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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2023.09.12) - 한강

동선(冬扇) 2023. 9. 12. 11:50

책소개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이, 여자는 말語을 잃는다. 그것이 처음 왔던 것은 열일곱 살 겨울.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달싹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이혼을 하고, 아홉 살 난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다시 그렇게 말을 잃어버린 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다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선택한 것은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 그곳에서 만난 희랍어 강사와 여자는 서로의 앞에 침묵을 놓고 더듬더듬 대화한다.

가족들을 모두 독일에 두고 십수 년 만에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 남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볼 수 없다던 마흔이 가까워오지만 아마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 여자를 주의 깊게 지켜보지만 여자의 단단한 침묵과 마주하자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선 본 적 없는 지독한 침묵. 그리고 점점 소멸해가는 남자의 미약한 빛. 이 어스름이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 걸까.

『희랍어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기미를 발견하고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 기미와 흔적들은 어두운 암실, 정착액 속의 사진이 점점 선명하게 상을 만들어내듯 어느 순간 고대문자처럼 오래고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 현재진행형의 시간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존재하던 것들, 그 기미와 흔적들, 영원과도 같은 어떤 찰나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어떤 한 장면을 소설을 통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저 : 한강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2007년 출간한 『채식주의자』는 올해 영미판 출간에 대한 호평 기사가 뉴욕타임스 등 여러 언론에 소개되고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에 질문을 던지는 한강 작품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만해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의 해외 번역 판권도 20개국에 팔리며 한국문학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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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단다.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단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단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라고 썼단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믿었던 그와는 달리, 저자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단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단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밥.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단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이 보르헤스와 세게 사이에 길게 가로놓엿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세네바에는 들러지 않았단다. 그의 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단다. 대신 그기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단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비를 타고 저물녘까지 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리를 떠다녔단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단다. 풍경들은 오직 그녀의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단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단다. 아직 세계와 그녀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단다. 
 

2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두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이 멈췄다 깊이 들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두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도 검정색이며, 커다랗고 검은 헝겊 가방에 넣은 목도리는 검정색 털실로 짠 것이다. 상가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 같은 그 복장 위로, 그녀의 거친 얼굴은 일부러 길게 빚은 진흙상처럼 여위어 있다.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단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흘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나마는 더이상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녀와 같은 줄에 앉은 앳된 대학생, 기둥 뒤로 반쯤 몸을 감춘 초로의 사내, 구부정한 자세로 창가에 앉은 거구의 청년을 향해 구루 눈길을 던진다. 
"에못, 에메테로스, 나의 우리들의" 세 명의 학생들이 낮고 수줍게 따라 읽는다. "소스, 휘메테로스. 너의, 너희들의"
강단에 선 남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체구는 약간 작은 편이고 눈썹과 인주으이 선이 뚜렷하다. 감정을 자제하는 엷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다. 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 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엿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엷은 녹색을 넣은 두꺼운 안경알 뒤로, 남자의 눈이 여자의 꾹 다문 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신다. 그는 굳은 얼굴을 돌린다. 짧은 희랍어 문장을 빠르게 흑판에 쓴다. 악센트들을 채 찍기 전에 백묵이 두동강나며 떨어진다. 
 
지난해 늦봄, 저렇게 백묵 가루가 잔뚝 묻은 손으로 여자는 흑판을 짚고 서 있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여자가 끝내 다음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 채 일 분여의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였다. 그녀는 논을 부릅뜬 채, 학생들도, 천장도, 창밖도 아닌 정면의 허공을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맨 앞자리에 엊아 있던, 곱슬머리에 귀염성 있는 눈매의 여학생이 물었다. 여자는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잠시 경련했을 뿐이었다. 떨리는 입술을 꽉 다문 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것이 다시 왔어"
마흔 명 남짓한 학생들은 서로운 논을 보았고,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속삭이는 질문들이 책상에서 책상으로 번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침착하며 그곳을 걸어나가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가 복도로 나온 순간, 은밀하던 속삭임들은 갑자기 음량을 키운 스피커처럼 소란해졌고, 석조 복도에 울리는 그의 구두 소리를 삼켜버렸다. 
 
여자는 대학으르 졸업하던 해부터 육 년 남짓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그 일들을 그만둔 뒤에는 칠 년 가까이 수도권의 두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해왔다. 진지한 시집 세 권을 삼사 년 정도의 간격으로 묶어냈고, 격주로 발행되는 서평지에 여러 해째 칼럼을 기고해왔다. 최근에는 아직 제로를 정하지 않은 문화잡지의 창간 멤버로 매주 수요일 오후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시 왔으므로 그녀는 그 일들을 모두 중단했다.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물론 그녀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수년 전에 잉혼했고, 세 차례의 소송 끝에 마침내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으며, 그 아이가 전남편의 집으로 들어간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보낸 뒤 생긴 불면증으로 일주일에 한 번 그녀가 찾았던 반백의 심리치료사는 그토록 자명한 원인들을 왜 그녀가 부인하려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아니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백지에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그것이 마지마가 상담이었다. 필담으로 하는 심리치료는 시간이 너무 걸렸고 오해의 소지가 많았다. 언어문제를 다루는 다른 심리치료사를 소개해주게0ㅆ다는 그의 제안을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더이상 고가의 치료를 감당할 경제력이 없었다. 
 
어린 시절 여자는 영민한 편이었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던 마지막 일 년 동안, 그녀이 어머니는 틈날 때마다 그녀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었다. 마치 죽기 전에 가장 확실히 해둬야 할 일이 그것이라는 듯이.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슬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국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가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 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속에서 만들어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력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헤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그후 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담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모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하지만 '정말 영민했다'는 어머니의 기억과는 달리,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아이였다. 어떤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고, 성적 역시 특출하지 않았다. 친구가 몇 있긴 했지만 방과후까지 어울려 노는 일은 없었다. 세수할 때 말고는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 무덤덤한 여학생이었으며, 연애에 대한 막연한 동경조차 거의 느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근처의 구립도서관에서 참고서 대신 책을 읽었고, 집으로 대출해간 책들을 이불 속에서 엎드려 읽다 잠들었다. 그녀의 삶이 격렬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일기장 위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시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한밤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수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픔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들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형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은 그녀가 막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발음을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 침묵에 싸여 더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더이상 그녀는 어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놀란 어머니와 동행해 정신과엣 받아온 알약들을 혀 밑에 숨겼다가 화단에 묻으며, 오래전 자음과 모음을 깨쳤던 마당가에 쪼그려앉아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그녀는 두 계절을 보냈다. 여름이 되기 전에 목덜미는 햇볕에 달아 검어졌고, 늘 땀이 맺혀 있던 콧잔등에는 빨긋빨긋 땀띠가 돋았다. 근가 파묻은 약을 먹고 자란 사루비아가 검붉은 꽃술을 톡톡 내밀기 시작했을 때 의사와 어머니는 상의 끝에 그녀를 학교로 돌려보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게 분명했고, 어떻게든 진급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월에 소집통지서만을 받았을 뿐 처음 들어가본 공립 고등학교의 교정은 살풍경했단다. 교과 진도는 그녀를 한참 앞질러가 있었다. 선생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권위적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마지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동급생은 없었다. 지명받아 교과서를 읽거나 체육시간에 구령을 붙어야 할 때 그녀는 선행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고, 예외없이 교실 뒤쪽으로 내쫓기거나 빰을 맞았다. 
의사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단체생활의 자극은 그녀의 침묵에 균열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 밝고 진해진 정적이 우둑한 항아리 같은 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붐비는 거리에서, 그녀는 마치 거대한 비눗방울 속에서 움직이든 무게 없이 걸었다. 물 밑에서 수면 밖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른어른한 고요 속에, 차들은 굉음을 내며 달렸고 행인들의 파꿈치는 그녀의 어깨와 팔을 날카롭게 찌르고는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의문했다. 
방학을 앞둔 그해 겨울의 평범한 수업시간, 한 개의 평범한 불어 단어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퇴화도니 가관을 이억하듯 무심코 언어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한문이나 영어가 아니라 하필 불어였던 것은, 고등학교 과정부터 선택해 배우는 낯선 외국어라서였는지도 몰랐다. 여느 때처럼 뭄묵히 흑판을 올려도보던 그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단신에 머리가 반쯤 벗어진 불어선생이 그 단어를 가리키며 발음했다. "비믈리오떼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남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두 손을 책상에 올려 놓는다. 손톱 검사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굳은 자세로 고개를 수그린다. 남자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지는 것을 듣는다.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3의 태가 있다는 것, 지난 시간에 잠깐 설명했지요?" 
그녀와 같은 줄에 앉은 남학생이 힘주어 고개를 주억거린다. 빰이 통통하고 이마에 잔뜩 여드름이 익은, 영리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의 철학과 2학년생이다. 
여자는 창 쪽으로 구개를 돌린다. 의예과를 간신히 졸업하기 했지만 타인으 싦을 책임지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의학사를 공부한다는 대학원생의 옆얼굴이 보인다. 턱이 겹쳐지는 통통한 얼굴에 검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거구의 그는 언뜻 보기에 태평한 성격이어서, 쉬는 시간이면 여드름투성이의 대학생과 낭랑한 목소리로 끝없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수업이 시작되는 즉시 그의 태도는 바뀐다. 실수를 두려워한다는 것, 매순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히 드러난다. 
"우리가 중간태라고 부르는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창밖으로 살풍경한 연립주택들이 드문드문 주황빛 전등들을 밝히고 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어린 활엽수들은 검고 깡마른 가지들의 윤곽을 어둠 속에 숨기고 있다. 그 활량한 풍경을, 거구의 대학원생의 겁먹은 얼굴을, 희랍어 강사의 핏기 없는 솜목을 그녀는 묵묵히 응시한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육체를 잃은 그림자처럼, 죽은 나무의 텅 빈 속처럼, 운석과 운석 사이의 어두운 공간처럼 차고 희박한 침묵이다. 
이십 년 전, 모국어가 아닌 낯선 외국어가 침묵을 깨뜨리리라고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함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원서로 읽기를 원하는 플라톤과 호메로스와 헤로도투스, 속화된 헬라어로 쓰인 후대의 문헌들에 그녀는 거의 무관심하다. 더 낯선 문자를 쓰는 버마어나 산스크리트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다면 주저없이 그것들을 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상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영어에 'kill himself'라는 표현이 있지요? 희랍어에서는 himself 없이 이 중간테를 사용해서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고 말하며 남자는 흑판에 쓴다. 
διεφθάρθαι
흑판에 적힌 문자들을 곰곰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연필을 쥔다. 공책에 그 단어를 옮겨적는다. 이렇게 규칙이 까다로운 언어를 그녀는 접해보지 못했다. 동사들은 주어의 격과 성과 수에 따라, 여러 단계를 가진 시제에 딸, 세 가지 태에 따라 일일이 형태를 바꾼다. 놀랍도록 정교하고 면밀한 규칙 덕분에 오히려 문장들은 간명하다. 주어를 굳이 쓸 필요도 없다. 어순을 지킬 필요조차 없다. 삼인칭의 한 남자가 주체이며, 언젠가 한번 일어난 일임을 나타내는 완료시제를 쓴, 중간태에 따라 변화된 이 한 단어에 '그는 언젠가 자신을 중이려 한 적이 있다'는 의미가 압축돼 있다. 
 
판 년 전에 그녀가 낳은, 이제 더이상 키울 수 없게 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무렵, 그녀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를 꿈꾼 적이 있었다. 등이 흠뻑 젖을 만큼 생생한 악몽이었다. 어마어마한 밀도아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잠투정이 심한 아이를 재우다 설핏 잠들 때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정던되는 꿈을 꾸었다. 
 
기억만으로 선득한 그 감각을 잇사이로 누르며 그녀는 쓴다.
διεφθάρθαι
얼음 기둥처럼 차갑고 단단한 언어.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국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 
 
밤은 고요하지 않다. 
반 블록 너머에서 들리는 고속도로의 굉음이 여자의 고막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칼금을 긋는다.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욱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전단지와 세금고지서 들이 꽂혀 있는 우편함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옆에 육중하게 버티고 선 일츤 현관문에 그녀는 열쇠를 꽂는다. 
다시 양유권 소송을 해서 되찾아올 생각이었으므로 집안에는 아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낡은 천소파 옆의 낮은 책장에는 세 살 때부터 읽힌 그림책들이 꽂혀 있고, 동물 스티커로 장식한 골판지 상자들에는 크고 작은 레고 부속들이 그득하다. 
수년 전, 아이가 마음껏 놀게 하려고 일부러 맨 아래층에 얻은 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발을 구르거나 뛰어다니려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줄넘기 연습을 해도 된다고 그녀가 말하자 아이는 물었다. "지렁이랑 달팽이들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까?"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골격이 섬세한 아이였다. 무서운 장면이 있는 책을 읽으면 38도 가까이 열이 올랐고, 긴장하면 토하거나 설사를 했다. 그 아이가 친가의 장손이자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 예전만큼 아주 어리지는 않기 때문에,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므 예민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전남편이 일관되게 주장해왔기 때문에 - 십대에 받은 정신과 진료기록이 불리한 자료로 제시되었다 - 지난해 은행 본사로 승진 발령받은 그에 비해 그녀의 수입이 턱없이 적고 불규칙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지막 재판에서 패했다. 이제 그나마의 수입원도 사라졌으니 현재로서 다음이 소송이란 불가능했다. 
 
구두를 벗지 않은 채 그녀는 현관 턱에 걸터앉는다. 두툼한 희랍어 교본과 사전, 공책과 납작한 필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린 빛이 도는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린다. 어두워지자 그녀는 눈을 뜬다. 어둠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가구들을, 검은 커튼을, 정적에 잠긴 검은 베란다를 본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악문다.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 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흐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3

열다섯 살의 초여름이었단다. 
꽉 찬 달이 검고 뭉클뭉클한 구름장 속으로 멈칫 몸을 감췄다가 드러내길 반복하던 일요일 밤이었단다. 아무리 닦아도 어둑한 데가 남은 은숟가락 같은 그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어두운 보도를 걷고 있었단다. 한 순간, 신비하고 불안한 암호 같은 달무리가 보랏빛 동그라미를 그으며 구름 위로 번졌단다. 
수유리의 집에서 4.19 탐 네거리까지는 버스로 고작 세 정거장 거리였지만, 워낙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시간이 퍼 늦어버렸단다. 모퉁이 서점에 이르렀을 땐 그 옆 전파사에 진열된 여러 대의 텔레비전에서 동시에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단다. 서점에 들어서자, 꾸깃꾸깃한 회색 셔츠에 넓적한 멜빵을 한 중연의 주인남자가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오 분만 시간을 달라고 양해를 구한 뒤 그녀는 바쁘게 서가를 오가며 책을 고르기 시작했단다. 그때 집어든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불교에 관한 보르헤스의 대중 강연을 번역한 문고판 서적이었단다. 

그때의 그녀에게 불교의 인상이란, 보름쯤 전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갔떤 연등회 날의 기억이 전부였단다. 그때까지의 짦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낮과 밤에 모두 경험했단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리고 있었단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그녀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단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그녀는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단다. 
두 달 뒤면 가족 모두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일요일 오전, 왜 그녀 눈앞에 그 지등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걸까. 그 빛들이 준 충겨이 종교적인 경외감과는 약간 다른 것임을 어렵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어머니가 넉넉히 쥐여준 돈으로 기초 독일어 교본과 회화 테이프를 사러 간 그 밤 그녀는 문고판 <수타니파타>와 <법구경>. 현암사에서 나온 연와무니 표지의 <화엄경 강의>와 <열반경 강의>를 욕심껏 골랐단다. 그 책들을 지구 반대편의 독일까지 운반함으로써 가족들과 그녀의 운명이 안전해질 것 같은, 막연하고 미신적인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었던 것 같단다. 
보르헤서의 그 얇은 책이 그 목록에 끼어든 것은, 서양 사람이 쓴 책이니만큼 아마 기초적인 입문서가 되어즐 거라는 실질적인 기대 때문이었단다. 반쯤 눈을 감은, 무언가를 기도하거나 후회하는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그의 사진이 초록색 표지 상단에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을, 그때에는 특별히 눈여겨 들여다보지 않았단다. 
 
독일에서 보낸 십칠 년 동안 그녀는 그 책들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었단다. 어떤 밤에는 그저 한글의 생김새를 들어다보고 있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단다. 어떤 책을 펼치든 그 초여름 밤 수유리의 서늘한 공기가 팔뚝 위로 느껴졌단다. 어둑한 은숟가락 같던 달과 신비하고도 불안한 암시 같던 보랏빛 달무리를 잊지 않은 것은 그 책들 덕분이었단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게 된 책은 현암사에서 나온 <화엄경 강의> 였단다.(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사유의 체계를, 그후 어느 책에서도 다시 경험하지 못했단다). 반면 보르헤스의 그 책은 짐작대로 쉽고 개괄적인 내용이어서, 비교적 빨리 훑어보고는 책장에 꽂아두고만 있었단다. 시간이 흐른 뒤, 대학에 들어가 그의 소설들과 평전을 독일어로 읽고서야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펼쳐 읽었던 기억이 난단다. 
 
오늘 아침, 그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드렁크에서 꺼내왔단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단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단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이어서 독일어로 생명, 생명이라고 흘려썼다가 굵게 가로로 선을 그언 지운 흔적이 보였단다. 분명히 그녀의 필체인데, 언제 그것을 적어넣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단다. 독일에서 학생들이 노트 필기할 때 사용하는 짙은 청색 잉크 글씨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단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고 낡은 회색 가죽필통을 찾아냈단다. 기억대로 만년필이 그 안에 있었단다. 독일에 건너간 직후부터 대학 2학년 무렵까지 수차례 촉을 갈아가며 사용했던 것이었단다 흠집이 좀 있을 뿐 깨진 데 없는 뚜껑을 열어 책상 한컨에 두고, 촉에 말라붙은 잉크를 녹이기 위해 욕실로 만녀밒을 들고 갔단다. 세면데에 맑은 물을 받은 뒤 촉을 담그자, 짙은 청색의 가느다란 실 같은 잉크가 흔들리는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번져갔단다. 
 

