 이정표를 세웠던 위대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위대한 책을 남긴 사람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책들에 기대어 나름의 행로를 걸었던 그 자신과 그 과정에서 그가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단다. 지금까지 그의 삶에 깊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던 이 책들은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 그가 들었던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어떤 독자도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단다.
생물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한단다. 최초의 수정란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수십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으로 성장하는 열 달은 지구 행성에 처음 출현한 유기 분자가 호모사피엔스로 발전하기까지 수십억 년의 진화적 시간을 압축.반복한단다. 지성의 개체발생도 계통발생을 반복한단다. 인간의 대뇌피질에 축적된 정보의 유기적 통일체인 지성, 그것 역시 기나긴 지식과 지성의 발생사를 압축.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단다. 나의육체는 코스모스를 운행하는 모든 별들과 같은 물질로 연결되어 있고, 정신은 문명사의 이정표를 세웠던 위대한 지성인들과 책을 통해 이어져 있단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서 살아 있는 문화 유전자를 상속받았단다. 그들이 했던 고민과 사색은 많든 적든 그의 것이기도 하단다.
명색이 글쟁이면서 그의 아내에게 헌정한(?)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면목이 없단다. 그래도 이 책은 그의 아내 K의 허락을 받아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가 제 나름의 인생행로를 설계하고 있는 딸 S에게 주기로 했단다. 그의 아내와 그는 그들이 그 나이였을 때 있었다면 좋았을 책이라는 데 공감했단다.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단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 할 수 없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기획을 했을 때부터 격려와 배려를 앆지 않았던 웅진지식하우스 이수미 선생과 한 꼭지씩 초고부터 함께 읽고 검토해준 김보경님께 감사드린단다. 함께 일하는 게 처음인데도 모든 일이 유쾌하고 원활하게 진행되었단다. 국회도서관에서 30여 년 전 책들을 찾아준 김유경님의 수고에 감사드린단다. 그의 청춘의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어주셨던 리영희 선생님과 최인훈 선생님께는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담아 큰절을 올리며 두 분의 건강을 축원해드리고자 한단다. 아울러 위대한 지성의 목소리를 우리말로 번역해 들러주신 모든 선생님들께도,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감사드리지 못한 데 대한 용서와 이해를 청하며 감사 인사를 올린단다.
2009년 10월
유 시 민
01 ;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고등학생 시절, 공부가 잘되지 않으면 문고판 책이 많았던 아버지의 서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 뒤적이는 버릇이 있었단다. 마음이 끌리는 책이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될 때까지 읽다가 덮어두곤 했단다. 이렇게 띄엄띄엄 읽었던 책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제목과 내용이 대충 떠오른단다. 대입예비고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던 1977년 가을 어느 토요일, 저녁을 먹고 나서 글자가 깨알처럼 박힌 세로쓰기 문고판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단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그 책은 중간에 덮을 수가 없었단다.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상하 두 권을 다 읽었단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었단다. 그는 소설 도입부의 문장 하나에 그대로 꽂혀버렸단다.
"그런 일을 저지르려고 하면서, 이토록 하찮은 일을 두려워하다니!"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그런 일"은 살인이란다. "이토록 하찮은 일"이란 하숙집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이란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이고 돈을 훔치기로 결심한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는 현장을 미리 답사하기 위해 하숙집을 나섰단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이, 집세와 식대가 밀려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주눅이 든 나머지 혹시 계단에서 하숙집 여주인과 마주칠까 봐 마음을 졸였단다. 주인공은 그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비웃었던 것이란다.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결국 라스콜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였단다. 범죄에 쓴 도구는 도끼였단다. 자신이 예측한 것과 달리 바로 그 순간 현장에 나타났던 노파의 배다른 여동생 리자베따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단다. 그것은 계획하지 않은 살인이었단다. 그런데 이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른 살인범 라스꼴리니꼬프는 악한 인간이 아니란다. 못된 짓은 한 적이 없는, 선량한 대학생이란다. 자신도 돈에 쪼달리면서 폐결핵에 걸린 친구를 도우려고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를 다 써버리고, 그것도 부족해 그 친구 아버지 장례도 치러주었단다. 심지어는 살인을 한 뒤에도 선행을 했단다. 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된 퇴역 관리 마르멜라도프가 만취 상태에서 마차에 치여 죽자, 어머니가 빚을 내 보내 준 장학금 25루블을 메르멜라도프의 아내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장례 비용으로 쓰라며 몽땅 줘버린단다. 메르멜라도프의 딸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일로 인연을 맺었단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저자는, 인간의 삶이 위험의 바다를 향해하는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단다. 그가 <<죄와 벌>>에 '꽂혔던' 것은 그 소설의 문학적 향취나 극적인 재미 때문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가 정밀하게 묘사한 제정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부르크 뒷골목의 음산한 풍경과 여러 등장인물들이 겪는 처참한 가난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그것은 저자가 어린 시절 경주와 대구에서 직접 보고 겪었던 절대 빈곤보다 훨씬 더 끔찍한 참상이었단다.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한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은 100년도 더 전인 1860년대 '제정(帝政)' 러리사였다는 사실을 그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단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사람을 죽였지만 근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란다. 그가 본의 아니게 죽인 리자베따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판 소냐도 모두 착한 사람이란다. 소냐의 아버지 알코올중독자 마르멜라도프와 계모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도 결코 악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단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하단다. '어째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인간 사회는 이러한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런 의문이 나를 사로잡았단다.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과 소설 속에 나오는 1860년대 제정러시아가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비슷한 사회로 보였단다. 그때 대한민국은 조세희 선생의 <<안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동철'이라는 필명을 쓰는 정체불명 작가의
