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行)/길따라 물따라

2019.04.20. (창령 개비리길)

동선(冬扇) 2019. 4. 21. 10:16


창령 개비리길 주변

(산행시간 : 3시간 20분)



07:50 집에서 출발

         특별한 계획을 하지 않은 채 나선 산책겸 운동이다.

         며칠 날씨가 춥더니만 오늘은 초여름 날씨다.

         창령하면 우포늪이 먼저 떠오르고, 우포늪은 계절에 상관없이 자주 가본 곳이고 참으로 좋은 곳이다.

         우포늪 둘레길 비슷한 가벼운 코스가 있는 모양이다.

     

09:15 영아지마을 입구

         '개비리길' 입구라는 안내판이 있고, 미처 10대의 차량도 주차할 수 없는 작은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에는 승용한 한 대가 있었는데, 아마도 낚시를 하러 온 사람의 차인 듯 하다.

09:36 영아지 전망대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팔각정 전망대에 한 남자가 잠시 운동을 하더니만 누워 자는 척한다.

         인기척이 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는 난처하거나 머쓱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09:44 팔각정

10:20 우실등(220)

          가끔 산에가면 '이런 친절한 사람이 있나' 하면서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곤 하는 작은 '안내판'이 나무에 걸려 있다.

         

          '준.희'라고 표시하고 산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이런 안내판은 나 같은 '산 초보'에게는 상당한 정보를 주곤 한다.


10:55 아지리마을

         언덕같은 나즈막한 산길을 따라 내려 오니 몇 가고 살지 않는 '아지리'란 마을에 도착했다.

         길을 따라 내려오긴 했지만 이 길이 우리가 가고자 한 길인지 알 수 없다.

         사전에 이곳을 올 생각을 하지 않고 갑자기 온 터라 정보라곤 들머리에서 찍은 안내판이 전부다.

         마을 주민들도 만날 수 없고, 별도의 안내판도 없어 마을 안에 있는 '경로당'을 찾았다.

         할머니 몇 분이 계셨는데, '양아지'로 갈려면 걸어서 한 시간쯤 가야 한단다.  아무튼 차길을 따라, 또 강둑을 따라 걸었다.

12:40 영아지마을 입구

         아무튼 한 시간쯤 걸어 목적지인 양아지마을 입구까지 왔는데, 배가 고파서 혼 났다.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달랑 물 하나만 들고 갔는데, 

        그곳은 시골이라 상점조차 없다. 아마도 허기를 느끼면서 삼십 분 이상은 걸은 듯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창령읍내 청국장 집을 찾았는데, 규모가 상당하다.

        그런데 그기 단체손님들도 많아 혼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 30분을 기다려 겨우 '청국장 보쌈정식'을 먹고 창령을 떠났다. 


        그런데 오늘, 아무런 준비없이 간 코스라 아래의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은 걷지 못했다.

        아마 첫시작은 맞았는데, 어느 정도 올라가다 우측으로 가야할 길을 좌측으로 갔나보다. 그래서 진작 걷고 싶었던 길은 걷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가봐야겠다.


        아참! 걷는 도중에 '탱자나무 꽃'을 봤는데, 백색의 작은 꽃잎이 이뻤다.




낙동강 남지개비리길은 남지읍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에 이르는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랑을 따라 자연적으로 조성된 길이람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이 길은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경을 가슴에 담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시골 여행길이란다.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등록문화재 제145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유래는

여러 이야기로 전해진단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조그만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단다. 힘이 약했던 조리쟁이는 어미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지는 그런 조리쟁이를 가엾게 여겼는데, 할아버지는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두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 너머 시집간 황씨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가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집인 알개실(용산리)로 데려갔단다.

며칠 후 황씨할아버지의 딸은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보고 깜짝 놀랐는데,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山)을 넘어 온 것이었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다녔던 것을 알게 되었단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단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하며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

한단다.
















(탱자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