4

우러우렁 따라 읽는 학생들 사이에 그녀는 묵묵히 않아 있다. 희랍어 강사는 더이상 그녀의 침묵을 지적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뒷모습을 모이며, 푹신한 헝겊지우개를 든 손과 팔을 크게 움직여 흑판 가득 씌어진 문장들을 지운다. 
그가 동작을 멈출 때까지 학생들은 침묵한다. 기둥 뒤에 앉아 있던 마른 체구의 중년 남자가 허리를 힘두어 펴고는 주먹으로 척추께를 두드린다. 여드름투성이의 철학도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스마트폰의 액정 위로 검지손가락을 움직인다. 거구의 대학원생은 흑판에서 힘차게 지워지는 문장들을 지켜보고 있다. 체구와 대조되어 더 얇아 보이는 입술을 벌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사라지는 단어들을 읽는다. 
"유월부터는 플라톤을 읽습니다. 물론 문법은 계속 병행해 공부합니다"
깨끗해진 흑판에 상체를 기대며 희랍어 강사가 말한단다. 백묵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안경을 추어올린다. 
"침묵 속에서 어어, 웅, 하는 분절되지 앉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가니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러렀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고어를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는 백묵으로 흑판에 포물선을 그린다. 외쪽 오르막의 경사는 가파르고, 오른쪽의 내리막길은 완만하고 길다. 포물선의 정범을 검지손가락으로 짚으며 그는 말을 잇는다.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의 유럽어는 그 어랜 과정을 거쳐 덜 엄격하게, 덜 정교하게, 덜 복잡하게 변화한 결과물입니다. 플라톤을 읽으면서, 수천 년 전 정덤에 이르렀던 고어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음의 말을 잇기 전에 그는 침묵한다. 기둥 뒤에 앉은 중년 남자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는 짧고 낮게 헛기침을 한다. 한번 더 길게 헛기침을 하자, 이마에 여드람이 익은 대학생이 남자를 흘긋 돌아본다.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약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모든 말에 집중하지는 못한단다. 한 문장이 긴 물고기처럼 토막나서, 비늘 같은 조사와 어미 들이 떨어져나가지 않은 채 그녀의 귓속에 박혀 있단다.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분절되지 않은 음성, 처음 몇 개의 단어들."
말을 잃기 전에 - 그것을 사용해 글을 쓰고 있을 때 - 그녀는 때로 자신이 사용하는 말들이 그런 것에 가깝기를 바랬단다. 신음이나 낮은 비면, 숨죽여 앓는 소리, 으르렁거림, 잠결에 아이를 달래는 흥얼거림, 킥킥 터지는 웃음, 어떤 입술들이 포개어졌다가 떨어지는 소리.
그녀 자신이 방금 사용한 단어들의 형상을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입술을 열어 그것들을 읽을 때가 있었단다. 핀에 꽂힌 육체 같은 그 납작한 형상들과, 뒤늦게 그것을 읽으려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이질적인 것인지 그녀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단다. 읽기를 멈추고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곤 했단다. 베인 곳을 바로 눌러 지혈하거나, 반대로 힘껏 피를 짜내 혈관 속으로 균이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할 때처럼. 
 

5

당신이 지금 이 편지를 일고 있다면 - 나에게 이 편지가 반송되지 않았다면 - 당신의 가족은 아직 그 병원 이층에 살고 있는 것이겠지요.
18새기에 인쇄소를 지어졌다는 석조 건물은 지금쯤 연한 담쟁이 잎으로 덥였겠지요. 중정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틈으로 자잘한 제비꽃들이 피었다고 졌겠지요. 민들레도 시들어, 희끗한 혼령 같은 홑씨들만 동그랗게 남았겠지요. 굵게 찍힌 문장부호 같은 야생 개미들이 줄을 이어 계단 가장자리를 오르내리고 있겠지요.
볼 때마다 다른 색깔의 화려한 사리를 쓰고 있던 당신의 벵골인 어머니느느 여전히 아름답습니까. 차디찬 회색 눈으로 내 안구를 들여다보던 늙은 독일인 아버지는 아직 안과의사입니까? 당신이 않았다는 딸은 이제 많이 자랐습니까. 이 편지를 읽는 지금, 당신은 아이를 외조부모에게 보이려고 잠시 다니러 온 참입니까. 당신이 쓰던 북쪽 방에 마물련서, 이따금 오뮤차를 밀고 나가 강가를 산책합니까. 당신이 좋아햇던 오래된 다리 앞의 벤치에 앉아 쉬며, 늘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던 필름조각들으 거내 눈에 대고 태양을 올려다 봅니까.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그 다리 앞의 벤치에 앉았을 때, 당신은 그렇게 문득 청바지 주머니에서 두 개의 네거티브 필름조각을 꺼냈지요. 가무잡집하고 날씬한 팔을 들어, 두 눈을 필름들로 가리고 해를 올려다보았지요. 
견딜 수 없게 가슴이 떨려왔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 처음 진료를 받던 날, 그러니까 그해 유월 초순의 오후였습니다.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핀 병원 중정에 놓인 철제 긴 의자에서, 당신은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질끈 묶은 채 필름조각들을 통해 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당신 옆에 앉아 있던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 간소하가 그것을 중 하나를 달라고 손짓했지요. 다 큰 어른들이 나란히 앉아 한쪽 눈을 감고, 필름 조각 한 장씩을 들고 해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어딘가 웃음을 자아내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늘진 유리문 뒤에서 내가 훔쳐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남자는 필름에서 눈을 때고 몇 마디 말릉 당신에게 건넸지요. 당신은 주의 깊게 남자의 입술을 바라오았습니다. 순간, 남자가 당신이 입술에 어색하고 짦게 입맞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부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당신 역시 놀란 듯 흠칫 물러앉았다가, 이내 용서하듯 날렵하게 남자의 뺨에 입맞추었습니다. 함께 해를 보았으므로 생긴 우정이 너그러운 의례라는 듯이, 당신은 가볍게 일어서서 남자가 들고 있던 필름을 빼앗았습니다. 남자는 얼굴이 묽어진 채 멋쩍게 웃엇지요. 당신도 웃었습니다. 말없이 돌아서서 사라지는 당신의 뒷모습을, 남자는 여전히 멋쩍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몇 ㅂㄴ간의 완전한 정적이 열입곱 사의 나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당신은 알지 못했겠지요. 얼ㄹ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그 병원집의 딸이라는 것을, 갓난아이였을 때 열병을 닳다 청력을 잃었다는 것을, 이태 전에 특수학교를 졸업한 뒤 병원 건물 뒤쪽의 창고에서 목가구를 제작하며 지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이, 그날 내가 본 짧은 장면의 서늘함을 다 설명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 현관에 들어설 때마다, 당신이 일하는 창고에서 전기톱 소리가 들려울 때마다, 작업복 차림으로 무심히 강가를 산책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나는 라이락 냄새를 갑자기 들이마신 것처럼 멍해지곤 했습니다. 한 번도 누군가와 입맙춰본 적 없는 내 입술이, 미세한 전류에 감전된 듯 비밀스럽게 떨려오곤 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어머니 쪽을 더 닮았지요.
질끈 묶은 검은 머리채와 다갈색 피부도 보기 좋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눈이었습니다. 고독한 노도으로 단련된 사람의 눈, 진지함과 장난스러움, 따스함과 슬픔이 부드럽게 뒤섞인 눈,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들여다보겠다는 듯, 커다랗게 열린 채 무심히 일렁이는 검은 눈.
이제 당신이 어깨를 툭 건드린 뒤 필름 한 조각을 달라고 손짓해야 하는 순간이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두 눈에서 필름조각들을 떼어낼 때까지 그저 당신의 동그란 이마를, 거기 흘러내려 달라붙은 곱슬곱슬한 잔머리칼을, 순수한 혈통의 인도 여자처럼 조그만 보석을 붙이면 완전해질 것 가은 콧날을, 거기 맺힌 동그란 땀방울들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뭐가 보여요?"
내가 묻는 동안 당신은 주의 깊게 내 입술을 들여다보았지요. 순간 그 무뚝뚝한 얼굴의 남자 간호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시건이 단지 내 말을 읽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득 당신에게 입맞추고 싶었습니다. 당ㅅ니은 헐렁한 작업복 셔츠의 앞주머니에서 수첩을 까내 볼펜으로 썼습니다.
"네 눈으로 직접 봐"
그때부터 내 시력은 이미 불안정했습니다. 섣부른 안과수술은 오히려 실명을 앞당길 뿐이라는 임상 결과들을 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며, 당신의 아버지는 값싼 동정심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한 빛이 해롭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조심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그는 충고했습니다. 태양광선이 강한 낮에는 선글라스를 끼고, 밤에는 조명 아래에서 지내라고 권했습니다. 배우처럼 눈에 띄는 검은색 선글라스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엷은 녹색을 넣은 안경을 끼고 생활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필름으로 가린다 해도 태양을 직접 올려다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저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당신은 다시 수첩에 썼습니다. 
"나중에"
수없이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해온 듯 당신의 손은 날렵하고 정확했습니다. 
"완전히 모든 걸 못 보게 되기 직전에"
당신이 내 병의 예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당신이 가족이 식탁에 들러앉아 내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상상만으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그때 나는 불현듯 낯선 슬픔을 느꼈는데, 방금 받은 상처나 모욕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 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 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칠월의 햇빛을 받은 강물이 거대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뒤척이며 번쩍이던, 당신이 문득 내 팔에 가무잡잡한 손을 얹었던, 그 손등 위로 부풀어오른 검푸른 정맥들을 내가 떨며 어루만졌던, 두려워하는 내 입술이 마침내 당신의 입술에 닿았던 순간들은 이제 당신 안에서 사라졌습니까. 그 앍은 다리 앞에서 당신의 딸은 유모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엄마를 부르고, 당신은 필름조각들을 호주머니에 넣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까.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 순간의 어떤 것도 내 기억속에선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뿐 아니라, 당신과의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까지 낱낱이 살아 꿈틀거립니다. 나의 자책, 나의 후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눈물에 온통 젖어 번들거렸던 그 얼굴, 내 얼굴을 후려친, 수년간 억센 나무를 다뤄 사내보다 단단했던 주먹,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버지가 예고했던 마흔 살이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아직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일이 년쯤은 더 볼 수 잇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더디 진행되어온 일이므로, 마음의 준비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허락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서울 변두리의 이 상가 골목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오갑니다. 교복 치마를 어설프게 줄여 입고 이어폰을 낀 여학생,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아랫배가 나온 중년 남자, 패션잡지에서 방금 걸어나온 듯 근사한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걷는 여자, 새하얗게 센 쇼트커트 머리에 반짝이 장식이 가득 달린 스웨터를 빛내며 느린 동작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노파, 어디선가 욕지거리가 들리고 식당에서는 국밥 냄새가 번져옵니다. 자전거를 탄 소년이 일부러 크게 벨을 울리며 내 앞을 미끄러져 지나갑니다. 
최대한 노두슬 높인 안경을 끼었지만, 이 모든 것들의 세부를 이제 나는 보지 못합니다. 형상과 동작들은 덩어리로 뭉개어져 있고, 디테일은 오직 상상의 힘으로만 선명합니다. 여학생의 입술은 음악에 맞추어 달싹거리고, 아랫입술 인쪽에 당신이 가진 것처럼 파르스름하고 작은 점이 있을 겁니다. 중년 남자의 트레이잉복 소매는 때에 절어 반들반들하고, 원래 희었던 운동하 끝은 몇 달을 빨지 않아 진한 회색이 되었을 겁니다. 자전거를 탄 소년의 관자놀이께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을 겁니다. 녹록지 않은 관록이 느껴지는 노파의 담배는 가느다랗고 섬세한 종류의 것이고, 스웨터 가득 박힌 조그만 자개 반짝이들은 장미나 수국 문양일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하며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지루해질 때쯤, 천천히 뒷산의 산책로를 오르기도 합니다. 연푸른 나무들은 한 덩어리로 일렁이고, 꽃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번져 있습니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절의 대중방 마루에 앉아 나는 쉽니다. 무거운 안경을 벗어들고,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흐릿한 세계를 둘러봅니다. 잘 모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달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돠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톤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날이 저물면 급격히 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시간을 끌지 않고 나는 일어섭니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새로 씻습니다. 당신이 해를 올려다보기 좋아했던 그곳의 정오 무렵, 이곳 시각으로 저녁 일곱시부터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는 날이 아직 밝을 때 사설 아카데미에 도착해 수업 시간을 기다립니다. 환한 건물 안에서는 활동에 큰 지장이 없지만, 안경을 낀다 해도 밤거리를 혼자 걷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니까요.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열시경, 아카데미의 현관 앞으로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수업을 하느냐구요.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희랍어 초급반을, 금요일에는 플라톤을 원전 강독하는 중급반을 가르칩니다. 한 반의 수강생은 많아야 여덟 명을 넘지 않습니다.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이 섞여 있습니다. 
동기가 어떻든,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걸음걸이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口語)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고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그렇게 무사히 이곳의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간혹 기억할 많나 일이 있었다 해도, 거대하고 불투명한 시간의 양감에 묻혀 흔적 없이 지워집니다. 
이곳을 처음 떠나 독일로 가던 해에 나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독일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는 서른한 살이었으니, 그때 내 인생은 거의 정확히 절반씩 두 언어, 두 문화로 쪼개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당신이 아버지가 예고했던 마흔 살 이후의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나는 양자택일해야 했습니다. 모국어를 뜨슨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가족과 스승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모국에서 뭘 할 너냐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물었습니다. 까다롭게 따낸 희랍 철학 학위 따위는 휴짓조각에 불과할 거라고, 무엇보다 내 특수한 상황을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 헤쳐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곡 이 년만 살아본 뒤 결정하겠다고, 나는 어렵게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처음 작정했던 시간의 세 배 가까이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지만, 아직 나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못 견디게 그리웠던, 산사태처럼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모국어에 감격하며 한 계절을 보낸 뒤 겨울이 오자, 독일의 도시들이 그랬던 것과 꼭 같이 서울이 낯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채색 모직고트와 점퍼 들 속에서 어깨를 웅크린 사람들은 오래 견딘 얼굴, 더 오래 언제까지든 견뎌나갈 얼굴로 내 몸을 스치며 얼어붙은 거리를 종종절음쳐 갔습니다. 독일에서 그랬던 것과 꼭 같이, 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감상과 낙관에도 빠지지 않은 채 나는 여기 있는 것입니다. 유난히 수줍어하는 수강생들과, 몇몇 스타 강사들을 기영해 영케 수익을 내며 인문학 아카데미를 꾸려가는 까다로은 성격의 원장과,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사계절 휴지를 달고 사는 단발머리 아프바이트생과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이 생활의 덤덤한 즐거움입니다. 아침이면 그날 강독할 문장들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암기하고, 새면대 위의 거울 속에 어렴풋하게 비쳐 있는 내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환한 골목과 거리를 한가롭게 걷습니다,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이제 당신은 그을린 얼굴 가득 햇빛을 받으며 유모차를 밀고 돌아옵니까. 두 살배기 딸의 손에선 당신이 한 묶음 꺾어 쥐여준 강아지풀이 차란차란 흔들립니까. 강변에서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당신은 백년 된 그 성당 앞에 멈춰 섭니까. 단단한 두 팔로 아이를 안아올리고, 유모차를 경비에게 맡긴 뒤 서늘한 성당 안으로 들어섭니까.
얼음에 담근 것 같은 햇빛이 청색 계열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을 투과해 쏟아져내려오는 곳, 그리스도는 아무런 고통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천진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천사들은 잠시 산책나온 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허공을 거니는 곳, 진한 푸른색과 더 진한 푸른색 앞사귀들이 착하게 손바닥을 펼친 종려나무들, 옅은 회청색 머리칼에 더 옅은 회청색 수도복을 걸친 화한 얼굴의 성자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죄와 고통의 흔적이 없는, 그 때문에 거의 이교적이라고 느껴졌던 성 슈테판 성당.
당신과 나란히 그곳을 걸어나오던 오래전의 늦여름 저녁, 당신은 수첩을 꺼내 나에게 써 보였지요. 어린 시절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져왔지만, 아무리 애써도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대신 새벽까지 어두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런 혼령들이 있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할 거라고, 논리적이지 않을 뿐더러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기독교의 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당신이 재미있어서, 나는 소리내어 웃으며 당신의 수첩을 건네 받았지요. 그 무렵 어디에선가 읽은,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을 적어 당신에게 내밀었지요.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진심으로 화를 낼 때 당신의 눈은 커지지요. 숱 많은 눈썹들이 치켜올라가고, 속눈썹과 입술이 떨리고, 숨이 몰아쉴 때마다 가슴이 벅차게 오르내리지요. 당신은 나에게서 펜을 돌려받은 뒤 수첩에 휘갈겨 썼지요.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고 같은 논증 따위에 미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슾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군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이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렇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이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십수 년간 다녔던 특수학교의 독순술 수업에서., 당신은 입술을 읽는 법뿐 아니라 말하는 법도 배웠다고 했지요. 필담으로 당신과 그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밤 나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그 수업에서 배운 대로 말을 한다면 어떨까.
그 여름 나는 가족 몰래 독일어 수확본을 사서 밤마다 문장들을 익혀가고 있었습니다. 책상 옆에 걸린 작은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가며 한 시간쯤 수화를 연습하다보면 등이며 겨드랑이가 흠뻑 젖어 있곤 했습니다. 핮만 조금도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인생에서 겪을 수 없을 달콤한 밤들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올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부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플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여름 밤 내 책상 옆의 작은 거울 속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설픈 수화를 연습하는 내 상반신이 비쳐있었지만, 거기 어른어른 겹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나는 매순가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이 나엑 말을 건넨다'
그 밤, 독일어로 먼저 생각났던 그 문장을 나는 소리내어 모국어로 다시 중얼거려보았습니다.
순간 떠오른 것은, 당신이 종일토록 일하는 창고에 가득 쌓여 있던 생나무들이었습니다. 사람들 몰래 - 특히 당신의 아버지 멀래 - 나는 그곳에 숨어들어 당신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지요. 널빤지들을 톱으로 켜고, 끌로 깎고, 사포로 밀어내는 당신의 모습은 아무리 지켜봐도 싫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일이 길어지면 나는 작업실 구서구석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지요. 건조시키기 위해 벽면 가득 널어놓은 널판지들에 코를 대보고 손끝으로 매만져보았지요. 향이 진한 삼나무, 흰 자작나무, 얼굴을 가까이 대면 은은한 향이 나는 소나무, 당신의 둥근 어깨를 닮은 다갈색 나이테들. 
당신의 목소리는 아마 그 생나무들의 감촉과 냄새를 닮은 어떤 것일 거라고. 막연히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당신이 목소리가 궁금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당신은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은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ㅇ낳을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결국 나는 눈이 멀것이었습니다. 더이상 당신을 볼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필담으로로, 수화로도 당신과 말을 나울 수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난 뒤 갑자기 쌀쌀해진 휴일 오후, 일을 쉬며 차를 끓이던 당신에게 나는 물었습니다. 어떤 위험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아니, 백치처럼 순진하게.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무슨 말이든 나에게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은 주의 깊게 내 입술을 들여다보았고, 멍한 시선으로 내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나는 찬찬히 더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 
 
얼마나 여러 번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돌려, 그날의 내 어리석음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원했는지 당신은 알지 못했겠지요. 당신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고, 부슬비가 내려 너무 향이 더 진해진 창고에서 즉시 나를 내쫓았습니다. 더이상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물론 나에게 키스하지 않았고,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에, 좋은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섬세한 쇄골에 얼굴을 묻게 하지 않았고, 갈망하는 내 손을 당신의 셔츠 속에 끌어넣어 심장 박동을 느끼게 하지 않았고, 새벽부터 당신의 집 앞에서 서성이며 기다린 나를 단호히 외면했고, 냐 손가락이 끼이건 말건 힘을 다해 창고 문을 닫았고, 마침내 몇 주가 더 흐른 밤,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습니다. 
나도 당신도 놀랐습니다, 떨어진 내 안경을 줍지 않은 채, 코아 입술에서 들큼한 피가 흐르는 대로 버려둔 채 나는 당신의 다리를 안았습니다. 몸이 떨며 당신은 나를 밀어 넘어뜨렸습니다.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한 순간 입술을 열었습니다.
....당장, 나가!"
그 목소리. 
겨울 밤 창문 틈을 할퀴며 들어오는 바람 소리, 실톱이 쇠 위에서 소리치며 유리창이 갈라지는 소리, 당신의 목소리. 
나는 더듬더듬 배로 기어가 다시 당신의 다리를 안았습니다. 정말 몰랐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당신이 나무토막을 집어 내 얼굴을 쳤을 때, 내가 즉시 기절했을 때, 델 것 같은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을 당신은 보았습니까.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당신을 잃고 몇 해가 지난 뒤, 두 개의 필름조각을 통해 해를 올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정오가 아니라 오후 여섯 시에, 엷은 산을 부은 듯 눈이 시어 나는 오래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그토록 매혹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웠을 뿐입니다. 내 곁에 앉아 있지 않은 당신의 손등이. 연한 갈색 피부 위로 부플어오른 검푸른 정맥들이. 
 
