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行)/ㄱ,ㄴ,ㄷ

2018.04.08. (공덕산 : 가족이랑)

동선(冬扇) 2018. 4. 7. 17:31


2018.04.07

제1관문(주흘관) - 지름틀바위 - 조령원터 - 교귀정 - 조곡폭포 - 제2관문(조곡관) - 바위굴 - 제1관문 왕복

(소요시간 : 2시간)


2018.04.08

대승사 - 사불암 - 윤필암 - 묘적암 - 묘봉(810) - 쌍연봉(8280 - 대승봉(820) - 공덕산(913) - 반야봉(781) - 대승사

(산행시간 : 4시간 20분)





2018.04.07

10:30 집에서 출발

         산에 가기 위해 왜 이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섰는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내가 산에 가기 위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선 적이 있었던가? 아마 기억해 내기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된 것인지 하면,

         요즘 며칠 일기가 좋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가 하면, 미세먼지를 포함한 황사로 인해 하늘다운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나를 포함한 온 국민이 고통을 겪었을 것이고, 또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나, 많은 어린애들이 병원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려고 했었다. 그런데 짝지가 내일도 쉰단다. 자주 있지 않은 연휴다.

         기회다.


         사불암이 생각났다.

         언제가(블로그를 뒤져보니 2016.05.11), 어느 작가(신문기자 출신 조현)가 쓴  책(하늘이 감춘 땅)에서 소개된 사불암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물론 내가 사는 곳에서 너무나 먼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별로 가고 싶어하지도 않을 짝지와 함께 이 시간에 나선 것이다.

         이와 나선 김애 문경새재에 가서 가벼운 산책을 하고, 내일 사불암이 있는 공덕산 산행을 할 계획이다.  


         사불암(四佛岩),

         암자 庵이 아니다. 바위 岩이다.

         사불암에 대한 소개는 내일 산행을 한 뒤 하겠다.


         사불암을 소개한 <하늘이 감춘 땅>은

         한겨레 종교/명상 전문기자 조현이 거의 1년간에 걸쳐 취재한 대한민국의 오지 암자 기행서다.

         묘향대와 상무주암을 비롯한 지리산 자락의 여러 암자들과 화려한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달마산 미황사의 도솔암, 300여 명 비구니들의 운문사,

         두만강 너머의 일광산 범바위까지, 천상의 영역인 듯 속세로부터 슬쩍 비켜선 암자 29곳과 그곳에 사는 산승들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은 책이다.

12:30 삼국유사 군위휴게소(부산어묵우동 5,500원 * 2, 통감자 4,000원, 주유 50,000원)

         와! 비싸다.

         한 젖가락 남짓한 우동가락과 엄지 손가락 한 마디만한 어묵 몇 개를 넣고 그 가격을 받다니,

         또 골프공보다 작은 감자알 열 개에 4,000원이라니, 비싸도 너~~~~~무 비싸다.


14:00 문경새재 주차장(고속도로 통행료 14,200원)

         문경새재는 잘 알려진 고갯길로, 새재에서 먼 한반도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진도에서 부르는 진도아리랑에도 사설의 첫 대목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도 관련이 깊은 곳이란다. 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시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제1대로였던 영남대로에 위치하고 있단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단다. 고갯길이 워낙 높아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고갯길 주변에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한단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단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낸 고갯길’이단다.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단다.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도 과거길과 관련이 있단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라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했단다. 《택리지》에도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단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에 개통되었단다. 새재가 열리기 전까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계립령의 하늘재가 주요 교통로였는데,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단다.

         새재는 세 개의 관문을 따라 옛날 선비들이 다니던 길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약 10km에 이르는 구간이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단다.

         새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초점(草岾),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충청도의

         한강 유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유역을 가르는 주된 도로였단다.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단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단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하였고, 그 후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단다.

         새재길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갯길에 얽힌 설화와 민요가 매우 다양하단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세 개의 관문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첫째 관문은 주흘관(主屹關)으로 숙종 34년(1708)에 설치되었으며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단다.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

         고도 한단다.  마지막 관문은 조령관(鳥嶺關)으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단다.


