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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소로(2025.01.26) - 존 캐그, 조너선 반 벨 - 기록중

동선(冬扇) 2025. 1. 26. 14:34
책 소개

MD 한마디
『월든』 저자 소로는 은둔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사회에 저항하는 운동가였고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였다. 이 책은 소로의 노동자 정체성을 추적한다. 집필, 강연, 오두막 짓기, 연필 제작 등 다양한 일을 했던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주체적으로 일하라고. - 손민규 인문 PD


불멸의 인문 고전 『월든』으로 200여 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새롭게 해석한 『일터의 소로』가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숲속으로 들어간 은둔자이자 사색가 소로에게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간 노동자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목한다. 월든에서 소로는 사색하고 글만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지런한 갓생을 사는 N잡러였다. 그런 삶을 기반으로 다져졌기에 소로의 철학은 시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 잠에서 깨어 자유로운 하루를 맞이하길 바라지만, 먹고살아야 하기에 매일 출근길에 오르는 우리에게 소로는 말한다. 영혼도, 시간도, 삶도,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말라고. 일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죽어 간다고. 의미 없는 출퇴근의 나날 속에 절망하면서도 한 줄기의 빛을 향해 마음을 열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저 : 존 캐그
메사추세츠 대학교 철학 교수. [뉴욕타임스] [하퍼스매거진]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보스턴 근교에서 아내와 딸과 살고 있다. 저서 『미국철학American Philosophy: A Love Story』은 2016년 NPR 최고의 책 및 뉴욕타임스 Editors’ Choice로 선정되었고,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은 2018년 NPR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특유의 우아한 문체로 윌리엄 제임스를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 은 2021년 미국출판협회 프로즈상 철학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철학을 매혹적으로 결합하는 글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
 

저 : 조너선 반 벨
작가이자 독립 연구자이자 철학자. 저서로 『Zenithism』『Thinking through Writing』 등이 있다. 아내와 꼬마슈나우저, 니체와 함께 미국 오리건주에 살고 있다.

                                                                                                                                                                                 * 출처 : 예스24


 

서문

 

먹고사는 일

 

빈둥빈둥 논다는 사람이 44세까지 일기장에 200만 개도 넘는 단어를 적을 수는 없단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에 담긴 단어의 개수는 뉴킹제임스 성경보다 120만 개가 많는 200만 개란다. 그럼에도 소로는 게으름쟁이에 한량으로 악명이 높단다. 이렇게 묻고 싶단다. 소로를 생각하면 무엇이떠오르는가? 자연을 숭배하는 자연주의자? 급진적인 노예폐지론자? 도독을 추구하는 생존 전문가? 농땡이 치는 사기꾼?

소로의 모습은 여럿이지만 유독 한 모습만은 주목받지 못한단다. 바로 노동자 솔호의 모습이란다. 소로를 노동자로 보는 시각은 흔치 않지만 사실상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생각이 깊은 노동자였단다. 일은 소로 철학의 뿌리에 있으며 소로의가장 유명한 저서 <월든>의 근간이기도 하단다. 이 책은 소로가 매사추세츠주 콩고드 숲속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던 2년 동안의 기록이란다.

월든 호숫가에 네 평 집을 지은 일은 소로가 숲속에서 한 다양한 노력 가운데 최초는 아니지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단다. <<월든>>의 첫 장 <경제>는 노동에 관한 소상하고 소란스러운 기록이란다. 소로는 도끼를 빌려다가 "목재를 마련하기 위해 아직 어린, 화살 같은 스토로브 잣나무를" 제었는가 하면 "통나무 겉 부분을 켜서 만든, 송진 범벅에 삐뚤빼뚤한 널조각으로" 집의 외벽을 덮었단다. "남향으로 앉은 언덕배기를 파서" 지하 저장실을 만들기도 했다. "호수에서 돌멩이를 주워 두 팔 가득 안고 언덕으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그 양이 수레 두 개를 채출 만큼이었다" 소로는 이 돌로 굴뚝의 기초를 쌓았단다. 심지어 문에 달 빗장쇠를 두드려 만드는 것도 도왔단다. 침대를 만들기 위해 중국식 침대 겸용 의자를 재활용하기도 했는데, 수십 년 된 등나무 뼈대에 다리를 못질했고 들것에 쓰던 막대기도 갖다 붙였단다. 소로는 집을 짓는 이 모든 과정을 즐겼단다. "나는 일을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을뿐더러 알차게 누렸다" 즐거운 일을 서둘러 할 필요는 없는 법이란다. 