이제 당신은 아이를 안고 어두운 성당에서 걸어나옵니까.
입구의 경비원에게 맡겨놓았던 유모차를 찾아 아이를 태운 뒤 버클을 채웁니까. 함부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고쳐묶고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까. 열일곱 살의 내가 내벽부터 어리석음가 번민 속에 서성이던 그 거리를, 자잘한 검은 돌들이 박힌 포도를 통과해 걸어갑니까. 유모차 바퀴가 불쑥 튀어오를 때마다 아이의 가슴 앞으로 손을 내밀어 달랩니까. 선하기에 슬퍼하는 당신의 신을 어깨에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적 속에서 나아갑니까.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필름조각들을 까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질긴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6

어두운 초록색 픅판 가득 문장들을 쓴 뒤 남자는 흑판 가장자리에 상체를 기댄다. 짙은 청색 셔프의 어깨 부분에 백묵 가루가 잔뜩 묻은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면도를 말끔히 한 그의 얼굴은 매우 창백해서 언뜻 대학원생처럼 앳되어 보이지만, 우묵하게 꺼진 두 빰이 제 나이를 드러내 보여준다. 노쇠의 조용한 시작을 알리는 가느다란 주름들이 눈과 입가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7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카페와 식당에서 그녀는 스스럼없이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 건 - 강의할 때만 예외였다 - 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자신의 부피를 더 작게 만드릭 위해 어깨와 등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머를 이해했고 퍽 낙천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웃음소리만은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를 상담했던 반백의 심리치료사는 그 점을 지적했다. 정석대로 그녀의 유년기 체험에서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그년느 절반쯤만 그에게 협조했다. 십대에 언어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대신, 더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어 찾아냈다. 
그녀를 뱃속에 가졌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피푸스에 걸렸다.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매끼 한움큼씩의 알약을 한 달 남짓 복용했다. 그녀와 반대로 급하고 괄괄한 성격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몸을 추스르기 무섭게 산부인과에 가 아이를 지우겟다고 말했다. 약을 그만큼 먹었으니 성한 아이가 나올 수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의사는 이미 태반이 형성되었으므로 임신중절은 위험하다고, 두 달 후에 다시 내원하면 유도분만 주사를 놓아 아이를 사산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한 두 달이 가까워지자 태동이 시작되었고, 마음이 약해진 그녀의 어머니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불안에 시달렸다. 양수가 젖어 미끈거리는 갓난아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거푸 세어본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자라면서 그녀는 이 일화를 반복해 들었다. 고모들, 외사촌들, 오지랖 넓은 이웃집 여자들로부터 "하마터며 넌 못 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섬뜩한 차가움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ㄷ.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떠들썩하고 웃음이 많은 손님들을 서름서름하게 배웅하고 난 저녁 무렵, 그녀는 툇마루에 쪼그려앉아 땅거미에 묻혀가는 마당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어째를 웅크린 채, 그토록 얇고 거대한 한 꺼풀의 세계가 어둠에 삼켜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고백한 이 이야기를 심리채료사는 흥미로워했다. "혹시 그게 최초의 기억입니까" 라는 그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한 뒤 더 생각을 더듬었다. 햇볕이 드는 마당가에서 보낸 한나절의 기억 - 모국어의 음운들을 처음 발견했던 - 을 꺼냈다. 그 일화 역시 심리치료사의 마음에 들었다. 두 개의 기억을 신중하게 결합해 그는 결론을 만들어내려 했다. "최초의 기억으로 떠올렸을 만큼 당신이 언어에 사로잡혔던 것은, 언어가 세계와 결합되는 회로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말하자면 그 매혹은, 당신이 세계에 대해 가져온 위태롭다는 느낌과 무의식적을 유사한것은 아니었을까요?" 심리치료사는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럼 최초로 꾸었던 꿈을 혹시 기억합니까?"
어쩌면 그가 자시의 저서에 사례로 인용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문득 상상했다. 그 어뚱한 상상 때문에 불안해져 그녀는 고백하지 않았다. 글을 깨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꾼, 이상하게 생생하고 차가웠던 꿈에 대해서, 낯선 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고, 표정 없는 낯선 어른들이 그녀를 지나쳐갔다. 어린 그녀는 낯선 옷을 입고 혼자서 큰길가에 서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쩐 사건의 전개도, 결말도 없었다. 오직 서늘한 감각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귀를 틀어막은 것처럼 조용한 거리, 처음 보는 사람 사람들, 혼자인 자신의 몸.
그녀가 침묵하며 그 꿈의 세부에 집중하려 애쓰는 동안, 심리치료사는 처방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당신은 삶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고, 당연하게도 자립적으로 살아갈 힘이 그때에는 전혀 없었으며, 위태했던 출생의 과정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위협감은 느꼈던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당신은 훌륭하게 자랐으며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고, 목소리를 크게 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공간을 점유하고 어깨를 곧게 펴라고, 
그 논리를 따라가면 그녀의 남은 삶은 하나의 투쟁,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의심하는 가냘픈 내적 질문에 한 발 한 발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했다. 그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의 어딘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여전히 그녀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고도, 본성의 잔연스러움을 억누르며 지내왔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순조롭게 상담이 진행되고 있었던 오 개월째,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는 대신 말을 잃은 것에 심리치료사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해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이해합니다. 소송에 패했다는 사실을, 때마침 찾아온 육친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겠지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이가 그리웠겠지요. 이해합니다.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버텨 낸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겠지요"
과장되게 간곡한 그의 어조에 그녀는 당황했다. 가장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이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담담하게 알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요"
그녀는 펜을 집어, 탁자에 놓인 백지에 반듯하게 적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톤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잇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졋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 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 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때로는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잃은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러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책상에 펼쳐놓은 책에 그녀는 고개를 묻고 있다. <국가> 원본의 전반부와 한국어 번역본을 대조해서 볼 수 있도록 두춤하게 체본한 교재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희랍어 문장으로 떨어진다. 거친 재생종이가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 
고개를 들자, 침침하던 교실이 갑자기 밝아진 것처럼 느껴져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 기둥 뒤의 자리에서 늘 침묵을 비키고 있떤 늦은 중연의 남자가 거구의 대학원생과 나직하게 나누는 대화가 거제야 그녀의 귀에 들어와 박힌다. 
"앙코르와트에요. 어제 새벽에 돌아왔습니다. 사박오일 여름 휴가를 미리 냈어요. 피곤해서 오늘 수업은 빠질까도 했는데, 두 주 거푸 빠지는 건 수강료가 아까워서 말이죠.허허, 체력은 아직 쓸만하죠, 주말마다 산에 다니니까.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얼굴이 탔다고들 하네요. 그럼요. 거긴 더운 건 여기하고 비교 못 합니다. 매일 스콜이 한 번씩 지나가는데, 그런다고 딱히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고....뭐 그냥, 폐허에 대한 흥미져, 고대 크메르 문자가 사원의 돌에 새겨져 있던데, 개인적으론 고대 희랍 문자보다 더 보기 좋더군요"
휴식시간의 텅 빈 흑판을 그녀는 올려다본다. 강사가 헝겊지우개를 가볍게 지운 후라서, 흰 백묵으로 쓴 희랍 문자의 부분들이 두문드문 남아 있다. 문장의 삼분지 일 정도가 거의 완전히 잃히는 곳도 있다. 넓은 붓으로 일부러 형태를 만든 것처럼 희끗하고 거친 소용돌이가 남은 곳도 있다.
그녀는 다시 교재를 향해 고개를 수그린다. 깊게 숨을 들이쉰다. 숨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말을 잃은 뒤, 때로 그녀는 자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말과 닮았다고 느낀다. 마치 목소리처럼 대담하게 침묵을 건드린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는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의식불명인 어머니가 한차례 더운 숨을 내술 때마다 침묵이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니가 숨을 들이마시면, 몸서리쳐지게 차가운 침묵이 소리치며 어머니의 몸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녀는 연필을 쥔다. 좀 전까지 일고 있었던 문장을 들여다본다. 이 철자들 하나하나에 작은 구멍 하나씩을 뜷을 수 있을 것이다. 연필심을 넣고 길게 찢으면 한 단어, 아니, 한 문장이 통째로 뚫려나갈 것이다. 거친 회색 재생종이, 그 위에 도드라진 검고 작은 철자들, 벌레처럼 등을 운크리거나 활짝 편 악센트들을 그녀는 묵묵히 들여다본다. 발을 디디기 힘든 그늘진 장소, 더이상 젋지 않은 플라톤이 고심하며 시간을 버는 문장. 손으로 입을 가린 사람의 불분명한 목소리. 
그녀는 더 힘주어 연필을 쥔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그 문장에 밴 감정이 백묵 자국처럼, 무심히 굳은 핏자국처럼 드러나는 것을 견딘다. 
 
오랫동안 말을 잃은 상태를 그녀의 육체는 예민하게 드러낸다. 그녀의 몸은 실제보다 단단하거나 무거워 보인다. 걸음걸이, 손과 팔의 움직임, 얼굴과 어깨의 기름하고 둥근 윤곽 모두가 확고한 경계선을 이룬다. 어떤 것도 외보로 새어나가지 않고, 어떤 것도 내부로 스며들어오지 않는다. 
원래도 거울을 잘 보지 않는 편이지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가장 많이 상상해 눈앞에 그리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일 것이다. 더이상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게 되자, 차츰 그녀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연히 유리창이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무주칠 때 그녀는 자신의 눈을 곰곰히 들여다본다. 두 개의 그 또렷한 눈동자들만이 자신과 그 낯선 얼굴을 연결하는 통로라고 느낀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ㅏㅁ이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신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침묵의 얼음 속에서 근가 온 힘을 다해 건져내 들ㅇ다보는 것은 이주에 하룻밤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아이의 얼굴과 연필을 쥐고 꾹꾹 눌러쓰는 죽은 희랍 단어들뿐이다. 

그녀는 끈적끈적한 땀이 밴 연필을 내려 놓는다.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낸다. 
 
"엄마, 구월부터 나 여기 못 온대."
지난 토요일 밤, 소리없이 놀라며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이 주 사이에 아이는 또 성큼 자랐다. 자란 만큼 여위기도 했다. 속눈썹이 길게 그늘져 생긴, 펜으로 그린 세밀화 같은 빗금들이 희고 말랑말항한 뺨 위에 선명했다. 
나, 거기 가기 싫은데, 영어 자신 없어, 거기 산다는 고모는 얼굴도 못 봤는데, 일 년이나 있아야 한대, 겨우 친구 사귀어놨는데 이렇게 금방.
방금 목욕시키고 침대에 함께 누운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사과 냄새 같은 거품비누 향이 났다. 아이의 동그란 눈 속에 그녀의 얼굴이 비쳐 있는 것이 보였다.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아이의 얼굴이 비치고, 그 얼굴 속 아이의 눈에는 또다시 그녀의 얼굴이....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말해주면 안 돼? 말 못 하면 편지 쓰면 안 돼? 나 다시 여기로 데려어면 안 돼?"
아이가 짜증을 내며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을, 그녀는 잠자코 손을 뻗어 다시 그녀 쪽을 돌려놓았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왜 안 돼?"
다시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며 아이가 말했다.
"불 좀 꺼.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잠을 자"
그녀는 일어서서 불을 껐다. 
일층의 창문으로 가로등 빛이 새어들어와, 조금 지나자 아이의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또렷이 드러났다. 아이의 이마 가운데가 찌푸러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폈다. 다시 찌푸려졌다.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아이는 질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유월 늦은 밤의 어둠은 흥건한 풀냄새와 나무 수액 냄새, 썩어가는 음식 쓰레기 냄새로 뒤법먹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준 뒤, 여자는 버스를 타지 않고 두 시간 가까이 서울의 중심부를 통과해 걸어 돌아왔다. 어떤 거리는 대낮처럼 환했고, 매연으로 숨이 막혔고, 음악소리가 요란했고, 어떤 거리는 캄캄했고, 후락했고, 버려진 고양이들이 쓰레기봉지를 이빨로 뜯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았다. 멜레베이터 앞의 챵백한 조명 아래, 이제 들어가 잠들어야 할 집의 현관문을 쏘아보며 그녀는 서 있었다. 돌아서서 아파트 건믈을 빠져나갔다. 생명을 가졌단 모든 것이 상해가는 여름밤의 냄새 속을 점점 빠르게 걸었다. 관리사무소 앞의 공중전화부스로 뛰어들어갔다. 집히는 대로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입을 벌렸다. 숨은 뱉었다. 들이마셨다가 다시 뱉었다. 
"여보세요"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수화기를 움켜 잡았다.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경련하는 손가락들이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그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었다. 자신의 빰을 후려치는 사람처럼 거칠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인중을, 턱을, 아무도 틀어막지 않은 입술을 문질렀다. 

 

말을 잃은 뒤 처음으로, 그날 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시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고 언어 없이 생각했다. 두 눈이 저렇게 고요할 수는 없다. 피나 고름, 더루운 얼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면 오히려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속에 침묵하는 그녀가 비쳐 있고, 비쳐 있는 그여의 눈 속에 다시 침묵하는 그녀가.....그렇게 끝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몀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년 남자와 대학원생이 어느 사이 복도에 나갔는지 캔커피 하나씩을 들고 들어온다. 중년 남자는 자신이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휴대폰으로 계속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잘하는 사람한테 맞추지 말고 못하는 사람한테 맞춰어야지. 잘하는 사람만 따라오라고 할 거면 사원 교육은 뭐하러 하느냐고. 추후 보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가 무슨 대기업이야? 그 강사 내일 나하고 통화하게 해줘."
대학원생이 눈짓으로 중년 남자에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낮은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다. 고개를 앞과 뒤, 양옆으로 우둑우둑 꺾는다. 십 분간의 휴식시간은 이미 끝났다. 시간을 잘 지키던 희랍어 강사가 오늘따라 늦는다. 갑자기 정적이 흐른다.
그녀는 여전히 꼼짝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탓에 허리와 고개, 어깨가 뻐근하다. 그녀는 공책을 펼친다. 앞 시간에 받아적었던 문장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문장들 사이의 여백에 단어를 적어넣는다. 까다로은 시제, 명사들의 격변화, 복잡한 태의 용법들을 끈질기게 뚫고 들어가 불완전하고 단순한 문장을 만든다. 입술과 혀가 자신도 모르게 달싹이기를 기다린다. 첫 소리가 문득 세어나오기를 기다린다. 

"그게 뭐예요?"
그녀와 같은 줄에 앉아 있던 철학과 학생이 갑작스럽게 묻는다. 앞 시간에 예문으로 배웠던,

에 그녀가 이어 쓴 뚝뚝 끊긴 희랍어 문장들로 채워진 공책을 가리킨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서둘러 공책을 덮지도 않는다. 얼음의 내부를 들여다보듯 온 힘을 다해 청년의 눈길을 들여다본다.
 
