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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와 너트(2024.08.05) - 로마 아그라왈 - 기록중

동선(冬扇) 2025. 3. 6. 16:57

책소개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뜻밖에도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와 같은 아주 작고 단순한 사물들이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물 7가지가 현대인의 삶을 어떻게 뒤바꿨는지 말해주는 이 책은 수천 년에 걸친 공학적 발명의 놀라운 여정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베스트셀러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에서 거대한 건축물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준 로마 아그라왈은 못의 발명이 어떻게 현대적인 고층 건물로 이어졌는지, 자석의 발견이 어떻게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데 일조했는지 설명하며 공학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 펼쳐 보인다. 과학과 역사, 기술적 원리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촘촘하게 얽혀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주변의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탐구하고 일상에서 공학의 경이로움을 발견해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저 : 로마 아그라왈

구조공학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구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더 샤드(The Shard)’를 포함해 다리와 터널, 기차역과 마천루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부를 설계하고 만들어왔다. 어린 시절,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혼자 물건을 분해하고 그 속을 파고들던 소녀는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공학자가 되어 자신을 평생 매료시켜 온 주제, 거대하고 복잡한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작은 사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2011년 구조공학자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젊은 공학자상, 2014년 올해의 여성공학자상, 2017년 영국왕립공학회가 가장 뛰어난 공학자에게 수여하는 루크상을 수상했고, 2018년 영국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첫 책인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은 잘락상 최종 후보, 미국과학진흥회(AAAS) 2019 올해의 과학책으로 선정되며 작가로서의 재능 또한 증명했다. 이번 책 《볼트와 너트, 세상을 만든 작지만 위대한 것들의 과학》은 2023 영국왕립학회 과학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역 : 우아영
과학 기자. 동아사이언스에서 5년간 과학 전문지 『과학동아』를 만들었고, 1년간 유튜브 채널 [과학 읽어주는 언니]를 운영하며 독자와 구독자를 만났다.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연료전지를 공부했다. 발화 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소방관들의 노고를 담은 기사로 2017년 1월 한국과학기자협회 ‘이달의 과학기자상’을 받았다. 옮긴 책으로 『빅 히스토리』(공역), 『빌트, 우리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공역)이 있다.

                                                                                                                                                                                           yes 24

 

머리말

이 세계의 구성 요소를 이해하는 일

 

부러진 크레파스들이 눈앞에 어지러이 놓여 있었단다. 한숨이 나왔단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단다.

아마 다섯 살쯤이었을 거란다.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눈 덮인 뉴욕주 북부에 살던 때였단다. 1980년대 당시 그녀는 샌드위치나 과자, 보온병 따위를 넣는 커다란 직사각형 도시락통 여러 개를 엄선해서 갖고 있었단다. 그중에서도 그녀 앞에 열려 있던, 앞면에 머펫츠 캐릭터가 그려진 도시락통은 특히 좋아하는 거였단다. 거기엔 음식 대신 그녀만의 어마어마한 크레용 컬렉션을 보관했단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느다란 색색의 크레파스란다.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녀도 게속 호기심을 품고 있다가 어느 날 결심했단다. 크레파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내기'로. 그래서 크레파스를 감싼 종이를 벗겨낸 뒤, 열려 있는 도시락통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크레파스를 하나씩 찧어 두 동강 냈단다. 하지만 크레파스 속은 여전히크레파스만 빽빽이 들어차 있을 분이었고,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꺾였단다. 여동생은 엄청 실망했지만 그녀는 그냥 계속 했단다.

조금 더 자라서 연필로 글짜를 쓰기 시작했을 땐 종이 위에 흔적을 남긴 그 회색 막대가 연필 전체를 관통하는지 궁금해 연필깍이 안에 넣은 보고 돌려보곤 했단다. 예상이 맞았단다. 그 뒤엔 곧 펜을 쓰기 시작했단다. 펜을 분해하자 훨씬 흥미로운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단다. 어린 시절 크레파스는 그녀에게 실망을 안겼지만, 만년필과 볼펜에서는 나사산이 파인 두껑이 있었고 거기에 가느다란 잉크 카트리지와 나선형 용수철이 연결돼 있었단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혼자 물건을 해체하곤 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럴 때에도 옆에서 참견하기 일쑤였단다. 인도에서 자라는 동안 텔레비전 화면에 검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분해하는 모습을 봤단다. 텔레비전 내부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훗날 물리학 학위를 받은 뒤에야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단다. 사실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한 건 우주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단다. 학창시저리 끝나갈 무렵 원자물리학과 입자물리학에 매료되었단다. 한때 더 이상 쪼갤 수 없다고 여겼던 원자가 전자, 양성자,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는 게 밝혀지고, 이것들이 '물질의 기본 요소'라는 전당에 오르는 듯했지만 머잖아 쿼크라는 더 작은 요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그녀의 마음을 쏙 빼앗겼단다. 이해를 하든 못하든 당시 그녀는 사물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아보는 데에 푹 빠져 있었단다.

복잡한 사물은 더 작고 단순한 것들로 이뤄져 있단다. 우주의 구성 요소도, 살이 있는 생명체도, 인간의 발명품도 마찬가지란다. 그녀는 꽤 운이 좋아서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어린시절의 호기심을 업으로 삼을 수 있었단다.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기계와 건물.일상 속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중심부에 위치한 요소들에 끝없는 매력을 느꼈단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란다. 그럴 써 내려간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란다.

엔지니어링은 어머어마한 분야지만 뛰어난 업적 중 일부는 규모가 작거나 무척 단순한 형태란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인공물에는 기본 구성 요소가 들어 있고, 이것들이 아니었다면 모든 복잡한 기계는 존재할 수 없었을 거란다. 언뜻 재미없이 보일 수도 있단다. 작고, 때론 숨겨져 있단다. 하지만 전부 공학적으로 놀라운 위업에 해당한단다. 그 안에는 수천 년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혹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단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복잡한 기계의 기초가 되는 여섯 가지 '단순 기계'를 정의했단다. 지렛대, 바퀴와 축, 도르래, 빗면, 쐐기, 나사란다. 하지만 이건 너무 구식인 데다 그녀가 보기엔 충분한 설명도 아니기 때문엥 이 중 몇 개를 빼고 다른 걸 추가해서 현대 세계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일곱 가지 사물을 소개하기로 했단다. 이 사물들은 근본 원리와 그것이 적용된 엔지니어리 분야, 그리고 이를 통해 가능해진 규모 면면을 살펴보면, 이 일곱 가지 사물에는 무척 광범위한 혁신이 내포돼 있단다.

못, 바퀴, 스프링, 자석, 렌즈, 끈, 펌프. 그녀가 고른 이 일곱 가지 사물은 다양한 반복과 형태를 거쳤고, 앞으로도 게속 변화할 경이로운 발명품이란다. 이 사물들은 처음 등장한 이후 계속 진화하고 때론 서로 다른 순서로 결합되기도 했단다. 발명과 혁신이라는 연속적인 나비효과를 통해 인류는 점점 더 복잡한 기계를 만들어냈단다. 일곱 가지 사물 전부가 감동을 주었고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단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류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란다. 이 사물들은 기술을 창조하고 변화시켰으며 또한 역사, 사회, 정치 및 권력 구조, 생물학, 커뮤니케이션, 교통, 예술, 문화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단다.  

세계적인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0년 영국에서 1차 봉쇄령이 내려진 시기에 이 일곱 가지 사물을 골랐단다. 집에 갇힌 그녀가 가진 소품들과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물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둘러보면서 상상으로(때로 물리적으로) 물건을분해하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살폈단다. 다시 보니 볼펜은 스프링과 나사, 회전하는 구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단다. 아기 이유식을 만들 때 쓴 믹서기는 기어로 돌아갔고, 기어는 톱니바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단다. 모유 수유를 할 때는 유축기 덕분에 남편도 딸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수 있었단다. 훗날 그녀의 딸로 자라난 배아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했던 체외수정 과정과 코로나19 백신을 만든 연구는 전부 세포 크기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렌즈 덕분에 가능했단다. 잠깐 산책을 할 때 착용하거나 의료진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마스크는 수많은 섬유조직을 얽어 짠 천으로 만든 것이란다. 가족과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전화 스피커를 만들려면 자석이 있어야 하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이더넷 소켓도 마찬가지란다. 

굴착기, 고층 건물, 공장, 터널, 전력망, 자동차, 인공위성 등 더 크고 복잡한 물건들에 대해 계속 생각했지만, 언제나 이 일곱 가지 기초 혁신으로 돌아오곤 했단다. 조각들을 이어 붙이려면 못이 필요하단다. 회전하는 무언가도 필요한데 그게 바퀴란다. 동력도 필요하고 동력을 저장하는 기술인 배터리도 필요하단다. 물론 더 근본으로 들어가면 스프링이 있단다. 자력(그리고 전력)은 멀리서도 사물을 조정할 수 있게 해준단다. 렌즈의 빛의 경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해준단다. 끈을 이용하면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소재를 만들 수 있단다. 마실 물을 퍼 올리기 위해 펌프를 만든단다.

이 일곱 가지 공학적 위업은 실패와 반복을 통해 발견되거나 발명되었단다. 무언가가 필요할 때 재료와 모양과 형태를 바꿔가면서 될 때까지 시도해보는 과정말이다. 예를 들자면 건물, 다리, 공장, 트랙터, 자동차, 전화기, 자물쇠, 손목시계, 세탁기 등 금속 조각들을 이어 붙여야 하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못, 나사, 리벳, 볼트가 고정하고 있단다. 못은 원래 나무조각을 잇는 데 쓰였단다. 더 튼튼한 배와 가구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개념이었단다. 나중에 나사가 등장해 못이 더 큰 힘을 지탱할 수 있게 됐지만, 만들기는 훨씬 더 어려웠단다. 그 뒤 얇은 금속판을 저렴하게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못과 나사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았고, 리벳이 발명되었단다. 작은 리벳으로 냄비를 만들다가 점차 더 크고 강한 리벳으로 금속판이나 선박, 교량을 이어 붙였단다. 그 뒤 기술자들은 리벳과 나사를 합쳐 더 튼튼하고 설치하기 쉬운 볼트를 발명했단다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그녀가 구조 엔지니어로서 6년 동안 몸담았던 프로젝트인 런던의 더 샤드 빌딩을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고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볼트란다.

하지만 그 모든 진화가 본래의 못이 쓸모없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란다. 실제로 못과 그것의 어려 '형제'들이 나사, 리벳, 볼트와 함께 조합돼 가장 알맞은 목적을 위해 쓰이고 있단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식으로 디자인이 혁신된단다. 인류는 몇 세기 동안 어떤 기술을 사용하다가 새로운 재료나 공정을 발명하면 기존 기술을 그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단다. 반대의 경우도 있단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튼튼한 섬유인 '케블라'를 우연히 발명하고 나서 활용할 방도를 찾는 식이란다. 방탄조끼가 그 예란다. 이런 발명품 중 일부는 바퀴처럼 매우 비숫한 디자인으로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개발됐지만 펌프처럼 모양이 매우 다른 발명품도 있단다. 그래서 이런 발명품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탄생하고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본래 목적을 훨씬 뛰어넘어 예상치 못하게 응용되고 뜻밖의 영향을 미치기도 했단다.

흔히 엔지니어린을 이질적이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물질과 복잡한 기술이 어우러져 있는 분야라고 여기지만, 사실 핵심은 사람이란다. 만드는 사람들, 필요로 하고 사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때로 무심코 기여하는 사람들이란다. 닐 암스트롱이 입은 우주복의 실밥이 터질까 봐 걱정하는 델라웨어주의 재봉사, 자기 손에 전류를 흘려 보낸 의사, 현미경으로 자신의 정자를 관찰한 가게 주인, 돼지 심장을 이식받은 환자들이란다. 또 전파를 발생시켜 부총독의 몸을 통과하게 한 인도의 박식가, 실수인 줄 알았는데 실은 놀라운 것을 발명한 이민자 가정의 여성 화학자,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이슬람 학자, 깨진 접시 때문에 속상해하던 주부도 그에 해당한단다. 수 세기 동안 엔지니어링 특히 서구의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들과 남성들이 지배해왔단다. 이 책에 소개한 이야기와 발명품, 혁신가들은 전 세게 여러 지역과 여러 시대에서 골랐단다. 그리고 감춰지거나 인정받지 못한, 엔지니어링 분야의 소수자들이 기여한 바도 포함했단다. 주로 업적이 문서화되지 않았거나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거나(못했거나) 허가받지 못해서 사라지곤 하던 이야기들이란다.

그녀는 엔지니어링이 과학과 디자인와 역사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펼쳐 보이려고 한단다. 이는 인간의 필요와 창의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문제를 찾고 이전엔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란다. 또한 우리 삶을 더 낫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반대로 발명품을 책임감 있게 쓰지 않으면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는 이야기란다. 가장 기초적인 엔지니어링이 어떻게 모두의 일상과 인간성에 불가분의 관계로 연걸되는지 설명하고자 했단다. 독자들이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다시 일깨우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엔지니어링의 블랙박스를 조사함으로써이 세계의 구성 요소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란다. 

 

1장

 

못(Nail)

가장 단순한 도구가 현대사회를 지배하기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고요? 아직 충분히 뜨겁지 않은데." 작업장의 시끄러운 소리를 뚫고 단조공 리치가 소리를 내지른다. 나는 팔 길이 정도 되는 가느다란 강철 막대의 한쪽 끝을 맨손으로 조심스레 잡고 있다. 막대의 반대쪽 끝은 용광로 안에서 섭씨 1000도 이상으로 끓고 있는 코크스에 잠겨 있다. 화염 위로 공기를 불어넣어 온도를 더 높인다. 코크스에 잡겨 있던 막대를 뽑아 들고 색깔을 확인한다. 불타는 듯 시뻘겋지만, 리치는 나에게 아직 분비가 덜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선 나는 막대를 댜시 불 속에 잡어넣고 밝은 주황색으로 타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이제 이 빛나는 강철 막대로 못을 만들 참이다.

그러자면 도구가 필요하다. 옆면에 '103kgs'라는 각인이 새겨진 모루(무언가를 올려놓고 두들기기 위한 도구로 주로 단조 일을 할 때 쓴다)가 내 앞에 놓어 있다. 강철 막대의 각도를 조정해 막대의 달궈진 쪽 끝을 평평한 모루 위에 올려놓고 무거눈 망치로 때린다. 막대가 약간 납작해진다. 몇 번 더 치고 나서 막대를 90도 돌린 다음 다시 때린다. 하짐나 머지 않아 막대 색깔이 어두워진다. 망치가 튕겨 나오는 게 느껴지고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더 날카로워진다. 막대가 식어버린 것이다. 막대를 다시 불 속에 넣고 주황빛으로 달궈질 때까지 기다린다. 막대를 모루 위에 올려 망치로 때리고 돌리고 다시 달군다. 끝으로 갈수록 점점 뾰족해지게끔 제대로 만들려면 이 작업을 세 번 반복해야 한다(리치는 한 번 만에 해낸다) 마침내 못의 몸통이 완성된다.

다음으로 모두 위쪽에 난 네모난 구멍에 금속용 조각 끝을 날카로운 끝이 위로 향하게 꽂는다. 앞의 작업으로 끝이 뾰족해진 강철 막대를 다시 달궈 끝 날 위에 직각으로 걸쳐놓고 인정사정없이 세게 내리쳐서 강철 막대를 두 동강 낸다. 이렇게 하면 뾰족한 끝부분만 쉽게 떼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머리 만드는 도구'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금속판으로 천공기로 뚫은 듯 다양한 크기의 구멍이 여러 개 뚫여 있다. 못의 몸통이 꼭 낄 만한 구멍을 골라 곧 못으로 완설될 그 철 조각을 통과시킨다. 그러고는 강하게 비틀어 못이 돌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제거한다. 이제 못의 꼬리 부분은 금속판의 구멍을 통과해 아래쪽으로 늘어진 모양새가 되고 머리 부분은 약 1센티미터 정도 구멍 위로 튀어나온 상태가 된다. 그 부분을 모루의 동그란 구멍에 정렬시키고 재빠르게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면 못의 머리가 완성된다. 

이제 '담금질'을 할 차례다. 금속판과 못을 통째로 수조에 집어넣으면 뜨거운 열기가 식으면서 '쉬이이익'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ㅜㄴ다. 꺼내서 망치로 톡톡 두드리자 못이 바닥에 떨어지며 댕그랑 소리를 낸다. 아직 따끈따끈한, 보잘것없는 나의 창조물.

못은 아주 단순한 엔지니어링 같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못은 어디에나 있다. 책상에서 글을 쓸 때면 못으로 건 사진과 못으로 이어진 책꽂이가 보인다. 책상 자체도 못으로 고정돼 있고 책상 밑에서 방금 내가 발로 찬 신발도 마찬가지다. 회반죽 아래 나무판자로 만든 벽이나 나무 들보 위에 놓인 바닥도 전부 못으로 연결돼 있다. 이런 못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무나 가죽, 벽돌 등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괴묵하고 든든한 그들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못이 있기에 물체를 서로 연결할 수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두 물체를 잇는 행위는 한때 급진적인 일이었다. 우리 주변의 인간이 만든 거의 모든 물겨ㅓㄴ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부푼과 재료들이 결합된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이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수천 년 전 뭔가를 창조한다는 건 보통 한 가지 재료를 목적에 알맞은 형태로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바위 안에 공간을 깎아내 동굴을 만들거나, 돌을 날카롭게 쪼개 도구를 만들거나, 통나물르 개울 위로 쓰러뜨려 다리를 만드는 식이었다. 전부 엔지이너링의 유용한 사례다. 하지만 좀 더 복잡한 집을 짓거나, 나무각대 끝에 돌이 달린 무기를 만들거나, 나무 한 그루 길이를 훨씬 넘는 거리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여러 부분들을 한데 묶어야 했다. 그래야 훨씬 복잡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돌을 쌓아 올려 다리를 지탱할 수도 있다. 밧줄이나 가죽으로 묶을 수도 있고, 접착제가 발명된 뒤론 붙여버리는 방법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못과 못에서 나온 파생물(리벳, 나사, 볼트) 덕분에 별도 지침 없이도 누구나 큰 규모로 서로 다른 재료를 튼튼하게 이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목재 보와 기둥을 연결해서 건물을 짓고 여러 겹의 나무 널빤지를 이어 배를 만들고 얇은 금속판을 덧씌워 선박, 조각상, 자물쇠, 시계 등을 만들었다. 못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복잡한 인공위성을 끈으로만 둘러서는 결코 우주로 보낼 수 없다. 움직이는 부품들을 접착제로 이어 붙여서는 시계를 만들 수 없다.