월든의 집이 소로의 첫 건설 프로젝트는 아니었단다. 아버지 존을 도와 매입한 집을 새로운 터로 옮긴 적도 있단다. 평생 열심히 일한 소로의 아버지는 당시 식료품점 사업을 두 차례나 말아먹은 뒤였단다. 소로는 아버지와 함께 기초 공사를 해 텍사스가에 집을 짓고 "텍사스 하우스"라고 이름 붙였단다. 집을 지어 보고 초석을 놓아 본 철학자가 얼마나 있을까?

호숫가 집이 완성된 후 진정한 노동이 시작되었단다. 글을 쓰는 일이었단다. 소로가 밝혔듯이 그는 월든 호수에 일을 하러 간 것이었단다. 소로는 목숨이 달린 문제라는 듯 일했고 사실상 목숨이 달려 있었다고 주장한단다. 우리가 한 작가의 글을 그 사람의 코퍼스(육신을 의미하는 라틴어 코르푸스에서 왔다)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단다. 그 작가가 남겨 놓고 떠난 사상의 육신, 혹은 기념비이기 때문이란다. 소로의 친구이자 초월주의 학파의 동료였던 앨러리 채닝은 소로가 호숫가 집에서 놀라운 생산성을 발휘했다는 이유로 이 집을 "나무로 만든 잉크 받침대"라고 했단다. 여기서 머문 2년 하고도 두 달 하고도 이틀간 소로는 첫 저서 <<콩코드와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의 초고를 쓰고 또 수정했으며 117쪽 분량의 <<월든>> 초고를 썼단다. 이뿐 아니라 다양한 수필을 다양한 방식으로 집필했는데 그중에는 추후 <시민 불복종>으로 알려진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도 있었단다. 그나저나 첫 저서 <<콩코드와 메리맥강에서의 일주일>>은 판매량이 형편없었단다. 왜냐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소로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지나치게 애를 썼기 때문이란다. 실로 노동자 소로를 너무 그대로 본받지는 않는 편이 좋은데 소로는 여러모로 지나치게 애를 쓴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그럼에도 짧고도 부지런했던 소로의 삶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여러 교훈을 준단다.

 

소로는 미국 경제사의 중요한 전환기, 노동의 의미가 급진적으로 변화한 시기에 살았단다. 소로의 직계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단다. 오히려 의심할 바 없이 가난할 때가 많았단다. 소로의 집안이 1820년대에 들어 경제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소로의 삼촌 찰리가 뉴햄프셔에서 흑연 광산을 발견한 덕분이었단다. 소로의 아버지와 삼촌은 연필 제작 사업을 시작했단다. 훗날 미국 문학의 선택받은 아들로 불리게 될 젊은이에게도 매우 적합한 직업이었단다.

소로의 어린 시절은 여느 노동자 집안 아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연속이었단다. 아홉 살 때에는 "소에서 떨어졌다". 소로가 실제로 소를 타고 있었는지 그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단다. 같은 나이에 심부름으로 바무를 베러 나갔다가 발가락 하나를 잃기도 했단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에는 빗속에 임시 거처를 세울 수 있었단다. 열여섯이 된 소로는 처음으로 배를 만들어 로버라는 이름을 붙이고 콩코드강을 오르락내리락 휘젓고 나녔단다.