얼어붙은 표면 위로 무수한 핏자국을 날마다 끼엊어놓을 뿐, 이즈음 아이의 고백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고통은 그녀의 침묵에 균열을 내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오래 이를 닦거나, 냉장고 문을 열고 너무 오래 서 있거나, 정차중인 승용차의 앞법퍼에 다리를 부딪치거나, 가계의 선반에 진열된 물건들을 부주의하게 어깨로 쳐서 떨어뜨렸다. 선득한 홑이불 속에서 눈을 감을 때마다 눈 내리는 거리가, 낯선 행인들이, 낯선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그녀인지 그녀의 아이인지 구별할 수 없는 희끗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 열린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갓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걱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시예요? 희랍어로 쓴 시?"
창가에 앉아 있던 대학원생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돌아본다. 열려 있던 앞문으로 희랍어 강사가 들어도다가 멈춰 선다. 
"선생님! " 이마에 빨갛게 여드름이 익은 대학생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분이 희랍어로 시를 썼어요"
기둥 뒤에 앉아 있던 중연의 사내가 감탄스러운 듯 그녀를 돌아보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 소리에 놀라 그녀는 공책을 덮는다. 희랍어 강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한 얼굴로 지켜본다. 
"정말입니까? 제가 잠깐 봐도 되겠어요?"
외국어를 해독하듯 온 힘을 다해 그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연한 녹색을 넣은, 어지러울 만큼 두꺼운 안경알을 올려다본다. 이내 상활을 깨닫고, 두툼한 교재와 공책, 사전에 필통을 가방에 넣는다. 
"아니, 앉으세요.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녀는 일어선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빈 의자들을 차례로 밀치며 문을 향해 걸어나간다.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 앞에서 누군가가 뒤에서 여자의 팔을 붙든다. 그녀는 놀라 뒤돌아본다. 희랍어 강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는 것은 처음이다. 교단에 서 있지 않은 그의 ㅣ는 생각보다 작고,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갑자기 나이들어 보인다. 
"저, 불편하게 해들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그는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와 묻는다.
"혹시 내 말을, 들을 수 없나요?"
그는 갑자기 두 손을 들더니 무엇인가를 수화로 말한다.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며, 그것을 해석하듯 더듬더듬 반복해 말한다. 
"미안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체념하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두 손을 움직이든 것을 본다.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고속도로 방음벽 옆으로 일차선의 일방통핼로가 길게 뻗어 있다. 그 길 옆의 인도를 따라 그녀는 걷고 있다. 행인이 많지 않아 시에서 돌보지 않는 길이다. 깨어진 보도블록들 틈으로 질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아파트에서 담장 대신 심은 빽빽한 아카시아 나무들은 검고 굵은 팔 같은 가지들을 서로를 향해 힘꺼 펼치고 있다. 축축한 밤공기 가득 풀냄새와 배기가스가 역하게 뒤섞여 있다. 수천 개의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 같은 엔진음이 지척에서 그녀의 고막을 긋는다. 발 옆의 풀숲에서 여치가 느리게 운다.
 
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걸을 걸엇떤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이 있었으머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 들은 마친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ㅗ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부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ㅇ들의 상이 맞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오래전의 이런 여럼 밤, 그녀는 길을 걷다가 혼자 웃은 적이 있었다. 
갸름하게 부푼 열사흘 달을 보고 웃었다. 
어떤 사람의 시무룩한 얼굴 같다고, 움푹 파인 둥근 분화구들은 실망을 숨긴 눈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마치 그녀의 몸속에 있는 말들이 먼저 헛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것 같았다. 
 
하지를 갓 넘기고 찾아온 더위가 이렇게 어둠 뒤로 주춤 물러선 밤.그리 오래지 않은 오래전의 밤그녀는 아이를 앞세운 채, 커다랗고 차가운 수박을 두 팔로 껴안고 걸은 적이 있었다.목소리가 다정히, 최소한의공간으로 흘러나와 번졌다. 입술에 악물린 자국이 없었다.눈에 핏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란다.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체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독일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 뒤 처음 맞는 초파일이었다. 오래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갔던 수유리의 절을 혼자 다시 찾았다. 떠나기 전에 절까지 오르는 길 양편으로 감자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밭은 완전히 시멘트로 덮이고 그만그만한 층수의 연립주택들이 세워져 있었다. 절의 일주문을 통하고서야 세월을 비켜간 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단다. 경내에는 어떤 건물도 신축되지 않았고, 탑과 종루는 오히려 그때보다 규모가 작아진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어른이 된 탓에 사물들이 조금씩 작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아직 밤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므로, 나는 경내를 서성이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나이 지긋한 불신도들이 그동안 세상을 떠나서인지 연등들의 수효는 줄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만은 여전했다. 아니, 오래전의 철없던 시절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 보았던 연등회가 순정한 경이로움이었다면, 이번엔 어딘가 사무치는 데가 있었다.
 마침내 날이 저문 뒤, 바람이 불 때마다 붉고 흰 지등의 안쪽에서 불빛이 흔들려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대중방 마루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처음에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한 단어였다는 것을, 밝음과색채 역시 그렇게 한 몸이었다는 것을 그때만큼 생생하게 실감한 적은 없었단다. 법당이 문을 닫는 열한시가 다가왔을 때에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가자'라고 뜻없이 입속으로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이제 버스정류장이 있는 대로변까지 나가자면 삼십 분은 걸어야 했고, 거기서부터 내가 사는 곳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그 버스가, 내가 사는 곳에 영원히 다다르지 못핳 것 같았다. 아무리 버스와 지하철은ㅅ갈아탄다 해도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생생한 밤의 바깥으로 벗어날 우없을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십대부터 수없이 반복해 꾸며온 꿈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꿈들속의 시간은 저물녘이었고, 차창 밖 거리의 간판들은 모눅어도 독일어도 아닌 생소한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꿈속의 나는 잘못 올라탄 버스에서 당장 내리고 싶었지만, 버스에서 내린다해도 어느 버스로 갈아타야할지, 어떤 길을 건너 다른 정류장으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체 처음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기억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거리를 뚫어지게 내다보며 뒷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꿈에서 께어날 때마다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마음, 두렵도록 익숙한 그 감정을 누르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제법 차다. 머리 위로 결겹이 걸린 붉은 지등들은 여전히 완전한 아름다움과 정적에 싸인 채 소리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라고 그때 문득 줄어거려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9

새벽 어스름 속을 걸어본 적 있니.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따뜻하고 연약한 것인지 실감하며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새벽, 모든 사물의 몸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와, 방금 잠이 씻긴 두 눈 속으로 기적처럼 스며들어오는 새벽.

 

키리에크 거리 끝은 아파트 이층에 우리가 살았던 시절, 새벽이면 늘 그렇게 혼자 목목을 걷곤 했어. 공기에서 푸른 기운이 가실 때쯤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님과 넌 아직 잠들어 있었지, 바깥보다 어두은 실내를 밣히려고 나는 갓등을 켜고, 깨끗한 허기를 느끼며 냉장고를 뒤졌어, 몇 알의 호두를 꺼내 우물거리며, 발뒤꿈치를 들로 살금살금 내 방으로 들어가곤 했어. 

이제 그 모든 일들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어. 충분히 밝은 시간, 밝은 장소에서만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다만 상상할 뿐이야, 동틀 무렵 지그 ㅁ세든 집을 나서서, 차량도 행인도 드문 어둑한 거리를 통과해, 오래전 우리가 살았던 수유리 집에 다다를 때까지 걷고 또 걷는 내 몸을.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방이 네 개나 되는, 당시로선 꽤 넓은 편이었지만 외풍이 심해 겨울을 나기 힘든 빌라였지.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나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퍼르스름한 실들이 쉴새 없이 뽑아져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결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활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삐비라고 이름붙였던 우리 병아리 기억하니.

교문 앞에서 종이봉지에 담아 팔던 그 따뜻한 녀석을 내가 사들고 왔을 때, 아직 학교에 안 들어간 너는 좋아서 얼굴이 새빨개졌지. 녀석을 키워도 된다는 허락을 어머니께 받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떼쟁이인 너 덕분이었어. 

하지만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우린 나무졋가락 한 짝을 분질러서, 교차되는 부분을 무명실로 친친 감아서 십자가를 만들었지. 그때까지 우린 선산 묘지의 상성과 비석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서양 동화책들이 삽화에서 본 대로 흉내를 냈던 거지. 

빌라 공용 화단의 흙은 단단하게 얼어 있었어. 밤새 울어서 눈이 부은 너를 언 땅을 숟가락으로 파다 말고 손이 시리다고 했어. 내가 움켜쥔 숟가락은 흙을 이기지 못해 이미 휘어 있었고, 하얀 가제수건에 싸인 빼비는 여전히 고요했어.

 

실은 그곳을 찾아가보았어, 이곳으로 돌아와 맞은 첫 겨울에.

빌라는 헐리고 없더구나, 대신 두 층을 더 올린 신축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었어. 화단이 있던 자리에는 주차공간을 표시하는 흰 선이 그어졌고, 승용차 두 대와 승합차와 소형 트럭이 나라히 주차돼 있었어. 앞유리와 사이드 미러에 잔뜩 성애가 낀 그 차들을 보다가, 내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흰 김을 바라봐가 무심코 생각했던 것 같아. 

어떻게 됐을까. 그 작은 뼈들은.

 

란아.

넥 보내준 편지와 시디 잘 받아보았어.

받은 날 밤 바로 답장을 썼는데, 쓰다보니 마음에 들지 ㅇ낳아 이렇게 다시 쓴다. 어째서인지, 요즘은 어떤 글이든 쓰다보면 금세 생기없는 식상한 내용이 되어버리는구나.

 

어쨌거나, 네가 편지에서 걱정한 것과는 반대로 난 잘 지내고 있어.

믿을 만한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고, 제때 음식을 만들어 먹는단다. 아침이면 삼십 분쯤 맨손체조를 하고, 오후에는 깨 오랫동안 골목 산책을 하곤 해. 

사실, 건강이 걱정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너야. 너는 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지 않니. 무엇에든 몰두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엔 병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 않니. 

계집애 같은 오빠와 사내애 같은 여동생. 친척들은 늘 우리 그렇게 비교했지. 넌 그런 말을 죽기봐 싫어했지. 나처럼 서랍을 정리하라는 말. 나처럼 책가방을 밀 챙겨두라는 말, 나처럼 글씨를 받듯하게 쓰라는 말, 나처럼 공손하게 어른의 얼굴을 오려다보라는 말,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로 너는 엄마엑 소리지르곤 했지. 그만 좀 해요. 열이 나서 못 살겠어. 냉장고에라두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라구. 

 

요즘도 그러니, 란아.

낸장고에 뛰어들고 싶도록 하나는 일이 있니.

연습이 바쁘다고, 학창 시절처럼 아침저녁으로 뮈슬리만 먹는 건 아니니. 

마음이 잘 맞지 않든다던 단장하고는 조금 좋아졌니.

어머니와는 그때 이후로 통화해봤니.

무릎은 어떤시니.

혼자서,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니.

어머니와 네가 힘을 합해 걱정하는 아카데미 일은, 언제나 그렇듯 아직도 별탈 없단다. 내가 무일푼이 될까봐, 자존심 때문에 그걸 아무에게도 말 안 할까봐 어머닌 노심초사하시지. 얼마 전에 라틴어 토급반이 하나 더 개설되었다고, 이제 일주일에 네 번 강의한다고 어머니께 전해주겠니. 반이 만아졌다 해도 학생 수는 적어서 전혀 힘들지 ㅇ낳고, 나이가 들 만큼 들고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라 수업하는 게 재미있다고. 여기 돌아와서 처음 이삼 년간은 공양 고전들을 간간이 찾아 읽었는데, 모르는 부분을 묻는 동안 격의 없이 친해진 학생들도 있다고 - 그러고 보니 그 학생들과 연락한 지 한참 되었구나 - 고백하자면, 학생들을 지켜보다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 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동강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을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란아. 실은 이즈음, 특이한 학생이 눈에 띄어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어.

적은 수의 학생들과 수업하다보니 논빛만 봐도 각자의 관심사를 느길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처음부터 어떤 텍스트에도 관심이 없었어. 희랍 철학에도, 문학작품에도, 간혹 인용되는 신약 성경에도. 그렇다고 태만한 건 아니고, 오히려 출석은 한 번도 빠진적이 없어. 언어 자체의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할까 - 문법과 특수한 표현들에 주의를 길울인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보다 특이한 점은 그 사람이 결코 말을 하지도, 웃지도 않는다는 거야. 수업시간에 지명하면 대답하지 않고, 휴식시간에도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수줍어하는 성격의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 이상한 생각이 들더구나.

한번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막 교실로 들어오는데 한 학생이 웃으며 나에게 말했어.그 여자가 희랍어로 시를 썼다고, 나는 호기심이 생겨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여자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울려다보더니 일어서서 강의실을 나가버렸어.

소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 건 그때였어. 여태 입술을 읽어 간신히 강의를 따라왔던 거라고. 그래서 어떤 농담과 질문 들에도 반응할 수 없었던 거라고. 

나는 서둘러 북도로 뛰어나갔어, 캄캄한 비상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어. 그 사람이 천장의 환한 조명을 벗어나는 순간 난 더이상 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말과 수화로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냐고, 모르고 있었다고, 불현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고, 그게 독일어 수화라는 사실을 , 당연히 한국어 수화오는 다를 거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우리가 얼어붙은 순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란아. 

일전에 보내준 편지와 시디 잘 받아보았어.

답장이 늦었지.

요즘은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특별히 걱정할 일은 아냐.

어머니가 늘 소원했던 대로 책 읽는 시간을 줄였거든. 

한가하게 가만히 앉아 있거나 밝은 거리를 산책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펜을 쥐고 어떤 짧은 글이든 마무리하는 일이 어느 사이 서먹서먹해진 건지도 모르겠어.

대신 네 시디는 거이 매일 듣는단다.

화음 속의 소프라노 파트에 귀 기울이는 한 순간, 네 목소리구나. 느낄 때가 있어.

 

거기는 지금 저녁 어스름이겠구나.

아직 사위는 환하고, 상점들에 하나둘 불이 밝혀지겠구나. 행인들은 부산히 그 앞을 지나쳐 걷고 있겠구나 트램 전루장에는 퇴근 길의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모여 있고, 전철을 타려는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노숙자들을 지나쳐 계단을 밟아 내려가겠구나.

 

이곳은 지금 깊은 밤이야.

창문을 열어놓고 볼륨을 주여 네 시디를 들으면서, 이따금 따라 흥얼거리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이곳의 여름밥을 기억하니.

한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엎질러진 어둠.

풀냄새, 활렵수들의 수액 냄새가 진하게 번져 있는 골목.

새벼까지 들리는 자동차들의 에ㅐㄴ진 소리.

뒷산과 이어지는 캄캄한 잡풀숲에서 밤새 우는 풀벌레들.

그 속으로 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

 

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을까.

네가 연습하는 소기가 시끄럽다고 나는 투덜거리곤 했지만, 너는 다혈질의 성격대로, 오랜 시간 훈련받은 성량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곤 했지만, 아마 넌 짐작 못 했을 거야. 서울보다 추웠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맞은 독일의 첫 겨울, 낯선 교ㅗ실과 언어와 사람들에 지쳐 돌아온 내가, 아파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네 노래를 들으며 벽에 기대 앉아 있곤 했다는 걸, 그 목소리가 어떻게 내 얼굴을 만져주었는지.

 

집세가 싼 마인츠로 옮겨간 이듬해 겨울, 사춘기에 막 접어든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지. 아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식료푸점을 연 어머니가 늦도록 집을 비운 사이,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리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졋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거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느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너도 나에게 그런 절망을 느꼈니.

내가 인천행 비행기표를끊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너는 공연 리허설을 하루 앞두고 밤기차로 달려왔지. 한쪽 코트깃은 어깨 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찬 공기에 성대를 상하지 않으러고 희색과 연두색, 연노란색 스카프를 여신처럼 겹겹이 감고서. 오빠를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너는 말했지. 나는 오빠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언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우리가 그토록 연하고 부서지기 쉬웠을 때, 지구 한쪽에서 반대쪽으로 옮겨다닐 때,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달걀, 같은 흙반죽에서 나온 두 개의 도자기 공 같았지. 네 찌푸린 얼굴, 우는 얼굴, 깔깔 웃는 얼국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부서지며, 가까스로 무사히 모아 붙여지며 흘러갔지. 

우라가 어렸을 때 했던 놀이들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웃을 때가 있어. 끝없이 별명을 지어 부르며 서로를 놀리던 일. 너를 없고 가며 노래하듯 주고받았던 말들. "어디까지 왔나, 정류장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당당 멀었다". 내가 너보다 강해서 너를 돌볼 수 있었던 짧은 시간.

골판지 상자로 만든 삐비의 집에 네가 끝없이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오려 붙이던 모습. 

저녁부터 새벽까지 삐이삐이 울며 죽어가던 삐비를, 녀석을 지켜보며 밤새 울다 기진한 너를 번갈아 노려본 디 파자마 차임의 아버지가 버럭 소리지르던 일.

"당장 내다버리지 못해!"

엉엉 울며 너는 작은 주먹으로 아버지의 배를 때렸지. 이빨로 그의 허벅지를 물었지.

 

란아. 

가끔 아버지 생각을 할 때가 있니. 

그는 너를 사랑했으니까 - 자주 네 손을 잡고 동물원과 놀이공원과 가페 같은 곳들을 다니곤 했으니까 - 내가 모르는 기억들이 너에게는 많이 남아 있니.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우리를 비교하던 숱한 타인들처럼 어머니에게 말하곤 했지. 계집애같이 온순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꽉막힌 아들이라고. 활달하고 솔직한 너 같은 아들, 진짜 사내로 자라날 수 있는 아들이 필요했가고.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그가 정말 싫어한 것은 내 기질이 아니라 눈이었다는 걸. 그는 나와 눈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어.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면 천천히, 침착하게 피했지. 냉정한 사람. 빠른 속력으로 조직의 사다리를 밟아올라 젊은 나이에 강부가 된 사람. 독일 지사의 책임자로 발령받은 지 일 년 만에 스스로 사직서를 낸 사람. 누구에게도 거쳐를 알리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 사람. 육 개월 만에 불쑥 돌아왔을 때 그는 곧 안과수술을 받아야 했고, 수술이 실패하고 우리와 함께 마인츠로 옮겨간 뒤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파트 구석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지. 

 

너에게 그가 말해주었니.

그 반년 동안 그가 어디 숨어 있었늕.

어떤 도시의 어스름 속에서 나처럼 기다리다 돌아왔는지.

어떤 연민도, 흔적뿐인 애정도 없이 그에게 묻고 싶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이 어스름이 정말 완전한 밤으로 이어지는지.

 

그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내가 그렇게 물었다면, 그 냉정한 사람은 나를 비웃었을까. 더이상 필요 없어진 안경을 벗은, 잘생긴 눈썹 아래 열린 텅 빈 눈으로 말없이 내 쪽을 바라보았을까.

 

보고 싶은 란아.

고집불통, 기차 화통 란아.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혤르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 걸. 타고난 그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이제 네 시디는 다 돌아갔고,

밤은 아까보다 더 깊어졌어.

네 목소리가 정적 속에 스며들어서,

이 정적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진다.

 

동이 트려면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겠지.

그때까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지.