 

내가 못을 맏은 곳은 하트퍼드셔주 머치해덤 마을에 있는 단조 공장이다. 이 공장은 1811년부터 계속 운영되었다. 내가 만든 못은 네모 모양에다가 약간 두껍고 고르지도 못했으며, 못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 고되었다. 그렇게 망치질을 하고 났더니 손바닥에 물집이 2개나 잡히고 이두박근이 떨려왔다. 물론 요즘엔 못도 다 기계로 만들지만 고대 이집트와 로마 시대부터 수천 년 동안 못을 만드는일은 본질적으로 내가 머치해덤에서 거쳐야 했던 과정, 즉 두드리는 노동을 수반했다. 

그 고된 노동은 못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의 유연성 때문이었다. 못에 얽힌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금속에 대한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때로 나무로 만든 못도 좋지만 금속 못은 판도를 아예 바꿔 놓았다. 금속은 못을 만드는 데 중요한 두 가지 측성을 갖고 있다. 첫째, 망치로 직접 때려 다른 재료에 박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이에 못잖게 중요한 건 끝을 날카로운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금속은 내부 구조가 결정질이기 때문에 결정들이 서로 약간씩 움직일 수 있는데, 금속 특유의 이 유연성을 연성(延性)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클립은 여러 번 구부려도 부러지거나 깨지지 않는다(유연성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는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물질들이 있다. 이른 물질에 강제로 힘을 가하면 쉽게 파괴된다).

열은 금속에 연성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온도가 뜨거워지면 부유하는 전자와 결정 구조 내의 원자들이 들뜬 상태가 되어 격렬하게 움직인다. 열에너지가 빠르게 이동하며 금속이 좋은 도체가 된다는 뜻이다. 금속마다 녹는점과 전도도가 다르지만 온도가 높을수록 원자와 전자가 서로 미끄러지고 이탈하면서 재료가 부드럽고 우연해져 금속 재료를 특정 모양으로 성형할 수 있게 된다. 또 놀랍게도 가열하고 망치로 두드리고 나면 크고 거친 결정들이 더 작고 더 규칙적인 결정들로 재배열되면서 금속의 구조가 바뀐다. 이렇게 하면 금속이 식었을 때 더 강하고 더 단단하고 더 균일해진다. 

인류는 약 8000년 전 석기시대부터 금을 캐내기 시작했고 이후 구리, 은, 납을 발견했다. 이 금속들은 너무 물러서 못을 만들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리에서 최초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진취적인 우리 조상들은 구리와 주석을 혼합해 청동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고, 마침내 인류는 더 튼튼한 도구와 무기, 갑옷, 못 등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강한 재료를 만들어냈다.

가장 오래된 청동 못은 기원전 3400년 정의 것으로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이 못은 오늘날 수작업으로 두드려 만든 강철 못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50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녹슬고 무뎌지고 변색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청동 세공에 능숙해서 금속에 귀금속, 에나멜, 금으로 정교한 장식을 새겼고, 못 같은 실용적인 도구에도 청동을 사용했다. 이 못을 사용해서 배와 전차를 조립했다. 

그 후 1000년 동안 구리와 청동을 사용해 못을 만들었지만 청동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마드는 재료였기에 상업적으로 실용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기원전 1300년경 인도와 스리랑카의 금속 노동자들은 철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청동만큼 단단하고 구리보다 더 강한 재료였다. 이로서 동방의 철기시대가 열렸고 청동은 곧 대체되었다. 결정적으로 기원전 1200년 즈음 중동의 정치적 격동기가 시작되면서 청동이 사라졌다. 무역로가 닫히면서 주석(그리고 청동)이 엄청 비싸진 것이다. 훗날 순철 역시 대체되었다. 철에0 약간의 탄소를 섞어 만든 강철 같은 합금으로 훨씬 더 튼튼한 못을 만들게 됐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인도산 철을 활용하는 데 무척 능숙해져서 갑옷을 만드는가 하면 브린튼섬을 포함한 제국 전역에서 못을 대량생산하기도 했다. 로마군 요새가 있던 스코틀랜드 퍼스셔의 인추틸이라는 벌판에서 1960년대에 거대한 못 더미가 발견되었다. 서기 83~86년경 로마 제20군단 소속 약 50000명의 병사가 갑자기 떠나면서 버리고 간 것이었다. 물을 공급하는 수로와 로마식 공중목욕탕을 채 완성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 점령했지만 발굴 결과 로마의 요새 설계와 제조 기술에 대한 대단히 흥미로운 고고학적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요새는 21헥타르(축구장 26개 이상)에 이르는 광활한 규모였고 64개의 막사 건물, 병원, 곡물 창고, 그리고 특히 작업장과 대장간이 있었다. 요새의 양 날개 쪽에서 커다란 밀폐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이 약 2미터 깊이의 자갈층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예상치 못한 보물이 드러났다. 다양한 크기의 철제 못 87만 5428개였다. 놀랍게도 대부분 새것 같은 상태였다. 가장 바깥쪽에 있떤 못이 녹슬어 불침투성 피막을 형성하면서 나머지 못들은 부식되지 않고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 못들은 약 2000년 전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빛이 나고 날카로웠다.

작업장 밖에는 또렷한 바퀴 자국이 새겨져 있어서 무거운 물건들이 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인추틸 대장간은 다른 정창지에 못을 공급했을 것이고, 비축물의 규모를 보건대 당시 그들의 군사 계획이 유럽 대륙으로 향함에 따라 브리튼섬의 총독 율리우스 아그리 콜라가 갑자기 로마로 소환되기 전까지는 북쪽으로 더 많은 요새를 건설할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철수할 때 요새를 불태우고 못 10톤을 묻었다. 당시 칼레도이아인들이 그걸 녹여 무기를 만들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인추틸 구덩이에서 발견된 못의 종류는 여섯 가지였는데, 각각 다른 용도롤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반 모양 머리를 가진 손가락 정도 길이의 못이 가장 많았는데, 가구 또는 벽과 바닥 패널에 쓰였을 것이다. 내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에 이르는 길이의 훨씬 커다란 못은 무거운 목재를 고정하는 데 쓰였을 걸으로 보인다. 머리가 반복적인 망치질을 견딜 수 있도록 피라미드 모양으로 돼 있었다. 대부분 몸통 단면이 정사각형이었지만 단면이 둥글고 머리가 납작한 운뿔 모양에 꼬리 끝부분이 끌 모양인 못도 28개 있었다. 이런 못들은 아마 석재를 관통하는 데 사용됐을 것이다. 못이 네모나면 각진 부분 때문에 돌이 쪼개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못 머리에 망치질을 했다. 못은 품질이 좋았고 모양, 크기, 재료가 균일했다. 큰 못은 작은 못보다 탄소 함유량이 높아서 더 단단했다. 이건 대장장이가 단조하기 전에 원재료에 등급을 매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못의 끝부분이 머리보다 더 단단했는데, 아마도 가열해셔 망치로 두들기고 담금질하는 방식 덕분일 것이다. 분명 매우 숙련된 금속공들의 솜씨였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수작업으로 못을 만드는 것은 아주 고되고 복잡한 일이다. 금속을 적당한 온도까지 가열해야 하며, 망치에 정확한 힘을 실어 정확한 방향으로 내리쳐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금속이 충분히 뜨거운 상태에서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고대인들은 재료의 온도를 측정할 수 없었기에 색깔을 보고 판했다. 시뻘겋게 달궈졌을 때(강철의 경우 섭씨 700~900도) 구부리는 정도는 괜찮지만 더 복잡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하면 금속이 갈라질 수도 있다. 더 뜨거워지면 더 유연해지고 이때 저녁노을 같은 주황색으로 변한다. 섭씨 1300도 이상으로 더 가열하면 눈부신 백색으로 빛난다. 금속 조각을 망치로 두드려 '불 용접'(두드려 만든다는 뜻의 단조 용접이라고도 한다)을 하기에 좋은 온도이며, 이 이름은 강철에서 튀는 흰색 불꽃에서 따온 것이다(이렇게 뜨거울 때 금속은 특유의 최면에 걸린 듯한 강렬함을 선사한다. 이 책을 쓰려고 조사하는 동안 강철을 이용해 매우 비범한 유기적인 조각을 창조하는 단조공이자 예술가인 애그니스 존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강철이 달궈져 흰 불꽃으로 빛나는 순간을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강철 표면의 얇은 층이 녹아내리며 단단한 모서리가 흐려지는 모습이 마치 바람 부는 날 모래사장 표면 같다고 말했다). 그 눈부신 흰 불꽃은 단조공이 원하는 한계 온도를 뜻한다. 이 온도를 넘어서면 강철은 폭죽처럼 변하며 불꽃놀이 냄새를 풍긴다. 강철이 타버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저탄소 합금은 섭씨 1000~1200도가 성형하기에 적당하다(정확한 온도는 합금 배합에 따라 다르다). 이때 금속은 여름철 오후의 태양처럼 노랗게 빛나며 어는 정도 다룰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다. 만족스러운 모양이 나왔다면 찬물에 빠르게 넣어서 식힌다. 앞서 언급한 담금질 과정이다. 금속이 단단해지며 강도가 높아지고 모양이 유지된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뒤 유럽에서 못 제조 기술은 수 세기 동안 귀하고 특별한 기술로 취급되었다. 중세 브리튼에서 못을 만드는 노동자 '내일러'들은 말굽, 이음매, 건충 등에 필요한 못을 만들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재료와 숙련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산업화 이전 시대에 못의 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영국은 목재 주택이 일반적이던 북아메리카 등의 식민지로 못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결과 이 지역들에서 못은 더욱 귀해졌고, 이사할 대 살던 집에 불을 질러 잿더미 속에서 못을 수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1619년 버지이나주에서는 이런 관행을 막기 위해 소유자 보상을 약속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이 농장을 버리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필수 주택을 불태우는 것은 불법일 것이나, 충분한 보상을 위해 중립적인 두 사람이 그 주택을 짓는 데 들어간 못의 개수를 계산하여 지급할 것...,

 

1776년 미국이 독립한 후 경제와 주택 시장이 팽창하자 미국인들은 본인 소유의 못 제조 사업을 시작했다. 가장 초기의 대규모 사업체 하나는 미국 헌법 제정자 중 한 명인 토머서 제퍼슨이 설립한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7년 전인 1794년, 제퍼슨은 버지니아 살러츠빌에 있는 몬티첼로 농장에서 주조 공장을 차렸다. 2000헥타르의 농장에 딸린 대저택은 가파른 언덕 곡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고, 제퍼슨이 사는 동안 400명이 넘는 노예들이 일했다. 열두 살 때부터 제퍼슨의 못 공장에서 일했던 조 포셋은 다른 어린 소년들과 함께 손으로 매일 8000개에서 1만 개의 못을 만들었다. 농장의 고갈된 토양을 회복시키는 휴경기 동안에도 페퍼슨 가족이 먹고살기에 충분했다. 포셋은 나중에 공장 관리자가 되었고 노예 해방 후에는 아내와 자녀 열 명의 지유를 사기 위해 직접 못 제조 사업을 시작했다.

제퍼슨은 못 만드는 사업에 자부심을 느꼈고 프랑스 정치인 장니콜라 드뮤니에에게 보낸 편지에 못을 만드는 일이 그에겐 '귀족의 칭호'와 같다고 쓰기도 했다. 몇 년 뒤 영국이 마침내 수출을 시작하면서 철 가격이 떨어지고 못을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제퍼슨은 1796년 또 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 장만한 '절단기'를 활용해 생산량을 늘릴 거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제퍼슨이 뉴욕의 버랄 씨에게서 구입한 그 기계는 못 제조 기계의 상징이었다. 1600년에도 못 제조기가 나왔지만 인기가 별로 없었다. 제퍼슨의 기계는 둥근 통의 테두리에 두르는 용도로 쓰이는 얇은 철판(배럴 후크)을 잘라 조그만 4페니 못(중세 영국에서 이 못 100개의 값이 4펜스였는 데서 유래란 이름)을 만들었는데, 아마 수동 축으로 작동하는 한 쌍의 수직 칼날을 사용했을 것이다. 제퍼슨의 기계로는 못의 머리 부분은 만들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 시대의 다른 기계들은 지렛대 여러 개로 못의 넓은 쪽 끝을 평평하게 눌러서 머리를 만들었다. 이로써 고된 육체노동이 줄고 못을 만드는 과정도 빨라졌지만, 그렇다고 과거와 절처하게 단절된 건 아니었다. 초기 기계로 만든 정사각형 커팅의 다소 투박한 못은 오늘날의 완벽하게 둥그런 못보다는 기존의 수제 못과 더 닮았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대규모 못 생산지였다. 숙련 기술자는 손으로 약 1분 안에 못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일곱 살이나 그보다 어린 소년 소녀들이 돈을 벌려고 못을 만드는 일이 흔했다. 특히 일글랜드 중부의 블랙컨트리에서 못 제조 사업이 번창했다. 철과 석탄이 나오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식비와 생활비를 벌려는 여성들이 보통 그 일을 도맡았다. 그래서 탄광 노동자와 철물상들은,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부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못 만드는 처녀'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성들이 돈을 버는 경우 종종 그렇듯 결국 노동조합의 반대에 부딪혔다. 못 단조공 노동조합이 여성들이 이 일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 것이다. 결국 여성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부리던 사업주들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말이다. 일부 여성은 역경을 딛고 불가능에 도전했다. 예컨대 엘리자 탄슬리는 1851년에 남편이 사망한 뒤 남편의 못 제조사를 인수하면서 '그 미망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남편이 사망할 당시 그녀에게 열한 살 미만의 다섯 자녀가 있었고, 못과 체인을 만드는 가족 사업을 확장하는 데 성공해 스태퍼드셔 카운티에서 동업종게 가장 큰 규모를 갖추어 다른 7개 지역에 창고를 둘 정도였다. 그녀는 공정하고 인간적인 고용주로 알려져 있었고,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고객들을 만났다. 1882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회사 직원은 4000명이 넘었다. 그 회사는 지금도 존재하며,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못 패키지에도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엘리자가 살았던 시대에 두 가지 발정이 이루어지면서 산업에 혁신을 일으켰다. 첫째, 엔지니어들이 정밀함과 대량생산의 힘을 발견했다. 이는 물건을 정확한 치수로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헨리 모즐리(1771년생)는 최초로 실용적인 금속 절단 선반을 발명했다. 이전에는 기계에 들어가는 작은 금속 부품을 수작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초차가 불가피했다. 반면 그의 기계는 수치가 정확하고 일관도니 부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교환 가능한 부품이라는 신세계가 열렸다. 이제는 필요한 곳 어디에든 꼭 들어맞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부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이 개념은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고 나사, 기어, 스프링, 와이어와 같이 특히 얇고 작은 것들을 만드는 기술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강철을 빠르고 값사게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총의 재료가 되는 철의 품질을 높이려고 노력했던 또 다른 '헨리'인 헨리 배서머(1813년생)는 석탄을 태우는 대신 철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으면 철을 훨씬 더 높은 온도로 가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공정을 통해 철의 불순물을 효과적으로 태운 후 탄소를 정확한 양만큼 다시 첨가해 강철을 만들 수 있엇다. 강철은 순철보다 더 강하고 단단하며 마모에도 훨씨 오래 지속되고 약간 유연하다. 못을 만드는 데 이상적인 재료다.

이런 발전에 힘입어 19세기에 빠르게 움직이고 강하게 누르는 기계가 만들어지면서 강철 와이어를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재료로 값싼 못을 만들 수 있었다.

와이어로 만든 못은 얇고 둥글었으며, 처음에는 네모난 못보다 지탱하는 힘이 약했기 때문에 숙련된 소목장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훨씬 싼 가격 덕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생산량이 치솟았다. 1886년 미국 못의 10퍼센트가 강철 와이어로 만든 것이었다. 1913년에 90퍼센트였다.

오늘날 못을 찍어내는 기계는 1분에 800개가 넘는 금속 못을 만들 수 있다. 와이어로 만든 민자 못(제일 흔하다), 아연 같은 것으로 코팅해 부식을 방지하는 못, 약간의 나사산이나 가시가 나 있는 가시못 등 다양한 종류의 못이 있다. 20세기 초에 나온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전부 강철 와이어를 원통에 감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름 6밀리미터인 일반 와이어는 못을 만들기에 너무 굵기 때문에 와이어를 계속 잡아당기는 여러 개의 회전하는 원통을 이용해 와이어를 늘여서 가늘게 만든다. 그러고는 막대 모양으로 뚝뚝 자른다. 각 막대를 못으로 만들려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먼저 한쪽 끝을 칼날로 눌러서 날카롭게 만들고, 또 다른 기계로 반대쪽 끝부분에 강한 압력을 가해 못의 머리를 만든다. 그러면 끝이다. 가열하지 않아도 되고 이두박근을 튀어나오게 하는 망치질도 필요 없다. 이대로 완성이다.

 

못을 보고 있으면 뭐가 보일까? 만약 엔지니어라면 못을 움직이지 않는 견고한 물체가 아니라 때리고 밀고 당기고 부르뜨리는 다양한 힘의 중심점으로 불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엔지니어들은 못으로 물건을 고정하거나 고정 상태를 유지할 때 이런 힘들을 고려해야 했다.

못을 재료 안으로 밀어 넣어 박기 위해서 빠르고 강하게 때린다. 못의 끝부분이 날카롭기 때문에 재료를 손상시키지 않고 표면에 구멍을 낼 수 있다. 힘이 작용하는 면적이 작을수록 압력이 커지므로 망치를 꽝 때리는 힘이 못의 끝 점을 통해 재료로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이힐을 신고 풀밭에 서면 구두 굽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원리다. 

못을 통해 재료로 가해지는 힘이 있는 반면 거꾸로 못이 받는 힘도 있다. 한번에 벽에 그림을 걸려고 못을 박는데 못이 휘어버렸다. 내가 못을 약간 빗나가게 치는 바람에 힘이 못의 몸통을 따라 곧장 전달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못을 충분히 세게 때리지 않았고, 이는 못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가 되는 금속의 또 다른 특정을 보여준다. 못을 충분히 세게 때리지 않아서 못이 휘어진 이 같은 상황은 직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큰 힘으로 때릴수록 축이 휘어질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구조물의 무게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골격을 짓누르는 대형 건물이나 교량에서는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못은 힘이 작용하는 방식과 그 힘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거동한다. 여기서는 오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못을 망치로 내리칠 때 압축력이 엄청 커서 못의 몸체에 충격파가 전달되지만 하중이 지속되는 시간은 몇 분의 1초에 불과하다. 못을 세게 내리치면 못이 휘어질 틈이 없다. 하중에 의한 금속의 변형은 하중이 가해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하중이 빨리 가해질수록 금속은 변형되지 않으면서 더 큰 힘을 견뎌낼 수 있다. 