중요한 스승이자 동료였던 랠프 월도 에머슨을 위해 소로는 저장실 바닥에 마루를 깔기도 하고 울타리, 헛간, 옷장 선반, 배수구 등도 만들어 주었단다. 게다가 에머슨의 아이들과 조카들도 돌보았단다(뉴욕시에서 작가로 일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스태튼아일랜드에 잠시 머물 때였다). 에머슨이 강연을 하느라 유럽에 가 있는 동안 콩코드에서 에머슨의 아내 리디언과 함께 에머슨 집안의 아이들을 돌보던 소로에게, 에머슨의 어린 아들 에디는 아빠가 되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단다. 에머슨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로는 다소 경솔하게도 이렇게 적었단다. "에디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문더군요. '소로 아저씨, 우리 아빠가 되어 주실래요?'... 그러니 자리를 빼앗기기 싫다면 어서 돌아오셔야겠습니다."

소로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란다. 하버드 재학 시절에도 오레스테스 브라운슨의 아이들을 돌본 적이 있었단다. 브라운슨은 설교자이자 작가, 노동 운동가로 은행과 부의 상속을 폐지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사람이었단다. 

소로는 학교에서도 가르쳤단다. 그는 일찍부터 교단에 서는 진로를 택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로"를 정할 때처럼 꼭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란다. 소로는 형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존 주니어와 함께 콩코드 아카데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단다. 콩코드 아카데미는 소로가 피니어스 앨런의 지도 아래 형 존과 함께 다녔던 사립 학교였단다. 소로 형제의 다소 진보적인 교육 목표에 따라 학생들은 자연 속으 산책하거나 토론하거나 실용적인 기술을 배웠단다. 형제의 제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 중에는 <<작은 아씨들>>의 저자 루이자 메이 올콧도 있단다. 하지만 소로 형제의 교직 생활은 길지 않았단다. 존의 건강이 악화되어 문을 연 지 겨우 4년 만에 두 사람은 콩코드 아카데미의 횃불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단다.

하지만 하나의 진로가 다른 진로로 이어지기도 한단다. 콩코드 아카데미를 운영한 덕에 소로는 운 좋게도 정기적인 소득을 가져다주는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측량이었단다. 콩코드 초등학교에서 측량을 가르치긴 했지만 소로가 특량 기사로 일하게 된 계기는 여러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차적인 결과였단다. 소로 연구자 제프리 S. 크레이머는 이렇게 썼단다. "1840년 소로는 복합식 높이 측정 도구와 측량용 나침반을 구매했다. 형 존과 함게 운영하는 학교에서 측량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좀 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응용 분야를 보여 주고 싶었다. 덕분에 소로는 일생을 측량 기사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었고 콩코드 지역에서 약 150건의 측량을 했다." 

소로는 측량 일로 만족하지 않고 부업도 했단다. 그에게는 발명가의 면모도 있었단다. 그는 기존의 유럽산 고급 연필에 쓰이는 흑연보다 더 고운 입자의 흑연을 분쇄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단다. 소로는 스스로 "손가락 개수만큼 재주가 많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살면서 장작 패기, 목수일, 석공 일, 흑연 분쇄 등 안 해 본 일이 없지만 신기하게도 손가락 열개는 무사했단다. (물론 발가락의 경우는 달랐단다)

어쨌든 소로는 게으름쟁이는 아니었단다. 걸어 다닐 때도 일을 하라고 권유했단다. 반추라는 일 말이란다. 수필 <걷기>에서 소로는 "걸으면서 반추하는 유일한 짐승인 낙타처럼 걸어야 한다"고 썼단다. 그리고 스스로 낙타처럼 걷는 법을 실천했단다. 로버트 설리번의 글에 따르면 "소로는 매일 4시간에서 6시간씩 걸었고 매일 수천 단어가 넘는 글을 썼다. 밖에서는 연실로 수첩에 적고 나중에 일기장에 잉크로 옮겨 적으면서 살을 붙였다" 걷기를 반추와 엮은 것만이 아니란다. 소로는 모든 여가 시간을 적극적인 행동과 엮었단다. "여가가 좀 완전하고 온전한 행동을 할 기회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왜 미국 언론인 찰스 프레더릭 브릭스는 <<월든>>이 출간되었을 당시 월간지 <퍼트넘 매거진>에 서평을 쓰면서 소로를 디오게네스와 성 시메온에 견주었을까? 이 둘이야말로 실제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디오게네스는 커다란 포도주 통에, 성 시메온은 열 길이 넘는 높은 기둥 위에 살았단다. (게다가 "집"을 직접 짓기는 커녕 "어쩌다 발견한 물건"을 집으로 삼았다) 글을 끄적이고 측량하고 집을 짓고 아이를 돌보고 식물 표본을 모았으며, 두엄을 퍼 나르는 일같이 하찮은 일을 비롯해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던 소로는, 그렇다면 왜 여유 만만한 시간 비우기의 대가, 뉴잉글랜드식 선불교의 지도자 취급을 당하게 된 걸까? 