이제 스텐드를 끄면 얻ㅁ이 찾아오겠지

눈을 감는 것가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이.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정망하지 앟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바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10

"'수난을 겪다'는 뚯의 동사와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거의 흡사하지요.그러니까 지금 이 부분에서, 소트라테스는 일종의 언어유희로 두 가지 행위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무심코 팔꿈치로 누르고 있던 육각 연필을 빼낸다. 얼얼한 팔꿈치를 한번 문지른 뒤, 흑판에 적힌 두 단어를 공책에 옮겨적는다. 먼저 희랍 알파벳으로 단어를 쓰고, 결국 그 옆에 모국어로 뜻을 써넣지 못한다. 대신 왼주먹을 들어 졸음기 없는 두 눈을 문지른다. 희랍어 강사의 해쓱한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의 손이 움켜쥔 백물을, 하얗게 마른 핏자국 같은 모국어 문자들이 선명하게 흑판에 박혀 있는 것을 본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중첩을 단순히 언어유희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에게 무엇인가를 배워 깨닫는 일은 글자 그대로 수난을 의미했으니까요. 소크라테스 자신은 생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그를 지켜본 젊은 플라톤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었을 겁니다"

 

기둥 옆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식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인다. 퇴근하고 바로 오면 늘 저녁을 굶게 된다는 그의 제안으로 지난주부터 수업이 여덟시로 미루어졌는데, 포만감 때문인지 오히려 더 졸리고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다. 철학과 학생은 학기가 끝나 고향에 다니러 갔는지 지난주부터 결석이고, 대학원생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여 희랍어 단어를 소리없이 발음하고 있다. 그는 의학사 석사논문이 통과되는 대로 영국에 건너가 희랍 의학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찰학과 학생에게 말한 적이있다. 그러러면 의학사 전공자에게 장학금과 체류비를 지원한다는 제약회사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고도 했다. 언젠가는 낱장마다 잔뜩 밑줄이 그어진 갈레노스의 원서를 들고 와, 해부학과 관련된 부분의 해독을 희랍어 강사에게 부탁해 강사를 난처하게 하기도 했다. 원전 해석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에게 강사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고대 희랍어는 유럽 사람들도 다들 어려워해요. 한국의 젊은 사람들한테 한문 고전을 바로 독해하라고 하면 어려워하는 것처럼...여기서 너무 완벽하게 해가려고 하진 마세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받은 뒤, 좌충우돌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그의 인생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장 입구에 걸인처럼, 시비꾼처럼, 얼치기 사제처럼 버티고 서서 그는 모른다고 반복해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나는 알고 있지 않다고, 누구든 좋으니 제발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달라고, 어떤 스승도 없는 배움의 시간, 이제 모두가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수난의 시간이 그의 남은 삶을 이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희랍어 강사의 해쓱한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 흑판에 씌어진 모국어 단어들이 그녀의 오른주먹 안쪽에, 땀으로 축축해진 육각 연필의 매끈한 표면에 소리없이 으깨어져 있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쉰다. 들이마시고 싶지 않다. 깊게 들이마신다.

 

11

그녀가 세든 집은 어둡다.

아파트의 일층인데다, 거실 앞으로 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키 큰 나무들의 밑동이 보이는 것이 좋아 세들었던 것인데, 그 울창한 숲이 한낮에도 거실을 그늘지게 하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살던 때에는 태양광에 가깝다는 삼파장 형광등을 종일 켜두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럴 필욜를 느끼지 못하낟. 바깥 날씨를 짐작할 수 없는 어둑한 거실에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와 함께 쓰던, 더블침대와 옷장과 텔레지번이 있는 안방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를 의해 원목 책생과 책장을 짜넣은 작은 방도 마찬가지다. 숲그늘이 지지 않아 그녀의 집에서 유일하게 밝은 곳이지만, 아이가 오는 날이 아니면 문을 열지 않는다. 

어머니의 상을 치른 직후 - 아직 아이와 함께 있었고, 말을 잃지 않았을 때 - 그녀는 일 년 동안 상복으로 입을 옷들을 꺼내 육십 센티 폭의 행어에 걸었다. 검은색 봄가을 면셔츠와 반소매 블라우스 한 장씩, 검은색 면바지와 진 한 벌씩,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와 긴 모직코트 한 벌씩, 검고 굵은 털실로 뜬 목도리와 짙은 회색 장갑. 

"됐다. 아무것도 따로 살 필요 없겠어."

행어 앞에 서서 그녀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여태 침대에 걸터앚아 그녀의 생돌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왜 앨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녀의 생활은 단순하다.

한 계절에 한두 벌뿐인 검은 옷을 제때 세탁해 입고, 최소한의 식료품을 가까운 가게에서 장봐오고, 최소한의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바로 치운다. 그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대체로 거실의 소파에 꼼짝 앉고 앉아서, 키 는 나무들의 두꺼운 밑동과 푸르른 가지들을 내다본다. 저녁이 오기 전에 집은 벌써 어두워진다. 나무들의 운곽이 검어질 때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어둑우둑 저물어가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초록색 신호등이 금세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걷는다.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히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때까지 걷는다. 결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뭉을 끄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희랍어 강의가 있는 목요일에는 좀더 일찍 가방을 챙겨 나간다. 아카데미까지 여러 정거장을 남겨두고 버스에서 내린 뒤, 도로의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오후의 복사열을 견디며 걷는다, 덕분에, 그늘진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한참 동안 그녀의 온몸은 흠뻑 땀에 젖어 있다. 

한번은 그녀가 막 이층으로 올라서는데 앞서 걸어가는 희랍어 강사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이미 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인사를 건네려다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아챌수 있는, 친밀감과 멋쩍음과 체념이 섞인 웃음이었다. 곧 웃음을 거둔 그의 얼굴은 진지해서, 그렇게 웃었던 것을 이해해주기를 정식으로 청하는 것 같았다. 

그후 계단이나 복도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칠 때, 그는 웃음짓는 대신 어렴풋한 눈인사를 한다. 각기 뒷문과 앞문을 열고 텅 빈 강의실에 들어설 때까지 그들은 비슷한 보폭으로 걷는다. 비슷하게 상체를 앞으로 수그리고,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담담하게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 채.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 그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겸손하게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눈길인데, 때로 겸손하다는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을 때가 있다. 

희랍어 시간이 시작되기 삼십여 분 전, 강의실에 두 사람뿐이었을 때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뒤 가방에서 주섬주섬 교재와 필기 도구를 꺼내고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교탁 옆에 놓여 있던 자신의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와 조금 거리가 있는 책상까지 다가왔다. 의자를 빼서 공간을 맏는 다음 통로를 향해 앉았다. 그는 두 손을 들어올려 허공에서 가볍게 손깍지를 끼었는데, 잠시였지만 그녀는 그가 악수를 청하려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손깍지를 낀 자세로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말을 걸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이제 곧 결정한 뒤 알려주려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그는 일어서서 교탁 옆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수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더운 칠월의 밥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 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매시간 지나치리만큼 성실했던 거구의 대학원생은 이십 분 전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다. 기둥 뒤에 앉은 중년 남자는 목덜미의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더니, 마침내 기진한 듯 도금 전에 책상에 이마를 엎드리고 잠들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그녀와 대학생 청년 뿐이다. 회전 모드로 맞춰진 선풍기 바람이 지나가버리는 즉시 청년은 한지로 만든 장부채를 벌럭여 땀을 식힌다. 

 

"사실 <국가>는 박진감 있는 저술입니다. 사유 자체의 박력 있는 전개만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있어요. 논지를 전개하다가 이따금 좁고 위태한 지점.....비유하자면 낭떠러지의 가장자리 같은 곳을 디딜 때마다 플라톤은 소트라테스의 목소리를 빌려 독자에게 묻습니다. 잘 따라오고 있는가? 마치 무모한 등반대장이 뒤를 돌아보면서 대원들의 안부를 확인하듯이 말입니다. 실은 그것이 위태로운 자문자답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읽는 울리들도 압니다." 

 

연한 녹색 안경알 뒤의 담담한 눈길로 그는 그녀의 또렷한 눈을 응시한다. 학생들이 유난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인지, 십 분 가까이 그는 희랍 문법 대신 택스트의 내용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 강독의 성격은 희랍어와 철학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진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운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채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 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마 -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음다움만 - 믿는 자신이. "

 

강의가 끝난 뒤 가방을 메고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그녀는 그가 단발머리 아르바이트생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이 새로 산 스마트폰의 기능을 그에게 열의 있게 설명해주고 있는 참이다. 그는 허리를 반쯤 수그리고 스마트폰에 바싹 얼굴을 대고 있다. 안경과 스마트폰이 곧 부딪힐 것 같다. 그런 자세로 있으니 실제보다 더 체구가 작아 보인다. 아르바이트생이 높은 톤으로 빠르게 말한다.

"여기, 이건 남극의 펜귄 군락지에 설치한 웹캠의 실시간 영상이에요. 잔뜩 더울 때 열어보면 정말 시원해요. 음, 여기도 지금 잡이네요. 얘네들, 보여요? 펭권들은 벌썬 다 잠이들었어요.....아, 이거요? 여기 진한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 그게 바다라니끼ㅏ요. 희끗한 건 얼음이죠. 최다 빙하예요. 와아, 지금 막 눈이 오네요. 이것 보여요? 이것들 말예요. 반짝반짝하는 점들....안 보여요?"

 

후락한 아카데미 건물의 현관을 빠져나오며, 그녀는 거구의 대학원생이 어두운 벽에 붙어서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본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이를 악물며 낮은 소리로,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가 속삭인다. "말했지. 도와달란 말 안 할 테니까. 내 앞길 막지만 말라고, 유학 갈 돈이야. 이 나이까지 석사도 못 마치고 뼈 빠지게 모은 돈이라고, 내가 그 돈 다 털어주건 말건 아버진 말할 거잖아. 망하고, 또 망하고, 끝까지 망할 거잖아."

 

희랍어 시간이 끝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 도로 위의 차량들은 언제처럼 대담한 속력으로 질주한다. 붉은색 철제 상자에 야식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차선과 신호를 무시하며 곡예운전을 한다. 젊거나 늙어가는 취객들, 투피스나 반소매 와이셔츠 차림의 지친 직장인들, 손님이 들지 않는 식당 입구에서 멍하게 행인들을 응시하는 나이든 여자들을 지나쳐서 그녀는 계속 걷는다.

팔차선과 사차선 도로가 교차되는 번화한 거리에 다다른다. 까마득히 높게 솟아오른 빌딩들과, 그 꼭대기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들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그 화면들을 올려다본다. 실제보다 수십 배 확대된 얼굴들이 거대한 입술을 움직여 들리지 않는 말을 한다. 거대한 활자들이 물고기처럼 입을 달싹이며 화면 아래를 흐른다. 거대하게 확대된 뉴스 화면들이 지나간다. 들것에 실려가는 시체, 군중, 불붙은 비행기, 울부짖는 어자들이 지나간다. 

어느 사이 초록불이 켜진다. 복사렬이 아직 식지 않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그녀는 맞은편 거리를 향해 걷는다. 전광판들은 여전히 소리없이 거대한 화면과 활자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침국하며 달리는 미끈한 승용차,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소리없는 웃음이 검은 거리 위로 유령처럼 깜빡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에 다다를 때쯤, 그녀의 머지투성이 얼굴은 완전히 땀에 적어 번들거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강변도로의 인도를 그녀는 계속 걷는다. 캄캄한 강에 비친 불빛들이 일렁인다. 그녀의 종아리에는 단단히 알이 뱄고, 밑창이 얇은 샌들을 신은 발바닥은 불붙은 듯 뜨겁다. 강의 수면에서 올라온 검고 습기찬 바람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식힌다. 

지난봄부터 그녀가 밤마다 들이마신 공기 속에 떠돌고 있었을, 호흡기 속으로 무심히 들어와 아직 깜박이고 ㅇㅆ을 극미량의 발광체들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세포들의 틈을 희미하게 밝히며, 투명하게 관통하며 떠돌아왔을 원소들을 알지 못한다. 제논과 세슘137, 반감기가 짧아 곧 사라졌을 방사성 요오드 131, 혈관 속을 끈질기게 흐르고 있을 뭉클뭉클하고 붉은 피의 입자들을 알지 못한다. 캄캄함 폐와 근육가 장기 들을, 세차게 펌프질하는 뜨거운 심장을 알지 못한다. 

 

지하도를 건너 그녀는 더 걷는다. 셔터가 내려진 상점들과, 막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리는 상점들을 지나쳐 걷는다. 화장실 앞에서 가망 없는 싸움이 붙은 인사불성의 취객들을 지나쳐 걷는다. 길디긴 소화관 같은 지하도를 끝까지 통과한 뒤 어두운 거리로 뱉어져나온다. 신호들이 작동되지 않는, 주확색 점멸등만 깜빡거리는 위험한 보도를 걷는다. 수십 대의 승용차들이 캄캄한 공용 주차장에 소리없이 웅크리고 있는, 인적이 없어 마치 폐허 같은 거리를 지난다. 다시 나타나는 살풍경한 번화가를 지난다. 가난하고 시끄러운 선술집들을 지난다. 차도 중앙까지 걸어나가 위태하게 책시를 잡는 취객들을 지난다. 그녀와 야비하게 시선을 맞추는 번들거리는 눈들, 동공이 풀린 무관심한 눈들을 지난다. 

자정이 가까웠을 때 그녀는 낯선 영화관의 입구에 다라라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지막 영화의 매표가 끝난 부스에 불이 꺼저있다. 어두운 매표구의 반투명한 아크릴 칸막이를 향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간다. 여덟 개의 컴컴한 구멍들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가 흠칫 뗀다. 그 가지런한 구멍들에서 공포스러운 힘이 뿜어져나와, 그녀의 입술과 목구멍에서 강제로 목소리를 흡인해내고 말 것처럼.

 

극장 앞의 버스정류장은 어둡고 더럽다. 구겨진 맥주캔들과 탄산 음료 페트병들과 비닐봉지,누군가 뱉어놓은 가래침들, 흩어지고 짓밟힌 팝콘 부스러기들 가운데 그녀는 서 있다. 이제는 더이상 걷고 싶지 않다. 막차일지도 모를 좌석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집을 지나가지 않지만, 근처까지 가는 버스다. 

버스에 오른 순간, 지나치게 강한 에어컨 바람에 그녀는 놀란다. 침침한 조명이 밝혀진 버스 안에는 십수 명의 승객들이 침묵하며 좌석에 앉아 있다. 피로와 패배감, 오래되고 희미한 적의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침묵이다. 

그녀는 두 좌석 모두 비어 있는 자리까지 걸어들어간다. 운전석 뒤쪽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심야 드라마가 소리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들리지 않는 언쟁을 벌이다 말고 격렬하게, 오랫동안 입을 맞춘다. 색 보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면이 펴렇게 보인다. 

 

그녀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지 않는다. 지독한 피로가 몰려오지만,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강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팔뚝과 목덜미에 소름이 돋은 채 그녀는 차창 밖을 내다본다. 버스는 불야성의 거리를 거슬러오르고 있다. 눈부시게 불을 밝힌 카페의 투명한 냉장공에 색색의 머핀과 조각케이크들이 진열되어 있다. 문을 닫은 보석점 진열장 안에서 커다란 모조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빛난다. 건물의 한 면을 뒤덮은 거대한 걸개포스터 위로 낯익은 남자배우가 눈가의 잔주름을 깊게 패게 하며 웃고 있다. 짧은 원피스에 때 아닌 가죽부츠를 신은 여자가 휴대폰을 움켜쥔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다. 셔터를 내린 분식집 앞의 계단턱에, 희끗하게 머리가 센 남자가 신문지 위에 웅크려 누워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던 만화경을 그녀는 기억한다. 거울집에서 직사각형으로 잘라온 세 조각의 거울을 잇대어 삼각기둥을 만든 뒤, 그 안에 여러 색깔의 색종이를 잘게 잘라 넣었다. 한쪽 눈을 대고 만화경을 흘들 때마다 펼져지던 이상한 세계에 그녀는 단박에 사로잡혔었다. 

말을 잃은 뒤, 이따금 그녀의 눈앞에 그 세계가 겹쳐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처럼 녹초가 된 채 버스에 실려 검고 단단한 숲 같은 밤거리를 흘러갈 때, 아카데미 건물의 어둡고 좋은 계단을 걸어올라갈 때, 강이실에 이르는 긴 복도를 건너갈 때, 오후의 햇빛과 정적과 나무들, 잎사귀들, 그 틈의 노란 빛무늬들을 바라볼 때, 타닥타닥 터질 듯 깜박이는 네온사인과 색전구 들 아래를 걸어갈 때. 말을 잃고 나자 그 모든 풍경이 조각조각의 선명한 파편이 되었다. 만화경 속ㅇ서 끝끝내 침묵하던, 무수한 차가운 꽃잎같이 일제히 무늬를 바꾸던 색종이처럼.

 

그때 그녀의 아이는 일곱 살이었다. 

오랜만에 한가했던 일요일 오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아이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인디언 식으로 그들이 이름을 지어보자고, 아이는 재미있어하며 자신의 이름을 '반짝이는 숲'이라고 지은 뒤, 여자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치 가장 정확한 작명이라는 듯 단호하게.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응?

"그게 엄마 이름이야" 

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았다. 

 

조각난 기억들이 움직이며 무늬들을 만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한 순간 단호히 합쳐진다.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짓을 멈추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냉정한 무희들처럼. 

 

그녀가 유년 시절을 보낸 K시의 외곽도로가 그렇게 보인다.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더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강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채를 끌어 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으 ㄹ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낟.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한다. 

 

눈이 닿는 곳마다 사방에서 빛나던 못물들이 그렇게 보인다. 

스무 살이 되는 봄, 야간 경비를 서던 당직실에 죽은 아버지를 운구해 K시 근교의 선산으로 내려가든 긴 하루였다. 마치 온 세상이 어항으로 변한 듯, 눈부신청색 못물이 끝없이 담겨 있던 논들이 번쩍인다.

 

그녀의 검붉은 입술이 부풀어오르던 이상한 꿈을 그렇게 본다.

수차례 반복된 그 끔속에서, 물집이 터진 자리에서 피와 진물이 흐르던 걸 본다. 앞니가 곧 빠지려는 듯 뿌리째 흔들리고, 핌을 뱉자 한움큼 피가 섞여 나오던 걸 본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손이 돌처럼 단단한 약솜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던 걸 본다. 피와 비명을 한번에 밀봉하려는 듯 단호하게. 

