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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2024.10.21) - 한강

동선(冬扇) 2024. 10. 21. 07:11
책소개
MD 한마디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 섬세한 감수성과 치밀한 문장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해온 작가 한강이 광주의 5월을 그렸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담아낸 책. -소설MD 박형욱
말라파르테 문학상, 만해문학상 수상작
우리 시대의 소설 『소년이 온다』

2014년 만해문학상,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하고 전세계 20여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세계를 사로잡은 우리 시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이 작품은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에게 “눈을 뗄 수 없는, 보편적이며 깊은 울림”(뉴욕타임즈),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다룬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소설”(가디언),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문학평론가 신형철)이라는 찬사를 선사한 작품으로, 그간 많은 독자들에게 광주의 상처를 깨우치고 함께 아파하는 문학적인 헌사로 높은 관심과 찬사를 받아왔다.

『소년이 온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를 통해 한강만이 풀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1980년 5월을 새롭게 조명하며, 무고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진심 어린 문장들로 5·18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한국적인 서사로 세계를 사로잡은 한강 문학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작품. 인간의 잔혹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증언하는 이 충일한 서사는 이렇듯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인간 역사의 보편성을 보여주며 훼손되지 말아야 할 인간성을 절박하게 복원한다.



저 : 한강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2007년 출간한 『채식주의자』는 올해 영미판 출간에 대한 호평 기사가 뉴욕타임스 등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에 질문을 던지는 한강 작품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만해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의 해외 번역 판권도 20개국에 팔리며 한국문학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2023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2024년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출처 : 예스24

 

1장 

어린 새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너는 눈을 크게 떠본다. 좀 전에 가늘게 떴을 때보다 나무들의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언젠가 안경을 맞워야 하려나. 네모난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작은형의 부루퉁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여름이면 콧잔등을 타고 자꾸 안경이 흘러내린다고, 겨울엔 실내에 들어갈 때마다 안경알에 김이 서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작은형이 그랬는데, 더이상 눈이 안 나빠져서 안경을 안 쓸 순 없을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당장 집에 들어와.

단단히 화가 나 있던 작은형의 목소리를 털어내버리려고 너는 고개를 흔든다. 마이크를 쥔 젊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분수대 앞 스피커에서 울려온다. 네가 걸터앉은 상무관 출입계단에서는 분수대가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나마 추도식을 보려면 건물 오른편으로 돌아나가야 한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너는 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여러분, 적십자병원에 안치되었던,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자의 선창으로 애국가가 시작된다. 수천사람의 목소리가 수천 미터의 탑처럼 겹겹이 쌓아올려져 여자의 목소리를 덮어버린다. 무겁디무겁게 올라가다가 절정에서 결연히 쓸려내려오는 그 곡조를, 너도 낮은 목소리로 따라 부른다.

오늘 적십자병원에서 오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네가 아침에 물었을 때 진수 형은 짧게 대답했다. 한 서른명 될 거다. 저 무거운 노래의 후렴이 다시 까마득한 탑처럼 쌓아올려졌다가 쓸려내려오는 동안, 서른개의 관들이 차례로 트럭에서 내려질 것이다. 아침에 네가 형들과 함께 상무관에서 분수대 앞까지 날라놓은 스물여덟개의 관들 옆에 나란히 놓일 것이다. 

상무관에 있는 여든세개의 관들 중 아직 합동추도식을 치르지 않은 것은 모두 스물여섯이었는데, 어제저녁 두 가족이 나타나 시신을 확인하고 급히 입관을 해 스물여덟이 되었다. 너는 장부에다 그들의 이름과 관 번호를 덧붙여 쓴 뒤, 긴 괄호로 묶고 '합동추도식 3'이라고 적었다. 다음 추도식을 할 때 같은 관이 또 나가지 않으려면 잘 기록해둬야 한다고 진수 형이 당부했기 때문이다. 이번만은 너도 추도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는 너에게 상무관에 남으라고 했다.

그 사이에 누가 찾아올지 모르잖아. 잘 지키고 있어.

함께 일하던 형들과 누나들은 모두 추도식에 갔다. 여러 밤을 관 앞에서 새운 유족들은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꽂고, 몸속에 모래나 헝겊을 채운 허재비들처럼 느릿느릿 관을 따라 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은숙 누나는 네가 괜찮다고, 어서 가보라고 말하자 덧니를 살짝 보이며 웃었다. 그 덧니 때문에, 어색하거나 미안해서 억지로 웃을 때도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장난스러워 보였다.