일단 망치로 못을 때리면 마찰력에 의해 못이 그 자리에 고정된다. 마찰력은 두 표면이 서로 미끄러지는 중이거나 또는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 발생하는 힘이다. 만약 못으로 결합된 2개의 나무 블록을 떼어내려고 하면 나무의 섬유질이 못의 몸통을 붙잡는다. 못의 길이 방향을 따라 찢기는 힘이 가해지며 그것을 장력(張力)이라고 한다. 이제 이 시도는 둘 중 한 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못에 비해 장력이 너무 커서 못이 당겨지다가 반으로 뚝 끊어지거나, 마찰력을 극복하고 못이 헐거워지거나, 못을 두 동강 내는 데 필요한 힘은 표면의 마찰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전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걱정해야 활 것은 마찰력이다. 

못과 블록 사이 마찰력의 크기는 두 물질이 접촉하는 면적과 표면 거칠기에 따라 달라진다. 목재는 균일하지 않을 수 있다. 나무는 점점 커지고 두꺼워지며 나이테가 생기고 잎을 만들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 생명체다. 일단 나물르 잘라 목재로 만들면 나무 층의 단단함, 수분 함량, 나뭇결의 방향, 온도, 주변 습도 등이 재료에 영향을 미치며 시간이 지나면서 재료가 변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마찰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나사못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못에 가해지는 또 다른 힘은 전단력(剪斷力)이다. 만약 못이 관통하고 있는 두 블록 중 아래 블록은 정지해 있지만 위 블록이 옆으로 움직인다면 못의 몸통 전체가 변형될 수 있다. 이것이 전단 효과다. 못이 버틸 수 있는 전단력의 크기는 재료와 단면적에 따라 달라진다. 재료가 강하고 단면적이 클수록 못은 더 큰 전단력에 저항할 수 있다.

재료로서 강철이 지니는 약간의 유연성이나 연성은, 이런 장력과 전단력을 매우 잘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철이 나오기 전의 다른 재료들은 한계가 있었다. 연철은 너무 무르고 주철은 부러지기 쉬워서 이런 힘에 노출됐을 때 너무 변형되거나 쉽게 끊어졌다(탄소 함량이 연철은 0.1퍼센트 이하, 강철은 0.1~1.7퍼센트, 선철과 주철은 1.7퍼센트 이상이다). 이런 재료로는 못의 크기를 엄청 키워서 망가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기에 수 세기 동안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얇은 철제 못은 강철이 개발된 뒤에야 만들 수 있었다.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 박은 못은 크기가 작긴 해도 엔지니어가 매일 고심하는 것 중 하나인 힘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처럼 커다란 다리 상판에 연결된 케이블에는 상판과 그 위를 다리는 차들의 무게 때문에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장력이 가해진다. 그리고 상판을 구성하는 빕은 자체 무게와 빔이 지지하는 하중 때문에 전단 현상이 생긴다. 구조의 규모가 어떻든 엔지니어링의 핵심에는 동일한 기본 힘들이 존재한다. 

 

 

못에 작용하는 힘과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다루려고 고안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커다란 구조물로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무척 각별하게 여겼던 600톤급 전함 메리로즈호가 있다. 이 배는 1545년 솔렌트 해전에서 침몰해 수 세기 동안 해저에 가라앉아 있다가 역구 남부 해안 포츠머스에서 발견되어 현재 저시 중이다. 구조물의 상당 부분이 파도에 유실됐고 선체는 이제 썩어가는 늑골의 일부처럼 쩍쩍 벌어진다. 그럼에도 그토록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게 정말 놀라운데, 당시 전함이 감자기 침몰하면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을 것이고 변화무쌍한 솔렌트 해협의 조수를 수 세기 동안 견뎠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함의 기저에는 한때 바닷속에서 가장 깊은 지점에 있었을, 배의 등뼈에 해당하는 용골이 있다. 용골에서부터 갈비뼈가 위쪽으로 뻗어나와 선체의 구조 골격을 이룬다. 내무에는 짐과 널빤지로 만든 4개의 갑판이 있었고 갑판의 끝은 '니(knee)' (무릎, 해양공학은 그 자체로 생생한 어휘를 갖고 있다)라고 알려진 L자형 블록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널빤지와 니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선박용 나무못들은 수 세기 동안 배를 지탱해온 고정 장치다.

나무못은 보통 금속 못보다 훨씬 길고 굵은 원기둥 모양인 나무 막대다. 메리로즈호의 나무못은 최대 50센티미터 길이였다. 나무가 다른 나무조각을 뚫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에 못을 떠올릴 때 보통 연상하는 특징인 뾰족한 끝부분이 나무못에는 없다. 대신 오거(현대 전기 드릴의 시초)를 사용해 나무판자에 약간 작은 구멍을 먼저 만들었을 것이다.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나무못 끝에 동물성 지방을 바른 뒤 긴 자루가 달린 무거운 망치로 때려서 박아 넣었다. 좀 더 단단하게 박기 위해 나무못 끝부준은 약간 갈라 그 속을 코킹이나 타르로 칠한 섬유질로 채워서 못을 정교한 종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배 구조물은 지속적으로 수리와 교체가 필요한데 나무못은 쉽게 톱질할 수 있어서 선박에 매우 적합한 재료였다. 또 나무는 젖으면 팽창하기 때문에 바다에서는 배의 못이 더 튼튼하게 조여졌다. 그러나 큰 힘을 지탱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몇몇 중요한 접합부에는 나무못 외에도 니 같은 쇠막대를 넣어서 내구력을 높였다.

33년 동안 바람, 파도, 그리고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를 견뎌내며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나무못은 이 거대한 선박을 견도하게 지탱했다. 이 배의 최후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메리로호즈가 적함에 접근할 때 갑자기 선체가 뒤로 기울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이후 급격하게 침몰하면서 거의 모든 선원이 사망했다. 때때로 썰물에 잔해가 떠밀려왔지만 난파선이 정확한 위치는 찬즐 수 없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메리로즈호의 잔해를 찾기 위해 잠수부들이 솔렌트 해협을 체계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했고, 1971년에 마침 내 발견했다. 철은 바다의 짠물에 상당 부분 분해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선박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나무못이었다. 선박을 인양했을 때 나무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남은 철은 모두 제거했다. 이제 메리로즈호의 선테가 건조되고 수축하면서 과거 목재 표면과 수평으로 위치해 있던 나무못들이 드러났다. 마치 배를 온전하게 지킨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으려는 듯 고개를 내밀면서.

메리로즈호는 최초의 전용 전투함이었다. 220년 뒤 또 다른 함대인 영국의 HMS 빅토리호가 채텀 로열 조선소에 띄워졌다. HMS 빅토리호는 당시 가장 큰 목재 함대로 최소 2000그루의 참나무가 사용됐고 항해를 하려면 37개의 개별 돛이 필요했다. HMS 빅토리호가 건조될 당시엔 기술이 발전해서, 여전히 대형 나무못으로 연결하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방대한 양의 금속 고정 장치도 함께 사용되었다. 여기서도 색다르고 감각적인 명칭들을 만날 수 있다. 코악스(유창목으로 만든 짧고 넓적한 못), 클렌치(주요 구조물들을 묶는 거대한 구리 막대), 데크덤프(구부려서 갑판 구조물을 선체에 결합한 것으로 추정되는 굵고 긴 연철 막대), 랜턴못(랜턴을 매다는 용도로 쓰인 L자 모양의 머리를 가진 철제 못), 포어록볼트(끝이 가늘어지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 철제 쐐기가 통과해 볼트를 고정하는 부품), 문츠 금속못(끝이 뾰족한 황동합금 못으로 이를 발명한 조지 문츠라는 영국 버밍엄 산업가의 이름을 땄다) 등이다.

이 시점에 엔지니어들은 재료를 더 신중하게 사용했다. 예를 들어 바닷물에 잠기는 부분에는 구리 연결부를 썼다. 철과 달리 구리는 바닷물과 반응해서 목재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리와 철이 혼합된 문츠 금속은 순구리보다 값이 저렴하면서도 잘 부식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철은 선체의 수면 윗부분과 내부에 사용되었다.

1765년 배를 바다에 처음 띄울 당시 HMS 빅토리호는 최신 기술로 건조된 선박이었고 1775~1783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함대 전체를 이끌었으며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부사령관의 기함으로 쓰이면서 유명해졌다. 하지만 당시는 기술이 끊임없이 혁신되는 시기였고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기존 건조 방식은 빠르게 대체되었다. HMS 비토리호는 영국에서 제작된 마지막 대형 목재 전함 중 하나였고, 그 이후엔 대부분 철제로 건조되어 다른 종류의 고정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목재 선박은 지금도 프츠머스의 왕립해군국립박물관 건조 독에 보관돼 있다. 방문한다면 선박뿐만 아니라 선체를 연결하는 데 썼던 금속 못이나 볼트 같은 다양한 부품이 잡다하게 전시된 진열장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엔지니어들이 재료돌을 결합해 복잡하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숨겨져 있지만 매우 독창적인 방법들을 확인할 수 있다. 

 

메리로즈호에 나무못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금속 못이 유용하긴해도 늘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때로는 그저 필요해서 나무못이 사용된다. 일본에는 철광석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사철에서 수고스럽게 추출한 금속 대부분은 전설적인 일본도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5세기 이후로 일본은 나뭇조각을 서로 끼운 뒤 복잡하게 맞물리는 연결부를 정확한 순서로 조립하는 방식으로 사원과 탑을 세웠으며 여기에 금속 연결 장치는 없었다. 이렇게 나무로만 된 연결부는 유연성 덕분에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피해를 예방하기에 적합했다. 연결부가 덜컹거리며 에너지가 분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환경에서 엔지니어는 못의 뛰어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못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못의 단점 중 하나는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해 마찰력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는 못이 상당히 길어야 하며 못의 몸통 전체가 결합하려는 재료와 완전히 포개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며 못을 꼭 붙들어줄 마찰력이 생기지 않고, 진동과 반복적인 움직임이 마찰력을 이겨내며 못이 빠져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흔들림에 계속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엔지니어링 부품에는 못이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비행기보다 진동이 심한 건 없다. 나는 비행기를 타는 데 서툰 편인데 지상 수천 미처 위에서 아주 앏은 금속 하나만이 바깥 공기와 나를 분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진다. 만약 엔지니아들이 이런 진동을 견딜 수 있는 체결 장치를 고안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훨씬 더 불안했을 것이다.

비행에 대한 나의 두려움과 못이 비행기 제작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초기 비행기 일부가 실제로 못으로 고정돼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좀 놀랐다. 그리고 제46 타만 근위야간폭격 비행연대 같은, 초기 비행기를 탄 비범한 승무원들이 엄청 존경스럽기도 했다. 항공사(GPS가 없던 시절 태양과 별, 풍향과 풍속 등을 관찰해 비행기의 현 위치와 비행결로 등을 계산하는 임무를 담당했던 운항승무원)였던 폴리나 블라디미로보나 겔만은 1930년대 10대 시절부터 그라이더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키가 작아서(비행기를 설계할 때 모두를 고려하지 않은 탓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첫 글라이더 비행에서 교관이 버여준 기술을 시도하기 위해 비행기 방향타 페달을 조작하려면 좌석에서 미그러져 내려가야만 했고 그때마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겔만은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미라나 라스코바라는 조종사가 여성들만의 비행연대를 구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겔만은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에는 비행기가 너무 컸기 때문에 결국 항공사로 훈련받게 되었다. 

항공사인 겔만과 비행기 조종사는 폴리카르포프 po-2라는 비행기를 탔다. 밤의 엄호 아리 조종사와 겔만 그리고 나머지 비행대대는 독일의 참호, 보급선, 철도 같은 목표물에 접근할 때 엔진을 끄고 조용히 활공하다가 폭탄을 떨어뜨렸다. 고요히 활동하는 가운데 비행기 날개 구조를 통해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지상의 병사들은 이들을 빗자루 탄 마녀에 비유애 '나흐트핵센, 밤의 마녀들)' 이라고 조롱했다.

처음에 남성 조종사들은 이들을 과소평가했지만 여성 조종사들은 혹독한 기후 조건에서 종종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비행 임무를 수행하는 등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대부분의 연합군 조종사들이 귀환 전까지 30~50개의 임무를 수행한 데 비해 놀랍게도 겔만은 소속 연대의 선임 중위로서 860개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녀는 유대인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소련 시민이나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최고 영예인 소련 영웅 훈잔을 받았다(유대인이라는 건 그녀가 러시아인으로 여기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공로로 훗날 금성 훈장을 받았다. 

나는 po-2 비행기를 보러 영국 비글스웨이드에 있는 항공박물관 셔틀워스 컬렉션을 방문했다. 비행기만 보자먼 이 모델은 값싸고 조잡하지만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다(이 특정 모델은 지금도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다). 길이가 8미터에 불과하고 위아래로 날개가 2개 있는 복엽기다. 하지만 내가 가장 주목한 특징은 po-2가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즉 못이 비행기의 구조와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비행기 동체는 4개의 길고 단단한 목재 빔(위아래 각 측면에 하나씩)으로 만들어졌으며 수직 목재 빔이 이것들을 고정해 긴 직사각형 프레임을 형성했다. 각각의 수직 빔 사이에는 튜브를 받쳐주는 조각이 대각선으로 놓여 있어서 단단했다. 이 1차 구조물은 튼튼한 강판과 볼트로 연결되거나 못과 함께 접착해 보강했다. 기체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도색된 외피는 곡선 형태의 얆은 나무 늑골 보조망에 아마섬유를 붙인 것이었다. 접착제가 바르는 동안 아마섬유를 나무에 고정시켜놓기 위해 못을 사용했고 완성되고 나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제거하기도 했다.

목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기 제작에 사용돼왔지만 항공공학은 그 이후에 발전했다. 그래서 널리 알려진 호커 허리케인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전투기의 동체는 이전의 전투기와 구조는 같지만 날개는 한 쌍으로 줄었고 나무 대신 강철이 사용되었다. 비행기의 주요 구조는 강철로 만들고 외피에는 나무와 직물을 사용하기도 한 과도기였다. 이 비행기에서는 직물을 고정하는 데 여전히 못이 쓰였지만 강철판과 빔은 못을 박아 넣을 많난 공간이 거의 없는 얇은 판이었다. 이렇게 얇은 부품을 고정하려면 못이 아닌 다른 고정 장치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고대 세계의 엔지니어들이 이미 이걸 할 수 있는 고정 장치인 리벳을 개발해놓은 터였다. 

와이어로 만든 못처럼 리벳도 원통형이지만 못보다는 굵다. 와이어 못과 달리 리벳은 끝이 뾰족하지 않다. 대신에 둥그런 머리가 2개 붙어 있어서 아주 모그마한 아령처럼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면 산업혁명 시대의 철도 교량과 건물에 독특한 돔 모양의 머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구조용 빔과 기둥을 서로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구조물에서 리벳은 구식 부품이고 볼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곧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항공우주 산업의 엔지니어들은 리벳을 여전히 광범위하게 쓰고 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무거운 볼트보다 리벳이 더 낫기 때문이다. 현재는 목재가 아닌 금속을 다루는 조선업자들도 리벳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산업들은 단순히 리벳의 혜택을 받았을 뿐이다. 이런 산업들로 인해 엔지니어가 리벳을 발명한 게 아니다. 이를 알려면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로리카 하마타와 로리카 세그멘타타(가죽 끈에 묶은 금속 고리로 구성된 갑옷)라는 로마의 소사슬 갑옷 두 종류는 철제 리벳을 사용했다.


로리카 하마타

로리카 세그멘타타

머치해덤 공장에서 내게 못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단조공 리치는 이 기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설명해주었다. 목공 기술에 영감을 받은 단조공들은 장붓구멍에 끼워져 맞물리는 이런 접합부는 조심스레 조작할 수 있는 목제와 잘 어울리지만, 철은 본래의 특성과 모양으로 인해 목재처럼 매끄러운 펴면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장부와 장붓구멍 사이에 필요한 마찰력을 내기 위한 충분한 접촉면을 설계하기가 어렵다. 또 마찰만으로 크고 무거운 쇳조각들을 함께 고정시키기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단조공들은 장붓구멍을 뚫고 나오는 더 긴 장부를 만들어 장부의 끝을 가열한 뒤 망치로 내리쳐서 장부의 머리를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리벳 설계의 기초다.

하지만 실제로 리벳은 이보다 더 오래되었다. 이집트인들이 못을 만들던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3000년부터 사용했다고 추측된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집트의 고대 무덤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79~1352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주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아름다운 디자인의 이 주전자는 둥글둥글한 몸통에 땅딸막한 원통형 목이 달려 있으며, 표면은 짙은 빨간색과 갈색이 섞인 얼룩덜룩한 색감을 띠고 있고 망치로 청동 모양을 가공하면서 생긴 옴폭 들어간 흔적들이 있다. 한쪽에는 연꽃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3개의 리벳으로 몸통과 연결돼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엔지니어들에게 리벳의 장점은 못과 달리 마찰력에 의존하지 않는 다는다는 점이다. 리벳은 그 형태 자체를 통해 물체를 고정한다. 리벳이 고정하고 있는 2개의 금속판을 떼어내려고 하면 리벳 몸통에 장력이 걸리면서 양쪽 돔의 안쪽 면이 힘에 저항한다. 이런 식으로 힘에 대응하려면 리벳은 설치할 때 모양이 바꿔어야 한다(모양이 그대로 유지되는 못과 다르다). 리벳에는 핫리벳과 콜드리벳 두 종류가 있으며, 둘 다 한쪽 끝에 반구형의 뚜껑이 달린 원통형 축으로 시작한다. 설치하기 전에 연결하려는 2개의 관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19세기 교량들처럼 큰 힘으로 구조물의 대형 조각들을 결합하려면 핫리벳을 써야 한다. 불을 담당하는 리벳공은 뜨겁게 달군 리벳을 재빠르게 다음 기술자에게 던지고, 그 리벳공은 집게로 그걸 잡고 미리 뚫어놓은 구멍에 넣는다(뜨거운 금속 조각들이 건설 현장을 가로질러 달아다니는 것이 이제 과거의 일이라는 게 다행스럽다). 또 다른 리벳공은 돔이 새겨진 무거운 금속 도구인 '리벳 스냅'이 들어 있는 망치로 튀어나온 축을 두드린다. 빠르게 때리고 나면 축의 끝부분이 돔 모양으로 눌리면서 결과적으로 2개의 반구형 머리가 재료를 제자리에 고정한다. 리벳이 식으면 약간 수축하면서 체결력이 더욱 강해진다. 핫리벳은 철이나 강철 같은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두 번째 머리 부분을 형성하려면 가열해야 한다. 지금은 이 모든 종류의 리벳을 설치하는 과정이 기계화되어 있다.

엔지니어는 핫리벳 대신 콜드리벳을 쓸 수도 있다. 알루미늄 같은 더 부드러운 금속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열할 필요가 없고 모양이 더 쉽게 만들 수 있다. 속이 비어 있고 핫리벳에 비해 훨씬 작아서 더 가볍다(강하진 않더라도). 이런 종류의 비벳은 연료 소모량을 줄이기 위해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인 항공기에 사용된다. 

