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行)/기 타

2019.07.27. ~ 07.29. (휴가, 해남 일원)

동선(冬扇) 2019. 7. 30. 00:24


이순신대교-고산 윤선도 유적지-대흥사-도솔암-미황사-송호해수욕장

땅끝선착장-땅끝탑,전망대-공재고택-송평해수욕장-명량대첩기념관-울돌목,진도대교,진도타워-영암방조제-목포구등대

해남5일장-송광사-하동송림공원-최참판댁 마을




2019.07.27

05:50 집에서 출발

         이번 휴가는 한 달쯤 전부터 짝지랑 휴가시기를 맞추기로 했는데, 다행이 큰 어긋남이 없었다.

         해남으로 정한 것은 짝지의 한 마디가 있은 듯 한데,

         달마산과 도솔암에 대한 힘겨운 추억이 있어, 다시는 달마산이 있는 해남은 오지 않겠다고 했던 곳이다.

 

06:50 함안휴게소(아침: 비빔밥, 커피 30,000원)

08:10 섬진강휴게소

        - 옥곡IC(부산->옥곡IC, 통행료 8,200원) 


08:50 이순신대교 통과

08:55 이순신대교 전망대

         애초 이순신 대교는 일정에 없었는데, 섬진강휴게소에서 관광 안내판을 보다 눈에 띄여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멀리서 보는 대교의 모습은 참으로 멋져 보였다.

         그런데 그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차로 몇 십분 동안 그 지역 주변을 헤매야 했다.

         집에서 이곳까지 오는데도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도 했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하기도 했다.


10:50 보성녹차휴게소

           - 강진IC(광양IC->강진IC, 통행료 4,800원)


11:50 고산 윤선도유적지(입장료 4,000원)

         고산 유적지에 왔을 때도 비가 오락 가락했다. 녹우당 주변을 돌아볼 때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고산사당' 처마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한참 동안 기다리다 결국은 비를 맞았다.

         유적지 주변의 자연환경이 너무나 좋아 날씨만 궂지 않았다면 한 두시간은 그 주변에서 걷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곳 비자나무숲을 걷고 싶었다.

         그곳에서 국활나무(굴거리나무)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국활나무, 굴거리 나무)

          한자어로는 교양목(交讓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새잎이 난 뒤에 지난해의 잎이 떨어져나간다는, 즉 자리를 물려주고 떠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단다.

          그래서 이 나무의 잎이 달린 가지는 상서로운 것을 상징하는 장식으로 쓰이기도 한단다.

          얼핏 보면 잎의 모양이 만병초와 닮아서 굴거리나무를 만병초로 부르는 지방도 있단다.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섬에 자생하며,

          백운산·내장산에도 나타난단다. 잎이 고무나무처럼 싱그럽고 남국적인 향취가 있어 난대지역의 정원수로 좋으며, 가로수로도 유명하고,

          한방에서는 잎과 껍질을 급성늑막염·복막염과 이뇨에 사용하고, 민간에서는 잎을 달인 물을 구충제로도 사용한단다


13:20 대흥사

         대흥사도 예전에 산에 많이 다닐 때 분명히 몇 번을 왔을텐데, 절 안에 들어가서야 기억이 어렴풋하다.

         웅장하고 깔끔한 멋을 보이는 절이다.


15:25 도솔암주차장

         차를 가지고 이곳까지 갔는데, 비가 오락가락하고, 안개는 짙어서 산아래의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또 길은 작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듯한 경사진 길이사 위험하기 천만이다.

         만약 오가는 차가 마주친다면 족히 한 100미터는 후진을 해야 비켜갈 수 있는 길이었는데, 누군가는 혼줄이 날 듯한 길이다.

         당초는 미황사를 먼저 들렀다 이곳으로 올려 했는데, 비도오고 있어 날씨가 어찌될지 몰라서 이곳을 먼저 들린 것이다.


15:45 도솔암

         도솔암은 대한 기억은 조금 특이하다.