그럼, 시작만 보고 금방 올께.

혼자 남은 너는 상무관 출입계단에 걸터앉았다. 검은색 마분지로 앞뒤 표절을 댄 장부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 아래로 느껴지는 시멘트 계단이 차가웠다. 체육복 위에 걸친 교련복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따라 부르다 말고 너는 멈춘다. 화려강산, 하고 되뇌어보자 한문 시간에 외웠던 '려'자가 떠오른다. 이젠 맞게 쓸 자신이 없는, 유난히 획수가 많은 한자다. 꽃이 아름다운 강산이란 걸까, 꽃같이 아름다운 강산이란 걸까? 여름이면 마당가에서 네 키보다 높게 솟아로르는 접시꽃들이 글자 위로 겹쳐진다. 하얀 헝겊 접시 같은 꽃송이들을 툭툭 펼쳐올리는 길고 곧은 줄기들, 제대로 떠올리고 싶어서 눈을 감는다. 가늘게 눈을 뜨자 도청 앞 은행나무들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직 한방을의 비도 바람 사이로 튕겨져나오지 않았다.

 

-

 

애국가가 끝났는데도 아직 관이 정리되지 않았나보다. 군중의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시간을 벌기 위해선지, 마이크를 쥔 여자가 이번엔 아리랑을 부르자고 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울음소리가 잦아들 즈음 여자가 말한다.

먼저  가신 임들을 위해 묵념합시다.

수천사람의 웅성거림이 일제히 멎은 순간, 주변의 정적이 갑자기 도드라지게 느껴져 너는 놀란다. 함께 묵념하는 대신 일어선다. 옆구리에 장부를 끼우고, 반쯤 열어놓은 상무관 출입문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바지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쓴다.

초를 태워도 아무 소용 없네. 

냄새를 견디며 너는 강당에 들어선다. 날이 흐려 실내는 마치 저녁 무렵 같다. 출입문 쪽으로는 추도식을 마친 관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고, 아직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 입관을 못한 서른두사람의 몸들은 흰 무명천에 덮인 채 넓은 창 아래 누워 있다. 다 쓴 음료수 병에 꽂힌 양초들이 그들의 얼굴 곁에서 조용히 타들어가고 있다.

강당의 안쪽 끝까지 너는 걸어들어간다. 구석 자리에 뉘어놓은 일곱사람의 기름한 형상을 본다. 이들은 정수리까지 완전히 흰 무명천으로 덮어놓고, 젊은 여자나 아이를 찾는 사람들에게만 잠깐씩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모습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맨 끝 모서리에 있는 사람의 상태가 가장 나쁘다. 처음 네가 보았을 때 그녀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자그마한 여자였는데, 썩어가면서 이제는 성인 남자만큼 몸피가 커졌다. 딸이나 여동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천을 걷어 보일 때마다 너는 부패의 속도에 놀란다.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는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움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 눈에 띄는 그 상처들이 가장 먼저 썩었다. 타박상을 입은 상체의 피멍들이 뒤따라 부패했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정강이를 넉넉히 덮었던 물방울무늬 주름치마는 이제 부불어오른 무릎을 다 덮지 못한다.

너는 출입문으로 돌아온다. 탁자 아래 둔 박스에서 새 양초를 꺼내들고 모서리의 사람에게 돌아간다. 머리맡에서 가물가물 타고 있는 몽당초 불꽃에 새 초의 무명 심지를 기울인다. 불이 옮겨붙자 입김을 불어 몽당초를 꺼버리고, 데지 않게 조심조심 유리병에서 빼낸 뒤 새 초를 꽂는다.

아직 뜨거운 몽당초를 한 손에 쥔 채 너는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시취를 견디며 초의 불꽃을 들여다본다. 냄새를 태워준다는 반투명한 겉불꽃이 어른어른 타오른다. 주황색 속불꽃은 눈을 홀리듯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그 속에 작은 심장이나 사과 속씨 모양으로 흔들리는, 심지를 둘러싼 파르스름한 불꽃심을 너는 본다.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초불 하나나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더 갈아줘야 할 초들이 없는지 찬찬히 살피며 너는 출입구를 향해 걷는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 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강당을 나서기 직전에 너는 뒤돌아본다. 혼들은 어디에도 없다. 침묵하며 누워 있는 사람들과 지독한 시취뿐인다.