호커 허리케인 같은 비행기에는 속이 빈 리벳 수백 개가 쓰였고, 큰 부라를 지탱해야 하는 프레임 접합부는 나사와 볼트로 함께 고정돼 있었다. 그러나 리벳은 또한 비행기 동체의 근본적인 디자인을 바꿀 수 있게 했다. 호커 허리케인은 각각 강철과 누무로 만들어진 구조 두 세트로 동체가 구성돼 있었다. 하나는 내부의 주요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외피가 부착된 바깥쪽 구부러진 프레임이었다. 반면에 독특한 타원형 날개와 거의 시속 600킬로미터에 도달할 수 있는 유선형 몸체를 가진, 브리튼 전투의 상장인 스핏파이어 전투기는 이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항공박물관 셔틀워스 컬렉션의 po-2 비행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시된 스핏파이어 안을 들여다봤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내부가 거의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외피 바로 안쪽에 동체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개의 구부러진 알루미늄 아치들을 볼 수 있었다. 각 빔의 가장자리를 따라 좁은 테두리가 있었고, 외피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빔의 테두리와 동체의 외피, 이렇게 2개의 층이 수천 개의 리벳으로 고정돼 있었다. 2개의 알루미늄 층 모두 극도로 얇았다. 이렇게 두 층을 결합한 것은 하나처럼 움직여야한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층이 서로 미끄러지면 하나의 강력한 구조물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축을 가로지르는 전단력에 대항하는 데 효과적인 리벳은 이에 완벽했다. 여기서 핵심은 호커 허리케인이 2개의 프레임(구조와 외피)을 필요로 한 반면 스핏파이어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동체는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고성능 항공기의 시대를 열었다. 

리벳은 앞서 설명한 2개의 돔형 머리를 가지고 있지만 스핏파이어의 설계자 R.J. 미첼은 비행기 외부로 삐져나온 리벳 머리를 평평하게 만들어 비행기 위로 공기가 원할하게 흐르게 함으로써 비행기가 더 빨리 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접시머리 리벳이라고도 불리는 평리벳은 제조 비용이 더 많이 들고 설치 시간도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평리벳이 실제로 스핏파이어의 속도에 변화를 주는지 여부를 검증하기로 했다. 그들이 이를 실험하기 위해 쓴 방법은 특이했다. 엔지지어들은 비행기의 모든 평리벳 머리에 쪼갠 완두콩 조각을 접착제로 붙이고(어쩐 자료에 따르면 '수두 감염'처럼 보였다고 한다) 비행기를 날린 뒤 속도를 기록했다. 그러고는 쪼갠 완두콩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면서 추가 시험비행을 하고 결과를 기록했다. 미첼은 선택은 옳았다. 데이터에 따르면 돔형 리벳은 전투기의 최고 속도를 시속 35킬로미터까지 줄일 수 있었다.

전후 수십 년 동안 보통의 여객기는 스핏파이어와 비슷한 구조의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기체와 날개에는 휘어지고 뒤틀리는 큰 힘이 작용하며 갑작스러운 돌풍과 급격한 온도 변화, 강한 진동에도 충격을 받는다. 리벳은 항공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성 요소다. 보잉 737 비행기 한 대를 완성하는 데 60만 개 이상의 리벳과 볼트가 들어간다.

20세기 초 알루미늄 판의 추출 및 제조 방법이 값싸고 빨라지면서 항공우주 산업의 새로운 디자인 세계가 열렸지만 리벳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형 여객기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벳이 없었다면 여전히 po-2호와 호커 허리케인의 외피 안쪽에 끼워진 프레임에 의존해야 하고, 따라서 승객 수송력도 제한됐을 것이다. 서핏파이어의 튜브 구조의 개뱡형 리벳 덕분에 비행기 내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과 수 톤의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크고 가벼운 현대식 항공기가 탄생했다.

 

스핏파이어 같은 복잡한 기계들은 18세기 말에 시작돼 19세기에 확장된 대량생산과 조립라인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욥과 윌리엄 와이어 형제, 그리고 헨리 모즐ㄹ리(금속 절단 선반의 발명자)와 조지프 휘트워스 같은 엔지니어들은 제조 방법을 혁신해 미세하고 정확한 측정을 바탕으로 특정한 기준에 맞춰 물건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했다. 그중 하나가 나사였다.

나사는 리벳이나 못과 마찬가지로 사물을 서로 고정할 수 있는 공학적 해결책이다. 몸통이 길고 머리가 있다는 점에서 목과 비슷하지만 목과 달리 몸통이 매끄럽지 앟고 나선형의 나사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둘 다 끝이 뾰족해서 결합하려는 사물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못과 달리 나사는 돌아가면서 나사산이 사물을 파고들어 나사가 파묻히게 된다. 또 못과 달리 나사는 기계적인 힘으로 나사산 사이에 끼인 부분들을 물리적으로 고정한다. 

나사에서도 마찰은 여전히 중요하다. 나사산과 재료 사이에 마찰력이 작용하면서 나사가 풀리거나 느슨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함께 고정돼 있는 두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 나사에는 축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인장력보다는 사물이 나사산을 따라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설치할 때도 나사에는 못과는 완전히 다른 힘이 가해진다. 쾅 때리는 힘보다는 스크루드라이버로 돌릴 때 일정한 비틀림이나 뒤트는 힘이 작용한다. 나사를 만드는 재료는 비틀어도 변형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해야 한다. 

어쩌면 나사못이 더 좋은 고정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못의 어른 버전이랄까. 나사는 변형되지 않을 만큼 튼튼해야 하기 때문에 보통 못보다 단단한 재질로 만든다. 나사산 덕분에 사물을 단단히 결합해주며 장력(끌어당기는 힘)에도 잘 견디기 때문에 나사가 풀릴 염려 없이 물건을 걸 수 있다. 나선형 나사산은 아주 작고 축을 짧게 만들 수 있다. 나사로 손목시계 부품이나 얇은 금속판 같은 작은 것을 고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사는 설치했다가 제거하기도 쉽다. 스크루드라이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동시에 나사는 더 단단하기 때문에 전단력에 깨지기 쉬운 반면, 못은 더 연성이거나 유연해서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나사 디자인에 머리 모양(예컨대 스크루드라이버를 끼우는 십자나 마이너스 모양)이 포함되기 전까지는 설치하기가 까다로웠다. 모즐리의 기계가 나오기 전에는 나라를 만드는 데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들어갔다. 나사의 나사산을 일일이 손을 고생스럽게 파내야 했다. 즉 사사는 적어도 15새기 이전 유럽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고, 산업혁명 이후에 값싸고 널리 쓰이는 제품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나사, 더 구체적으로는 축을 둘러싼 나선형 나사산이라는 개념은 두 물체를 결합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엔지니어링의 오랜 특징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오늘날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양수기라고 불리는 관개 도구가 있었다. 속이 텅 빈 나무통이 있고 그 안에 긴 사사산이 달린 원통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한쪽 끝은 강이나 호수에 잠기고 다른 쪽 끝은 육지보다 더 높은 곳에 놓이도록 비탈면에 설치했다. 손잡이로 나사를 돌리면 나사산이 통 안에 물을 가득 담아 땅 위로 끌어올린다. 이런 관계 방식은 나일강을 따라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아르키메데스도 이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을 섬기던 기술자들이 바빌론의 유명한 공중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이보다 수백 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 6새기에 발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양수기는 수학적으로 복잡해 만들기 까다로운 나선형이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시간이었다.

16세기까지 나사는 (지렛대, 바퀴와 축, 도르래, 빗면, 쐐기와 함께) 단순 기계에 포함되었다. 단순 기계는 그리스인이 처음 만들고 르네상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다음은 개념으로, 움직이는 부품이 거의 또는 아예 없는 도구로소 종종 힘의 방향을 바꿔 힘에 대항해 작동하게끔 해준다. 

예를 들어 무거운 물건을 주직으로 들어올리는 것보다 빗면 위로 밀어올리는 것(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사용한 기술)이 훨씬 쉽다. 또는 지렛대의 일종인 시로로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를 들어올리는 것을 생각해보라. 아빠가 한쪽의 중심부 가까운 곳에 앉으면 아이는 다른 쪽의 끝부분을 아리로 눌러서 아빠를 들어올릴 수 있다. 분명 아이의 근육이나 체중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사의 경우 나선형의 나사산이 회전운동을 선형운동으로 변환한다. 즉 아르키메데스 나선 양수기에서 축의 회전은동은 물을 직선을 따라 위로 끌어올린다. 

마천루는 이런 회전운동을 선형은동으로 변환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초기의 고층 건물은 지반이 단단하고, 두꺼운 콘크리트 슬래브만으로도 건물의 엄청난 무게를 아래쪽 암반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맨해튼 같은 지역에 등장했다. 반면에 런던 같은 도시는 더 부드럽고 가변적인 재료인 점토에 기반하고 있는데, 점토는 물에 운반되고 분쇄된 입자로 만들어진 고훈 흙이다. 점토는 젖으면 팽창하고 마르면 수축해서 갈라질 수도 있다. 계절마다, 그리고 매년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곳에 고층 건물을 지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구조물을 지탱하려고 지반에 말뚝처럼 박은 기초인 파일을 사용한다. 땅속으로 40미터가량 박힌, 지름 1미터 이상의 거대한 콘트리트 축 위에 건물을 높다랗게 세울 수 있다. 못과는 한참 먼 것처럼 보일 수 있고 크기도 다르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힘이 가해진다. 못과 마찬가지로 마찰 파일도 표면, 즉 가장 바깥 표면과 토양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파일을 만드는 것은 반죽 상태의 콘크리트를 부어 굳히기 위해 상대적으로 좁지만 매우 깊은 구멍을 파내야 하기 때문에 엔지니어에게는 도전적인 과제다. 여기서 나사의 마법을 활용할 수 있다. 바로 말뚝을 박는 기계다. 이 기계에는 엔진 구동으로 땅속에서 회전하는 엄청나게 긴 수직 나사가 있다. 나사산이 흙을 퍼올리고 나사가 땅 위로 올라올 때 진흑이 함께 달려 올라오면서 구멍이 깨끗하게 파내진다. 마치 코르크 따개로 와인 병의 마게를 뽑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 구멍에 콘크리트 반죽을 붓고 그 안으로 강철망을 내린다. 콘크리트가 굳으면 강철과 결합하면서 건물의 하중을 땅속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견고하고 내구성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정밀 대량생산의 시대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또 다른 고정 장치가 탄생했다. 그건 이제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작은 부분이나 요소를 일컫는 표현이 됐고, 이 책의 제목도 거기에서 따왔다.

볼트는 어떻게 보면 나사와 리벳의 결함이다. 긴 원통형 축 위에 육각형 머리가 얹혀 있는 모양으로 렌치를 사용해서 조인다. 전체적으로 (어떤 건 축의 끝부분에만) 나사산이 파져 있고 지금까지는 대부분 딸딸막한 나사와 비슷했다. 볼트를 끼우려면 리벳과 마찬가지로 연결하려는 강철 빔이나 기둥에 미리 구멍을 뚫어놔야 한다. 너트는 육각형 도넛 모양으로 구멍 안쪽에 나사산이 불트 몸통과 반대 방향으로 새겨져 있다. 모즐리의 선반 같은 기계 덕분에 볼트와 너트의 나사산을 완전히 일치하게 만들 수 있다. 너트를 볼트에 끼워서 돌리면 물체를 고정할 수 있다.

볼트는 나사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힘이나 작동 방식에서는 리벳에 더 가깝다. 너트와 볼트를 조이면 고정해야 할 금속 조각이 꼭 물린다. 다리나 고층 건물처럼 두꺼운 철판이나 강판을 접합해야 하는 대형 구조물에서는 금속판에 스크루드라이버로 나사산을 뚫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사를 사용할 수 없다. 핫리벳은 어느 정도 쓸 수 있다. 비교적 부드러운 철로 만들어졌기에 현장에서 두 번째 머리 돔을 망치로 내리쳐 설치할 수 있지만 위험하고 고된 작업이다. 너트를 조이는 과정은 달궈진 금속 조각이 이리저리 나아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 볼트는 리벳조다 더 단단한 강철로 만들기 때문에 훨씬 더 튼튼하다 오늘날 건설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름 20밀리미터의 볼트 하나는 약 11통의 인장 하중을 견딜 수 있다. 런던의 이층버스 무게와 맞먹는 정도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더 샤드 프로젝트에서 볼트 수천 개에 걸리는 힘을 계산했던 엔지니어이자 자칭 '볼트 너트'인 오마르 샤리프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책의 제목은 '너터와 볼트, 그리고 와셔'라고 붙여야 한다고 했다. 일리가 있었다. 얇고 평평한 강철 고리인 와셔는 볼트를 설치할 때 필수로 들어간다. 연결하려는 강철 부재와 너터 사이에 끼우면 너트가 꽉 무는 힘을 분산하는 역할을 한다. 와셔 없이 너트를 조이면 빔이나 기둥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면서 약해질 수 있다. 오마르에 따르면 와셔는 말하는 다람쥐 캐릭터 앨빈과 다람쥐의 관계만큼이나 볼트에 중요하다. 즉 어느 하나 없이는 다른 쪽이 작동하지 않는다(심사숙고 끝에 책 제목은 바구지 않기로 했다. '너트와 볼트' 그리고 와셔'라는 제목이 그다지 와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샤드의 첨탑 '더스파이어'를 연결하는 데 사용된 볼트는 매우 특별한 기술적 문제를 야기했다. 스파이어에 불어오는 돌풍은 강철 프레임을 통해 주탑의 콘크리트 골조로 전달된다. 프레임은 뼈대와 같아서 건물이 튼튼하게 서 있게 해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골조 사이를 연결하는 조인트다. 볼트와 용접으로 이뤄진 복잡한 구조가 빔과 기둥을 결합해 건물을 높이 떠받치고 있다. 스파이어는 비바람에 노출돼 있으면서 그 구조가 전망대 관람객에게 보이기 때문에 볼트는 바람으 힘을 견딜 정도로 튼튼하고 날씨에 의한 마모를 견딜 만큼 내구성도 강해야 하며 공중에 설치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야 했다. 

이 일에 들인 노력을 감안하면 내가 더 샤드를 방문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헌든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못에서 영감을 받은, 스파이어를 고정하고 있는 볼트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본다(오마르도 나랑 똑같이 한단다). 이 볼트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튼튼하고 아름답고 세심하게 설치된 공학적 작품으로, 하나하나가 내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다. 

 

2장

 

바퀴(Wheel)

구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알람식계가 울린다. 침대에서 몸을 뒤척여 알람을 끈 뒤 시간을 확인한다. 터벅터벅 화장실ㄹ로 가서 수도꼭지를 열고 전동 칫솔 버튼을 켜서 양치질을 한다. 씻고 옷을 입은 뒤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 냄비에 붓고 오트밀을 휘젖는다. 오늘은 믹서리로 만든 홈메이드 스무디를 먹는 날이기도 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문손잡이를 돌려 집에서 나와 기차에 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하는 평범한 아침 모습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매일 아침 마주치는 사물들이 얼마나 많이 회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지 주목해보자. 이동하는 차량부터 볼텐 끝에 있는 구까지, 크레인으로 짐을 들어올리는 도르래부터 우리의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는 인공위성을 안정시키는  자이로스코프까지 종일 계속된다. 사람들에게 역대 가장 뛰어나고,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오래 지속된 발명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여러분도 골라보시라) 대부분 바퀴를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싶어도 바퀴가 매우 표준적인 답변이기 때문이다. 

바퀴는 어무나 친숙해서 바퀴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몇 가지 놀라운 점이 숨겨져 있다. 우선 바퀴가 퇴고의 발명품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인류의 이동성에 대한 세상을 바꾼 영향력 때문이지만 사실 바퀴는 사라이 이동할 목적으로 발명되지 않았다. 애초 목적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사람들은 바퀴를 보통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 즉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동그란 무언가로 생각하낟. '바퀴를 다시 발명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난비하지 말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생겨났을 정도다.(역설적이게도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변호사가 '순환형 교통 편의장치'에 대한 혁신 특허를 받는 데 성공했다. 그는 바퀴를 제발명함으로써 기존 시스템의 결함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5000년 동안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고, 그동안 인류는 계속해서 바퀴를 '재발명'해왔다. 바퀴의 형태를 여러모로 활용했고 바퀴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바퀴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재발명이다.

인류는 자연에서 영감ㅇ르 받아 날개 달리 비행기, 벨크로, 수중 음파 탐지기 등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다. 반면에 바퀴는 인류의 업적이다. 아르마딜로는 회전초처럼 몸을 공 모양으로 말아서 구르고 쇠똥구리는 똥을 동그랗게 만들어 쉽게 밀지만, 회전하는 물체가 회전하지 않는 물제와 상호작용해서 장치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자연계에 전례가 없다. 이건 진짝 ...혁신이다. 

어는 날 내가 스튜디오에서 만든, 형체가 다 허물어진 점토 덩어리는 인류의 업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노력의 결과물이 모든 면에서 너무나 못생겼다고 조롱하는 듯 계속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회전하는 바퀴 위에 점토를 던지고는 손으로 모양을 다듬고 있던 터였다. 단 12초 만에 도예가로서 기술을 더 발달시켜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기원전 29000년부터 점토로 예술품을 만들어 왔다. 현대의 높다란 건물을 지을 기초 재료로는 좋은 선택이 아닐 수 있지만, 그 유연성 덕분에 인류 조상들이 뭘 만들기에는 완벽했다. 초기에 인류는 진흙 그릇을 맨 처음부터 손으로 다 만들었다. 그 뒤에는 코일링 기법을 개발했다. 가래떡처럼 길게 뽐은 점토를 나선형으로 둥글게 겹겹이 쌓아올린 뒤 손가락으로 그릇 벽면을 매만져 완성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무척 오래 걸렸고, 인류가 영구적인 정착지를 더 많이 만들고 곡식을 재배하고 저장하고 요리하기 시작하면서 크고 품질이 좋은 그릇을 더 많이 더 빨리 만드는 방법이 필요했다.

바퀴가 처음 발명된 건 도자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바퀴는 기원전 39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났다. 도공이 만든 그 바퀴는 구운 점토나 나무로 만든 무겁고 커다란 원반이었다. 위 표면은 평평했지만 아리 표면에는 불룩한 곳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꼭대기가 구부러진 고정된 나무나 돌 조각 위에 놓았다. 도공들은 손으로 위쪽 원반을 회전시켰을 거고, 원반의 무게를 고려하면 얼마 동안 계속 돌아갔을 것이다. 