         이 암자를 찾게 된 것은 어느 작가의 책 '하늘이 숨긴 땅'에서 본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고,

         막상 이 암자를 찾았을 때는 한 여름 더위에 너무나 고생을 한 까닭이다.


16:25 미황사(부엉이 10,000원, 팥빙수 10,000원,  차량 유류 50,000원)

         전에 도솔암을 오를 때 등산 초입이었는데, 주차장에 도착하자 마자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절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사진도 몇 장 찍지도 못한채 절을 떠나 왔다.


17:30 숙소(60,000원)

         물론 본격적인 휴가철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남의 바닷가는 많이 한적하다.

         요즘의 트랜드는 해수욕장보다 계곡인가? 펜션보다 호텔인가? 휴가철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숙소를 정하고 차를 옯기려는데 시동이 안걸린다. 제조사에 전화하고, 보험사에 전화하고...한 바탕 난리를 쳤는데,

         알고 보니 내 실수다.

         자동차 기어를 중립이나 파킹에 놓지 않고 시동을 꺼. 시동장치에 잠금이 발생된 건데, 그것도 모르고 시동이 안걸린다고 난리를 피웠다.


19:00 송호해수욕장, 저녁(갈치조림 24,000원)

         저녁도 먹을겸 숙소 근처에 있는 송호해수욕장을 찾았는데, 마침내 '노래자랑' 행사가 있었다.

         마을사람, 휴가온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었다. 


 21:00 숙소 귀가 및 취침


2019.07.28.

04:30 기상 및 숙소출발

05:00 땅끝 선착장

         해남에서 일출로 유명한 곳이란다. 인터넷에서 구하고 구한 곳인데,

         해안에서 30미터 정도 떨어진 맴섬(쌍둥이 바위)을 배경으로한 일출이다. 계절적으로 지금 맴섬의 중간부분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볼 수 가 없었다.

         2월과 10월 정도가 좋단다.

         그래도 이것이 어딘가, 어제만해도 비가 내렸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는데, 어제 와는 다른 맑은 날이될 듯하다.


06:40 땅끝탑

07:14 땅끝 전망대(입장료 2,000원)

         모노레일도 있는데, 지금 이시간에는 운영을 하지 않는단다.

         낮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등산한 듯 모처럼 땀을 흠뻑 뺐다.


08:00 땅끝 선착장(아침: 콩나물 해장국 16,000원)

08:50 숙소 도착 및 출발

09:40 공재고택

         공재는 윤두서의 호다.

         공재 윤두서는 고산의 증손자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 화가란다. 해남 윤씨가의 학풍은 고산 윤선도로부터 시작된단다.

         윤선도는 아녀자들의 글로 치부되었던 한글로 시를 지었고, 박학다식과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던 인물이란다.

         고산의 학풍은 공재로 이어져 조선사회에 새로온 화풍을 개척했단다. 그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최초로 선보였고, 사실주의 화풍도 개척했으며,

         공재의 작품중 자화상(국보 240호)은 서양화법을 도입한 사실주의적인 작품의 최고로 평가 받고 있단다. 


       


10:10 송평해수욕장

          논 다섯 마지기(약 1,000평)는 족히 되어 보이는 제법 넓은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만 덜렁하니 서 있다.

          아마도 컨테이너 반 만한 해수욕장 관리사무소 직원의 차 인듯 하다.

          도심 같았으면 수 천명이 족히 해수욕을 즐길 듯한 곳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고, 화장실, 샤워실, 음수대는 작동 불능이다.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듯, 한 참 동안 감시대에서 앉아 놀다 왔다.


11:10 명량대첩기념관, 울돌목, 진도대교(입장료 4,000원, 커피 등 10,000원)

         익히 우리가 잘 아는 이순신 장군 관련 기념지역이다. 진도대교 밑의 울돌목은 언제봐도 신기하다.

         

13:26 진도 타워(입장료 2,000원, 홍주 55,000원)

         예전에 없었던 타워가 생겨있었다. 그곳에서 보는 진도대교 근처의 경치는 무척 좋았다.