 

-

 

처음에 저 사람들은 상무관이 아니라 도청 민원봉사실 복도에 누워 있었다. 칼라가 넓은 수피아여고 하복을 입은 누나가 평상복 차림의 또래 누나와 함께 피 묻은 얼굴들을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굽은 팔들을 억지로 펴서 옆구리에 붙여놓으려 애쓰는 모습을 너는 멍하게 지켜보았다. 

왜 왔어?

교복 입은 누나가 고개를 들고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며 너에게 물었다. 조금 튀어나온 눈이 귀염성 있게 동그랗고,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는 곱슬곱슬한 잔머리가 유난히 많았다. 그 머리카락들이 땀에 젖어 이마와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친구 찾으려고요.

피비린내 때문에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너는 대답했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요, 저 사람들 중에......

그럼 확인해봐.

복도 벽을 따라 누운 스무남은사람들의 얼굴과 몸을 너는 차근차근 들여다봤다. 확인을 하려면 잘 들여다보야 하는데, 오래 눈을 두기 어려워 자꾸 눈을 깜박였다. 

없어?

연두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누나가 허리를 펴며 물었다. 교복 입은 누나와 또래인 줄 알았는데, 마스크를 내린 얼굴을 보니 이십대 초반 같았다. 노릇노릇 핏기 없는 피부에 목이 가늘어 조금 허약해 보였다. 눈매만은 야무져 보였다. 목소리도 또렷했다.

없어요.

전대병원하고 적십자병원 영안실 가봤어?

예.

친구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네가 다녀?

아버지만 계신데 대전서 일하시고, 친구랑 친구 누나 둘이서 우리 집 상하방에서 자취해요.

시외전화 오늘도 안되지?

안돼요, 몇번이나 해봤는데.

그럼 친구 누나는?

그 누나가 일요일부터 안 들어와서 둘이서 찾으로 다녔거든요. 근데 어제 요 앞에서 군인들이 총 쐈을 때, 친구가 맞는 걸 동네 사람이 봤다고 그래서.

교복 입은 누나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끼어들었다.

혹시 다쳐서 입원해 있는 거 아냐?

고개를 흔들며 너는 대답했다.

그랬으면 어떻게든 전화를 했을 건데요. 우리 집에서 걱정할 걸 알 텐데.

연두색 셔츠를 입은 누가가 말했다.

그럼 며칠 더 이쪽으로 와봐. 이제 시신들이 다 여기로 온대, 총 맞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병원 영안실엔 자리가 없단다.

총검으로 목이 베여 붉은 목젖이 밖으로 드러난 젊은 남자의 얼굴을 교복 입은 누나가 물수건으로 닦아냈다. 부릅뜬 두 둔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감겨주고는, 수건을 양동이 물에 헹군 뒤 꽉 비틀어 짰다. 핏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양동이 밖으로 튀었다. 연두색 셔츠를 입은 누나가 양동이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너, 시간 있으면 오늘만 우리 도와줄래? 손이 너무 모자라. 어려운 건 아니고.....저기 끊어다놓은 천 잘라서 저쪽에 있는 사람들 덮어주면 돼. 너처럼 누가 가족을 찾으러 오면 하나씩 걷어서 보여 주고. 얼굴들이 많이 상해서, 옷하고 몸까지 봐야 누군지 확인이 될거야. 

 

그날부터 너는 그녀들과 한조가 되었다., 은숙 누나는 짐작대로 수파아여고 3학년이었다. 연두색 셔8츠 소매를 얻어 입은 선주 누나는 충장로에 있는 양장점 미싱사인데, 주인 내외가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친척집으로 피하는 바람에 감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고 했다.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가두방송을 들은 그녀들은 각자 헌혈을 하러 전대 부속병원에 갔고, 시만 자치가 시작된 도청에 일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왔다가 얼결에 시신들을 맡았다고 했다. 

키 순서로 자리가 배정되는 교실에서 너는 언제나 맨 앞에 앉는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된 3월부터 변성기가 시작되며 목소리가 약간 낮아지고 키도 꽤 자라줬지만, 아직은 제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상황실에서 온 진수 형은 너를 처음 보고 놀라며 물었다. 

너, 1학년 아니야? 여기 일은 힘든데, 집에 들어가라.

깊게 쌍꺼풀진 눈이며 긴 속눈썹이 여자애처럼 예쁘장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 때문에 내려왔다는 진수 형에게 너는 대답했다. 아니요, 3학년이에요. 저는 림든 거 없어요.