한동안은 그릇을 계속 코일링 기업으로 만들었지만, 바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훨씬 더 일정한 모양으로 매끄럽고 빠르게 그릇을 만들 수 있었다. 나중에 바퀴를 돌리는 발 페달이 등장하자 도공들은 자유로워진 손으로 점토 모양을 형성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일관된 회전운동 덕분에 내가 했던 것처럼 점토 덩어리를 회전 원반 중앙에 놓고 성형하는 기술이 나왔다. 나와 달리 숙련된 장인들은 표현이 매끄러운 항아리를 무척 빠르게 만들 수 있었고, 점점 늘어나는 정창민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공들은 최초로 한 점을 고정해놓고 회전하는 운동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바퀴를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선 발명품으로 여기곤 하지만(고인돌 가족 애니메이션이 주인공인 프레드 플린스톤과 그의 석기시대 자동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바퀴를 더올리기 훨씬 전부터 보석, 와인, 배, 악기를 만들고 있었다(전부 꽤 훌륭한 공학적 업적이다)

 

원형운동을 이용해 앞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비약적인 상상력이었다. 누군가는 정말로 바퀴를 재발명해야 했다. 최소한 바퀴를 활용하는 방식만큼은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진 도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명품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한다. 예를 들어 인류는 자연적으로 날카로운 바위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도구로 바위를 깍기 시작했고, 점차 돌 조각을 손잡이나 기다란 막대나 화살대 등에 부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퀴와 축을 사용하는 기본 형태에 도달하는 데는 이런 진화 과정이 없다. 작동했거나 안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걸 발명한 사람들은 분명 원반을 조각하기 위해 굵은 나무 기둥 한가운데서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고급 목공 기술과 비교적 평평한 육지를 가로질러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자 하는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물론 어떤 발명품은 필요에 앞서 먼저 나오기도 한다). 손재주, 지형, 기술이라는 이상적인 조합을 제외하고도 정말 혁신적인 생각이 필요했다. 바퀴를 실용적인 물건으로 만들어주는 회전축은 그 자체로 복잡한 엔지이너링 부품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축은 바퀴를 통과하는 막대다. 두 가지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다. 축을 차에 고정하고 바퀴가 그 주위를 돌게 하거나, 축과 바퀴를 함께 고정하고 둘 다 회전시키는 것이다. 축은 차 무게를 지탱할 만큼 충분히 튼튼해야 한다. 또 시스템이 회전할 수 있을 만큼 느슨하면서도 동시에 덜컹거리지 않을 만큼 꼭 맞게 장착돼야 한다. 축이 너무 굵으면 마찰이 증가해 시스템의 속도가 느겨지고 마모로 인해 수명이 짧아진다. 또 바퀴와 축이 접촉하는 표면은 매끄럽고 거의 완벽한 곡면이어야 하는데, 끝 같은 금속 도구가 인반화될 때까지 정밀한 목공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모든 이유로 엔지이니로서 전문가적 의견을 말하자면, 앞서 이야기한 프레드 플린스통의 차축은 절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발명은 무척 복잡하기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시스템이 여러 번 독립적으로 발명됐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리고 바퀴와 축이 일단 발명된 뒤 유라시아 대륙을 매우 빠르게 가로질러 전파됐을 거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장점은 명확했다. 하지만 동물은 금세 지치기 때문에 먹이와 보살핌이 필요했고, 썰매는 땅이 평평하고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지는 곳에서는 쓸 만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썰매 다리와 지면 사이에 생기는 마찰력을 극복해야 해서 번거로웠다. 썰매가 도처에 널려 있었지만, 바퀴가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바퀴가 빠르게 퍼졌기 때문에 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제4천년기 중반 메소포타미아 우르크에서 바퀴 달린 수레가 그려진 점토판을 발견했는데, 이는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노치체에서 발견된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묘사된 조자기 항아라의 연대와 거의 같은 시기다. 도나우강과 북캅카스 주변 지역에서는 수레 모양 점토가 발굴되었다. 바퀴 달린 장난감은 아메리카 대륙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에 등장했는데, 이는 바퀴가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발명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실제 크기의 바퀴 달린 운송수단의 증거는 없다. 아마도 주요 문명이 산(아스텍 발상지)과 가파른 산맥(잉카)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위치해 물자를 수송하는 데 동물이 더 유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퀴 달린 운동수단의 물리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찾으려면 러시아의 북캄카스 지역에 있는 스카브로폴 동쪽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서 고고학자들은 수만 개의 의식용 무덤이 있는 유적지를 발견했다. 기원전 제5천년기에 지역 주민들이 무덤을 만들었고, 기원전 제4천년기 암나야 공동체가 다시 사용하면서 무덤을 더 만들었다. 무덤 중 하나에 흥미로운 것이 묻혀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좁고 깊은 지하묘지 형태의 수직통로 바닥에서 사륜수레에 앉은 자세로 묻힌 남자의 해골을 발굴했다. 비로 수레는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기원전 3356~3033년의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초기 형태의 운송수단으로 추정되었다.

바퀴는 견고했고, 각 바퀴는 참나무 판자 3개를 목재 핀이나 말뚝(앞서 말한 나무못과 마찬가지로 못이 엔지니어링에서 얼마나 기초적인 역학을 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으로 연결해 만들었다. 단순히 나무 줄기를 동그란 조각으로 잘라 쓸 수 없는 것은 나무에 자연적인 결이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는 더 강하고 어떤 방향으로는 쉽게 쪼개지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쓰면 약한 방향이 더 영향을 받아 바퀴가 변형될 수 있다. 또 암나야족은 동물을 길들인 최초의 민족으로 추정되며, 야마도 동물들이 수레를 끌었을 것이다. 즉 동물 사육 또한 이 발명품에 영향을 미쳤다. 동물이 없었다면 수레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바퀴와 축, 그리고 그걸로 굴러가는 수레는 식략 생산에 변화를 가져왔다. 인류 조상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밭을 터벅터벅 오가며 땅을 경작했다. 이동할 땐 동물이나 자신의 두발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는 황소나 말, 수레의 도움으로 한 가족이 같은 땅에서 농작물을 대량 수확하고, 상하지 전에 먼 거리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바퀴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자유를 주었다. 이전에 얌나야족은 물가 주변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제 그들은 탐험가가 되었다. 이 낯선 탈것에 올라탄 얌나야족은 그들이 마주친 기존 정착민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자신들의 영역을 광활한 초원과 그 너머로 확장했다. 얌나야족이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나가면서 문화도 퍼져 나갔다. 전 세계의 거의 절반이 얌나야족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유럽조어에서 유래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산스크리트러, 그리스어, 라틴어, 파슈토어, 불가리아어, 영어, 독일어 등이 해당한다. 또 그들은 마나는 사람들에게 동물 가축화와 야금 기술을 전달했다. 심지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유럽에 흑사병을 몰고 왔을 수도 있다. 유전학자들이 얌나야족이 살았던 지역의 사람 치아에서 원인 박테리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얌나야족이 수레를 만들지 않았다면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도공의 바퀴를 옆으로 세워 그릇을 만드는 용도에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용도로 바꾼 것은 첫 번째 재발명에 불과하다. 시야를 넓혀주고 유라시아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꾸게 해준 초기 바퀴들은 견고했지만, 새로운 혁신을 통해 더 가볍고 빠른 것으로 변모했다. 

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언어인 힌디어를 할 줄 아는데, 그 기원이 얌나야족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바퀴의 여정은 내 모국어의 역사와 얽혀 있다. 내가 자란 인도에서 바퀴는 다양한 상징으로 등장했다.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만든 초기 국기의 중심에는 물레인 차르카가 그려져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 아우로빈도 고시, 라빈드라나트 타골, 랄라 라즈파트 라이 등 스와데시 운동 지도자들이 가졌던 야망 중 하나는 영구에 대한 경제적 의존에서 벗어나 인도 사람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이었다. 간디는 자기 옷을 직접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고, 평화적인 시민불복종 행동으로 이를 권했다. 당시 현지에서 옷을 만드는 것은 영국령 인도 제국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간디와 함께 여행하며 자유 투쟁의 역사적인 사건에도 등장했던 물레바퀴는 인도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 인도 국기에는 짚은 주황색과 녹색 줄 사이에 낀 중앙의 흰색 줄 위에 감색 바퀴 차크라가 그려져 있다. 고대 인도의 도상학, 예술, 건축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이 물레바퀴는 기원전 268~232년 인도아대륙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고 아시아 전역에 불교를 전파한 마우리아 왕조의 황제, 아소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견된 수레바퀴와는 달리 차르카(물레)와 차크라에는 둘 다 바퀴살(스포크)이 있다. 바퀴를 변형한 통찰력 있는 디자인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말 유라시아 대초원 북부의 신타슈타족과 인도-이란족도 이와 같은 바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제2천년기 스포크 바퀴는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과 미탄니(오늘날의 시리아와 튀르키예) 기록에서 발견된다. 이 바퀴들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중앙에 허브가 있고 여러 개의 바퀴살이 원형 테두리를 향해 뻗어 있다(아소카 차크라에는 각각 하루 시간대를 의미하는 24개의 바퀴살이 있어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상징한다).

힌두교의 어떤 신들은 자신의 '바하나' 수레를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태양의 신 수리아가 타는 건 보통 말 일곱 마리가 끄는 스포크 바퀴가 달린 전차다. 신들조차 스포크 바퀴를 더 좋아햇을 거라고 여긴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속이 꽉 차 있는 이전의 견고한 바퀴에 비해 어쨌든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비록 만들기는 더 복잡했지만 스포크 바퀴를 단 마차는 덜컹거리는 단단한 바퀴를 단 마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스포크 바퀴가 달린 전차로 경주를 했고 그리스인들은 그걸 전쟁에 사용했다.

바퀴살은 분명 개선됐지만, 또 다른 엔지니어링 혁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단점이 있었다. 바퀴살을 여러 개의 나뭇조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이리저리 거칠게 부딪친 뒤에는 쉽게 부러졌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철기시대(기원전 1200~600년)에 금속 가공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바퀴 테두리 바깥쪽에 남작한 금속 테를 더해 내구성을 높였다. 영리하게도 철제 '타이어' 치수를 금속이 아직 뜨거운 상태에서 바퀴 둘레의 길이와 일치하도록 측정했다. 그러고 나서 철제 타이어가 식으면 금속이 수축했기 때문이다. 바퀴 테두리가 안쪽으로 약간 찌그러지면서 나무로 만든 바퀴살이 중심부로 단단하게 밀려들어갔고, 바퀴를 더 튼튼하게 모래 쓸 수 있었다.

자, 이제 바퀴를 더 강하고 빠르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다음 발전은 무엇일까? 또 다른 급진적인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기까지는 1000년이 걸렸다. 


1800년대 초 항공공학자 조지 케일리는 비행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착륙할 때 생기는 큰 반동력을 흡수할 강한 바퀴가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가벼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를 공중으로 띄우는 첫 단계부터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었다. 원래는 무거운 운송수단의 압축력을 건딜 수 잇을 정도로 튼튼한 나무를 사용해 바퀴살과 테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케일이는 금속을 갖고 실험하기 시작햇고, 힘이 전달되는 방식을 바꿨다.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소재로 만든 바퀴살은 외려 쉽게 망가지곤 했는데, 케일리는 바퀴 중심부와 테두리 사이에 얇은 금속 와이어를 넣어서 힘이 가해지면 늘어나게 한 것이다. 이 와이어에 당기는 힘, 즉 인장력이 걸리면서 시스템이 고정되었다. 그가 1808녕에 개발한 이 디자인은 이전 바퀴보다 훨씬 가벼웠고, 글 ㄹ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고자 했던 경량 항공기는 진정 이때부터 폭발적으로 개뱔되기 시작했다. 

나무 바퀴와 와이어 바퀴의 ?또 다른 차이점은 옆모습이다. 이에따라 힘이 가히질 때 재료가 다르게 반응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두껍고 뻣뻣한 종이로 오래낸 동그라미를 수직으로 세워 고정했다고 상상해보자.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콕 누르면 일단은 모양이 잘 유지되겠지만, 힘을 더 세게 가하면 안으로 휘어진다. 만약 훨씬 얇은 종이로 오려낸 동그라미로 똑같이 한다면 훨씬 더 쉽게 구겨질 것이다. 하지만 이 종이 동그라미에서 부채꼴을 잘라낸 뒤 가장자리를 테이프로 이어 붙여 얆은 원뿔 모양으로 만들면 구조가 훨씬 더 안정되면 변형되지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나무 바퀴가 위에서 언급한, 두껍고 뻣뻣한 종이로 오려낸 동그라미 예시처럼 평평하게 만들어졌지만, 영국의 차체 제작사들은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갈때나 말이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 때 바퀴가 더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록 바퀴의 안쪽 면을 '접시 모양'으로 살짝 운푹하게 만들곤 했다. 이렇게 한쪽 면을 접시 모양으로 만든 바퀴는 나무처럼 압축력에 강한 재료로 만든 경우, 그리고 축 하나에 바퀴 두 개를 달아 움직임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에만 효과적이었다. 이 정도면 기발했지만, 와이어 바퀴에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끈 6개를 나란히 모아 한쪽 끝을 매듭지어서 중앙 허브를 만든 다음, 끈이 다른 쪽 끝을 하나씩 당겨 뻣뻣한 고리 테두리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바퀴 중앙을 꾹 누르면 끈이 널어나면서 허머가 옆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는 바퀴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한쪽 면만 접시 모양이라면, 접시 안쪽을 누르는 경우에 끈이 인장력에 강하기 때문에 바퀴가 변형되기 어렵지만 접시 바깥쪽을 누르면 허브가 또 쉽게 움직여버린다는 문제가 셍긴다. 이래서 쳘제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이중 접시 모양이 고안되었다. 현대의 자전거 바퀴를 자세히 살펴보면 허브로부터 두 세터의 와이어가 뻗어 나와 테두리에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장력이 유지되는 이중 접시 모양의 와이어 바퀴는 바퀴의 진화에서 무척 중요한 단계였다. 강하고 유연하고(거칠게 떠밀려도 쉽게 손상되지 않았다) 가벼웠다. 그러나 그때가지도 바퀴는 쌍으로 나란히 옆에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와이어 바퀴가 발병되고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아마도 바퀴살 이후 가장 중요한 혁신, 즉 한쪽 바퀴를 다른 쪽 바퀴 앞에 놓는 디자인을 누군가가 떠올렸다. 라우프머신(독일어로 '달리는 기계'라는 뜻)을 타는 건 분명 짜증나고 피곤한 경험이었을 거다. 1817년 독일에서 카를 폰 드라이스 남작이 발명했는데, 나무 바퀴와 프레임만 있고 페달이 없어서 석기시대 차를 탄 프레드 플린스톤이 그랬듯이 자기 다리를 사용해서 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라우프머신은 사람들이 상당한 거리를 이동할 때 더 이상 동물에 의존하지 않게 해준 쳣 운송 수단이었고, 이는 교통수단의 큰 진전이었다. 수많은 발명가들과 마찬가지로 드라이스 남작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얼론은 그의 디자인을 어린이용 장난감 말과 비교하면서 조롱했고, 도로 사정도 열악해서 라우프머신을 탄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도로 위로 뛰어드는 라우프머신 때문에 보행자들은 불만이 많았고, 라우프머신이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면서 밀라노, 런던, 뉴욕, 콜카타 같은 복잡한 도로들에서는 라우프머신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 영국의 차체 제작사인 데니스 존슨은 드라이스의 디자인을 보고 재빠르게 영국에서 특허를 냈다. 그는 자기 기계를 벨로시페드라고 부렀고, 안쪽을 철제로 보강한 더 크고 안정적인 목재 바퀴를 다는 등 몇 가지 사항을 개선했다. 그는 또한 여성을 위해 프레임 높이를 낮출 수 있는 모델도 고안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페달과 브레이크가 추가됐고, 마침내 와이어 바퀴가 표준이 되었다. 1888년 수의학자 존 보이드 던롭은 아들의 세발자전거 바퀴에 부드러운 튜브를 감아 아들이 자전거를 좀 더 편안하게 탈 수 있게 만들었고, 이것이 공기 주입 타이어로 이어지면서 자전거는 더 안전하고 운전하기 쉽고 편안한 수단이 되었다.자전거는 사람들의 일상을 크게 바꿨다. 말이 끄는 마차나 초기 자동차를 살 여유가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장거리 이동을 위한 개인 이동 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된 시대였다. 간호사와 성직자들은 시골을 방문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고, 우체부는 19세기 말까지 모든 가정에 매일 우편물을 배달했다. 자전거에 걸터 앉은 여성들은 심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1896년 <<자전거 타는 여성을 위한 핸드북>>을 쓴 릴리언 캠벨 데이비슨은 "자전거를 탄 여성은 성적 불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고 회상했다. 그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는 자유로운 기술이었다. 이 시기 여성 사이클링의 대표적인 옹호자였던 N.G. 베이컨은 "자전거를 통해 우리는 완벽하게 여성적인 (...) 방식으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는 베이컨이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은 측면에서 사실인 것 같다. 생물학자 스키브 존스는 자전거의 발명을 최근 인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는다. 자전거를 소유할 경우 이동 가능한 지리적 영역이 극적으로 넓어지고, 결과적으로 잠재적인 결혼 상대자 수가 증가해 유전자풀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은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사회 규범상 엔지니어가 되는 것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도전적인 일일 수 있다. 내가 느끼기에 엔지니어를 타깃으로 하는 패션 대부분은 정장 차림의 남성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다(포켓 행커치프와 넥타이...그것도 엄청 많다). 그래서 언젠가 아주 괴짜 같은 귀걸이를 발견하고는 엄청 흥분한 적이 있었다. 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귀걸이는 레이저를 이용해 아주 얇은 겹겹의 합판을 다양한 크기의 바퀴 4개롤 잘라내어 만든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바퀴는 비취색이고,검은색과 흰색 바퀴가 겹쳐져 있다. 하지만 이 바퀴들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부드러운 테두리 대신 가장자리가 톱니 보양이다.

이 톱니 모양들은 서로 완벽하게 맞물린다. 손으로 바퀴 하나를 돌리면 나머지 바퀴들도 회전한다. 나는 이 귀걸이를 정말 좋아한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 열정을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런 바퀴 배열, 그러니까 기어라고 부르는 바퀴의 화신이 어떻게 움직임과 힘을 전달하는지 아름답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계부터 자동차, 깡통따개, 크레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기계 안에는 이런 작은 경이로움이 숨겨져 있다. 기어가 없는 현대식 기계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한다. 

기어는 이빨(톱니)을 가진 바퀴를 뜻한다. 종종 기어를 톱니바퀴나 톱니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다소 혼란스럽겠지만 사실 이건 이빨 자체를 부르는 이름이다. 기어가 이토록 유용한 건 바퀴 2개(또는 그 이상)를 나란히 놓아 톱니가 맞물리게 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전 방향의 변경, 회전 속도의 변경, 기어 가장자리에 작용하는 힘의 변경 등이다.