         잠시 기념관에 들러니 '紅酒'가 눈에 띈다.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와인을 비롯하여 술이 있으면 그냥 모은다.

         그래서 홍주 한 병을 쌌다. 우리집에 있는 술 중에서 가장 높은 도수(60도)의 술이 되겠다. 그 전에는 금문주(58도)였다.


      


14:10 목포구등대, 두루미등대(라면 등 12,000)

         이곳도 이번 일정에 중요한 한 코스다,

         내가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하거나 할 때면, 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일출과 일몰이고, 이에 맞는 장소를 찾는 것이다.

         땅끝마을 쌍둥이 바위의 일출, 목포구등대(두루미등대)의 일몰도 그렇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곳이라 위치과  적정한 포인트를 잘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날씨와 환경이다.


16:20 영암방조제

         일몰시간을 맞추는 데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그 주위 가볼만한 곳을 찾았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3~4킬로 이내에 카페도 없단다.

         그래서 시간도 보낼 겸해서 '영암 방조제'를 찾았는데, 그냥 지나치면서 보는 게 더 나을 듯하다.


17:45 목포구등대(아이스크림 2,000원)

         일몰 시간에 맞춰 다시 이곳으로 왔지만 아직도 시간이 남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못견딜 만큼의 더위는 아니다.

         일몰을 기다리고 있는데, 해남지역 사람이 듯 한 몇 분이 일몰 사진을 찍으로 왔다. 별로 좋은 일몰 환경은 아니란다.


19:50 목포구등대 출발

20:20 숙소(60,000원) 및 저녁(20,000원)


2019.07.29.

07:30 기상

         일출을 볼 계획이 없어 조금 늦게 기상을 했다.

         그래도 이 숙소는 최근 신축한 모양인지 방도 넓고,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컴퓨터가 있어 좋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고, 선별할 수도 있어 나중의 일을 조금 덜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휴가 기간에 읽으려고 산 책은 채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했다.

         휴대폰에 내용을 정리하면서 읽으려니 그렇고, 환경이 따라 주지 않았다.


09:00 해남5일장

         시골의 5일장 모습을 한 번 보려고 했는데, 장이 서는 날이 아니란다. 해남읍에서는 1일과 6일이란다.

         또 휴대폰 네비가 장이 서는 곳을 잘못 알려 주는 바람에 한 참을 헤맸다.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에게 물었더니 자세히 가르쳐 주시면서

         "많이 놀다 가시라"며 생각지도 않은 말을 들었는데,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했다.


09:40 차량 연료(50,000원) 

10:30 송광사주차장(통행료: 강진-> 보성 2,700원, 아점 24,000원)

         송광사 주차장 한 음식점에서 '돌솥비빔밥'을 아점으로 먹었는데, 우리가 두 번째 손님이란다.

         큰 주차장에 차들이 몇 대 없다. 또 길게 늘어서 있는 음식점들은 개점 휴업상태다.

         식당 주인의 말로는 손님이 없단다. 경기도 그렇고 휴가철도 아니라서 그런 듯하다.  내가 이런 먼 곳을 찾았을 때는 아마도 산악회에서 등산을

         왔울 때인데 그럴 때는 이런 곳에 손님들로 찼었다.


13:40 하동송림공원(통행료: 주암->동광양 2,900원)

         하동송림공원에도 사람들이 거의 없다.

         섬진강 모래톱에 어린 아이 몇이 뙤약볕에 놀고 있는 듯하다.  송림속의 바람은 에어컨 보다 더 시원한데 다들 어디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을까?

         또 손님 맞을 준비로 새로 조성한 주차장에는 우리 차 한 대만 서있다.

         옛 철길은 둘레길 코스에 포함되어 어제 개통했단다. 아마 외지 손님으로는 우리가 처음일거다. 섬진감을 가로 지르는 철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고

         철길에서 보는 섬진강의 모습이 참으로 좋았다.