         20세기 초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이화령 고갯길이 만들어지면서 문경새재는 폐도가 되었지만, 새재에 설치된 관문과 더불어 새재 고갯길은 옛 모습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단다. 새재길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와 임지를 떠나 새로 부임하는 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만나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

         터가 남아 있단다. 문경새재는 옛길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고갯길로서 옛날의 분위기를 느끼며 한번쯤 걸어볼 만하단다. 그 옛날 이 길을 넘던 수많은

         선조들의 감흥과 애환을 떠올리며 새재를 걷는 것은 매우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것이란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새재를 넘으며 이렇게 읊고 있단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嶺路崎山虛苦不窮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危橋側棧細相通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長風馬立松聲裏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盡日行人石氣中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幽澗結氷厓共白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老藤經雪葉猶紅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到頭正出林界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西望京華月似弓


      -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14:15 제1관문(주흘관)

         기억이 난다.

         언제가(2007.02.11. 조령산, 2007.09.09. 주흘산) 산악회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이래서 인간인가 보다. 물론 우리 인간보다 더 기억력이나 후각, 청각이 수 천배, 수 만배 좋은 동물도 있다.

         연어가 성어가 되어서 자기가 태어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내 머리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14:36 지름틀바위

14:38 조령원터

         나그네의 숙소 역할을 했던 곳이란다.


14:45 마당바위

14:51 교귀정(交龜亭)

         임지를 떠나 새로 부임하는 신구 경상도 관찰사가 만나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곳이란다. 


14:55 꾸구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아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흔들렸단다. 특히 아가씨와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는 전설이 전해진단다.


15:00 소원성취돌탑

15:02 응암(매바위)폭포

15:04 조곡폭포

15:07 제2관문(조곡관)

15:10 조곡약수

15:18 바위굴

         바위굴에서 유턴을 했다.

         내일 산행을 위해서고, 산행후 장거리 운전이 남았다.

         또 내일은 초등학교 동창회와 동기회가 있는 날인데, 저녁에 참석할 생각인데 잘 될지 모르겠다.


15:28 제2관문(조곡관)

16:03 제1관문

16:20 문경새재 주차장

         문경새재 제1관문 근처에 있는 문경새재 관리사무소에서 모신문에 게재되어 있는 '공덕산 산행안내지'를 프린트했는데,

         애초 산행계획이 없어 준비하지 않았었고, 또 집에 프린트기가 없어 산행안내지 없이 그냥 나섰다.

         다행히 관리사무소 직원이 친절하게 내 요청을 들어줘서 쉽게 해결했다.


16:50 문경온천호텔(보리빵 10,000원, 숙박료 50,000원, 저녁식사 24,000원)


2018.04.08.

05:40 기상

06:20 숙소에서 출발

         오늘 산행출발지인 대승사로 가는 길에 아침을 먹으려고 계속 찾았지만 시골이고, 또 이른 시간이라 식당은 커녕, 문을 연 상점하나

         찾을 수 없었다. 아침 식사 해결이 안되면 어제 사 둔 보리빵으로 떼워야 할 형편이다.


07:20 대승사 도착(산행 시작)

         절에 들어서니 인기척 하나 없다. 그렇다고 스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범어사나, 내원사나, 통도사 같으면 지금 시간이면 스님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일텐데,

         새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정말 고요한 절이다. 내 발자국 소리가 무색할 만큼 조용하다.