깡통따개는 아주 흥미로운 작은 도구다. 따개에는 2개의 분리된 암(arm)이 있어서, 깡통을 꽉 물었다가 나중엔 서로 떨어지면서 깡통을 놔준다. 칼날은 테두리를 따라 돌아야 한다. 여기서 톱니바퀴는 다음 목표를 달성하게 해준다. 깡통따개의 두 암에는 각각 기어가 하나씩 달려 있고, 이 두 기어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있어야 손잡이로 기어 하나를 구동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 돌아가면서 전체 메커니즘이 하나로 작동한다.

자세히 보면 손잡이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반대쪽 암으 칼날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기어는 크기가 같기 때문에 같은 빠르기로 회전하여 동시에 한 바퀴를 돈다. 이제 깡통따개를 분해해 기어를 나란히 놓았는데, 이전엔 오른쪽 기어가 왼쪽 기어보다 더 크고 둘레 길이가 두 배, 톱니 수가 두 배 더 많다고 가정해보자, 두 기어의 바깥쪽 가장자리가 맞물려 있어서 같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큰 기어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작은 기어는 두 바퀴를 돈다. 이는 또한 기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변화시킨다. 작은 기어는 큰 기어보다 테두리에 작용하는 힘이 더 크다. 이는 잘 알려진 몇몇 기계를 설계할 때 적용되는 원리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탈 때 처음으로 기어를 제어하는 경험ㅇ르 하게 된다. 나는 사이클 선수는 아니지만, 능숙하게 기어를 바꾸고 속력을 조절하면서 구부러진 길과 비탈길을 내달리는 프로 선수들을 항상 경외가 담긴 눈으로 지켜봐왔다. 자전거 페달은 체인링이라고 부르는 기어에 부착돼 있으며, 이 기어는 체인을 통해 뒷바퀴에 있는 다양한 크기의 기어 세트와 연결된다. 현대식 자전거는 보통 앞뽁에 최대 3개의 기어가 있고, 뒤쪽에 8~11개의 기어가 있는데, 일단은 간단하게 톱니 48개를 가진 기어가 앞쪽에 딱 하나만 있다고 상상해보자, 평평한 지표면에서 자전걸르 타는 건 쉬워서, 뒤에 있는 기어 중 작은 걸 사용해도 된다. 예컨대 톱니가 12개 잇는 기어라고 해보자, 페달을 한번 돌릴 때마다 앞쪽의 큰 기어가 뒤쪽의 작은 기어(그리고 뒷바퀴)를 네 배(48을 12로 나눈 값) 회전시키므로, 페달을 한번 돌릴 때마다 자전거는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다. 반면 중력 반대 방향으로 무게를 들어올리면서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는 뒤쪽의 작은 기어를 돌리는 데 필요한 힘을 사람 다리로만 감당하기는 무리다. 뒷쪽 기어를 더 큰 것으로 바꿔야 한다(톱니가 48개 있는 기어라고 하자. 힘이 줄면서 페달을 돌리기는 쉬워지지만, 이동 거리는 더 짧아진다. 이제 페달을 한번 돌릴 때마다 뒷바퀴는 딱 한 바퀴만 회전한다. 

기어를 사용하면 힘의 방향과 크기를 바꿀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엔지니어들은 이를 활용해 다양한 기술을 개발했다. 증기기관차는 기어 시스템을 통해 엔진에서 연료를 태워 객차 바퀴를 돌릴 수 있다. 시계에서는 전부 동일한 에너지원으로 구동하는 시로 다른 크기의 기어가 눈금판의 초침, 분친, 시침을 각기 다른 빠르기로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에 시간을 더 정확히 알려준다. 차의 기어를 바꿔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고 휘발유를 덜 쓰면서 더 빠른 속력으로 달릴 수 있으며 통제력을 잃고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공장에는 기어를 이용해 온갖 종류의 물건을 만드는 건물만큼 커다란 제조 라인이 있다. 크고 복잡한 물건 또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작고 복잡한 물건을 기어가 작동시킨다는 사실에 감탄하기 쉽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어의 예시는 믹서기, 세탁기, 식기세척기 등 일상적인 가전제푼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롤렉스 시계난 경주용 자전거에 비해 덜 화려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이것들이 사회 전반, 특히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내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893년 시카고 산업박람회에서 새로운 발명품 하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수많은 크랭크, 회전 기어, 그리고 한쪽에 바퀴가 달린 커다란 직사각형의 나무 상자였는데, 그 안에 들어찬 더러운 접시들이 사라졌다가 몇 분 뒤에 손으로 설겆이를 한 것처럼 깨끗해져서 다시 나타났다. 박람회 심사위원들은 '최고의 기계적 구조, 내구성, 그리고 해당 작업에 대한 적합성'을 인정해 최고상을 수여했다. 전시물 중 여성이 설계한 유일한 기계였다.

조지핀 코크런은 1839년 오하이오주 애슈터뷸라 카운티의 엔지니어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존 피치는 미국 최초의 특허를 받은 증기선을 발명했고, 아버지 존 개리스는 오하이오강을 따라 수많은 제분소를 지은 토목 기사였다. 조지핀이 아니라 조지프로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가족의 발자취를 따라 공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때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제한돼 있었다. 열아홉 살이 됐을 때 윌리엄 코크런과 결혼해 일리노이주 셸비빌에 있는 저택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사교계 명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코크런 가족은 성대한 저녁 파티를 여는 걸 즐겼고, 조지핀은 1600년대 산으로 추정되는 소중한 가보 그릇들을 종종 선보였다. 일하는 사람들이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깨면 조지핀은 무척 속상해했다. 그릇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직접 설거지를 하기도 했지만, 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학자인 가족들을 관찰하던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인지 그녀는 더 크게 생각할 수 있었고, '아무도 설거지 기계를 발명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해내겠다'고 마음먹고 설겆이 기계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1983년, 이 일을 한창 진행하던 중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조지핀은 상당한 빚을 떠안았고, 가진 돈이 아주 적었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아이디어와 스케치를 실제 사업으로 빠르게 전환해야만 했다. 복잡한 기계 공학에 대해 전문 기술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훗날 "남자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시도하고 실패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일을 내 방식대로 하도록 만들 수가 없었다"라며 그들의 도움에 조절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조지핀은 1885년에 첫 번째 특허를 출원했고, 집 뒤에 있는 헛간에서 식기세척기의 첫 번째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조지 버터스라는 젊은 정비공을 고용했다.

남자들, 그러니까 그 시대에는 설거지와 별로 관련이 없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조지핀 이전에도 식기세척기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그들의 디자인은 결국 파손으로 이어졌다. 수세미로 그릇을 닦고, 사람이 직접 끊는 물을 끼얹어줘야 했다. 반면 조지핀은 그릇을 어떻게 닦고 보호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또 진짜 실용적이려면 기계 조작을 최대한 단순화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델 내부에서부터 시작해 그릇의 치수를 재고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안전하게 고정해줄 특정 구획이 있는 철망을 설계했다. 기어 배열이 이 절망을 천천히 회전시켜 모든 그릇이 세제와 물줄기에 노출되도록 했는데, 수세미 대신 펌프로 퍼올린 물을 사용해 세척하는 최초의 기계였다. 각 펌프(물과 세제용)는 레버로 작동했고, 레버는 다양한 기어와 맞물려 작동했다(그녀의 '기어'는 원형이 아닌 톱니 모양의 원호였고, 두 쌍이 있었다). 초기 설정에서 사용자가 레버를 앞뒤로 조작하면, 첫 번째 탱크에서 세제 거품이 그릇 위로 쏟아졌다. 그런 다음 레버를 두 번째 위치로 조정하면 뜨거운 물을 가압하는 펌프가 작동해 접시들을 깨끗하게 헹궜다. 이 모든 과정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886년 12월 28일, 조지핀 코크런은 식기세척기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처음에는 기계의 가격과 크기, 사용 시 필요한 온수의 양 때문에 판매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레스토랑과 호텔에 집중했고, 친구 소개로 시카고의 유명 호텔인 파머하우스로부터 첫 주문을 받았다. 그 뒤 다른 대형 호텔에도 영업을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그만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여성이 남성의 동행 없이 외출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조지핀은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가야만 했다. 아버지나 남편 없이는 어디에도 가본 적이 없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호텔 로비가 1마일은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로비를 가로질러 가서 담당자를 만났고, 800달러의 주문을 받고 떠났다고.

조지핀은 이제 사업가였지만, 여성에게 투자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본을 모으느라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나기로 결심했고,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산업 박람회에서 드디어 둘파구를 마련했다. 박람회에 전시한 개리스 - 코크런 식기세척기 회사 광고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모든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호텔 직원들은 이 기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간단하고 쉽게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한 시간 안에 사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리노이주와 미국의 인근 주들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멕시코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더 큰 모델은 단 2분 만에 240개의 그릇을 씻어 말릴 수 있었고, 고객층은 병원과 대학까지 확장되었다.

 

조지핀은 디자인을 계속 발전시켰고, 물이 기계적으로 펌핑되며 선반이 앞뒤로 움직이는 전동식 모델을 만들었다. 이후 모델에서는 바퀴에서 영감을 받은 회전식 선반이 장착됐고, 호스를 통해 싱크대로 물을 배내는 기능도 추가되었다. 일흔센 살이 되는 1912년에, 한때는 호텔 로비를 혼자 걸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녀는 뉴욕으로 건너가 일류 호텔과 쇼핑센터에 여러 대의 기계를 판매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고, 사업체는 호바트 제조회사에 인수되어 현재는 월풀 그룹 내 키친에이드 사업주에 합병되었다. 키친에이드는 1940년대에 최초로 가정용 식기세턱기를 성공적으로 출시해 마침내 조지핀이 의도했던 고객들에게 기계를 판매했다.

오늘날 식기세척기는 선구적인 개리스 - 코크런 기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펌프로 퍼올린 뜨거운 물을 사용해 그릇을 세척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바쿠가 등장하는데, 회전하는 기계 암이 잔디밭의 스프링쿨러 시스템처럼 그릇 위에 뜨거운 물을 뿌려준다. 천재적인 공학자였던 조지핀이 이미 예견했던 혁신으로, 그녀는 세상을 뜨기 직전에 이와 유사한 디자인을 고안해냈다. 

2006년 조지핀 코크런은 사후에 미국국립발명가 명예의 전장에 오름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발명품을 인정받았다. 식기세척기, 청소기, 믹서기, 세탁기와 같은 발명품들은 수백만 명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것들을 모두 기어, 바퀴, 도르래와 같은 회전하는 부품들을 기반으로 하며, 집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만들어진다. 이런 장치들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 여성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기계가 그런 일을 대신해주게 되면서 여성들은 시간이라는 엄청나게 소중한 것을 얻게 되었다. 2009년에 발표된 몬트리올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1900년에 여성들이 집안일을 하는 데 소비한 시간은 주장 평균 58시간이었으나, 1975년에는 18시간으로 줄었다. 물론 가전제품은 임금 인상, 전쟁,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 같은 더 큰 발전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가전제품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트, 자동차, 자전거, 기차에 사용되는 다양한 형태의 바퀴는 육상 운송의 풍경, 그리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설계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중심으로 도시를 설계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바퀴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잘라내자 완전히 새로운 기계가 탄생했다. 바퀴를 도자기 제작용 물레와 같은 방향으로 되돌려 눕힌 뒤 날개를 달아 헬리콥터를 만들었고, 항공기 엔진은 경이로운 회전 바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세상을 훨씬 접근하기 쉽고 역동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진보는 바퀴 자체에 대한 재조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항법 분야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돌려야 했다.

바퀴뿐만 아니라축도 회전하게 만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렇게 하면 극한 환경에서 내 위치를 찾을 수 있고 아주 먼 곳까지 탐험할 수도 있다. 이 기적의 기계가 바로 자이로스코프다. 자이로스코프의 중심에는 회전하는 바퀴(원판)가 있는데, 이 바퀴는 여러 개의 회전하는 원형의 고리가 있는 프레임 안에 매달려 있어서 바퀴가 원하는 방향으로 회전할 수 있다. 이 이스템이 안정성을 만드는 데 유용한 이유는 움직이는 물체의 특수한 움직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에 따르면, 어떤 물체가 균일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어떤 외부의 힘이 가해져 변화시키지 않는 한 물체는 계속 그렇게 움직인다. 뉴턴이 묘사한 움직이는 물체는 물체의 질량, 속력, 이동 방향의 측정치인 운동량이 있다. 즉 테이블을 가로 질러 굴러가는 당구공은 가장자리에 닿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이 운동량은 '보존'되는데, 이는 시스템의 총 운동량이 항상 동일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같은 속력으로 서로를 향해 똑바로 굴러가는 2개의 당구공을 상상해보자. 질량과 속력은 같지만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의 총 운동량은 0이다. 완전 충돌 이후 당구공은 동일한 속력으로 서로 밀어지기 시작하며, 이때도 총 운동량은 여전히 0이다. 당구공은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량인 선형 운동량의 한 예이지만, 이 보존 원리는 각운동량이러고 부르는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량에도 적용된다.뉴턴은 또한 모든 작용에는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고 했다. 내가 만약 벽을 밀면 벽도 나를 밀어낸다. 회전력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이를 '토크'라고 한다. 이 모든 과학을 종합하면 회전하는 물체에는 운동량이 있으며, 만약 힘을 가함으로써 회전하는 물체의 방향을 바꾸려고 시도하면 물체도 반대로 밀어내며, 시스템의 총 각운동량은 항상 똑같이 유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이로스코프의 기본 개념은 플이이휠이라고 부르는 회전자를 특정 방향으로 회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각운동량이 보존돼야 하기 때문에 자이로스코프의 프레임이 주위를 회전하더라도 회전자는 원래 회전 방향을 유지한다. 주변 프레임이 운직여도 회전축은 짐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객기에는 음료 전용인 작은 홀더가 있는데(이코노믹석 한정이다. 다른 좌석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앞좌석 등받이에 테이블이 원래대로 접혀 있는 상태에서 이 홀더를 내릴 수 있다. 홀더 안에는 링이 있으며, 두 점에 고정돼 있어서 회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홀더의 각도에 관계없이 컵을 그 안에 놓고 지면과 수직이 되도록 조절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집벌이다. 자이로스코프의 프레임은 2개의 짐벌로 구성된다. 회전축은 제1짐벌의 앙쪽 끝에 부착돼 있고, 이 짐벌은 다시 제2짐벌에도 양끝점에 부착돼 있지만 회전축과 90도 각돌르 이루고 있다. 

자이로스코프는 여행과 탐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자이로스코프가 발명되기 전까지 항해사들은 지구 자기장으로 작동하는 자기 나침반에 의존했다. 하지만 지구의 자기장은 고정돼 있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 나침반은 절대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자기장의 '북쪽'이 지구 자전으로 측정할 수 있는 북쪽과 항상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선원들이 처음으로 쇠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깨달았듯, 금속이 나침반을 방해하기도 했다. 자이로스코프 나침반은 이런 문제를 방지한다. 짐벌이 회전하는 동안에도 회전자는 축의 방향을 유지한다. 프레임에 대한 축의 위치를 비교하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비행기를 고속으로 복잡하게 급선회하는 전투기 조종사도 자이로스코프 덕분에 비행기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자이로스코프를 반대로 쓸 수도 있다. 회전자를 신나게 회전시키는 대신, 회전자의 축 방향을 억지로 바꿀 수 있다. 아이들의 장닌감 팽이를 보자. 회전하는 팽이의 각운동량은 축을 통해 위쪽을 향한다. 만약 다란히 같은 속력으로 회전하는 2개의 동일한 팽이가 있다면, 각운동량은 합쳐서 두 배다(2개의 당구공이 같은 속력, 같은 방향으로 평행선상에 구르는 것고 비슷하다). 만약 우주라서 팽이가 더 있는데 하나는 똑바로 서 있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거꾸로 서 있다면, 시스템의 총 각운동량은 0이다(이건 2개의 당구공이 서로를 향해 똑바로 굴러가는 것에 해당한다).

놀이방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가보자. 동일한 회전자 4개가 짐벌에 장창돼 있는, 즉 4개의 자이로스코프가 있는 구조를 상상해보자. 하지만 이번에는 짐벌이 회전자 주위를 자유롭게 도는 대신 짐벌을 제어해서 회전자의 축이 가리키는 방향을 제어할 수 있다. 각 회전자의 무게는 98킬로그램이고, 지름은 약 1미터이며, 분당 6600번 회전한다. 즉 상대적으로 크고 매우 빠르다. 이 회전자들은 훨씬 더 큰 구조물 안에 위치해 있다. 보통 회전자는 통 각운동량이 0이 되도록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에 외부 구조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짐벌을 조정하고 회전자를 움직여 총 운동량 값이 증가하도록 만들 수 있으며,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총 운동량이 최대값이 된다. 각운동량 보존 원리에 따르면, 처음에는 운동량이 0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자이로스코프에서 억지로 순 운동량을 얻었기 때문에 자이로스코프는 뒤로 밀려나게 되고, 결국 자이로스코프가 속해 있는 외부의 더 큰 구조물이 회전해 이 운동량을 0으로 상쇄하게 된다. 이 큰 구조물이 바로 국제우주정거장(ISS)이다.