15:50 평사리 최참판댁 마을(팥빙수 등 15,000원, 기념품 10,000원)

         최참판댁은 가끔와 본 곳이다. 시간이 남으면 한 바퀴 돌려고 했는데, 짝지가 양산에서 친구랑 약속을 잡는다.

         지금 여기서 출발하면 퇴근하는 친구와 대략 맞아질 거란다.


16:10 평사리 출발

18:30 물금 도착(통행료: 하동->산인 5,000원, 마산->물금 2,300원)

         약속한 음식점에 도착할 때 쯤 친구의 차가 보인다. 낙지볶음을 먹고 친구집에 갔는데, 연로하신 분들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차를 마시며 잠시 머물다 집으로 왔다.


21:00 집 도착

         이렇게 올 여름 휴가는 끝났다.

         독일에서 나름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큰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하는 일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 한 편으로는 뿌듯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기에 따르는 애로사항도 있는 듯 하다.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좀 그렇다.


         오늘 아침 7시정도부터 오후 5시가 되어가는 지금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이번 휴가를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몇 번을 더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절약하면서 다녔는데도 2박 3일의 경비는 나 짝지 합해서 한 오십만 원은 쓴 듯하다.



(이순신 대교)



이순신 대교는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이 펼쳐진 여수시 묘도동과 광양시 금호동 사이의 바다위에 건설된 대교로 노량 해협과 인접한 지역이고,

왜적과 7년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장소이도 하단다. 2013년 2월 8일 개통되었고, 여수에서 광양을 잇는 순수 우리

기술로 시공한 국내 첫 현수교로 2.260m로 현수교로 국내최대, 세계4위 규모로 '하늘과 바다 사이의 평행선' '철로 만든 하프'라고 불리울 정도로 웅장하단다.


이순신 대교가 있는 이곳은 노량 해협과 인접한 지역이고, 전투를 이끈 이순신 장군의 주 활동 무대 중 하나이자 그가 전사한 곳이기도 하단다.

이순신대교에는 경치를 감상하고 쉴 수 있는 홍보관 겸 휴게시설이 운영중에 있는데, 거북선을 형상화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건물에 반영하였으며,

이순신 대교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단다. 홍보관은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1층 홍보관에는 이순신대교 건설 당시의 사진과 세계 주요 교량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관에서는 이순신 대교 건설 당시의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단다. 야간에는 이순신 대교의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자,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유적지로, 이곳 유적지에는 해남윤씨의 고택인 녹우당,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 추원당이 있고, 유물전시관에는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 전고화첩, 윤선도 종가 문적, 노비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단다.

윤씨 어초은파의 종가 고택인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의 하나로도 알려진 곳이고, 뒷산 중턱에 있는 비자나무 숲은 약 500여년전

이루어 놓은 원림으로 알려져 있단다. 

고산 선생은 광해 4년(1612)에 진사가 되고, 4년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권신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으나, 광해 15년에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다가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했단다. 인조 6년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급제한 후

안평과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차례 걸처 중용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에는 주로 해남과 완도의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이루어 원림문화와 국문학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단다.












[서사]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水]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松]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노라.

[竹]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



춘사(春詞)
고운 볕이 쬐이는데 물결이 기름같다.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그물을 드리워볼까 낚시를 놓아볼까.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탁영가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으리로다.
 
하사(夏詞)
연잎에 밥을 싸고 반찬은 준비하지 마라.
닻 올려라 닻 올려라.
삿갓은 이미 쓰고 있노라. 도롱이를 가져 오느냐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저를 좇아가는가, 제가 나를 좇아오는가.
 
추사(秋詞)
흰 구름이 일어나 나무 끝에서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에는 서쪽 바다요, 썰물에는 동쪽 바다로 가자.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강가의 꽃들이 가는 곳마다 아름답구나.
 
동사(冬詞)
지난 밤 눈이 갠 후에 경치가 달라졌구나.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앞에는 맑은 바다, 뒤에는 겹겹이 둘러 있는 흰 산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선계인지 불계인지 속세는 아니로다.





