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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서 영원으로 (2012.09.24) - 불필 스님

동선(冬扇) 2012. 9. 24. 11:09

 

 

 

책소개

성철스님 탄생 100주년, 딸이며 제자인 불필스님이 처음 밝히는 큰스님 이야기!

성철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불필스님의 에세이 『영원에서 영원으로』. 큰스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출간되는 이 책에는 처음으로 밝히는 성철스님의 가족사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선지식들의 수행까지, 제자들을 뜨겁게 품은 은사 인홍스님부터 온 대중들을 감화시킨 큰스님들의 법거량까지, 책갈피마다 한국불교의 역사가 은은하게 묻어나고 스님들의 아름다운 향기가 깊은 무늬로 아로새겨진다.

이 책에서 성철스님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가장 멀리 있어야 했던 불필스님의 눈을 통해 가장 철저했던, 동시에 너무나 자비로웠던 참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대신,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대자유인의 길을 이끌어주는 사제의 연을 택한 결정은 홀로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걸어가는 수행자의 표본이었다. 이에 불필스님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다 합해서 다시 만나 뵐 것을 약속하는 아홉 번의 절로서, 영원한 대자유인으로서 성철스님을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한다.

이 책에는 인홍스님, 법전스님, 향곡스님, 묘엄스님, 법정스님 등 대가들의 성자 같은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 예로 11대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법전스님은 해인사에 있을 때 선방에 앉으면 미동도 하지 않아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는 해인사 전통의 용맹정진 때도 유일하게 졸지 않은 사람이 법전스님이었다. 졸지 않는 비결을 묻는 후학들에게 법전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화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졸 수 있는가?” 이처럼 철저한 정신과 수행이 법전스님을 우리 시대의 대승(大僧)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 책에는 그동안 불필스님이 개인적으로 소장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성철스님의 법문과 편지, 사진 자료들이 실렸으며, 과거에 가필된 형태로 발표되었던 성철스님의 친필 법문 노트를 원문 그대로 담겼다. 불교 수행자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증도가」, 「신심명」, 「토굴가」 등 여러 자료들을 채록해 실어 초심자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지침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저 : 불필스님

不必 1937년 지리산 자락 아름다운 경호강 굽이에 안겨 있는 묵곡리에서 성철스님의 딸로 태어났다. 봄이면 뒷동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꺾고, 여름이면 맑은 개울에서 물장난을 치고, 가을이면 밤나무 숲에 들어가 친구들과 알밤을 줍는 천진무구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갑작스럽게 언니의 죽음을 맞았다. 이후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생각에 빠져 있던 중 아버지 성철스님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의 길에 대한 말씀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1956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철스님이 직접 쓰신 법문 노트를 받아 수행의 지침서로 삼았다. 1957년 가지산 호랑이라 불리던 인홍스님을 은사로 석남사에서 출가하여,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1961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석남사 심검당에서 100일 동안 눕지 않는 장좌불와를 한 끝에 3년 결사를 회향했다. 출가 이후 자유로운 운수납자(雲水衲子)로 해인사 청량사, 태백산 홍제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묘적암,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대원사, 오대산 지장암 등 제방선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1993년 성철스님께서 열반하신 후 지금까지 석남사 심검당에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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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불필스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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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춘 스님(도솔암에서 불필스님과 함께 계셨단다)

 

 

 

 

성악가였다는 혜춘스님

모든 것을 갖춘 인텔리 여성이 자식을 넷씩이나 남겨두고 출가를 하니

성철 큰스님은 유별날 정도로 혜춘스님을 힘들게 하셨나봐요.

방에도 들이지 말라하여 법당 뒤에 거적을 깔고 한여름을 나게하고

밥도 부엌에 서서 얻어먹듯하고.

큰 체구에 주는 밥이 너무 적어 “이 거렁뱅이 밥 한술만 더 주시지요”라며

애원을 해도 밥도 더 주지 않았다는군요.

이러면서 세속에서 법률가 집안의 딸로 도지사부인으로 대접만 받던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하심수련을 혹독히 치러야 했지요.