소로가 노동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가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란다. 소로는 고용자와 피고용자 모두에게 따져 물었단다. 근로 계약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칭했으며 사람들이 "착각 속에 일한다"고 주장했단다. 이런 식으로 소로는 철학을 실용적인 것으로, 심지어 시급한 것으로 만들었단다. 그는 사직의 기쁨과 위험, 근무일의 리듬, 노동이 필요없는 기술의 유토피아라는 종종 터무니 없는 약속, 그리고 불변의 철학적 질문, "내 월급은 얼마인가?" 등에 대해 차근차근 길잡이가 되어 알려 준단다.

한편 소로가 근면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를 경제학자로 보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도덕적. 정치적" 경제라는 좀 더 오래되고 전체론적인 의미에서 소로는 분명히 경제 사상가였단다. 소로의 귀중한 작품 <<월든>>의 첫 장 제목도 <경제>란다. 소로는 열심히 일한 만큼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도 했단다. 그는 소크라테스식 화법으로 일에 질문을 던졌단다. 우리는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가? 거기서 무얼 얻고자 하는가?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소로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1830년대에 미국 경제는 오늘날의 모습과 비슷해져 가고 있었단다. 사람 대신 기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주식 투기가 벌어지고 온갖 상품이 넘쳐나는, 돈에 미친 괴물이었단다. 소로는 이런 변화를 경이와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단다. 콩코드강 기슭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는 화물을 실은 바지선이 여기서 저기로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신이 났단다. 선장은 가끔 소로를 태워 주기도 했고 그런 날만큼은 어린 소로도 거상이 된 기분이었단다. 그러나 갈수록 소로는 현대 자본주의라는 세이렌의 노랫소리,  그 속에서 흥청망청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두려움을 느꼈단다. 물론 현대 경제 체제 속의 노동은 결코 편안하지 않단다.(소로 역시 일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소로의 시대에도 우리 시대에도 노동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지나친 탐욕과 맹목적인 생산성 추구가 과도한 소외와 허무주의를 초래했다는 점이란다. 

이것이 과장이라고 느껴진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잔다. 출근길에 종종 일허러 가기 싫다는 기분이 들이 않는지? 급여로 받은 돈으로 차에 기름을 넣고 회사로 가면서 회사를 불태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지는 않는지? 주당 70시간 일해도 밀린 신용 카드 대금의 이자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영리하게" 일해도 언제나 주머니가 가볍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지? 이 정도면 이해가 될 것이란다. 소로는 <<월든>>의 도입부에서 "경제"의 원뜻을 되새기려는 시도를 통해 오늘날의 경제 모델을 집요하게 비판한단다. 