        

         대승사(大承寺)

         사불산 대승사는 아름다운 창건설화와 함께 비교적 풍부한 사적을 보우하고 있단다.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승사사적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서총대사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을 중창하였고,

         다시 효종 2년(1651 경묵 대사가 대웅전 동쪽의 선당을 중창하였다고 하였단다. 이후에도 인조 8년(1630)에서부터 숙종 29년(1703)에 이르는 사이에는

         계담 대사, 각인 대사, 선림 대사, 혜탄 대사, 종수 대사, 원응 대사, 등 역대제사의 중수가 있었단다. 고종 12년(1875) 목각후불탱을 부석사로부터 이안

         하여 계속 시비가 일기도 하였으나, 결국 대승사에 귀속되었단다. 그리고 1922년 여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는데, 

         이에 의운, 취월, 덕산 대사 등이 정재를 모아 1927년에 옛모습대로 복구하였단다. 그러나 1956년 1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을

         남기고 불타버리자 남인, 대휴, 설월, 정암 대사 등이 힘을모아 대웅전, 응진전, 대방,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단다.


07:33 이정표(윤필암, 사불암 가는 길)

         컴퓨터로 "윤필암, 사불암 가는 길입니다"라고 인쇄하여 팻말을 세워 놓았다.

         아마 윤필암과 사불암으로 가는 길이 헷갈리거나, 또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이 함께 있나 보다.

 

07:40 장군수

         그 물을 오래 마시면 장군 같은 힘이 난다는 샘물 이란다.


07:44 이정표(대승사 0.7, 윤필암 0.4, 사불암 0.4)

07:56 사불암

         사불암은 높이 3.4m, 너비 2.3m 크기의 작은 바위에 새겨진 평범한 불상이란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바위의 네 면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여래· 미륵불이 돋을새김돼 있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고 깎여 언뜻 봐서는 형상을

         식별하기 어렵단다. 그러나 해발 600m가 넘는 산줄기의 툭 튀어나온 너럭바위 위에 자리 잡아 주위를 압도한단다.

         너럭바위 아래로 신라·백제·고구려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접경지대가 굽어보여, 하늘에서 내려온 네 부처가 창칼을 물리치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불국토를 선포하는 듯하단다.

         그 선포의 주체는 신라이고, 불국토는 신라가 추진하는 통일왕국이단다. 그에 관한 내용이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에 나온단다.

         "죽령 동쪽 백 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년)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단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이 새겨지고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란다. 왕이 가서 보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단다. 법화경을 외는 중을 청해 절을 맡고, 그 산을 사불산이라고도 한단다.

         " 진평왕은 선덕여왕에 앞서 통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인데, 하늘이 신라에 석불을 내려보냈다는 신화를 만들어 국내의 민심을 모으고 국외에 통일의

         명분을 천명하는 고도의 종교정치 전략을 구사한 것이란다.


08:12 장군수

08:19 윤필암


         윤필암(潤筆庵)

         윤필암은 문경의 사불산에 있는 대승사의 부속 암자란다. 대승사의 창건은 사불산의 산마루에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과 관련이 있단다.

         대승사의 암자인 윤필암은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과 찬성(贊成) 김득배의 부인 김씨가 창건하였단다. 각관과 김씨는 나옹화상이 입적하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윤필암을 짓고, 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단다. 이색은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그 돈으로 사찰 건립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는데,

         윤필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서는 “이색이 왕명을 받들어 나옹의 부도명을 지었다. 나옹의 문도들이

         집필료를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받지 않고 그 집필료로써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수리한 암자를) 윤필암이라고 불렀다

         (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단다.

         근래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던 청담(靑潭, 1902~1971)의 속가 둘째 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던 성철(性徹, 1912~

         1993)의 비구니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이 출가 수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단다.


08:36 마애여래불

         윤필암에서 산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묘적암으로 올라가는 길목 오른쪽 암벽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란다.

         높이 6m, 어깨너비 높이 6m, 어깨너비 2.2m의 큰 불상인데, 이중연화좌대 위에 앉은 부처님의 머리와 몸 뒤로 둥근 광채가 감돌고, 머리 양쪽에는

         뿔처럼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단다.  엉뚱한 생각을 하며 걷다가 깜빡했으면 놓지 뻔한 곳이다.


08:49 묘적암

         묘적암(妙寂庵)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에 속하는 대승사(大乘寺)의 산내암자란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신라 말기에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 말기에 나옹(懶翁)이 출가하여 수행한 사찰로 유명하단다.