사실이었다. 너의 일은 힘들지 않았다. 선주 누나와 은숙 누나는 베니어합판이나 스티로폼 판에 미리 비닐을 깛아놓고 그 위에 죽은 몸들을 눕혔다. 얼굴과 목을 물수건으로 씻고 헝클어지 머리칼을 가는 빗으로 정돈한 뒤, 냄새를 막기 위해 몸에 비닐을 둘렀다. 그사이 너는 그들의 성별과 어림잡은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겼다. 강지 쪽이에다 같은 번호를 적어서 가슴께에 핀으로 꽂아놓은 뒤, 얼굴 아래로 흰 무명 천을 덮고는 누나들과 힘을 합해 벽 쪽으로 밀어놓았다. 도청에서 가장 바쁜 사람처럼 보이는 진수 형은 하루에도 몇번씩 다급한 걸음걸이로 너를 찾아왔는데, 네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을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나탄 가족들에게 너는 흰 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신원이 확인되면 멀찍이 물러서서 오열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너무 험하지 않게만 대강 수습해놓은 시신을, 유족들은 목화솜으로 코와 귀를 막아주고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간단한 염과 임관을 마친 사람들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하는 것까지가 너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짦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된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려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부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난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

 

이튿날 아침 누나들과 너는 악취가 심한 몸들 몇을 민원실 뒤뜰에 내놓았다. 새로 실려오는 죽은 사람들을 눕힐 공간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바쁜 걸음으로 상황실에서 건너온 진수 형은 놀라며 물었다. 

비가 오면 어쪄려고요?

죽은 사람들로 발 디딜 곳 없는 통로를 당혹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진수 형에게, 마스크를 벗으며 선주 누나가 말했다.

여긴 너무 좁아서 방법이 없어요. 저녁에 시신들이 또 들어올 텐데 어떻게 해요. 상무관 사정은 어때요? 거긴 공간이 있지 않아요?

한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진수 형이 보낸 사람 넷이 왔다. 어디서 수비를 서다 왔는지 어깨에 총을 메고, 전경 부대가 버리고 간 방석모를 쓰고 있었다. 뒤뜰과 통로에 뉘어놓은 몸들을 그들이 트럭에 싣는 동안 너와 누나들은 갖자 비품을 챙겼다. 먼저 출발한 트럭을 따라 천천처 상무관을 향해 걸었다. 화창한 오전이었다. 덜 자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며, 이마 언저리까지 내려온 낮은 가지를 너는 뜻 없이 쥐었다 놓았다. 

앞장서서 걸어간 은숙 누나가 먼저 상무관으로 들어섰다. 네가 따라 들어갔을 때, 그녀는 거무스름한 피 얼룩이 묻은 면장갑을 움켜쥔 채 강단 가득 들어찬 관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뛰다라온 선주 누나가 네 앞으로 한걸음 더 들억,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질끈 손수건으로 묶으며 말했다.

거기선 계속 내보니기만 해서 몰랐는데.....한테다 모아놓으니까 정말 많다.

무릅을 맞대고 앉아 있는 유족들을 너는 보았다. 그들이 돌보는 관들 위에는 액자를 갖춘 영정 사진들이 올라가 있었다. 혼타 병 두개가 나란히 머리맡에 놓인 관도 있엇다. 유리병 하나에는 흰 들꽃 한묶음이, 나머지 하나에는 양초가 꽂혀 있었다.

그날 저녁 네가 진수 형에게 양초 한상자를 구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초를 태우면 냄새가 없어지겠구나.

무명천이든 목관이든 갱지든 태극기든, 필요한 것들을 부탁하면 그는 수첩에 적었다가 하루 안에 구해주었다. 아침마다 대인시작이나 양동시작에서 장을 보고, 거기서 구하지 못한 것들은 시내의 목공소와 장의사, 포목점들을 찾아다니며 구한다고 그는 선주 누나에게 말했다. 집회에서 걷힌 성금이 아직 많이 남은데다, 도청에서 왔다고 하면 헐하게 주거나 그냥 가져가라는 사람이 많아 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이제 시내에는 관이 동났다고, 급한 대로 베니어판을 구해 목공소에서 짜고 있다고도 했다.

진수 형이 오십개들이 양초 상자 다섯개와 성냥갑을 놓고 간 아침, 너는 도청 본관과 별관을 구석구석 다니며 촛대로 쓸 음료수 병들을 모아왔다. 출입구의 탁자 앞에 서서 하나씩 양초를 밝힌 뒤 유리병에 꽂아놓으면 유족들이 가져다 관 앞에 놓았다. 초가 넉넉해서, 유족이 지키지 않는 관과 미확인 시신들의 머리맡까지 모두 밝힐 수 있었다.

