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0 집에서 출발
올해 겨울은 추위도 없었고, 어느 해보다 일찍 봄이 찾아온 듯 하여 '구례 산수유 꽃축제' 가 있기 몇 주 전이지만,
혹시나 하고는 집을 나섰다.
매년 산수유가 피는 봄이면 혼자서 가기도 하고, 가족과 가기도 하고, 또 친척과 가기도 하고, 친구랑 가기도 했는데,
어떤 때는 꽃이 피는 삼월인데도 멀리 보이는 지리산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여름인지 모를 정도로 더울 때도 있었다.
08:00 산동마을 도착
산동마을에는 산수유꽃도, 매화꽃도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길에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아래와 같은 모습을 보려면 최소 이때 이후는 되어야 할 듯하다.
08:10 아침식사
산동마을 입구에 있는 순두부 집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몇 년전에 왔을 때 '전국노래자랑' 영원한 사회자인 '송해' 선생과 그 일행분들이 아침을 드시고 계시는 모습을 본 식당이다.
그런데 산수유꽃이 없는 이곳은 그저 황량하고 쌀쌀할 뿐이다.
08:40 상위마을
산수유꽃이 만발했을 때 상위마을 전망대에서 본 마을의 전경인데, 오늘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저 초라한 시골마을이랄까.
그래서 그곳에서 가까운 '수락폭포'로 향했다.
09:00 수락폭포
산동면 소재지인 원촌마을에서 4km 거리인 수기리에 위치한 수락폭포는 하늘에서 은가루가 쏟아지는 듯한 아름다운 풍치를 이룬단다.
높이 15m의 폭포로 여름철이면 많은 부녀자들이 낙수를 맞으며 더위를 식히는데 신경통, 근육통, 산후통에 효험이 있다하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단다.
10:00 구례예술인마을
낯익은 마을이다. 지리산둘레길 막바지에 다다를 쯤인 2014.02.01. 이 구간(방광마을~산동마을)을 지났다.
이 당시는 이 마을에 건물이 몇 개 없었는듯 하였는데, 그새 많이 들어선 모양이다.
10:29 천은사
남방제일선찰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지리산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단다. 천은사는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밝고 따뜻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리산의 높고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절 옆으로 펼쳐지고 우람한 봉우리가 가람을 포근히 둘러싸고 있단다.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지금은 노고단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절앞까지 이어져 있고, 화엄사까지 직통하는 도로가 놓여 있어 어렵지 않게 절을
찾을 수 있으며, 산문과 일주문을 지나 수홍문을 건너면 절이 있는데, 천은사는 신라 때 창건된 고찰이란다.
신라 중기인 828년(흥덕왕3)에 인도의 덕운(德雲) 스님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의 지리산에 들어와 천은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단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은사 중건 당시 지어진 극락보전 상량문에 의하면 창건과 관련하여는 "당 희종 건부2년(875년)에 연기(도선국사)가 가람을
창건하였고 후에 덕운이 증수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단다.
절이름이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뀐데에는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자,
한 스님이 그 뱀을 잡아 죽였더니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단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단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마을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단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단다. 그 뒤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단다
11:37 오미마을(운조루)
이곳도 지리산둘레길의 한 코스에 포함된다.
내가 이곳은 2013.12.01(송정마을~오미마을 구간)에 들렀었는데, 그날 춥고 바람이 많이 불고 점심먹을 곳이 없어서
프라스틱으로 만든 마을버스정류장 부스안에서 라면을 끓여먹었던 기억이 있다.
운조루(雲鳥樓)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단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는데. 큰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단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로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단다.
집을 지 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칸집이었는데,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한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단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었고,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민도리집' 구조로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란다.
'운조루' 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사랑채 이름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란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란다.
13:15 남원시
13:30 광한루
보물 제281호.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
(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단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으로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
(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고. 그 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단다.
16:00 남원 출발
매년 이곳을 찾을 때면 만개한 산수유꽃과 매화꽃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꽃없는 이곳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이달 중순 아니면 이달 말 쯤 다시 한 번 와야겠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모든 기분이, 모든 마음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一切唯心造'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수락폭포)
(천은사)
(오미마을)
(광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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