         나옹이 처음 이 절의 요연(了然)을 찾아 중이 되기를 청하였을 때, 요연은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단다.

         나옹이,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마는, 보려 하여도 볼 수가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습니다.”고 한 뒤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를 물었단다.

         요연은 자신도 알지 못하니 다른 고승을 찾아가 물어볼 것을 권하였단다. 뒷날 나옹이 도를 깨닫고 다시 이 절로 돌아와서 회목 42그루를 심었으며,

         그 뒤 나옹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절에 찾아왔단다. 나옹으로 인하여 이 절은 조선 후기까지 불교의 한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단다.

         1668년(현종 9)성일(性日)이 중건하였고, 1900년취원(就圓)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09:29 부부바위

09:52 묘봉(810)

10:07 쌍연봉(828)

10:12 대승봉(820)

10:21 대승재(741)

10:45 헬기장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절에서 스님조차 보지 못했는데, 여기 와서야 5~6명의 산행팀을 만났다.


10:46 공덕산(912)

         아마 예전에는 이곳이 정상인 줄 알았는데, 현재는 이곳보다 100미터 정도 더 떨어진 곳이 1미터 정도 더 높아서 공덕상 정상으로 칭하고

         있는 듯하다, 정상석도 공덕산 정상이라는 연화봉에 두었다.


10:54 공덕산 정산(연화봉, 913)

         공덕산(功德山)

         지금은 사불산(四佛山)이라 더 알려진 산인 듯 하다. 

         587년(진평왕 9) 사방에 여래상(如來像)을 새기고 붉은 비단으로 싼 사방이 열자나 되는 큰 돌이 하늘로부터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에 있는

         산꼭대기에 떨어졌단다. 왕이 이를 듣고 가서 예배한 뒤 그 바위 한쪽에 대승사(大乘寺)를 개창하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승려를 청하여 이 절을

         맡겨 향화를 그치지 않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산 이름을 사불산이라고 하였단다. 뒤에 그 승려가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고 한단다.


         이 산은 3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주봉 서쪽에는 대승사, 동봉에는 천주사(天柱寺), 중봉에는 백련사(白蓮寺)가 있단다.

         13세기 중엽까지 백련사에 의상(義湘)이 쓰던 종려로 만든 삿갓 및 육환장이 있었고, 옛 건물에는 원효(元曉)와 의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기도

         하였단다. 의상은 이 산에 백련사를 창건하여 주석하고, 원효는 화장사(華藏寺)를 지어 살면서 조석으로 만났다고 한단다.

         조선시대에는 반야암(般若庵)·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大妃庵)· 묘봉암(妙峯庵)· 윤필암(潤筆庵)· 문수암(文殊庵)· 보현암(普賢庵)· 사불암(四佛庵)·

         미륵암(彌勒庵) 등의 암자가 있었으며 신라 이래로 원효· 의상· 나옹(懶翁)· 무학(無學)· 함허(涵虛) 등의 고승이 머물기도 했었단다.


11:10 반야봉 781)

11:23 이정표(공덕산 1, 대승사 0.7)

11:38 대승사

         사불암, 윤필암, 묘적암, 묘봉, 쌍연봉, 대승봉, 공덕산, 반야봉을 거처 원점회귀 산행이 끝났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묘적암을 지나면서 빵과 집에서 가져가 과일로 허기를 떼웠다. 그래도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너무 좋아서 힘든줄 모르고

         산행을 했다. 오랜만에 따라온 짝지도 가끔 뒤쳐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잘 따라와 주었다.

         산행을 마치고 온 이시간에도 대승사는 개미 발자국 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곳이 진짜 절인 듯하다.

         대승사 뿐만이 아니었다. 윤필암, 묘적암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절이나 암자들을 살짝 다녀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게 말이다.


12:08 김용사

         대승사 가는 길에 김용사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산행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김용사에 들렀다.