우주정거장은 인류가 협력해 만들어낸 결과물 중 분명 가장 인상적인 예시일 것이다. 유럽, 일본, 캐나다, 러시아, 미국의 여러 팀들이 수십 년 동안 함께 이 우주정거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로써 전 세계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중력 없는 공간에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표로부터 408킬로미터 상공에서 모듈을 점진적으로 접합해 만든 이 정거장은 무게가 41만 9700킬로그램이고 길이가 109미터, 너비 73미터로 미식축구 경기장보다 약간 크다. 우주정거장은 '자세'라고 불리는 매우 구체적인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 궤도는 적도를 기준으로 51도 기울어져 있고, 자세 제어를 완료하는 데 90분이 걸린다. 이 궤도에 지구 인구 90퍼센트 이상이 포함되며, 덕분에 우주정거장은 지구 표면을 관측하는데 유리한 독특한 전망대가 된다. 또 우주정거장은 항상 지구를 향해 같은 면을 보이도록 설계돼 있다. 만약 우주정거장의 같은 면이 항상 태양을 향한다면 극단적인 온도로 가열되고 동싱에 반대쪽은 극단적인 온도로 냉각되면서 주재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주정거장이 지구와 교신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신위성들이 높은 궤도에 있기 때문에 통신을 항상 유지하려면 안테나가 지구로부터 먼 곳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와 SF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 우주에서 일단 물체를 회전하게 되면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물체는 계속 회전한다. 원칙적으로 우주정거장이 궤도에 오르면 영원히 돌 수 있다는 뜻이지만, 우주정거장에 작요하는 작은 힘들이 정거장의 자세에 영향을 미친다. 지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약간의 대기가 있기 때문에 정거장의 움직임에 작은 저항이 생긴다. 주요 동력원인 커다란 조절식 날개에 장착된 태양 전지판은 태양을 향하도록 이리저리 움직이며, 특정 위치에 있으면 작은 공기 저항이 증가한다. 중력 기울기의 미세한 효과도 있다. 지구에서 멀수록 중력의 당기는 힘이 작아지기 때문에 우주정거장 중에서도 지구에 가장 가까운 부분에는 다른 부분보다 약간 더 강한 끌어당김이 가해지므로 미세하게 힘의 불균형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주정거장에는 자세를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며, 자이로스코프가 그 역할을 한다. SF에서 보면 부스터나 추진기를 사용해 방향을 조정한다. 우주정거장에는 예컨대 도킹하는 우주선을 맞이하기 위해 자세를 크게 바꿔야 할 때와 같은 큰 움직임을 위한 추진기가 있지만, 그게 항상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우선 그런 장치들은 귀한 연료를 밀요로 하고 그걸 지구에서 운반해아 하는 데, 비용이 무척 많이 드는 일이다. 게다가 추진기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미묘한 변화가 필요한 경우엔 제거하기가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런 힘이 가해지면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의 미소중력 환경에서 수행하고 있는 극도로 섬세한 실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주정거장에 전력을 공급하는 태양 전지판은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보통 주진기를 가동하려면 태양 전지판을 접어서 잠가야 하는데, 이는 우주정거장 운영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한다. 따라서 구조물을 조금씩 부드럽게 이동시며 조종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제어 모멘트 자이로(CMG)라고 불리는 4개의 지이로스코프를 사용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주정거장은 어느 정도 스스로 비행한다. 즉 컴퓨터와 센서로 구성된 시스템이 우저정거장의 자세를 측정하고 기록하며, CMG를 제어하는 컴퓨터에 정보를 보내 이동이 필요한지, 얼마나 이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 시스템은 매우 민간해서, 대원들이 언제 일어나 정거장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 결과로 시스템 전체의 각운동량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지상에서 우주정거장을 조종하는 팀은 시나리오 시뮬레이션을 실행해 뭔가가 잘못됐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숙지학, 모듈 도킹과 같은 흔치 않은 활동을 계획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들은 우주비행사들이 바쁜 일정을 소화할 수 있도록 우주정거장의 자세를 통제하는 주요 책임을 맡고 있다. 하지만 에를 들어 볼트, 스프링, 자석이 가득한 케이스 내에서 진동이 발생하는 등 CMG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휴스턴에 있는 팀이 수동으로 헤어할 수 있다.

그리고 바퀴는 사소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모든 기술에 영감을 주고 제어한다. 우주비행사들이 박테리아나 곰항이 같은 미생물이 우주의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장시간 우주비행중에 인간이 어떻게 시간을 인지하는지 조사하고, 줄기세포로 작은 3D 장기를 개발해 인공자기를 만들고, 새로운 ㅁ루질을 시험하거나 식재료를 재배하는 등 지구상의 기술을 향상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구간의 외계 행성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는 실험실이 지구 상공 408킬로미터에 있다는 사실은 무척 당황스럽고도 숨이 멎을 듯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사람이 지구의 책상 앞에 앉아 달과 지구 중간에 잇는 위성과 통신하면서 실험실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는 바퀴 4개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바퀴와 차축이 발명된 이래로 이것들을 이용해 인류의 이주, 언어, 그리고 세계화에 영향을 미친 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제는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 너머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 인류의 진보, 그리고 바퀴와 축의 재창조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퀴를 계속해서 재발명해야 하는 이유다. 

 

3장

 

스프링(Spring)

우리가 생각보다 조용한 도시에서 살 수 있는 이유

 

시간을 거슬러 12세기 칭기즈칸(당시에는 테무친이라 불렀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그가 훗날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연속 제국을 세울 가능성을 의심할 것이다. 아버지가 경쟁 씨족에게 살해된 뒤 테무친은 어머니 호엘룬, 경제들과 함께 버려졌다. 그들 일족은 겨울 초입 어느 날 밤 가족 소유의 동물들을 데리고 사라졌는데, 그곳은 겨울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곳이었다. 아무도 이들의 생존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호엘룬이 식량을 체집하는 법, 동물 가죽을 꿰매 따뜻한 옷을 만드는 법, 활과 화살로 사냥하는 법 등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친 덕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기술 하나가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됐을 때 생존과 패권을 가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칭기즈칸 구사 전술의 핵심은 유달리 가볍고 강력한 활이었다.

활은 일종의 스프링이다. 기본적으로 스프링은 힘이 가해져 모양이 변할 때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다. 힘이 제거되면 원래 모양으로 되돌아가면서 에너지를 방출하고, 이 에너지가 유용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진다. 스프링은 반(半)유연성 재료로 만들어져 비교적 변형하기 쉽고, 탄성이 있어서 힘이 사라진 뒤에는 고무줄을 당겼다 놓을 때처럼 원래 모양으로 되돌아간다. 반면 가소성 재료는 힘을 가하면 영구적으로 변형된다. 예컨대 모형 만들기용 점토를 손가락으로 찌르면 자국이 남는다.

스프링을 변형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궁수는 한쪽 팔로 곡선 모양의 활을 앞에 들고 다른 쪽 손으로 활 양끝에 묶인 줄을 뒤로 당겨 활의 모양을 바꾼다. 구부러진 활에 이 에너지가 저장돼 있다고 궁수가 손가락을 놓는 순간 에너지가 화살로 빠르게 전다되면서 화살이 멀리 날아간다. 스프링과 마찬가지로 활을 많이 구부릴수록 에너지가 더 많이 저장되고 발사되는 힘이 더 강력해진다. 맨손으로 화살을 던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스프링은 에너지를 '저장'하고 '원할 때' 방출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었던 인류 최초의 도구다.

 

나는 스프링의 형태가 엄청 다양하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를 느낀다. 발명 이후 기본적인 형태가 거의 변하지 않은 못이나 바퀴와 달리 스프링은 무수히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한다. 무기처럼 활 모양일 수도 있고, 운송수단의 서스펜션 시스템을 구성하는 약간 구부러진 목재나 금속을 여러 겹 쌓아서 만든 스프링도 있다. 1763년에야 특허를 받은 우리에게 익숙한 코일형 금속 스프링 같은 원통 나선형도 있지만 와선형, 원뿔형, 구형도 있다. 심지어 여러 겹의 고무로 만든 정육면쳉나 직육면체 모양의 블록처럼 단순한 형태도 있는데, 내가 다루는 구조물에서는 이런 모양이 더 친숙하다.

힘을 가하고 변형시키는 방법도 다양하다.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볼펜의 펜촉 안쪽에는 길고 가느다란 스프링이 달려 있는데, 필기하는 공안 이 스프링이 아래쪽으로 눌려 고정되면서 에너지를 저장하도록 설계되었다. 다 쓰고 나서 버튼을 딸깍 누르면 스프링이 원래 길이로 늘어나면서 펜이 몸통 안으로 쏙 사라진다. 스프링을 반대로 쓸 수도 있다. 트램펄린 테두리를 따란 연결된 스프링이 늘어날 때 장력을 저장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트램펄린 그물망에 체중을 싣고 위아래로 뛰면 가장자리의 스프링이 널어나면서 에너지가 저장되었다가, 원래 길이로 줄어들 때 방출된 어니지가 그물망과 사람엑 전달되어 그냥 바당에서 뛸 때보다 후러씬 높이까지 튀어 오를 수 있다. 웃핀으 작은 스프링처럼 비틀어 사용하는 방식도 있다. 또 운송수단의 서스펜션 스프링이나 활에서 알 수 있듯, 형태를 더 많이 구부릴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

이런 유연함(실제로나 비유적으로나) 때문에 스프링은 아마도 내가 선택한 모든 발명품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다양한 규모로 사용됐을 것이다. 스프링은 활 같은 무기뿐만 아니라 투석기와 화기에서도 발견된다. 솜목시계, 펜, 핀셋, 키보드 등 버튼을 누르는 모든 물건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자물쇠, 매트리스, 신축성 있는 운동기구, 탄력적인 댄스 플로어, 트램펄린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유아차, 수레, 자동차 서스펜션 시스템, 주사의 접이식 안전바늘, 현미경과 망원경의 튼튼한 받침대에도 쓰인다. 심지어 일부 고층 건물 토대에는 지진 진동에 대히배 건물을 안정화시키는 거대한 스프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스프링은 다재다능한 엔지니어링의 완벽한 본보기다. 

스프링을 언제 어디서 누가 발명했는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활과 화살이 인류 최초의 복잡하고 실용적인 스프링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활을 만들어 줄을 매고 화살을 조준해 발사한다는 건 인간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활은 섞기 쉬운 유기 물질인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만 년 전부터 썼을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그 세월을 견디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활은 불과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섯 조각으로 부서진 이 짙은 갈색의 느릅나무 활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덴마크의 이탄 습지에서 발견됐고, 이 지역의 이름을 따 홀메고르 활로 불린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중세 잉글랜드의 장궁과 마찬가지로, 홀메고르 활도 나무라는 단일 재료로 만들어졌다. 

중세 몽골 활이 놀라운 건 당시 가장 진보한 복합 설계, 즉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활 설계자들은 활을 당길 때 안 면(궁수와 가장 가까운 면)은 찌그러지거나 압축되는 반면 바깥 면은 늘어나거나 장력이 걸린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활을 제작할 때 종류별 힘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활의 중심부는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재료인 대나무나 목재로 구성했으며, 조심스럽게 말려서 튼튼하고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사슴, 말, 무스 등의 뒷다리 힘둘을 말리고 두드려서 느슨한 섬유질로 만들었다. 이를 물고기 부레로 만든 접착제에 담갔다 꺼내 활 바깥 면에 겹겹이 붙였는데, 엄청 고된 과정이었다. 섬유질을 너무 많이 붙이면 활이 너무 뻣뻣해 구부리기가 어려우지면서 활살에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가 줄어들었고, 섬유질을 너무 적게 붙이면 활이 약해 뚝 부러지기가 쉬웠다. 동물의 힘줄은 늘어나는 힘에 대해 유연하고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활 재료로서 완벽하다. 이는 콜라겐 때문이다. 흔히들 주름 개선 크림 광고나 어떤 유명인이 콜라겐 주사를 맞았다는 언론의 추측 기사를 통해 콜라겐을 알고 있지만, 사실 콜라겐은 힘둘 같은 연결 조직에 힘을 부여하는 단백질 분자다.

6개월 동안 건조한 뒤, 야생 염소나 가축을 뿔을 삶아 브드럽게 만든 다음 활 안쪽 면에 붙여서 압축력에 견디도록 만들었다. 6개월 정도 더 말리고 난 뒤 부드러운 나무껍질을 겹겹이 텃대 활을 습기로부터 보호했다. 그 결과 비바람에 강하고 튼튼하고 가볍고 작고 탄력적이면서 매우 강력한 무기가 탄생했다. 비스한 시대의 잉글랜드 장궁이 더 크고 위험해 보일 수는 있지만, 몽골 활은 그 유연성 덕분에 궁수가 힘을 적게 들이고도 에너지를 더 많이 저장하고 방출해서 화살을 더 빠르게 멀리 보낼 수 있었다. 1226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것(직립 석판)에는 투르키스탄 동부의 사르 타울 정복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명궁수 에숭게가 335알드(약 536미터)에서 목표물을 쐈다는 기록이 고대 몽골 전통 문자로 남아 있다.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잉글랜드 장궁의 평균 사거리가 약 300미털호 추정된 데 비해 놀라운 성능이다.

칭기즈칸 휘하의 몽골군은 강하고 작고 민첩한 말을 능숙하게 통제하면서 활을 쏘았기 때문에 대단히 능률적이었다. 그들은 세 살 때부터 말을 탔고, 다섯 살 때부터는 두 다리만으로 말을 타면서 활 쏘는 법을 배웠다. 그 덕에 두 팔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적군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안전한 거리에서 적들을 정확하게 쏠 수 있었다.중국인들은 수년에 걸쳐 한 손으로 독화살을 쏠 수 있는 소형 석궁, 화살을 여러 개 발사하는 석궁, 이동식 받침대에 장착해서 쓰는 무거운 석궁 등 다양하게 변형된 석궁을 설계했다. 점점 더 많은 석궁이 기술이나 훈련(그리고 생각) 없이도 사용할 수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살상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이 도착하기 전에 중국군은 석궁을 만들고 배치하는 기술을 통해 침략군을 어느 정도 물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기에고 불구하고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치명적이고 휴대성이 뛰어난 몽골 활을 들고 장거리를 빠르게 횡단하는, 숙련되고 자급자족하는 칭기즈칸 군대의 능력과 민첩성 때문이었다.이 때문에 칸은 야만적인 살인자로 명성이 자자하다. 사실 그가 남긴 유산은 훨씬 다양하다. 칸은 신하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고(당시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패배한 지역의 출신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등용했다. 유리사에서 13세기와 14세기는 상대적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몽골은 단일한 무역 및 관세 시스템을 구축하고, 중국 동부에서 시리아까지 연결되는 우편 서비스인 '잠'을 만들었다. 여행이 안전해지면서(항복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이 증가했고, 문화 간 기술과 상품 교류가 촉진되면서 특히 비단과 제지 기술이 중세 유럽에 전해졌다.

나는 물론 공학이 세상을 발전시키고 선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묘사하고 싶지만, 이는 부분적인 관점일 뿐이란다. 교역로를 통해 유럽에 활과 화살, 석궁, 투석기도 전해졌는데, 스프링의 과학 덕분에 이전에 개발된 무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스프링은 여전히 무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이제 앞서 약속한 대로 연기 나는 총구에 대해 설명하겠다). 현대의 기관총은 재장전 없이 여러 발의 탄환을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데, 이는 총열을 관통해 총알 벨트를 구동하는 스프링 배열 덕문이란다. 반자동 권총에도 여러 개의 스프링이 있다. 이런 권총 손잠이 안에는 탄약통이 든 탄창이라는 탈착시기 장치가 있다. 총알을 장전하면 탄창 바닥에 있는 큰 스프링이 압축된다. 탄창을 다시 손잡이 안으로 넣고, 슬라이더라고 부르는 총의 윗부분을 뒤로 당긴다. 스라이더에는 반동(리코일) 스프링이 있어서 압축된다. 스라이더를 움직이면 탄창 위에 빈 공간이 생기고 바닥에 있는 스프링이 탄창을 위로 밀어올인다. 슬라이더에서 손을 떼면 반동 스프링이 스라이더를 다시 제자리로 밀고, 총이 장전돼 발사 준비가 완료된다. 방아쇠를 당기면 또 다른 스프링이 불리면서 거기에 연결된 길고 나카로운 금속 막대인 '공이'가 탄약통을 날카롭게 때린다. 이로 인해 탕약통에 작은 폭발이 발생하면서 총알이 발사된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 단락 활애했지만, 스프링 덕분에 이 모든 일이 1초가 채 안 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다. 하지만 스프링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뉴턴의 작용-반작용 법칙에 의해 총알이 발사될 때의 폭발력으로 반동 스프링이 압축되면서 총의 슬라이더가 뒤로 밀리고, 다음 탄창이 올라오면서 다시 발사 준비가 완료된다. 

현대 총의 이야기는 활, 화살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들은 9세기에 석탄, 질산칼륨, 황을 섞은 화약을 발명해 속이 빈 대나무나 금속관으로 적을 향해 화염과 파편을 발사하는 데 사용했다. 화약은 몽골이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하던(내 추측에 실크로드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활 덕분에 안정된 것 같다) 13세기에 유럽인 손에 넘어갔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이전에 동양인들이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화기를 만들어냈다. 이후 위협과 정복은 화력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번 진화했다. 전투군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부상의 유형이 달라지면서 의학의 발전을 자극했다. 한 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초초화할 수 있는 파괴적인 원자폭탄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쟁터를 지배한 것은 화기였다.

총의 위력은 날 두렵게 한다. 스프링의 고학이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를 이용한 최소한의 힘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보건계량평가연구소가 2018년에 발간한 보고서의 주 저자 모센 나하비 박사에 따르면 총기 폭력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공중보건 위기다. 2020년과 2021년에 미국에서는 한 해에 4만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르완다 대학살이 일어난 1994년을 제외하면, 1990년 이후 매년 전 세계 총기 관련 사망자는 국제 분쟁 및 테러 사망자보다 많았다. 이런 통계를 보면 특히 엔지니어인 나는 참담하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인류의 발명품과 혁신에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프링은 그 안에 숨겨진 과학이 제대로 연구되기 전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사용돼온 흥미로운 공학적 사례다. 스프링 제작자들은 시행탁오를 겪으며 어떤 재료와 모양이 용도에 가장 적합한지 경험을 통해 알아냈다. 이는 어떤 물건의 작동 원리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 없이도 얼마나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럼에도 17세기에 과학이 연구되기 시작하자 스프링의 활용은 훨씬 더 정교해졌다.

이해와 응용의 이런 도약은 로버트 훅의 공이 크다. 훅은 1635년 잉글랜드의 화이트섬에서 태어났다. 4만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계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며 진정한 박식가로 이름을 날렸다. 망원경을 만들어 화성과 목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던 당싱에 화석과 지구의 나이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1666년 런던 대화재로 피해를 입은 건물의 절반가량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관심사 중 하나가 재료의 탄성에 관한 것이었고, 결국 그는 스프링을 연구하게 되었다.

스프링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수학적, 물리적으로 설명해 메커니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 훅의 법칙으로 알려진 논문을 발표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이 법칙을 1660년에 애너그램 암호로 발표했고, 18년 뒤 '길이가 늘어날수록 힘도 커진다'라는 뜻의 라틴어 'Ut tensio, sic vis,'란 제목으로 해법을 제시했다. 훅은 스프링이 늘어난 길이는 스프링이 지탱하는 무게에 비례하며, 스프링이 더 많이 늘어날수록 스프링을 변형시키는 데 필요한 힘이 커지고 에너지를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무게 1킬로그램으로 스프링이 1센티미터 늘어나면 2킬로 그램으로는 2센티미터 늘어나게 되며, 후자의 경우 스프링은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한다(이 법칙은 몽골 활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를 정량적으로 설명해준다). 힘과 변형 정도가 충분히 작아서 재료가 탄성을 유지하는 한(즉 원래 모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한), 훅의 법칙은 유효하다. 

