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티 투어(동해안 코스, 야간시티투어)
(09:10 ~ 21:30)
(동해안 코스)
07:00 집에서 출발
경주시티투어를 한 번 하고 싶었다.
마음을 여러 번 먹곤 했지만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마침 짝지가 토.일이 휴무가 되어 기회가 온 것이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나니 비가 올 것 같은 일기예보가 나온다.
많이만 내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시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불편할 거다.
08:10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도착
시티투어버스를 탑승하는 곳은 신경주역을 비롯하여 이곳 시외버스터미널과 보몬단지내 호텔, 콘도 등 여러곳에서 탑승할 수 있단다.
주로 친구들, 가족들이 많을 것이다.
곳곳을 둘러보는데 차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불편해서 이 투어버스를 많이 이용하는 듯 하다.
09:10 시티투어버스 탑승
10:10 골굴사
골굴사는 경주에서 동해안 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함월산 불교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신라 불교가 번창하던 6세기경 인도에서 온 광유(光有) 성인 일행이 마애여래불과 열두 곳의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유서 깊은 사찰이란다.
석굴 사원은 인도나 중국과 달리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선 보기가 드물데,
바위산에 팬 굴의 모습이 마치 해골 같아 ‘골굴’ 이라 이름 지은 골굴사는 원효대사가 머물렀고, 또 화랑 수련 도량으로도 이름이 높았단다.
석굴에는 수십m 높이의 거대한 암벽에 열두 개의 석굴이 나있었다고 하는데,
맨 꼭대기에는 오랜 비바람에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뚜렷한 얼굴 윤곽과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는 마애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단다.
최근에는 ‘불가의 전통 무예와 참선’을 결합한 선무도를 체험할 수 있는 템플 스테이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단다.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사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단다.
눈·코·입의 처리에서 형식화가 뚜렷이 진행되고 있으며, 평판한 신체, 직선적인 신체 윤곽선,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무릎의 물결식 옷주름,
어깨의 V꼴 옷주름 등에서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단다. 보물 제581호로,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11:15 명주전시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명주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 주는 전시관이다.
11:50 감은사지
사적 제31호로〈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단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단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은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한단다.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12:30 양남주상절리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인데, 기둥의 단면은 4각~6각형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단다.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류가 급격히 냉각되면 큰 부피변화와 함께 수축하게 된단다. 이때 용암이 식으면서 최소한의 변의 길이와 최대의 넓이를
가지는 "육각기둥"의 모양으로 굳는 경향을 보인단다.
수축이 진행되면서, 냉각중인 용암표면에서 수축이 일어나는 중심점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런 지점들이 고르게 분포하면서, 그 점을 중심으로
냉각,수축이 진행되면 다각형의 규칙적인 균열이 생기게 된단다. 이러한 균열들이 수직으로 발달하여 현무암층은 수천 개의 기둥으로 나뉘게 되었단다.
이들은 용암의 두께, 냉각 속도 등에 따라 높이 수십 m, 지름 수십 cm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하게 된단다.
14:50 문무대왕릉
사적 제158호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단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고,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단다.
바위는 둘레가 200m쯤 되는 천연 암초인데 사방으로 물길을 터놓았는데. 이 물길은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고, 안쪽 가운데에 길이 3.7m, 높이 1.45m,
너비 2.6m의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어 이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682년 감은사를 지어 왜구를 막으려 했는데,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의 금당 아래를 깎아 동해로 구멍을 내어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15:30 한수원홍보관
17:00 경주시외버스터미널
18:30 야간시티투어버스 탑승
19:30 동궁, 월지(안압지)
동궁은 통일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쓰였단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라는 기록이 있단다.
이 연못이 바로 월지인데, 조선 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 부르기도 하였단다. 연못과 어우러진 누각의 풍경이
아름답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에 비친 야경이 더욱 유명하단다.
20:20 첨성대
국보 제31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단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원주부·정자형두부로 나누어진단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단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며 〈고려사〉에도 이어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단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제기된단다.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단다.
21:40 계림숲
사적 제19호. 원래 시림이라 하여 신라초부터 있던 숲으로 경역은 약 7,300㎡이며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단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는데, 그 궤짝 안에는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단다.
왕은 아이 이름을 알지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단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단다.
21:00 교촌마을, 경부향교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란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단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단다.
21:10 월정교
경주의 남천에는 지금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담긴 월정교가 복원되고 있단다.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월정교는 통일신라의 다리로 원효대사는 평소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오?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단다.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찾도록 명령한단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졌단다.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해 옷을 말리게 했고 원효대사는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단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난 아들은 설총이란다.
경주의 남천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강으로 월성의 남쪽을 감싸 안고 흐르는 이 강은 문천(汶川)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운 모래가 거꾸로 흘러
토함산으로 거슬러 올랐다고도 전한단다. 이 강은 신라의 설화와 역사를 안고 있는 있어 그곳에 있는 다양한 다리의 흔적들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란다.
월정교의 복원이 거의 마무리 돼 가는데 경주시는 월정교의 복원이 완료되면 단순히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물로서의 가치만 부여할 것이 아니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 누가 해도 달콤하고 아름답단다.
21:20 최부자댁
21:40 경주시외버스터미널
23:00 집도착
(야간시티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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