 

버스에서 내린 뒤 그녀는 다시 걷는다.

대여섯 정거장의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 한때 인도를 포장했던 시멘트 조각들이 조각조각 깨어져 있는 일방통행로로 들어선다.

버스의 냉방이 너무 강했던 탓에, 열대야의 열기가 아직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멘트가 깨어진 자리마다 웃자란 풀을 헤치고 그녀는 걷는다.

샌들이 검은 가죽끈 사이로 맨살이 습기에 젖는다.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엄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수차례 땀에 젖는다. 마른 그녀의 끈끈한 몸이 이제 세면대 위의 거울에 비쳐 있다. 그녀는 따뜻한 물을 반쯤 채운 욕조에 들어간다. 먼지투성이의 몸을 물속에서 구부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든다. 무심코 잠이 들었다가, 물이 거의 식었을 때에애 떨며 눈을 뜬다. 

 

잠든 아이의 눈꺼풀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맞춘다. 나란히 누워 눈을 감는다. 눈을 뜨면 펄펄 눈이 내리고 있을 것 ㄱㅌ아, 질끈 감은 눈꺼풀에 힘을 준다. 눈을 감았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는 육각형의 커다란 결정들도, 깃털 같은 눈송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짙은 보랏빛 바다도, 흰 봉우리 같은 빙하도 안 보인다. 

밤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는 말도 없고 빛도 없다. 모든 것이 펄펄 내리는 눈에 덮여 있다. 얼다가 부서진 시간 같은 눈이 끝없이 그녀의 굳은 몸 위로 쌓인다. 곁에 누운 아이는 없다. 싸을한 침대 가장자리에 꼼짝 않고 누워, 수차례 꿈을 일으켜 그녀는 아이의 따뜻한 눈꺼풀에 입맞춘다. 

 

12

거구의 대학원생이 통통한 손을 들고 희랍어 강사에게 묻는다. 진지하고 낭랑한 음성이 조용한 강의실에 울린다. 땀에 젖은 회색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등과 겨드랑이에 달라붙어 진한 회색의 무늬를 만든다.

그녀의 옆에 앉자 있던 여드름투성이의 철학과 학생이 희랍어 강사에게 묻는다. 대구 사투리의 억양이 남아 있는 말씨다. 방금 내려 놓은 휴대폰 대기화면에, 흰 티셔츠를 입은 컨트머리 여자애와 함께 팔을 들어올려 커다란 하트를 만든 사진이 떠 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놎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13

아직 동 트기 전이었다.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와 내 어깨를 건드리고는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고맙다고 인사한 뒤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떤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봉투를 뜯자, 눈처럼 흰 백지가 반듯하게 두 번 접혀 있었다. 백지를 펼치는 짧은 시간 동안 손끝의 감촉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점자로 씌어진 편지였다. 

나는 신중하게 문장들을 더듬기 시작했다.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마침내 편지의 끝까지 더듬어내려갔다.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읽은 것이 한글 점자인지, 알파벳 점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직 점자를 배우지 않았다.

발신인도, 내용도 짐작할 수 없는 편지를 무릎에 내려놓고 나는 조금 떨었던 것 같다. 이제 어쩐 답을 사자에게 전해야 옳은 걸까. 방금 편지를 건내준 사람, 아직 내 머리맡에 서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직 꿈속이었지만, 얼굴을 든 순간 방금 점자 편지를 익는 꿈에서 깨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유년 시절의 아침이 돌아온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선명한 빛과 형체들로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짙은 청색 커튼이 조금 흔들렸다. 방 안의 공기는 미세한 유리알들을 머금은 것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 엷은 푸른빛으로 칠한 벽에 수많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외벽에서 스며들어와 이제 바닥으로 흘러내릴 눈부신 물방울들을 보다가 나는 의아해졌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환할까.  

 

눈을 뜨고 있는 꿈을 꾸다가 문득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상실감도, 체념도 느끼지 않는다. 잠이 천천히 몸에서 가시는 동안 단호히 꿈으로부터 돌아누울뿐이다. 마침내 눈을 뜨고 희끄무레한 천장을, 윤곽이 무너진 사물들을 바라볼 뿐이다. 한번 더 빠져나갈 꿈 밖의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침착하게 확인할 뿐이다. 

 

14

아직 실감할 수 없어. 너, 서른일곱 살, 요하힘 그룬델의 죽음을, 읽을 수 없는 점자 편지를 마지막 글자까지 손끝으로 훑은 듸, 어떻게든 이해했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았던 그 낯선 꿈처럼.

 

그 먼 곳에서 네가 올수 없다는 것 안다. 라고 네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지. 장례식은 여섯 시간 훙에 치러진다고. 내가 미안해할 것 같아 일부러 늦게 알렸다고 했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미안하다고 말했어. 그녀는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잘 지내고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지. 나는 그렇다고, 독일에 ㄷㄹ아가면 인사드리러 가껬다고 말했어. 네 어머니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지.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잠긴 목소리로 말했어. 

물론이지. 너는 언제든 환영이란다. 

그 전화를 받은 토요일 아침부터 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어. 허기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눈부신 조도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비교적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어. 그 차갑고 선명한 공간이 마치 얼어붙은 낙원 같아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시간을 끌었어. 간단한 음식을 꺼내 식탁에 놓고 짧은 시간 허기를 달래고는, 마치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처럼 침대로 돌아와 눕곤 했어. 

 

네 방의 창은 유난히 크고 밝았지.

햇볓이 잘 드는 오후면, 창틀 아래 선반에 진열된 수십 대의 미니 어처 비행기들이 제각기 반질반질한 빛을 냈지. 내가 너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그 비행기들의 정교한 디테일에 감찬하는 동안, 너는 청색과 녹색 체크무늬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말을 이어갔지. 내가 고개를 돌려 너와 눈을 맞추면, 넌 장난스럽게 코를 찡그리는 동작만으로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곤 했지. 

종횡무진, 네가 다루는 다채로운 화제들은 다독가답게 숱한 암시와 인용과 논증의 터널들을 롤러코스터처럼 통과하며 오래 이어졌지. 때로 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다고 느낄 대면 난 네 어머니가 직접 구웠다는 근사한 파이를 한입씩 베어물었어. 책상 옆의 푸르스름한 회벽에 붙어 있는 고지도의 복사본들이며 행성들의 사진, 흑백의 세밀화 - 아르마딜로와 매머드와 네안데르탕린의 옆 얼굴 - 들을 무심한 척 곰곰히 들여다보면서. 

이따금 너의 화제는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게 내 눈의 상태로, 그것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장래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지. 그게 내 마음을 은밀히 다치게 한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너는 말했지. 내가 너라면, 그때를 위해 점자를 미리 배워두겠어. 흰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도 익혀두겠어, 잘 훈련받은 멋진 리트리버를 사서 그 녀석이 늙어 죽얼 때까지 함께 살겠어. 

이를테면 너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거지. 세상의 어떤 불행이든 스스럼없이 대해도 될 만큼 고통을 겪어보았다고,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너는 십여 차례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앗고, 열네 살엔 육 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들었다고 했지. 끈질긴 독학 끝에 대학에 입학하는 걸 보고 의사와 간호사 들 모두 혀를 내둘었다고 했지. 그렇게 병원 밖으로 나와 처음 사귄 친구가 나였다고 했어. 

또렷이 기억해.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네 깡마른 몸을. 겨우 일곱 달 나보다 생일이 빠를 뿐인데, 마치 중년의 남자처럼 주름이 패어 있던 이마를.

그 이마에 힘을 주어 주름을 더 깊게 하며 너는 나에게 말했지.

"고백하자면 말이야.....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함부로 던진 농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너는 진지하게 내 얼굴을 마주 보았지. 예민한 사람 특유의 자의식이 느껴지던 그 표정을 기억해. 햇빛에 홍채가 환히 들여다보이던 연한 푸른 눈도, 그 순간 네가 내 얼굴을 만지고 싶어한다고 느꼈지만, 또는 내가 네 얼굴을 만져주길 원한다고 느꼈지만, 그 느낌을 나는 곧 부인했어. 

 

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근교의 바위산을 올랐던 일요일이 생각날 때가 있어. 하얗게 드러난 관절 같은 바위들을 반바지 차임으로 오르다가, 날카로운 잎들이 돋친 깡마른 관목들에 종아리가 쓸리지 않도록 주의하다가, 두 무릎을 손바닥으로 짚어가며 더 오르다가, 땀을 닦으며 쉬다가,전날 밤 얼려둔 물을 들이켜다가, 간식으로 싸온 검은 빵을 우물거리다가,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농담들과 객쩍은 웃음을 주고받다가, 결국 산꼭대기에 채 이르기 전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걸 보고 우리는 산을 내려왔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도 이런 바위산이 있었어. 라고 그때 나는 고백했지. 인수봉과 백운대라는 두 개의 흰 바위봉우리를 올려다보면서 자랐다고. 지금도 모국을 떠올리면, 인구 천만의 붐비는 도시 대신 그 한 쌍의 얼굴 같은 봉우리들이 생각난다고. 

내가 그 고백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네가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고 활달하게 내 말에 응수하는 대신 쓰러졌기 때문이었어. 비탈진 길을 이삼 미터 굴러떨어지다 기다란 바위에 허리를 부딪히며 멈췄기 때문이었어. 

그 상황을 난 믿을 수 없어서. 너는 언제나 이제 깨끗이 나았다고 나에게 말했는데, 지긋지긋한 이십 년간의 투병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보란 듯 담배를 피워물고 맥주잔을 거푸 비우곤 했는데, 자신에 찬 그 말들을 난 손톱만큼도 으심하지 않았는데.

마치 낯선 사람처럼 보이던 네 굳은 얼굴을 기억해. 처음으로 타인의 죽음을 보게 될까봐 덜덜 떨리던 내 손을 기억해. 네 눈꺼풀이 잠잠히 감겨 움직이지 않던 걸 기억해. 너를 업고 내려오던 그 가파른 바윗길에서, 나는 속옷까지 흠뻑 땀에 젖었지. 눈꺼풀 속으로 비오듯 매운 땀이 흘렀지. 

 

그렇게 산을 내려온 뒤 열흘이 지났을 때, 병실 철제 침대에서 비스듬히 상테를 일으켜 앉아서는 넌 나에게 물었지. 

너, 왜 철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나에게 물은 적 있지. 내 생각을 듣고 싶니?

침대 옆의 탁자에 안경을 벗어놓았는데도,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 올리려는 듯 너는 콧잔등을 찡긋했지. 

 

고대 희립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것 아니겠니?

 

수년 뒤, 너와 결별하고 혼자 스위스를 여행할 때였어.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종일토록 얼음 덮인 협곡들 사이를 흘러다니던 날이었지. 처음의 계획은 그 배의 종점 - 호수의 가장 깊은 곳 - 까지 항해나는 것이었지만, 나는 불쑥 부르넨이라는 작은 도시에 내렸어. 항구를 감싸안은 두 개의 희고 커다란 바위봉우리 때문이었지. 온족의 봉우리는 백운대를, 오른쪽의 봉우리는 인수봉을 빼닮아 있었어. 

내가 자랐던 수유리 쪽에서 북한산을 올려다보면 왼쪽에 백운대가, 오른쪽에는 인수봉이 있어. 실제로는 백운대가 더 높지만, 인수봉이 조금 앞쪽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높아 보이지. 부루넨의 두 봉우리는 그 위치와 약간의 높이 차이, 흰 바위의 생김새와 숲이 우거진 정도까지 흡사했어.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맞닥뜨린 그 친숙한 풍경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선착장에 내려서자, 카페테리아에서 내놓은 알루미늄 간이의자에 앉아 점심을 먹는 청년이 눈에 띄었어. 연한 금발에 갸름한 얼굴, 헐렁한 멜빵 청바지, 너와 조금도 닮지 않은 녀석이었는데 네가 생각났어. 나를 보고 미소짓는 그에게 물었지. 뭘 먹니, 그거 맛있니. 음, 스위스 식 치즈케이크야. 금요일이잖아.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그가 대답했어. 나는 카페테리아에서 똑같은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나와 그의 옆 테이블에 앉았지. 

그런데 금요일하고 치즈케이크가 무슨 상관이지, 라고 내가 묻자 그는 대답했어.

금요일엔 다들 고기 대신 치즈케이크를 먹어. 나야 뭐. 그렇게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지만.....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셨잖아. 

그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특별하지 않았어. 어디에서 테어났는가, 무얼 하는가, 이 도시는 어떤 곳인가, 어디를 더 여행할 것인가 따위를 서로에게 물었지. 나는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며 전기 수리공이라는 것, 그 직업을 무척 따분해하고 있으며, 언젠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여행하고 싶어한다는 것, 세 살 때 부모가 이혼한 뒤 십 년은 어머니와 나머지 십 년은 현재까지 아버지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는 내가 스위스에 접경한 콘스탄츠에서 이때째 골치 아픈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보덴제가 루체른 호수만큼이나 아름답긴 하지만 겨울이면 시가지에 안개가 자주 끼어 우울하다는 것,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는 날엔 시계가 짧아 건물 외벽에 바싹 붙어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 내가 베를린에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조금 실망하는 것 같았어. 

브루넨의 작고 평범한 시가지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그저 임마누엘과 나란히 앉아 호수를 보며, 달지 않은 스위스 식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목적 없는 한담을 나누는 걸로 충분했어. 햇빛이 눈부셨지만, 물가의 바람은 퍽 쌀쌀했어. 

삼십 분쯤 뒤 루체른으로 돌아가는 배가 들어왔고, 나는 임마뉴엘과 가벼운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어. 통성명을 했을 뿐 우리는 서로의 이메일 주소 같은 것을 교환하지 않았지. 배가 브루넨의 선탁장에서 멀어지는 동안 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그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 내가 앉았던 알루미늄 의자와 사분의 일쯤 남겨 놓은 내 치즈케이크 접시가 차츰 멀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어. 너와 조금도 닮지 않은 임마누엘의 모습이 차츰 멀어지더니 흐릿해졌어. 백운대와 인수봉을 닮은 흰 바위봉우리들이 서서히 더 멀어지다가. 배가 협곡을 돌아가자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어.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찬란한 것,

어스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안경을 쓰지 않은 채, 그 몇 가지의 표현으로 바꿀 수 없는 미세한 조도의 차이를 느끼며 사흘째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느낀다.

난디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을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넌 철학을 하기에 너무 문학적이야, 라고 너는 이따금 나에게 충고했지. 네가 사유를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일종의 문학적 고양상태일 뿐이지 않니, 라고.

너와 밤늦도록 이어갔던 논쟁들을 기억해. 논쟁이 완전히 끝난 뒤 문득 텅 빈 벽이나 어두운 색 커튼으로 주의를 돌리 때, 마치 그때까지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던 깨끗한 침묵도, 그 시절의 넌 깨부술 수 없는 적이었지. 내가 던진 모든 질문들을 너는 명쾌하게 풀어갔지만, 네가 던진 질문들에 난 늘 기을 잃고 말았지. 틀렸어, 라고 너는 말하곤 했어. 미안하지만 지금 네 말은 틀렸어, 라고. 긴 논쟁이 마무리지어질 때쯤이면 덧붙여 말했지. "아무래도 넌 문학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넌 까다로운 친구, 지독히 까다로눈 동갑내기 스승이었지.

그 스승이 나에게 충고했던 것이 아마도 옳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플라톤의 후기 저작을 읽을 때, 진흙과 머리카락, 아지랑이, 물에 비친 그림자,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작들에 이데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오직 그 의문이 감각적으로 아르다웠기 때문,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안의 전극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어. 

 

그 무렵 내가 붙들고 있었던 주제를 기억해. 어둠의 이데아, 죽음의이데아, 소멸의 이데아에 대해 새벽까지 너와 내가 나누었던 길고 부질없고 쓸쓸한 이야기들을. 

모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며 선함이며 숭고함이라고 너는 말했지. 아치 자신보다 어린 학생을 설득하려는 듯 차분하고 슬프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러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와 관계맺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니. 서울과 베네치아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의 광장들이 같은 하루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이"

고개를 흔들면서 나는 너에게 물었지.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명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너는 고개를 저었지.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붜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누깨비는 처움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네 말을 들은 순간, 덧없는 전 세계가 빛을 잃었지. 그러나 영원히 녹지 않은 채 흩날리는 진누깨비, 영원히 바닥으로 내려않지 않는 진눈깨비의 세계는 여전히 어두운 환영처럼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

이것 봐, 라고 너는 다시 달래듯 말했어.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마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명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그 새벽에 문득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언네나 그렇듯 두려움 없이. 내가 받을지 모를 상처를 대범하게 감수하면서, 언젠가 눈이 멀 것이라는 사실이. 평소의 내 생각과 감정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너의 얼굴을 바라보았지. 너의 눈 밑에 검게 드리워진 그늘을, 움푹 파인 뺨을, 검게 죽은 입술을. 

그 순간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그 말, 네 잔인한 물음에 나는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나 자신을 생각해보지 않았어. 완전한 독일어를 구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십대의 나이에 나는 독일로 옮겨왔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동급생보다 잘할 수 있었던 과목은 수학과 희랍어뿐이었어. 동양에서 온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고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 - 나에게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네가 말한 그런 이유로 나는 플라톤의 전도된 세계에 이끌렸던 걸까. 그보다 먼저,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린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범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학 연학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섹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로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그 시절 내가 꿈꿨던 상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있어. 

아직 식지 않은 늦가을의 흙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들,.

어질머리나게 피어오르는 이른 봄의 아지랑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신의 파편들.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심 꽃을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

안경을 벗은 채 이 침대에 누워, 모호하게 흰 저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생각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하지만 그 시절의 너를 사로납은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지.

물리적 실재 시간.

무에서 뜨겁게 폭발하면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그래, 시간.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렀던 것.

그 수수께끼를, 한 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서명에 맞서는 생명을 너는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지

마침내 더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지.

영원히 다시 학생 따위는 되지 않겠다고 나에게 , 네 지친 엄마에게 맹세헸지.

커와 입술과 형에 피어싱을 했던 네 친구들을 기억해.

그중 유난히 눈이 슬퍼 보였던 한 친구도.

볼륨을 높일수록 가슴을 찟게 서글프던 그들의 음악을 기억해.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며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오르는 허파,

아직 따뜻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그  모든 뜨거움을 너는 잃었니.