"경제"라는 말은 뿌리가 그리스어 오이코스에 있단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는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단다. 가족, 가족의 땅, 그리고 가족의 집이라는 뜻이란다. 의미상 서로 대체 가능한 이 세 가지는 고대 그리스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  단위를 구성했단다. 특히 그리스의 세습 귀족 가문에게 가족과 혈통은 다른 어떤 소속 단위보다 중요했단다. 가족은 그 당시에도 이후에도 작은 국가로 여겨졌으며, 가족 내에는 질서와 모범이(뛰어난 도덕의식의 모범 혹은 도덕적 해이의 반면교사가) 존재했단다. 경제를 행하는 목적은 "집안 살림"이었단다.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말장난이나 어원에 관심이 많았으며, 글을 쓸 때 무척 꼼꼼했던 소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월든>>에서 가장 긴 장의 제목을 <경제>라고 붙인 것이란다. 그의 오이코스, 스파르타식의 엄격하고 간소한 작은 호숫가 집에 살고 그 집의 질서를 세우면서 소로는 다른 사람들 역시 집안의 질서를 세울 수 있게끔 돕고자 했단다. 한 번에 한 집씩, 한 번에 한 가족씩 도와 사회 전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단다. 이 건조한 첫 장의 제목은 말장난의 깊은 의도를 숨긴 채 이렇게 속삭인단다. "이 책은 호숫가에 있는 단순한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다지 단순하지 않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무질서한 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원래 경제란 은행 계좌와 주식 포트폴리오가 아닌 집을 가꾸고 관리하는 행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란다. 가장 본질적이고 유익한 의미에서의 집, 즉 번영하는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말이란다. 물론 여기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다. "내 은행 계좌도 내 집을 유지하고 나를 번영하게 해 주는데요." 하지만 이런 반박은 소소의 요점을 간과한 것이란다. 직업은 은행 계좌를 가득 채우고 주택 담보 대출을 상환해 주고 3개월마다 사흘간의 휴가를 보내 주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단다. 심지어 인생을 망쳐 놓을 수도 있단다. 그 인생은 뚜렷한 의도를 가지고 좋은 집을 만드는 데 쓸 수도 있는 인생이란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고 비유적으로 받아 들여도 좋단다. 넓은 의미로 이해해도 좋고 좁은 의미로 이해해도 상관없단다. 어쨌든 사실이니까. 소로의 생각에 따르면 어떤 일은 "내 집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실제 그런 상태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단다. 이것이 소로가 목표로 하는 경제란다. 

 

19세기에 현대 자본주의나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를 재고했던 사람은 소로 혼자가 아니었단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는 소로가 저항하려 했던 바로 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관심 주제로 삼았단다. 19세기 전반기 미국에서는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무리 지어 나타났고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삶을 지탱하는 의미 있는 노동을 찾고자 했단다. 이런 동시대 사람들의 목적이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았던 소로의 목적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상당한 차이가 있단다. 소로의 지적 동료들, 특히 초월주의자들은 실험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도했단다. 가령 조지 리플리의 브루크 농장, 에미머스 브론슨 올컷의 프루트랜즈가 있단다. 하지만 소로는 반대의 실험, 즉 홀로 사는 실험을 했단다. 학자 마이클 마이어는 이런 차이를 언급하면서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2년간 은거한 것은 초월주의자들의 공동체적 노력에 답변이었다"고 말한단다. 

소로는 브루크 논장에 방문한 적도 있지만 함께 살지는 않기로 했단다. 리플리가 랠프 월도 에머슨을 브루크 농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쓴 편지에는 소로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단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목표는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이 현재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결합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 안에서 사상가와 노동자가 최대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취향과 재능에 맞는 일을 하고 노력의 결실과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숭고한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혜택과 노동의 이익을 모두에게 열어 주어 허드렛일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왜 삶이라는 일을 이토록 다양하게 실험한 걸까? 분위기가 어땠기에 이처럼 많은 사상가들이 일과 삶의 본질을 재고하게 된 것일까? 공동체 차원에서든 개인의 차원에서든 왜 새로운 형태의 "집안 경제학"이 급증한 걸까? 당시 여러 미국 노동자들이 뿌리 없이 부유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탓일 수도 있단다. 산업 혁명 도중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가족 소유 농장, 긴밀하게 짜여 있던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제대로 자기를 챙기지 못하고 표류하는 상태가 되었단다. 