 

-

 

매일 아침 새 관들이 합동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들어왔다. 큰 병원에서 치료받다 숨진 사람들의 것이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번들거리는 얼굴로 유족들이 리어카에 관을 실어오면, 너는 관 사이의 간격을 좁혀 자리를 만들었다. 

저녁이면 계엄군과 대치한 외곽 지역에서 총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왔다. 군의 총격에 즉사하거나 응급실로 운반되던 중 숨이 끊어진 이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형상이 너무 생생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반투면한 창자들을 뱃속에 집어넣다 말고 은숙 누나는 강당 밖으로 뛰어나가 토하곤 했다. 코피가 잘 나는 체질이라는 선주 누나는 이따금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마스크 위로 콧잔등을 누른 채 강강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들에 비하면 너의 일은 여전히 어렵지 않았다. 민원실에서 했던 것처럼 장부에 날짜와 시간을 적고 죽은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록했다. 무명천을 미리 정당한 크기로 잘라놓고, 옷핀에 강지를 끼워 바로 숫자를 기입할 수 있게 준비했다. 신원 확인이 안된 사람들의 간격을 수시로 더 좁히고, 관들의 간격도 더 좁혀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자리를 만들었다. 유난히 죽은 사람들이 많았던 밤에는 간격을 만들 겨렬도, 공간도 없어서 얼기설기 관들의 모서리를 맞대 모조지 붙여놓았다. 그 밤, 빽빽이 강당을 메온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문득 둘러보며, 마치 이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한 군중 같다고 너는 생각했다. 소리치지도 움직이지도 손을 맞잡지도 않는, 지독한 사취만을 뿜어내는 군중 속을, 너는 장보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빠르게 걸어다녔다. 

 

-

 

정말 비가 쏟아지겠어.

강당을 나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너는 생각한다.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뒤뜰을 향해 걸어가다가, 너무 멀어져선 안된다는 생각에 건물 모퉁이에서 멈춘다. 마이크를 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와아아, 외치며 박수 치는 사람들이 소리가 부쩍 작아졌다고 너는 느낀다. 군이들이 철수한 다음 날 열린 집회를 너는 기억한다. 도청 옥상과 시계탑 위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올라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바둑판식 거리에, 선물 자리만 남겨놓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수십만층의 탑을 아스라하게 쌓아올리며 애국가를 불렀다. 수십만개의 폭죽을 연달아 터뜨리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제 아침 진수 형이 선주 누나와 나누던 대화를 너는 들었다. 공포 때문에 집회의 규모가 빠르게 줄고 있다고 그는 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수가 많아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느낌이 안 좋아요. 관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너무 많는 피를 흘르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다. 반복되는 피라는 단어가 어떤지 가슴을 답답하게 해. 너는 다시 입을 벌려 심호흡을 한다.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지난겨울 외할머니의 임종을 너는 떠올린다. 가벼운 감기로 폐렴이 되어 외할머니는 보름 가까이 입원했다. 기말고사가 끝나 토요일 오후, 너는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와 함께 문병을 갔다. 갑자기 외할머니의 상태가 위급해져, 외삼촌 내외가 서둘러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너와 엄마 둘이서 임종을 지켰다. 

어려서 외가에 가면, 네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허리가 기역 자로 구부러져 있던 외할머니는 따라오니라, 가만히 말하곤 앞장서서 걸어갔다. 광으로 쓰이는 어둑한 방으로 너는 따라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찬장 문을 열 거린 걸, 제사 때 쓰려고 유과와 강정을 꺼낼 거란 걸 너는 알고 있었다. 네가 유과를 받아들고 히둑 웃으면 외할머니도 실눈으로 웃었다. 그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바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떤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오래전 부활절 달걀을 먹으려고 친구들과 몰려간 성경학교에서 들은 것처럼, 천국이나 지옥 같은 이국적인 곳으로 날아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부러 무섭게 만든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흰옷을 입고 안개 속을 서성일 것 같지도 않았다. 

투둑, 빗방울이 네 상고머리로 떨어진다. 얼굴을 들자 뺨으로도, 이마로도 마구 떨어진다. 삽시간에 빗발이 되어 쏟아진다.

마이크를 쥔 남자가 다급히 외친다.앉아주십시오. 여러분. 아직 추도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비는 먼저 가신 혼들이 흘리는 눈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