성철스님의 다비식장에서 비가 오는 맨바닥에 비닐을 깔고 앉아

자신에게 매질을 아끼지 않으시던 스승을 보내는 노비구니 스님의 모습


혜춘스님의 세속의 아들은 차관급까지 오를 정도로 잘 성장했다지요.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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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홍스님(불필스님의 스승)

 

경남 합천에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는 성철스님이 있었다면 울산 가지산에도 호랑이로 불리는 비구니가 있었다. 원허당 인홍선사(1908~1997). 근대의 대 선지식 만공선사의 법을 받고 견성암 비구니 총림의 초대 원장을 역임한 묘리당 법희 선사(1887~1975) 등과 함께 비구니 선풍을 크게 일으킨 인홍스님은 격동의 시기, 한국 비구니 승단의 출가정신과 정체성을 확립시킨 산증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평생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생사를 해탈한 대자유인의 길을 추구하던 인홍스님이 열반에 든 지도 10년, 스님의 행장을 담은 일대기가 ‘길 찾아 길을 떠나다’(박원자 지음, 김영사)란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책에는 바늘귀만큼도 빈틈없이 수행 정진에 철저했던 젊은 날 선객의 모습에서 8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도 추상같이 자신과 제자를 경책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출가 수행자의 수행에 대한 열정과 고뇌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인홍스님이 출가한 것은 1941년,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선지식 한암 선사가 주석 중이던 오대산 월정사 산내 암자인 지장암이었다. 세속 나이 34세로 비교적 늦깎이, 그러나 스님은 이제야 참스승을 만났다는 환희심과 도를 구하는 길에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부처님의 정법대로 살아야 한다며, 혹독하다 싶을 만큼 원칙을 지킨 수행자의 자세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스님이 법의 스승을 제대로 만난 것은 1949년 부산 묘관음사에서 수행하면서 성철스님을 만났던 때로 봐야 한다. 성철스님은 당시 30대 말의 젊은 선객이었으나, 이미 도를 이루어 쏘아보는 눈빛만으로도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도인이었다. 비구니는 비구와 함께 머물 수 없다는 계율 때문에 근처 마을에 방을 얻어놓고 정진하던 인홍스님은 ‘생사 해탈’이라는 명제 하나만을 놓고 선방에 앉았다.

묘관음사에 오기 직전까지 봉암사 결사를 이끌던 성철스님은 장좌불와 중이었고, 그의 도반인 향곡스님을 포함한 대중들도 잠을 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직 정진뿐이었다. 움직이거나, 앉아 있거나는 말할 것도 없고 꿈을 꾸거나 깊은 잠을 잘 때에도 화두가 성성하게 하라. 동정일여(動靜一如)·몽중일여(夢中一如)·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어서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돼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뼈를 깎는 노력을 계속했다.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잠을 자지 안으며 수행하다 잠이 올 때면 행선(行禪·걸어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을 했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누비옷을 입고 행선중이던 인홍스님을 성철스님이 뜰앞 살얼음이 언 연못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공부에 신명을 바쳐라.”

성철스님이 보낸 무언의 뜨거운 경책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 스님은 천천히 못에서 나왔다. 엄동설한의 차가운 바닷바람으로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왔으나, 스님은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청산(靑山) 묵묵(默默)의 모습으로, 그 옷이 다 마르도록 행선을 계속하면서 정진했다.

인홍스님은 이어 경남 창원의 성주사와 경북 봉화의 홍제사에서 성철스님의 봉암사 결사 못지않게 엄격한 수행 결사를 이끌었다. 방안에서는 잡담이 일절 금지된 채 면벽좌선하고, 정해진 시각 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 등의 공주규약을 칼날같이 지키는 수행 모임이었다.

1954년 비구니종회의원으로 선출돼 절에서 대처승을 몰아내는 종단정화불사에 참여하기도 했던 스님은 1957년부터 석남사 주지로 취임, 부처님 정법대로 사는 회상을 만들기 위해 신명을 바친다. 석남사 주지를 맡으며 쇄락한 도량을 일으키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를 그대로 실천하던 스님은 1969년 60이 넘은 나이로 석남사 심검당 3년 결사를 시작한다. 마지막 100일은 아예 잠을 자지 않으며 용맹정진하는, 처절한 수행이었다. 또 주지의 소임을 다한 1976년부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운수납자가 됐으며, 이후 쌍계사 칠불암, 유가사 도성암, 지리산 상무주암, 덕산 대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을 계속한다. 그후 석남사 별당에서 주석하던 스님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서릿발같은 엄격함으로 후학을 지도하며 용맹정진을 할 때마다 장군죽비를 내리쳤다. 구순이 가까운 노인의 건강이 염려돼 공양할 때 대중과 다른 음식 한 가지라도 더 놓으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행자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사람은 물론 하늘을 감동시키는 사표가 돼야 한다…. 250명의 상좌, 손상좌, 증손상좌를 가르치고, 1500여명의 운수납자를 제접하며 비구니 승가의 수행 풍토 확립에 열정을 바치던 스님은 1997년 4월14일 시 한편을 남긴 뒤 편안하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사바의 인연을 다한다.

삼세불조(三世佛祖)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구순 생애 사바의 길 몽환 아님 없도다./일엽편주처럼 두둥실 떠나가는 곳,/공중에 둥근 달이 밝을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