이런 실험이 진행된 좀 더 뚜렷한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소로가 살밈으로서의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면 당시 국가라는 오이코스가 둘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일 거란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을 한 시점은 <<월든>>이 출간된 지 4년 후, 소로가 월든 호숫가 집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낸 지 11년이 지난 때로, 이 연설은 전후 시기 미국의 가장 근본적인 공포를 들여다보고 있단다. "'분열된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 절반은 자유인 상태로 영영 버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남부 연합이 해체되는 것을, 집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이 분열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집 전체가 이쪽이 되거나 전체가 저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 에머슨과 달리 소로는 노예 폐지 운동이 유행하기도 전에 이미 노예 제도에 반대하고 있었단다. 남북 전쟁이라고 불리는전국적인 붕괴 상태가 있기 월씬 전부터 소로는 전쟁을 촉진한 미국 사회의 내재된 갈등을 드러내고 표적으로 삼았단다. 소로는 비도덕적이고 끝없는 물욕으로 인해 미국이 노예 경매대의 국가로 전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월든>>이 출간되기 4년 전, 1850년 제정된 탈주 노예법은 노예제가 폐지된 주에 살고 있는 탈주 노예의 경우라도 주인에게 반환되도록 요구했단다. 그 결과 노예제가 폐지된 주가 없어지다시피 했단다. 집 전체가 잔인한 속박의 집이 되었고 누구도 그 집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단다. 이 연방법에 따라 연방 정부인 워싱턴 DC는 전국적으로 노예 사냥을 벌여야 했단다. 

탈주 노예법이 시행되기 여러 해 전, 소로가 납세 거부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단다. 소로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도덕성이 의심되는 국가에 세금 내기를 거부했는데 미국이 멕시코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전쟁도 소로가 납세를 거부한 중요한 이유였단다. 이런 저항을 통해 서로는 당대의 경제를 지탱하던 막무가내식 팽창주의와 도덕적 태만에 문제를 제기했단다. 짧은 구금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로는 전무후무한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 논평 <시민 불복종>을 썼고 이 글은 레오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단다.

간디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변형한 형태의 시민 불복종, 즉 사탸그라하를 이용해 인도라는 오이코스에 대한 영국의 착취를 종식하고자 했단다. 인도 경제를 되찾기 위한 간디의 방식도 소로의 방식처럼 개인의 노동의 의미를 되찾는 데 달려 있었단다. 인도 국기에 영원히 새겨진 돌아가는 바퀴의 형상은 노동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단다. 나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만 개인의, 국가의, 우주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의미란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여겨지는 간디의 "소금 샤탸그라하" 혹은 "소금 행진"을 보잔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24일 동안 390킬로미터를 걸으며 단지 소금을 모아 판매하려고 시도했던 이 효과적이면서도 비폭력적인 행진이 이루어지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시민들을 괴롭히고 체포했단다. 소금 행진은 <<월든>>의 <경제>에 나오는 한 문장을 연상시킨단다. "마지막으로 소금 같은 경우,...바닷가에 갈 좋은 핑계로 삼을 수 있다" 간디는 이를 실행에 옮겼단다. 바닷가 마을인 단디의 해안에 있는 염전으로 걸어간 것이란다. 당시 연국 지배자들은 소금을 독점하고 소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있었단다. 인도의 방대한 해안선을 따라 쌓인 천연 소금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는데도 식민지 정부의 공급업자를 통해서 사지 않으면 범죄로 간주했단다. 간디는 염분이 가득한 바닷가 흙을 손에 가득 움쳐쥔 뒤 치켜올림으로 해서 세계 최강 제국의 법에 불복한 거란다. 무해해 보이는 한 줌 흙을 들고 간디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것으로 나는 대영 제국의 기반을 흔들 것이다."

간디는 소로와 마찬가지로 노동의 차원에서 개인의 변화와 책임이 가진 힘을 이해하고 있었단다. 나라는 가장 기초적인 청치 단위에서의 변화와 책임 말이다. 간디는 이렇게 썼단다. "우리는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경향은 우리 몸의 세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세계의 다양한 경향 또한 바뀔 것이다...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기다릴 필요는 없다."