(나중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이철용이란다. 13대 국회의원이 되어서 청문회에 나온 전두환 씨한테 살인마라고 소리를 지른 사건으로 유명한데, 정계를 은퇴한 다음 한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머리를 싹 밀고 다시 나타나 역술인을 활약하고 있단다).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을 낳은, 정의가 짓밟히고 악당들이 활개 치며 착한 사람들이 멸시당하는, 바로 그런 나라였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죄와 벌>>을 읽으면서 가난의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것은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웠단다. 사회제도와 빈곤의 상호관계 또는 인과 관계를 논리적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기에 '느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단다. 이 느낌은 다음과 같은 의 문을 불러왔단다. '만약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악덕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사회악은 도대체 왜 생겼났는가? 사회악을 완화하거나 종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와 벌>>은 저자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떠난 독서와 사색, 행동과 성찰,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단다.
날카로운 첫 키스와 같은 책
도스토옙스키도 같은 질문을 두고 고뇌했단다. 그리고 그 고뇌의 끝에서 매우 과격하고 관념적인 해법을 건져 올렸단다. 도스토옙스키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쓴 <범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악을 척결하고 공동선을 실현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도덕적 딜레마'를 내포한 '초인론'이었단다. 예심판사 뽀르피리 빼뜨로비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전당포 자매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했단다. 의심의 단서가 된 그 논문에 대해 예심판사는 라스골리니꼬프와 그의 친구 라주미힌에게 각각 이렇게 말한단다.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어떤 부류들이 있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기보다는, 그런 짓을 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또 그들에게는 어떤 법률도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그런 암시였습니다"
"문제는 이분의 논문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법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는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순종하며 살아야만 하고, 법률을 어길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아.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들이니까. 비법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비범하기 때문이라는 거야."
라스꼴리니꼬프는 뽀르피리가 '거의 올바르게' 논문을 이해했다고 하면서도, 한 가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단다.
"비점한 사람들이 반드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써야만 하고,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비범한' 사람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것도 만일 그의 신념 - 때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적인 신념일 수도 있지요 - 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요구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말입니다. (.....) 예를 들면 아주 고대로부터 시작해서 리쿠르고스, 솔로몬,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입법자들과 제정자들은 새로운 법률을 제시하고, 그로 인해 선조로부터 전해져서 사회에서 성스러운 추앙을 받은 낡은 법률을 파괴했고, 만약 유혈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면, 피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범죄자들이었다는 생각을 발전시킨 거지요. 이런 인류의 은인과 건설자들이 대부분 특히 무서운 살인자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 어느 싸구려 술집에서, 젊은 장교와 대학생이 전당포 노파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단다. 대학생은 장교를 앞에 두고 라스꼴리니꼬프가 논문에서 다루었던 바로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한단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는 배다른 여동생 리자베따를 하녀처럼 부려먹었고, 그것도 모라자 동생이 부업을 해서 번 돈까지 모두 빼앗았단다. 그러면서도 리자베따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남기지 않고 자기가 죽고 나면 사후 추도를 해줄 수도원에 재산을 몽땅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단다. 대학생은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장교에게 묻는단다.
"도움을 받지 못하면 좌절하고 말 싱싱한 젊은이가 있단 말이야. 그런 젊은이가 도처에 있어! 그리고 수도원으로 가게 될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지고 고쳐질 수 있을 수백, 수천 가지의 사업과 계획들이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정들이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들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나 머릿니의 삶보다 나을 것이 없고, 어쩌면 그보다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잖아."
이 주장을 일반화하면 이렇게 된단다.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어떤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이라는 악한 수단을 써도 된단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본능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단다. 인간의 양심에는 악을 저지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모덕적 직관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본능이란다. 이 본능은 우리에게 명령한단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 '평범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이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단다. 만약 누군가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피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비범한 부류' 또는 초인이라고 할 수 있단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이 이론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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