이 법칙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훅의 법칙을 통해 엔지니어들은 스프링 외에도 탄성계가 특정 힘에 의해 얼마나 팽창 또는 수축하거나 움직일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이 얼마나 높이 튀어 오르는지, 재료가 어떻게 소리를 흡수하는지, 심지어 바람과 지진의 힘에 의해 탑이 얼마나 흔들리는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훅의 연구는 실용적으로도 많이 응용되었다. 자동차 스스펜션에 들어가는 코일 스프링이 우리 몸의 수축된 혈관을 확작하는 데 사용되는 스프링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힘이 필요한지, 움직임이나 유연성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등 용도를 이해하고 나면 스프링을 설계할 수 있다. 코일이라고 가정하면 전체 시스템의 지름, 와이어의 지름, 길이, 코일 개수를 계산해 완벽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엔지니어들은 스프링 저울(내 딸이 태어난 다음 날 체중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햐 이런 저울에 매달았다), 압력계(팔에 압력을 가했다 풀면 바늘이 다이얼 주위를 회전하는 구식 혈압계와 같은 장치), 따기 어려운 복잡한 자물쇠(작은 스프링들이 열쇠의 이랑 위에 위치해 떨어지고, 그 조합이 올바른 영우 자물쇠가 열린다) 같은 장치를 설계했다. 이중 아무거나 골라 스프링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겠지만 나는 특히 스프링 덕분에 엄청나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우리의 생활방식과 일하는 방식을 영원히 뒤바꿔놓은 매커니즘을 선택했다. 

 

영국 중부 버밍엄의 보석상 구역에 있는 조지 왕조풍의 높다란 붉은 벽돌 건물 중 한 곳에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학자인 리베카 스트러서스 박사를 만났다. 언제였건 흥미롭고 유익한 경험이었겠지만,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조치로 몇 달 동안 집에 갇혀 이냈던 터라 그녀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넓고 탁 트인 공간에 높다란 하얀 테이블이 있는 공간은 깔끔했다. 내가 도착하자 옆방에서 흥분해서 짖어대는 그녀의 개 아치를 제외하면 작업실은 조용했다. 방 주변에는 선반, 밀링머신, 토핑 공구 등 오래된 도구들이 보물창고처럼 쌓여 있었는데, 리베카는 각 도구마다 이름이 있으며 가족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남편 크레이그와 함께 아름다운 맞춤형 시계를 만드는 일이나 역사적인 시계를 복원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스트러서스 워치메이커사를 운영하고 있다. 스위스의 고급 식켸 회사인 유니버설 제네바의 새 베즐을 처음부터 직접 제작하는 일부터 빈티지 자동차의 대시보드 시계를 정말하게 청소하는 일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빈티지 시계에 관심이 많은 리베카가 손목에 금색 디지털 카시오 시계를 차고 잇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작업할 때 소중한 기계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동안 흔들려도 망가지지 않는 '작업장 호환용' 시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일에 놀라운 재능을 가졌다는 점 외에도 리베카는 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1980년대에 직장에 다니는 어머니와 전업주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고정관념을 깨는 힘을 배웠고, 상류층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업계어서 문신을 한 젊은 노동계층 여성(우리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수다를 떠는 동안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으로서 시걔ㅖ 제작자가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2017년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시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시계 제작자가 되었다. 리베카는 스프링 달린 시계가 개발되기 전 사람들이 시간을 알고자 할 때 직면했던 몇몇 도전과제에 대해 설명했다.

시간을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이고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헤아리는 것이 핵심이다. 약 5000년 전 이집트의 바빌론의 고대인들은 태양의 하루 주기, 달의 한 달 주기, 계절의 연간 변화라는 세 가지 자연 현상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시간 기록법을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숫자 12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매년 나일강이 범람할 때면 12개의 특별한 별자리를 볼 수 있었기에 한 해를 30일씩 열두 달로 나눴다(1년이 되려면 여기에0 5일이 더 필요하다). 빛과 어둠의 간격을 각각 동일하게 12개로 나눈 것을 한 시간으로 정했다(낮과 밤의 길이가 변함에 따라 한 시간의 길이도 달라져서 여름엔 낮의 한 시간이 밤의 한 시간보다 더 길었다).

이는 시간을 측정하는 꽤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늘 활용할 수 없는 햇빛에 의존한다는 점, 지구가 공전 궤도르ㅜㄹ 이동함에 따라 낮의 기리가 달라진다는 점, 태양이 뜨고 지는 주기가 그리 빈번하지 않다는 점 등이 한계였다.

조상들은 시간의 흐름을 물리적으로 보기 위해 막대가 그림자를 관찰해 하루가 얼마나 지났는지 파악했다. 훗날 물시계가 발명돼 밤낮으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단순한 물시계는 작은 구멍으로 물방울이 떨아지는 대야 모양이었는데, 물의 수위를 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막대기였던 것이 정교한 해시계로 진화한 것처럼, 물시계도 수백 년 동안 복잡한 기어 배열이 추가되면서 엄청나게 정교해졌다. 이런 발전은 중세 아랍과 중국의 과학자들이 주도했다. 해시계와 물시계 시스템은 따뜻한 기후에서는 잘 작동했지만, 낮에는 흐리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북유럽 기후에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 유럽의 시계는 기계식 시스템을 이용해 동력을 공급했다. 이런 기계식 시계를 처음 도입한 곳은 13세기 이탈리아의 카톨릭교회였는데, 혁신적인 엔지니어링의 등장을 예상하기에는 뜻밖의 장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하루 최소 일곱 번 그리고 자정에 한 번씩 기도를 해야 했고, 사제로서는 성직자들이 임무를 수행하게끔 기도 시간을 알려줄 수단이 필요했다.

교회 탑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런 시계의 내부에는 중력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무거운 추가 달려 있었다. 일련의 메커니즘이 추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고 에너지를 흡수해서 기어 체인을 구동시키는가를 제어했다. 이 체인 일부분에 달린 레버가 매 시간마다 풀리면서 종을 쳤다.

일정한 중력으로 움직이는 만큼 시계의 동력원은 안정적이었지만, 밑으로 떨어지는 추를 손목에 거는 건 결코 실용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추기 리리저리 흔들리면 시계의 정확성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커디린 추가 끝까지 다 내려오면 다시 감아 올려 하강하게 해야 했고, 이 작업을 하루에 여러 번 반복하지 않으려면 시계추가 낙하할 거리를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시계는 아주 높은 곳에 설치되곤 했다. 그래서 시계의 메인스프링(태엽)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시계는 움직이지 못하는 거대한 존재였다.

리베카는 내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작업대 위에 다향한 스프링을 올려놓았다. 내 손가락 끝과 잘 맞는 물음표 모양의 작은 스프링과 가느다란 원통형 와이어로 만든 약간 큰 V자 모양의 스프링이 있었다. 납작하고 폭이 넓은 금속 리본으로 만든 나선형의 미인스프링도 있었다. 하나는 작업대 위에 느슨하게 놓여 있었는데, 중심부는 단단히 감겨 있었지만 이내 피보나치 곡선처럼 펼펴지면서 끝 부분이 내 손바닥 너비만큼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를 취했다. 그 옆에는 끝이 반대 방향으로 감겨 있는 비슷한 스프링이 있었는데, 해마 꼬피를 연상시키는 모양이었다. 다른 하나는 단단히 감겨서 동그란 태엽통 안에 들어 있었다. 이 잡작한 나선형 스프링은 소형 기계식 시계와 각종 시간 측정 도구의 동력원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어 제친을 구동하는 데 필요하다. 이 스프링이 커다란 추를 대체함으로써 시간 측정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메인스프링이 없었다면, 손목에 차고 다닐 만큼 조그만 시계는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메인스프링은 15쇼ㅔ기 말 독일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금속 리본이 축에 감겨 있었다. 안쪽 끝부분은 축에 부착되었다. 스프링을 둥글게 감으면 스퍼링이 조여져서 에너지가 저장되었다. 스프링이 너무 빠르게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래칫이라는 장치가 사용되었다. 레버가 부착된 특수한 모양의 톱니가 있는 것이다. 레버를 한쪽 방향으로 돌리면 레버에 톱니가 걸리면서서 기어가 멈춘다(장남감 태엽이나 오르골 손잡이를 돌리 때 딸깍 소리가 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태엽을  다 감으면 축이 돌기 시작하고, 스프링이 천천히 풀리면서 에너지가 기어 트레인으로 전달돼 시계가 구동된다. 보통 메인 스프링은 한 번 감으면 40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길이로 제작되었다. 하루 한 번씩 감아주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혹여나 잊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여유분을 넣은 것이다.

무거운 추를 메인스프링으로 바꾸면서 시계는 더 작아지고 머잖아 휴대도 가능해졌으며, 이로써 사상 최초로 회중시계가 만들어졌다고 리베카는 설명했다. 하지만 1600년대 중반 훅이 스프링의 과학적 원리를 밝혀내기 전까지 스프링을 다루는 건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는 일이었고, 메인스프링을 처음 적용했을 때 식켸의 정확도가 떨어졌다. 메인스프링을 최대로 감았을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저장되고, 메인스퍼링이 풀릴수록 저장된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다양한 메커니즘('스택프리드' '퓨지'와 같이 생생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이 시스템에 추가 됐고, 이로써 메인스프링과 함께 새롭고 일관되며 크기가 작은 에너지 공급원이 만들어졌다(스택프리드는 독일어 starke와 feder가 결합된 단어로 각가가 '강한' '스프링'을 뜻한다. 퓨지는 프랑스어 fusee와 후기 라틴어 fusata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리 가득 감긴 원통'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스택프리드와 퓨지가 필요하지 않다. 끝부분이 가장 뻣뻣하고 시작 부분이 가장 덜 뻣뻣하게 설계된 해마처럼 꼬리가 달린 스프링 덕분이다. 한쪽이 더 뻣뻣하다는 건 훅의 법칙에 따르면 스프링이 풀려 에너지가 줄어들더라도 강성이 보정된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면 시계에 일정한 양의 에너지가 공급되고 시계는 느려지지 않는다. 

리배카의 작업대 위에는 다양한 스프링 외에도 19세기의 화려한 시계가 놓여 있었다. 나는 리베카가 시계를 조심스럽게 분해해 두번째로 중요한 스프링인 헤어스프링을 보여주는 과정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메인스프링만으로도 시계를 더 작고 휴대하기 편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메인스프링과 헤어스프링을 '함께' 사용하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수준의 정확성과 휴대성을 '모두' 갖춘 시계를 최초로 만들 수 있었다.

리베카는 아주 작은 나사 몇 개를 풀어 뚜껑을 분리한 뒤 내가 만져볼 수 있게 했다.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났던 나는 시계를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든 작은 메커니즘이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들여다봤다. 부품들은 금박을 입힌 황동으로 돼 있었다. 복잡하게 겹겹이 쌓인 다양한 크기의 기어에서 은은한 금빛 광택이 났다. 시계 화면에서 어는 바늘을 구동하는 기어인지에 따라 회전 속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는데, 1분마다 1회전하는 초침의 기어는 조금해 보일 정도로 빠른 반면 12시간이 지나야 겨우 한 바뮈를 도는 시침의 기어는 기어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익숙한 기어들 사이에서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돌다가 돌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등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특이한 바퀴 하나가 있었는데, 이를 밸런스 휠이라고 불렀다. 이 바퀴를 빠르고 일정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아주 가느다란 나선형 스프링, 그러니까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헤어스프링이다.

이집트인들은 24시간 주기로 몹시 느리게 움직이는 태양에 의존했기 때문에 시간 측정의 정확성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큰 오차나 부정확성이 누적되지 않도록 일관 되게 자주 발생하는 진동, 순환, 또는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헤어스프링이 발명되기 전 13세기 대형 중세 기계탑에는 탈진기라른 독창적인 엔지니어링 기술이 사용되었다. 탈진기의 형태는 다양했지만, 모두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시계를 조정할 용도로 시계 메커니즘을 규칙적으로 회전시키는 원리였다. 태양의 주기가 24시간이었던 반면, 탈진기의 주기는 단 몇초에 불과했다. 


초기 탈진기의 한 예로 중세 성당 시계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버지앤폴리옷을 들 수 있다. 수직으로 세워져 회전하는 축에 두갸의 작은 금속 탭이 부착돼 있었다. 축 꼭대기에는 양옆으로 금속 암이 뻗어 있었다. 각 암에는 진동 주파수를 조절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금속 덩어리가 달려 있었다. 암이 어느 한 방향으로 회전할 때마다 금속 탭이 축과 함께 빙글빙글 돌면서 왕관 모양 톱니가 하나씩 풀렸다. 그 뒤 금속 탭에 의해 축은 강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고 바퀴의 톱니 하나가 또 풀렸다. 왕관 모양의 바퀴는 앞서 언급한 천천히 내려가는 무게추와 연결돼 있기 때문에 바퀴가 조금씩 돌아갈 때마다 무게추가 조금씩 내려갔다. 이렇게 암이 왔다 갔다 흔들리면서 바퀴가 조금씩 회전하고, 이로써 무게추가 조금씩 내려가는 사이클 이 만들어졌다. 추가 다 내려가면 레버를 구동하는 기어로 에너지가 전달되고, 레버가 시계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렸다('시계'라는 단오는 종을 뜻하는 라틴어 'clocca'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문자판이나 바늘이 없었다).

탈진기는 무게추가 시스템으로 방출하는 에너지의 양을 제어하는 데 매우 중요했지만, 초기 형태는 몹시 민감하고 부정확했다. 진동 메커니즘이 일관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버지앤폴리옷의 경우 움직이는 부품 사이의 마찰, 온도 변화, 금속 덩어리 위치의 미세한 변화 등이 진동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 진동 빈도가 바뀌면 추가 내려가는 정도에 영향을 미치고, 종소리가 울리는 시간에도 영향을 미쳐 매주 최대 몇 시간씩 오차가 날 수 있었다. 17세기 신문 <아테네 머큐리>에 접수된 항의 서한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부정확성은 골치 아픈 문제였다.

 

내가 코번트가든에 있을 때 시계가 2시를 알렸고, 서멋싯하우스ㅜ에 갔을 때는 1시 45분, 세인트클레먼츠에 갔을 때는 2시 30분, 세잍트던스턴 교회에 갔을 때는 1시 45분, 플릿스트리트에 있는 미스터 닙스다일을 지날 때는 정확히 2시, 러드게이트에 갓을 때는 1시 반, 보우교회에 갔을 때는 1시 45분, 증권거래소 근처의 다일을 지날 때는 2시 15분, 왕립증권거래소에 도착했을 때는 1시 45분이었습니다.

 

시계만 보고 다니는 이 투덜이가 1656년 시계 디자인에 진자를 도입한 네덜란드의 수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당시에 이미 탈진기를 크게 개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길고 가느다란 막대 끝에 부탁된 무게추가 일관되게 왔다 갔다 흔들리는 방식이었다. 매 주기마다 진자 상단에 있는 닻 모양의 탈진기가 좌우로 흔들리며 기어의 톱니바퀴가 하나씩 풀렸고, 시계가 구동되었다. 시간과 달리 기술의 진화는 선형적인 경우가 거의 없으며, 오래된 할아버지 시계에서 볼 수 있듯 수많은 진자시계가 여전히 하강하는 무게추로 구동되는 반면, 다른 시계에서는 메인스프링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방식은 시계의 정확도를 크게 향상시켰지만 조작하기 불편했고 무엇보다 조금만 움직여도 진자와 탈진기가 흐트르져 시간 측정에 오차가 발생했기 때문에 여전히 휴대할 수 있는 시계는 아니었다. 따라서 현지 내에서든, 대양을 횡단하는 배 안에서든, 주변 세상을 탐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헤어스프링이 발명되면서 이런 상황이 뒤바뀌었다.

헤어스프링은 밸런스 휠과 함께 고주파로 진동하는 시스템을 형성하며(정확하고 정밀해진다) 주머니에 넣거나 손목에 차거나 배에서 흔들려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리베카가 내 손바닥에 올려놓은 시계르 바라보면서 나는 밸런스 휠이 비틀리는 모습에 반했다. 너무 빨라서 부기 어려웠지만, 방향이 바뀔 때마다 팔레트 포크라는 작은 메커니즘이 충돌하면서 좌우로 밀려났다. 포트에는 2개의 갈래가 있었는데, 이 갈래가 진동할 때마다 방탈 휠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모양의 기어의 톱니가 하나씩 풀렸다(기계식 시계에서 들리는 똑딱 거리는 소리 일부가 바로 이 앞두로 두르리는 동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관련 메커니즘과 함께 헤어스프링은 기계식 시계의 일관된 심장박동을 만든다(헤어스프링이라는 이름은 원래 수퇘지 털로 만든 스프링이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금속으로 대체됐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헤어스프링은 아주 섬세한 부품으로, 길리를 조금만 바뀌도 시계가 느려지거나 빨라질 수 있으며, 훌륭한 시계 제작자만이 완벽한 균형을 만들 수 있었다. 시계는 진동 속도에 따라 정확도가 달라지는데, 초당 진동수가 많을수록 시계를 갖고 움직이더라도 오차가 줄어들어 시간을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버지앤폴리옷은 몇 초에 한 번 진동하는 데 비해, 진자는 1초에 한두 번 진동하고 밸런스 휠과 헤어스프링은 1초에 여러 번 진동할 수 있다. 일반적인 메커니즘은 초당 6회 진동하지만, 초당 100회 이상 진동하는 디자인도 있다. 

휴대가 간편한 정밀한 공학기기가 등장하면서 생활방식을 바꾸었다. 손목시계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 최신 유행의 새로운 시계를 목에 펜던트 형태로 착용하거나 허리띠에 걸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손목시계는 한동안 여성용 장신구로 여겨졌다. 이게 좋은 것이었는지 나쁜 것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람들은 이제 끝없이 반복되는 다음 작업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리는 데에 완전히 매몰돼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프링이 들어간 시계는 과학, 선박, 사회에 분명하고 싶오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자들은 이제 태양, 달, 별과 같은 천체를 관측하고, 특정 시간에 천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한 뒤 몇 날 몇 년에 걸쳐 천체의 움직임을 추적해 태양계와 그 너머의 우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좁은 범위로 보면 철도가 생기기 전까진 각 도시에서 태양을 관측해 현지 시간을 정했다. 그러나 19세기 천문학자들은 전보를 통해 전국에 정확한 시각을 정송해 전체 도시망에서 시각을 동일하게 맞추도록 했으며, 특히 열차를 정시에 정확한 위치에 도착하게 해서 열차 간 충돌사고를 방지했다. 또한 시간 관리는 산업혁명 기간 동안 무역을 규제하고 공장 노동자의 하루 노동 시간을 조절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정확한 시간 측정은 항해사의 안전을 위해서도 무척 중요했다. 1707년 연국 실리제도에서 해군 항해사들이 함대의 위치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약 1400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가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 의회는 장거리 해상 여행의 안전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사람에게 포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육지에 접근할 때 방향을 잡는 중요한 수단인 지구 경도를 표시하는 데 있었다(폴리네시아 항해사들은 오랫동안 자연 관측을 통해 경도를 계산해왔고 바다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그리니치 경도 0도에서의 정확한 시각에 시계를 동기화한 다음 장거리 항해에 나선다면, 항새자들은 태양과 벌을 이용해 현지 위치의 시각을 계산하고 이를 그리니치 표준시와 비교할 수 있었다. 시간차를 통해 동쪽 또는 서쪽으로 몇 도를 이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정확한 시계가 있어야 했다. 항해 중에 예기치 못하게 시계에 오차가 발생하면 계산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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