너는 정말 죽었니.

생각에 잠긴 얼굴,

깊게 주름진 입가.

미소 띤 눈.

뻔한 대답을 하기 싫을 때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습관.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니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이제 곧 거울에 비찬 내 얼굴을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얼굴들은 기억 속에 굳게 얼어붙겠지.

너라면 이 순간 나에게 거침없이 충고했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과장되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하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점자를 배워. 백이에 구멍을 뚫어서 시를 써. 근사한 리트리버를 시귀는 법을 배워.

만일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국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더듬어 네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의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나를 욕망했으니까.

그 욕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쳤으니까.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렸으니까.

난 전속력으로, 너를 깊게 상처 입히면 도망쳤으니까.

널 원망했으니까. 

네가 아니 네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닌 너만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니까. 

 

그 쓸쓸한 몸은 이제 죽었니.

네 몸은 가끔 나를 기억했니.

내 몸은 지금 이 순간 네 몸을 기억해.

그 짧고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떨리던 네 손과 따스한 얼굴을.

눈에 고인 눈물을. 

 

15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에 주니 손에 힘을 준다.

고갤르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16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

눈두덩에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17

방금 새가 건물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어린애의 주먹보다 작은 박새다. 방금 들어오고도 나갈 길을 찾을 수 없는지, 다급하게 울며 콘트리트 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의 난간에 머리를 들이 받는다.

막 입구로 들어서던 여자가 소리없이 멈춰 선다. 새가 세번째로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것을 보고 뒤돌아선다. 한쪽만 열려 있떤 유리 현관문을 다른 쪽까지 활짝 연다.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말한다.

"밖으로 나가야지"

새를 밖으로 몰아주려고, 여자는 가방으로 벽을 툭툭 친다. 새는 그것을 우협으로 받아들인 게 분명하다.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날아 내려가더니, 난간 바로 아래 숨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거기 숨으면 안 돼.

밖으로 나가야지"

그녀가 두 걸음 물러서자 경계를 늦춘 듯 삐이삐이, 가냘픈 소리가 들린다. 다시 한 걸음 다가서자 소리가 뚝 멈춘다. 그녀는 열려 있는 출입문 밖을 내다본다. 줄기가 희끗한 여름 나무들이 저녁빛에 잠겨가고 있다. 안개들을 켠 택시가 유리문 앞까지 와서 멈춘다.

 

무늬 없는 흰 면셔츠에 진회색 면바지 차림의 남자가 택시에서 내린다. 어두운 게단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손전등을 켠다. 불 켜진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 손전등을 끄고, 묵직한 가방을 고쳐메고, 그녀에게 다가선다. 망설이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뭘 보고 계세요?"

여자가 내려다보고 있던 층계 난간 밑의 검은 생명체를 향해 남자는 상체를 기울인다. 어둠 속에서 그것이 조금 움직인다. 그는 손전등을 켜서 비춰본다. 쥐일까, 새끼 고양일일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여자의 긴장한 숨소리를 남자는 분명하게 듣는다. 여자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머리칼을 질끈 뒤로 묶었다. 귀밑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깊은 들숨과 날숨에 맞춰 흔들린다. 제대로 보고 싶다고 남자는 문득 생각한다. 조명이 충분히 밝지 않기 때문에, 손전등을 여자의 얼굴에 비추지 않는 한 표정을 볼 수 없다. 

다시 수화로 말해야 하는 건가. 그가 생각했을 때 여자의 숨소리가 멀어진다. 검은 반소매 블라우스와 검은 반지가, 흐끗한 얼굴과 목덜미와 팔이 멀어진다. 굽이 낮은 무두 소리가 또박또박 문장부호를 찍듯 석조 계단을 울린다. 삼층 복도까지 수지 않고 이어지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남자는 잠자코 서 있다. 말없이, 끝없이 멀어지는 그 발소리가 그의 감정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는가를, 비슷하게 착잡한 그 감정을 언제 경험했던가를 생각한다. 

 

뒤싸란 올라가려고 남자가 걸음을 옮긴 순간 삐이삐이 소리가 들린다. 그는 우뚝 멈춰 선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자, 죽은 듯 검게 엎드려 있던 물체가 두 계단씩, 세 계단씩 지하에서 뛰어놀라오고 있다. 그가 손전등을 비추자 다시 죽은 듯 몸을 웅크린다. 그것이 새라는 것을 그는 그제야 짐작해낸다. 

"나와야지. 거기 있으면 안 돼"

그의목소리가 어두운 낭하에 부딪혀 울린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현관 밖의 나무들을 본다. 빠르게 저녁빛이 깊어져, 나무들의 윤곽이 거의 검게 보인다. 

망설이다가 그는 가방을 열고 두춤한 책 한 권을  꺼낸다. 그것을 말아서 한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손전등을 비추며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간다. 그는 세 계단 이상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새는 아직 꼼짝도 하지않고 있다. 말아쥔 책으로 새가 잇는 족을 툭툭 치기 위해 그가 몸을 수그린 순간, 삐이삐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새가 푸드덕 날아오른다. 얼굴로 달려드는 새를 피하려던 그의 발이 계단을 헛디딘다. 손전등을 놓친다. 새는 벽에, 난간에 세차게 제머리를 부딪친다. 다시 그에게 달려든다. 안경이 떨어진다. 귀 뒤쪽에서 퍼덕이는 소리에 그는 팔로 얼굴을 감싸며 휘청댄다. 두 번, 세 번 안경알이 밣히며 깨어진다. 그의 구둣발에 차인 안경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새는 온 힘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유리문을 향해 돌진하낟. 콘크리트 벽에, 양철 우편함에 머리를 부딪친다. 

 

캄캄한 층계에 그는 앉아 있다. 모든 것이 검게 뭉게어져 있다. 떨리는 손으로 층계를 더듬어 안경을 찾는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깊은 곳, 부옇게 번져 있는 빛무리 속에 손전등이 있다. 

"누구 없어요?"

목소리가 잠겨 잘 나오지 않는다. 

"거기 누구 없어요?"

그는 손목시계를 바싹 눈앞으로 끌어당겨 연두색 야광 바늘을 들여다본다. 잘 볼 수 없다. 아마 여덟시 십오분경. 칠월 마지막 주, 여름휴가의 피크를 앞둔 목요일이다. 금요일 수업은 휴강됐고, 아카데미 사무실으 ㄹ지키는 아르바이트생은 강의실 문만 열어두고 일찍 고향에 내려간다고 했다. 직장인인 중년의 사내는 오늘 결석할 것이라고 밀리 알렸다. 그렇다면 삼층 강의실에는 그 여자와 대학원생 철학과 학생뿐일 것이다. 그 여자는 그를 도울 수 없는 사람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잡답을 나누며 삼십 분쯤 참을성 있게 선생을 기다릴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이다. 

그는 두 손으로 층ㄱ를 더듬기 시작한다. 한 계단을 다 더듬으면 앉은 채로 다음 계단으로 내려간다. 다행히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가방이 만져진다. 앞지퍼를 열고 더듬더듬 뒤져가다가,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달 만에 독일에서 반송된 편지 한 통을 오후에 받았고, 그것을 책상에 올려둔 채 감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집을 나설 시간을 놓쳤다. 급히 면도만 한 뒤 집을 나오던 경황중에 휴대폰을 챙긴 기억은 없다. 

가방을 다시 떨어뜨리지 않도록 어깨에 대각선으로 둘러멘 뒤 그는 다시 층계를 더듬는다, 흙과 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고 딱딱한 조각들이 만져질 뿐이다. 간혹 날카로운 금속조각이 하나둘 만져디면 그 부변을 세심히 더듬어보지만, 그것이 안경 유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깊은 바다 아래 넓게 버녀 있는 것 같은 빛의 중심을 향해 그는 두 손과 엉덩이를 짚어 내려간다. 일단 저 손전등부터 손에 쥐어야 한다. 계단들을 차례롤 손바닥으로 쓸어가던 그가 신음은 뱉는다. 안경이다. 완전히 깨어졌다. 오른쪽 손끝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날카롭고 따뜻한 감각에 그는 아랫입술으리 안쪽을 문다. 테가 휘어지고 양쪽 렌즈가 부서진 안경을, 다치지 안은 손손으로 더듬어 샅샅이 느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구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진작 현관 밖으로 날아간 것인지. 기어이 머리를 부딪치고 죽은 것인지 새도 잠잠하다. 

이렇게 조용한 저녁에 두 남학생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특히 대학원생의 낭랑하고 큰 목소리는 희미하게나무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만약 그들이 오늘 오지 않았다면, 삼층의 강의실에 있는 사람은 그 여자뿐일 것이다. 

텅 빈 강의실에 앉아 침묵하고 있을 그 여자를 떠올린 순간 그는 눈을 질끈 감는다. 멀리 번쳐 있던 빛이 사라졌을 뿐, 눈을 떴을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어둠이 그의 누꺼풀 안에서 일렁인다. 

 

그 여자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그 여자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눈을 뜬다. 번져 있는 빛을 향해 더 내려가기 위해 다시 왼손으로 층계를 더듬는다. 위층 복도에서부터 울리는 구두 소리를 그 순간 듣는다.

깨어진 안경 조각들을 다시손으로 짚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두 손과 두 무릎으로 더듬더음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분명하다. 아까 들었던 여자의 구두 소리다. 그는 철로 된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무거운 가방으로 연거푸 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이 진동은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도와주세요"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소리친다. 마침내 구두 소리가 지하 계단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한다. 

어둠 속의 어둠, 움직이는 어둠을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멈췄다는 것을, 사람의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는 것을, 그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나는 쪽을 올려다본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나요?.

위에 다른 사람은 없나요?

안경이 깨졌어요. 나는 시력이 아주 나쁩니다. 

누구든 불러주겠어요?

택시를 잡아야 해요. 안경점이 문을 닫기 전에.

내 말을 들을 수 있어요?"

 

연한 사과향의 욕욕비눈 냄새가 코끝으로 끼쳐온다. 차갑고 날렵한 두 손이 그의 두 겨드랑이에 끼워진다. 손들이 일으키는 대로 그는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디디려 애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그는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른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붙든 팔에 힘이 실린다.

어둠의명도가 달라진다. 계:단이 끝났다는 것을, 불 켜진 현관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볼 수 있다. 희끄무레하고 검은 것들이 윤곽이 보인다. 우편함을 짐작되는 회색과 흰색의 벽면, 아마도 현관문 바깥일 압도적인 어둠이 보인다. 

여자의 한 팔이 그의 등을, 다른 한 손이 그의 팔뚝을 바치고 있다. 습기 찬 바람이 느껴진다. 활짝 열린 유리문 앞에 그들이 서 있는 것이다. 여자의 희끄무레한 얼굴과 팔이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는 피 흐르는 손을 함부로 셔츠에 닦는다. 여태 움켜쥐고 있었던, 부서지고 뒤틀린 안경이 발 아래로 떨어진다. 설마, 아래족에 계속 생겨나는 붉은 반점들은 그의 피일까. 그는 허리를 구부려 안경을 집으려 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그는 여자를 향해 말한다. 

"가방 안에 지갑이 있어요. 택시비는 충분해요. 번화가로 가면 안경점을 찾을 수 있을 거옝. 안경을 맞춰야 해요.

 

18

보도에 움푹 파인 데가 나타날 때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신호한다. 한 발을 허공으로 떼었다가 디딜 때마다 그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침내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온 뒤, 이차선 도로의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그녀는 사방을 둘러본다. 

약국을 찾아야 한다. 건너편 차도변의 약국은 셔텨가 내려져 있다. 택시가 잘 다니지 않는 한산한 길이다. 출퇴근 시간이 지나면 마을버스의 배차간격은 길어진다. 자신이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냉정하고 빠르게 일의 순서를 정한다. 그의 오른손은 상처가 깊고, 흙과 먼지로 더러워져 있다. 피가 덜 흐르도록 그녀의 손수건으로 손목을 묶어두었는데, 이미 반나마 손수건이 피에 젖었다. 상처에 작은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을지 몰라 직접 지혈할 수도, 제대로 피를 닦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옆얼굴을 본다. 흔들리는 그의 눈길이 가 닿아 있는 아스팔트의 어둠을 본다. 안경을 끼지 않은 그의 얼굴은 낯설어 보인다. 짐작보다 큰 눈, 공포와 당호감을 숨기려 애쓰는 표정 때문일것이다. 

그녀는 다치지 않은 그의 왼손을 끌어다 잡는다.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그이 손바닥에 또박또박 쓴다. 

'먼저 병원으로 가요'

 

19

"책상 위에 있는 갓등을 켜주시겠어요.

천장의 형광등 대신 식탁 위의 백열등을 켜야 해요.

너무 밝으면 오히려 잘 보기 어려워요"

그녀는 구두를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검소하게 꾸며진 원룸이다. 옹이가 많은 삼나무로 짠 책상과 석 자짜리 책장 옆으로, 깉은 청색 매트리스 커버에 싸인 철제 싱글침대가 놓여 있다. 싱크대 선반 위로는 수수한 머그잔들과 밥주발과 작은 접시들이 차곡차곡 엎어져 있다. 호리호리하고 키 작은 독신자용 냉장고가 그 옆에 서 있다.

대여섯 권의 책이 서로서로 귀퉁이를 겹쳐가며 펼쳐져 있는 책상까지 그녀는 걸어들어간다. 확대경 옆에 놓인 연한 갈색 갓등을 켠다. 그녀가 현관으로 돌아오는 사이, 그가 손을 뻗어 벽을 더듬는다. 조금 전에 그녀가 켜놓은 형광등 스위치를 내린다. 그 아래의 스위치를 올리자 부엌의 식탁 위로 노란 백열등 불빛이 떨어진다. 

 

"이제부터는 잡아주지 않으셔도 돼요.

아, 제 가방을 여기 놓으셨군요.

괜찮습니다. 위치만 제가 알고 있으면 돼요.

다시 부딪히거나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어요"

그녀는 신장 옆에 두었던 그이 가방을 들어서 옮기려다 도로 내려 놓는다. 밤까지 가시지 않은 습한 무더위 때문에 그녀의 검은 블라우스는 축축하다. 묶었다가 풀어 어깨까지 헝클어져 내려온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있다. 그의 흰 셔츠도 등 부분이 완전히 젖었다. 가슴 앞쪽으로 드문드문 튄 핏자국은 이제 거무스름하게 말랐다. 붕대를 처맨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두 사람의 팔과 얼굴 모두 땀에 젖어 미끈거린다. 

 

"창문 아래 있는 의자에 앉으시겠어요?

이 방에선 거기가 가장 시원한 자리얘요.

아주 더울 땐 거기서 자기도 해요"

조금 웅크리면 누울 수 있을 만한 목제 긴 의자로 그녀는 걸음을 옮긴다. 거기 걸터앚는 대신 자신의 가방을 내려놓는다. 의자에 기대 선 채로. 그가 더듬거나 넘어지지 않고 침대까지 곧장 걸어가 걸터앉는 모습을 지켜본다. 좀 전에 택시에서도 그는 저렇게 자연스럽게 길 안내를 했었다. "네거리 다음, 처음 나오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주세요. 바이더웨이 바로 다음 집입니다" 택시가 멈추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바이더웨;이 다음 집 맞지요?"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팔을 잠깐 잡았다 바로 놓았다. 

 

"미안합니다. 집에 선풍기가 없어요.

되도록 짐을 늘리지 않으려다보니"

이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앉고 나니 무슨 말을 더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듯, 그는 얼마간 난처한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그녀가 잇는 쪽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다가,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을 들어 식탁 옆의 냉장고를 가리킨다.

 

"물 한 잔 드시겠어요?

냉장고에 생수가 여러 병 있어요.

아니요, 그냥 계세요.

제가 할게요.

컴에 따라드리지는 못하겠네요.

하필 오른손이 이렇게 되어서"

그가 침대에서 일어서서 냉장고 쪽을 몸을 옮긴다. 왼손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맨 위칸을 더듬어 작은 생수병 두 개를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운다. 돕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려 한다. 

 

"아니요. 편하게 계세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온다. 왼손으로 겨드랑이의 생수병을 빼내 그녀에게 내민다. 일어선 채로 그녀는 그것을 받아쥔다.

 

"안경이 있으면 아이스커피를 타드릴 텐데요.

여동생이 있는데, 좀처럼 오빠를 칭찬하지 않는 친구거든요.

그런데 제가 타준 아이스커피는 맛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독일에 있어요.

중창단에서 노래를 하지요.

소프라노 파트에선 경력이 가장 오래됐어요"

생수 한 병씩을 손에 뒤고 그는 침대에, 그녀는 긴 의자에 걸터앉는다. 널빤지 무늬의 리놀륨이 깔린 바닥을, 그 위로 드리워진 가구들의 그림자를 그녀는 내려다본다. 미색 벽지가 발라진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놀랍도록 커다랗게 부풀어 있다. 

아까부터 창밖에서 풀벌레 솔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을 그녀는 문득 깨닫는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 옆길에서 들리던 것과 흡사한 소리다. 빠진 것은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 같은 차들의 굉음뿐이다.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아까, 병원에 있을 때는 이렇게 혼자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가끔 제 손바닥에 대답을 써주셨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는 허공을 향해 잠깐 왼쪽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무릎으로 거둔다. 명확하지 않은 허공에서 눈의 초점을 맞추려고, 미간이 천(川)자로 깊게 패어 있다. 

 

"응급실에서,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어요.

어떤 나이든 여자가 화상을 당한 것 같았어요.

네 살, 아니 세 살쯤 된 아이가 숨이 넘어가게 울고 있었어요.

멀리서 누군가가 게속 이상한 고함을 질렀어요.

의사가 반말로 내뱉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렇게 왜 이런 짓을 했어, 라고"

그녀는 자신이 직접 본 그 사람들을 떠울린다. 머리가 희끗한 노파가 화상을 입었다. 무릎을 찜질하던 의료기구가 갑자기 터졌다고 했다. 자지러지게 울던 세 살배기 아이는 검지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갔다. 앳된 엄마가 가제수건에 싸가지고 온 낟알 같은 손가락 마디를 받아들고 간호사는 말했다. "얼음주머니에 싸드릴 테니 큰 병원으로 가세요. 저희 병원엔 봉합수술을 하는 선생님이 없어요" 기진한 아이를 덜쳐없은 앳된 엄마는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빨리요. 빨리 준비해주세요" 그 다급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입구 쪽 처치실에서 한 중년 여자가 위세척을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으어어, 으어어, 목구멍에 호스가 박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직 젊은 의사가 반말로 그 여자를 모욕했다. "그러게, 왜 이런 짓을 했어"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는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한 모금을 들이켠다. 잠시 쉬었다가 한 모금 더 들이켠다.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것을 듣는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혼자서 말을 이어가기 어려운 듯 그는 자주 침묵한다. 