         김룡사(김용사, 金龍寺)
         김룡사는, <운달산김룡사사적서>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 조사가 개선하여 사명을 운봉사라 하였다고 되어 있단다. 따라서 본래의 절

         이름인 운봉사라 사명이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중에 전해지는 괘불화기에도 운봉사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김룡사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지금의 김룡사가 큰절의 초창은 인조2년에 수행 공덕으로 고명했던 혜총선사가 제자들과 힘을 모아 이룩하였으며 그 후 소실된 것을 의윤, 무진,대휴의

         세분 대사가 옛모습을 되살려 놓아 번창시에는 48동에 건평 1,188평이나 되었으나 현재는 대소 전각 30여 채가 남아있단다.

         대웅전을 위시한 고색 창연한 전각들이 그 옛날의 창성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경흥 강원 건물은 국내 최대 강원건물의 하나로 300명을

         동시에 수용 할 수 있는 온돌방으로서 그 부엌아궁이는 어린 학생들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단다.
 
         인조 27년 설잠대사가 조성한 대웅전의 불상은 그 규모가 웅대하며 기예 또한 현묘하고 성균대사가 만든 후불 탱화가 유명하단다. 고종26년에 사증대사

         가 조성한 거대한 쾌불탱화를 비롯한 죽은 사람의 생,전사가 기록 영화처럼 비쳐진다는 거울 등 수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였으며 석탑과 석상을 절뒤에

         세운것은 그 선익을 진압한다는 뜻이며 혹은 산혈의 촉맥을 보우하는 뜻이라 한단다.

         김용사에서 특이한 것은 절 입구에 지은 지 300여년 된 해우소 (근심을 해소시키는 장소라는 의미의 화장실) 가 있는데 토속적인 목조 건물로 꼭 한번

         확인하기를 권하는 특별한 장소란다. 김용사의 해우소는 가보지 않았지만, 대승사에도 해우소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김룡사의 사명은 원래 운봉사였는데 김룡사로 바뀐 연유는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죄를

         지어 이곳 운봉사 아래에 피신하여 숨어 살면서 신녀가를 만나 매양 지극한 정성으로 불전에 참회하더니 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용이라 하였단다.

         그 이후부터 가운이 크게 부유해져 사람들은 그를 김장자라 하였고, 이로 인하여 동리 이름 또한 김룡리라 하였으며, 운봉사 역시 김룡사로 개칭하였

         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단다. 그러므로 이 절은 최소한 18세기 이후 김룡사란 이름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단다.


12:30 김용사 출발( -> 집으로)

         김용사에서 한 1~2백미터쯤 나왔을 때 남녀 서너 명이 길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뭔가 열심히 찍고 있었다.

         궁금해서 가보니 노란 색의 꽃이었는데, 각시붓꽃인 듯 했다.

13:00 아침겸 점심(기사식당 7,000원 * 2)

14:30 삼국유사군위 휴게소(아이스크림 등, 8,100원)

         내가 운전중 잠을 쫓는 방법인데, 아이스크림 특히 *레임 아이스크림을 몇 개 사서 잠이 올 때면 그것을 얼굴에 문지르면서 녹히고,

         또 다 녹으면 먹는데, 차가운 것을 얼굴에 문지를 때와 먹을 때 만큼은 잠을 잊는다.

 

15:40 통도사IC(도로비 12,000원)

15:50 시골마을 도착

         오늘 시골에서 초등학교 동기회가 있다. 그래서 산행을 마치자 마자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달려 왔다.

         어제 3시간 정도 운전과 오늘 새벽부터 산행을 하고, 또 3시간 정도의 운전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런 이유도 있고, 또 할 일도 많이 남아 있어 친구들 얼굴만 보고 몰래 빠져 집으로 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맘이 든다.


17:00 집 도착

        

       (이하 2018.04.08. 문경새재)

























(꾸구리 바위)


(소원성취 돌탑)
































(이하 2018.04.08. 산행)

(대승사 일주문)










(장군수)











(사불암)












(윤필암)


















(마애여래불)








(묘적암)











(부부바위)



























(대승사)







(김용사 일주문)












(노랑 각시붓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