소로의 <경제>는 자기 자신을 정돈함으로써 미국이라는 집에, 가능하다면 세계라는 집에 변화를 가져오라고 우리에게 말한단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이것이 모든 정치 단위에서의 살림 경제에 해당하는 것이란다. "의식적인 삶을 살라"는 명령은 단지 개인을 위한 좌우명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지침으로서 우리가 날마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 깨어나 살펴보라는 의미이며 일단은 내 집을 돌아보아야 하지만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란다.

 

대표적인 소로 평전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쓴 로라 대소 월스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단다. "<경제>는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괴물처럼 거대한 사회적. 물질적 하부 구조를 지탱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소로는 현대 사회의 위기를 강조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로가 해결책의 단초를 제공햇다는 점이란다. 적어도 그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단다. 그 해결책이란 개개인이 인류를 위해 협력하여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단다. 소로가 체질적으로 협력을 꺼린다고 생각했다면 다시 생각해 보기를 바란단다. 소로의 호숫가 집은 언제나 열려 있었단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기꺼이 알려 줄 것이며 대문에 절대로 '출입 금지'라고 적지 않을 것"이라고 소로는 썼단다. 로버트 설리번의 기록에 따르면 "<소로가 월든에서 보낸> 첫 해 8월 7일에 지역 신문 <콩코드 프리먼>은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여성의 연례 모임이열렸다고 전했단다. 서인도 제도의 노예 해방 기념일을 맞아 모임이 열린 장소는 월든 호수에 있는 소로의 집이었단다.

노동자이자 살림꾼으로서 소로는 삶을 향상하기 위해 협력과 친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단다. 우리는 타인이 칠요하고 타인에게 잘해야 한단다. "인간의 가장 뛰어난 본성은 열매에 달린 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지켜 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도 타인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경제학자들이 "부정적 외부 효과"라고 하는 것, 즉 제3자에게 가는 피해를 고렿해야 한단다. 하류의 연어 서식지로 산업 폐수가 흘러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잔다. 공장은 수많은 타인들에게 끼치는 끔찍한 피해에 대해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을 수도 있단다. 자신의 생을 더 깊이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핵심인 <시민 불복종>에서 소로는 이렇게 말한단다. "내가 남과 다른 일을 추구하거나 생각에 잠길 때에는 먼저 남의 어깨에 앉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어깨를 타고 앉아 있다면 그 사람 또한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거기서 내려와야 한다"

소로는 하숙집을 운영했던 어머니 신시아에게 친절에 대해 배웠단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 리디아 마리아 차일드에게 알뜰하게 살림하는 방법을 배웠단다. 차일드는 노예 폐지론자이자 여성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활동가였단다.

1829년 발간된 차일드의 소박한 살림 책 <<검소한 주부: 절약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책>>은 마치 생활을 향상시키고 "찰나를 향상"시키고자 했던 소로의 욕구를 예언하는 듯한 내용으로 시작한단다. "살림에서 진정한 절약은 모든 조각을 주워 담아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는 기술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각은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의 조각이기도 하다. 아무리 하찮더라도 쓰임새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식구가 몇이든 모든 식구가 돈을 벌거나 절약하는데 힘써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인색하고 돈에 무심해 보이는 소로의 생각과 딴판인 것 처럼 보인단다. 하지만 무심해 "보이는" 것뿐이란다. 소로는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매기는 돈에는 관심이 많았단다. <경제>에는 식료품 가격이나 건설 비용 등의 숫자를 나열한 목록이 여럿 있단다. 이러한 계산서는 한편으로 당시 인기가 많았던 주택 도안 책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목적도 있단다. 바싹 마른 세부 항목 밑으로 수맥이 흐르고 있는 것이란다. 소로와 차일드의 메시지는 정확히 일치한단다. "낭비하지 않으면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소로에게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조언이란다. 내가 낭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모자라지 않는단다. 소로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것을 마련하는 데 실은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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