(대흥사)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란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단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단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인데,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고, 13 대종사 가

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단다.




















(도솔암)












달마산 도솔암은 통일신라말 화엄조사 의상대사가 창건하신 천년의 기도도량으로 달마산 미황사를 창건하신 의조화상께서 미황사를 창건하시기전

도솔암에서 수행정진 하셨던 유서깊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암자란다.

이 도솔암은 조선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왜구들이 해상도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중 화마를 면치 못해 빈터에 주춧돌과 기왓장만 남아

있었는데, 30년전부터 여러차례 많은 스님들이 복원을 시도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단다. 그러다 2002년 오대산 월정사에 계셨던 법조 스님이 연속 3일간

선몽의 꿈을 꾸고 현세에 한번도 오지 않았던 이곳 도솔암 터를 보고 해몽하여 32일만에 건립하였단다.

  
















(미황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란다.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단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단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불교관련 물품들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단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

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단다.

그뒤의 사적은 알 수 없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1601년(선조 34)에 중창하고, 1660년에 3창했단다. 







(송호해수욕장)








(땅끝마을 선착장)



(맴섬)











(땅끝 전망대)





(땅끝탑)







(땅끝 전망대)






(공재 고택)



공재고택은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이란다. 고산 윤선도가 큰아들을 분가시키고 살기 위해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이 가옥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후에 증손인 윤두서가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단다. 윤두서는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과 함께

조선의 3재로 일컬어지는 선비 화가란다.

윤두서고택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을 알 수 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으로 이 고택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 11년(1670)에 지어졌고,

순조 11년(1811)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처음 건립했을 당시엔 문간채와 사랑채 등 48칸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와 곳간채, 헛간, 사당 등이 남아있단다.







(송평해수욕장)






(울돌목)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왜군의 선단과 싸워 승전한 명량해전의 격전지란다. 화원반도(花源半島)와의 사이에 놓인 명량해협의 폭은 가장 좁은 부분이

293m이며, 조류는 사리[大潮] 때의 유속이 11.5노트이고, 수심은 19m란다.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12척의 병선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여 31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전투인데,  그 당시에는 사리 때여서 물살이 빠른 데다 적이 침입할 때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아군에게 유리하였단다.

이 해전은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이 한강유역으로 침입하는 길목을 차단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데, 명량의 지명 유래는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하여

바닷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 한 데서 나왔단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에 녹진(鹿津)이 있어 진도와 우수영(右水營)을 연결하였고, 남쪽의 벽파진(碧波津)은 삼지원(三枝院)을 통하여 해남(海南)과 이어졌단다.

당시 벽파진에는 벽파정(碧波亭)이 있었고, 육지와의 연결은 주로 벽파진 나루를 이용하였는데, 현재 명량에는 등대가 있단다.



(진도대교)






(울돌목 물살)











(진교 전망대)











(목포구등대, 두루미등대)








(영암방조제)





(목포구등대, 두루미등대)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 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큰 절인데, 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단다.

고려 명종 때 보조 국사 지눌이 크게 고쳐 지었단다. '송광' 이라는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되었고, 그 뒤 이 절에서 16명이나 되는 국사가

나와 승보 사찰로 유명해졌단다. 불교도가 존경하고 섬기는 불 · 법 · 승을 삼보라 하는데,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삼보 사찰이라고 한단다.

현재 16국사의 영정이 국사전에 모셔져 있단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빈 터만 남아 있고, 1842년 큰불이 나서 대웅전과 함께 많은 건물이 타기도 했단다. 또 여순 반란 사건과 6 · 25 전쟁 등을

겪으며 절 주변의 숲이 못쓰게 되고 대웅전 등이 불타기도 했지만 그러한 때마다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렀단다.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 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단다. 이곳에는 국보인 '목조 삼존 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단다.

















(하동 철교)











(하동 송림)













(최참판댁 마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