 

"제 눈이 이렇게 나쁘다는 걸 아카데미에선 모릅니다. 굳이 알려야 할 필요가 없어서, 누구에고도 말하지 ㅇ낳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말을 끊는다. 그녀는 캄캄한 창밖의 전신주를 내다본다. 빽빽하게 얽힌 검은 전선들이 고압의 전류를 숨긴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부탁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안경만 있으면 이럭저럭 지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앞으로지요"

그의 침묵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미묘한 엇박자를 이루고 있다고 그녀는 느낀다. 삐르륵 삐륵, 높은 현으리 서툴게 켜듯 예민한 소리가 뒤늦게; 그의 음성에 겹쳐진다. 다시 침묵이 불쑥 끼어들고, 이번에 높은 현을 켜는 예민한 소리가 먼저 울린다. 

 

"언젠가 눈이 아주 나빠질 거란 걸 처음 알았을 때,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그땐 아주 캄캄해지는 거냐고. 

사실 그 질문은 아버지에게 해야 했지요. 

시력이 나쁜 쪽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무심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어떤 질문에든 필요 이상 최선을 다해 대답하는 분이었지요"

그녀는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뱉는다. 자신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떠울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열세 시간 동안 어머니는 눈과 입을 반쯤 벌린 채 느린 숨을 쉬었다. 십여 년 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오빠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유해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수지 않고 그녀는 어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의식을 잃은 것 같아도 청각만은 살아 있으니 무든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호스피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을 골라야 할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시절 네 식구가 벌였던 여름 한낮의 물장난, 시멘트를 얇게 바른 한옥집 마당, 호스에서 투명하게 뿜어져나오던 물줄기, 재빠른 동작으로 양동이에 물을 받던 아버지와 오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빡 젖은 채 소리치며 뛰어다니던 일곱 살의 그녀, 갑자기 스무 살은 젊어진 듯 말괄량이 처녀처럼 깔깔 웃던, 남편과 자식들에게 물바가지를 끼얹던 엄마.

어머니의 검은 입술을 물수건으로 축이며, 자신의 마른입에 생수병을 기울이며 그녀는 계속 속삭였다, 더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더 빠르게 속삭였다. 마침내 그녀가 침묵했을 때 그 일은 일어났다. 새 같은 무엇인가가 문득 육체를 떠났고, 그 육체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었다. "엄마, 어디로 갔어" 눈꺼풀을 감겨드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멍하게 입속으로 물었다. 

 

"그때 어머니는 대답해줬어요. 

그렇지 않다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할 거라고. 단지 아주 뿌옇게 될 뿐이라고.

그게 뭔지 나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어요. 

오른쪽 눈을 감으면, 그때 이미 아주 나빴던 왼쪽 눈으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으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어린 여동생이 부엌으로 달려가더군요.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찬장에서 찾아내서는 얼른 자기 눈에 대보더군요. 

으음, 이건 소파고 이건 책장이야,

저건 흰색이고 저건 주황색이야.

이렇게 걸어도 안 넘어질 수 잇어.

신기해하는 여동생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빼앗으며 어머니는 무섭게 그애를 노려봤지요"

그는 생수병을 입술에 기울인다. 달게 물을 마신다. 그의 얼굴이 부드러운 관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그녀는 본다. 혈육들을 추억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둡고 단단하던 그의 얼굴이 연해진다. 어름풋이 밝아진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어요.

누구도 내 시력에 대해 놀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때 여동생은 진심으로 다행스러웠떤 거예요.

아버지의 가까운 미래와 오빤의 먼 미래가,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막 깨달았던 거지요.

그걸 이해하기엔 어머니가 너무 진지했지요"

기척 없이 그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의 얼굴 속에 새 같은 무엇인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따스한 감각이 그녀에게 즉각적인 고통을 일깨운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듣고 있나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반쯤 마신 생수병을 왼손에 쥔 그가 문득 불안하게 묻는다. 팔을 뻗어 침대 옆의 책상에 생수병을 내려 놓는다.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족들이 걱정하는 건 아닌가요?"

그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했던 숨바꼭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집성촌이었던 아버지 고향의 작은아버지 댁에서였다. 수건으로 그녀의 눈을 가려놓고 손위사촌들은 숨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인기척을 향해 손을 뻗으면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렇게 한참 허공을 더듬다 서늘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을 가린 수건을 제손으로 풀고 활짝 문이 열린 방들을 살핀 뒤, 모두 밖으로 나가버린 것을 알았다. 

 

"거기서, 듣고 있나요?"

그의 얼굴에서도 빛이 꺼진다. 따스한 새가 웅크리며 숨는다. 망설이다가, 그녀는 발과 무릎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기척을 낸다. 들고 있떤 생수병을 의자에 내려놓는다. 

 

다음의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그는 주저한ㄷ.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독일에 두고 서울로 올 때, 저는 편도 항공권을 끊었어요. 돌아갈 날짜를 오픈해 왕복권을 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어째서였는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약간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긴 사이를 둔다. 어두운 곳에서 글을 쓸 때, 윗문장에 아랫문장을 겹쳐 쓰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넓게 간격을 두는 것처럼.

비행기는 동쪽으로, 동쪽으로.....편서풍을 타고 날아갔지오. 창밖을 볼 때마다, 거대한 화살에 실려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과녁이 아니라 과녁 바깥을 향해 힘껏 쏘아지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여 다시 기척을 낸다. 

"승객들의 절반은 독일인이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인이었는데, 한 사람뿐이던 한국인 여승무원이 나에게 한국어로 묻더군요. 음료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라고 나는 웃었어요. 그러니까 그 비행기에서, 이제 나는 더이상 눈에 띄지 않는 사림이었던 거지요."

그가 생수병을 들어 입술을 적신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외국인으로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는 언제나 노심초사했어요. 외국인이니까, 더군나 사람들의 눈에 띄는 동양인이니까 더욱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강박관념이었지요. 주말에 외출을 하면 사소한 문제로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곤 했어요."

"아니, 무턱대고 차를 빼서 나갔다가 출구에 카세가 없으면 어떡해요. 멀면 어때요. 이층에 카세가 있었던 건 확실하잖아요. 돌아가서 먼저 정산을 하고 가요. ....내 말 좀 들어봐요. 우린 외국인이잖아요. 돈을 안 내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만에 하나 출구에 카세가 없다면 말이에요......괜찮지가 안아요. 왜 모험을 하려구 그래요?"

그의 입술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괜찮다니까. 걱정 말라니까. 하고 거듭 퉁명스럽게 답하는 아버지의 태도로 봐서는 어머니의 노심초사가 지나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대체로 어머니의 말이 옳았으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당한 대우는 실제로 이까금 있었으니까, 나와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아버지가 상대하는 독일 기업과 관공서에서도. 인종적 시선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수 없을, 얼음처럼 선득한 혐오와 멸시가 숨겨져 있더 눈빛들을 기억해요"

그의 침묵이 길어질 때마다, 그녀는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여 기척을 낸다. 목제의자의 팔걸이를 뜻없이 손으로 쓸어보고, 머리를 쓸어올린다. 그러다 움직임을 멈춘다. 

 

"어머니는 언제나 지쳐 있었어요. 아버지 대신 생계를 꾸리기 위해 마인츠로 집을 옮기고, 아시아 쪽 식재료를 파는 가게를 연 뒤에는 집에서 웃는 얼굴을 보기 어려웠지요.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투덜거리곤 했어요."

"어떻게 된 게, 이놈의 나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야 한다니. 이제 그만 안 웃고 살고 싶다.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어. 집에서라도 나는 안 웃으련다. 내가 안 웃어도 화난 거 아니니까 오해 마라"

그녀가 아주 조금 몸을 움직일 때, 천장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훨씬 크게 움직인다. 그녀의 얼굴과 손이 아주 약간만 떨려도 그림자는 춤을 추듯 술렁인다. 

 

"사춘기 때, 저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게 미소였어요. 쾌활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언제든 웃고 인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저에게는 힘들었어요. 때로는 웃고 인사하는 일이 무슨 노동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형식적인 미소를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었어요. 그럴 땐 무술에 능한 동양의 불량비로 보일 것을 감수하며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호주머니에 두 주먹을 찔러넣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뚝뚝한 표정으로 걷곤 했어요"

천장 가득 부풀어오른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자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없이, 검은 경계선을 굳게 지킨 채 떨어져 있다.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고, 오랫동안 익혀 이젠 내 것이나 다름없어진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를 빠져나왔지요. 누군가와 몸이 가까워질 때마다 실례합니다. 라고 독일어로 말하고 싶었어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싶었어요. 입국장을 빠져나온 순간 깨달았어요. 가족이며 친구들을 마중 나온 한국 사람들이 사이를, 어깨로 헤지며 나아가면서.....이제야 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창밖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이 방의 정적을 바늘처럼 찌른다고 그녀는 느낀다. 수틀에 끼운 천처럼 팽팽한 정적에, 수없이 작은 구멍을 뚫는다. 

그림자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 창백하다.

 

"그러고 보니 독일로 간 첫해 겨울에, 아버지를 밴 세 식구가 기차를 타고 단출하게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생각이 나네요"

그의 독백이 조금씩 빨라진다. 어둠 속에서 급하게 쓰는 바람에 망쳐버린 글처럼, 한 줄 위에 또 한 줄이, 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덧입혀진다. 

"아무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것도 미술품이며 성당, 음식 같은 것도, 단지 거기. 카타콤베 묘지만은 잊을 수 없어요"

 

"그곳은 죽은 자들의 도시더군요.

통로가 끝날 때마다 세 갈래 갈림길이 나타났어요. 

길을 잃어 굶어 죽은 관광객도 있었다는 말이 실감났어요. 석실들의 벽면은 모두 크고 작은 서립 모양의 무덤들이었는데, 현지 여행사의 한국인 여자 가이드가 묻더군요. 

"여러분, 왜 관 속에 유골이 없을까요?"

목소리가 큰 여동생이 대답했어요.

박물곤에 가져다 놓은 거 아니예요?

가이드는 틀렸다고 하더군요. 

"누군가가 흠쳐갔나요?"

다른 관광객이 묻자 가이드는 다시 고래를 저었어요.

다아 여기 있습니다. 라고 가이드는 마치 자부심을 느끼는 듯 말했어요. 

여러분 눈앞에,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며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

그녀는 창밖으로 얼굴을 돌린다. 어둠 속의 전선들은 여전히 난마처럼 얽혀 있다. 고압의 전류 속으로 목소리들을, 영상들을, 수없이 깜박이는 활자들을 흘려보내며 태영히 정적에 잠겨 있다. 

 

"토할 것 같았어요.

내가 보고 있는 흙이 무서워서. 

그 흙이 내 몸에 묻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너무 어두웠어요.

모조리 똑같아 보이는 세 갈래 갈림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토할 것 같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수개월 전 그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여러 날 동안 토한 적이 있었다. 재판에 패해 아이를 잃은 직후였다. 일주일 만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모므라이스를 가까스로 만들어준 뒤 그녀는 저녁 내내 양배추만 먹었다. 믹서기에 갈아 먹고, 냄비에 쩌서 먹었다. 그것 말고는 속이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 토끼 되겠다" 아이가 말했다. "온몸이 초록색 되겠어." 그녀는 아이와 함께 웃고는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토했다. 위산으로 시어진 입속을 헹구고 나와 아이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토끼는 초록생이 되지 않는다니? 풀만 먹는데" 아이가 대답했다. "그거야. 토끼는 당근도 먹으니까" 구역질을 참으며 그녀는 웃었다. 

 

"이렇게 혼자서 오래 말하고 있으니까, 이상하게 그때 생각이나네요.

수천 구의 육체들이 뼈까지 깨끗이 삭아버린 거대한 무덤 속에, 그토록 따뜻한 몸을 가진 우리가 모여 있다는 게"

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담담함 위에 담담함이, 미소 위에 미소가 짓눌러진다. 

"피곤하군요"

그가 잠시 침묵한다.

"지금 잠들면 며칠 동안이라도 깨지 않을 것 같아요"

 

이를 악문 채 그가 무엇인가를 더듬고 있다. 더듬은 자리를 다시 더듬고 있다. 그녀가 침묵의 얼음을 더듬을 때 그렇게 하듯이. 한 겹의 얼음이 녹으면 세 갈래 길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 겹의 얼음 아래 세 갈래 길이 있고, 다시 더 두꺼운 얼음 아래로 갈라지는 길이.....그렇게 끝없이 갈라지고 있을 것이다. 

"꼭 한 번, 실제로 며칠 동안 깨어나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누가 얼굴을 나무토막으로 내려쳤지요.

괴한은 아니었어요.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안경이 깨지면서 상처가 났지요.

그 흉터가 아직 남아 있어요"

그의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희끗한 선에 그녀의 시선이 닿는다. 밤이 깊을 만큼 깊어, 끊어질 듯 ㄲㄶ기지 않던 풀벌레 소리가 막 끊어지려 한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는다. 캄캄한 집들이 더위를 못이겨 열어 놓은 무수한 창들, 촘촘하게 짜인 무수한 방충망들을 귀신처럼 펄럭이며 넘다드는 것은 저 검은 어둠뿐이다.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가 깨어보니 병원이었지요.

삼 인실이었는데, 마침 옆 침대들은 비어 있었어요.

어둑한 창밖을 보며 생각했지요.

이제부터 환해지는 걸까, 아니면 밤이 되는 걸까"

 

그 순간, 불쑥 오래된 한 단어의 기억이 절반쯤 잘린 채 떠올라 그녀는 그것을 붙들려 한다.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그때 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여동생과 어머니가 나를 보고 탄성을 질렀어요. 

동생이 뛰어나가 간호사를 불렀어요.

하루 일에 지친 인턴이 헝클어진 머리로 나에게 경과를 설명하더군요.

어둑어둑하던 푸른빛은 그때쯤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어요"

 

그녀가 어렸을 때, 긴 낮잠 끝에 이러나 문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던 적이 있었다. 컴컴한 한식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계단을 엉덩이로 짚어가며 부엌 바닥으로 내려가자, 어머니가 석유곤론 앞에 쪼그려앉아 서리콩을 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렴풋한 혼돈 속에서 그녀는 물었다. "엄마, 지금은 내일이야?"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식 부엌의 구석구석에 스며든 어둠은 밤의 것이었다. 새벽의 것보다 단단하고 깊은 것, 훨씬 오래 계속될 어둠이었다. 그녀 역시 무심결에 그렇게 느꼈기 땨문에 '내일'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내가 사흘 동안 의식불명이었다고 의사는 말하더군요.

외상이 삼하지 않아서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고"

그의 얼굴에 묘하게 서글프고 희미한 미소가 어린다. 

"꿈도 없이 그렇게 깊이 잔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마른 널빤지에 물이 번지듯 조용히, 얼굴 전체에 미소가 퍼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의 목소리가 더 잦아든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어느 순간부터 그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지 잊은 것 같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장미.

수박을 반으로 가르면 활짝 꽃어럼 펼쳐지는 붉은 속.

연등회 날 밤.

눈송이들.

옛 여자의 얼굴.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피로를 느끼며, 그녀는 눈을 길게 감았다.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는다. 다시 눈을 감자, 의식이 훌쩍 생시로부터 밀려나가려 한다. 이제 눈을 뜨면 그녀의 집 거실 천장이 시야에 가득 찰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거실 소파에 웅크려 누워 잠들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러 시간 전,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던 삼십여 분 동안에도 그녀는 비슷한 혼란을 느꼈다. 언제나 먼저 와서 학생들을 기다리던 희랍어 강사는 어째서인지 강의실로 들어오지 않았다.기둥 뒤의 자리를 좋아하던 중년의 사내도, 어두운 벽에 기대 잇사이로 날선 단어들을 밀어내던 거구의 대학원생도, 그녀를 향해 회심 가득한 눈을 깜박이곤 하던 여드름투성이 철학과 학생도 오지 않았다. 

흑판도, 교단도, 책상들도 모두 텅 비어 있었따. 두 대의 선풍기는 서로를 외면하듯 비스듬히 반대쪽 벽을 향한 채 정지해 있었다. 학생들이 생생하게 서 있거나 앉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 휴대폰으로 누군간와 통화를 하던 빈자리들이 이상한 통각을 띠고 그녀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 암석들의 단층처름 날카롭게 어긋나, 다시는 그녀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과 겹쳐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차량들의 엔진 소리에 우두커니 귀를 기울이던 한 순간, 그녀는 교재와 공책과 헝겊필통을 도로 가방에 밀어넣었다. 정적에 잠긴 강의실에 불을 켜둔 채, 유난히 크게 울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어두운 복도로 걸어나갔다. 

 

"내 말., 거기서 듣고 있나요?"

습기로 축축해진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의 음성이 변형되어 들린다.

저 음성이 희랍어 강사의 음성인가,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의심한단. 수개월 동안 그 적막한 강의실에서 들어온 그의 음성이 맞나, 저렇게 연약하게 떨리는 음성이었나.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잘길 수 있다는 건."

 

무거운 누꺼풀을 가까스로 치켜올리며, 그녀는 설핏 꿈에 잠기듯 해가 저물던 옛집 앞의 골목을 떠올린다. 젊은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외가에 가려고 나서던 참이었다. "시장에 들러서 귤을 좀 사가자" 어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의 지퍼를 혼자 잠그지 못해 쩔쩔매던 어린 그녀는 그 순간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 주황색 감귤들을 보았다. 그것이 진짜 균이 아니라는 사실에, 정말로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토록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생각을 바꿔 나무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술 같았다. 그녀의 눈이 보는 풍경은 오직 저무는 골목과 한없이 길게 펼쳐진 코크리트 담장뿐이었는데, 그녀는 분명히 나무를 보고 있었다.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의 형상들이 거기 겹쳐졌다. 나무, 소리내어 발음하며 그녀는 혼자 웃었다. 나무. 나무. 

 

"내가 하는 말들이, 이상하게 들리나요?"

겨느는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본다. 옛날이 흉터와, 아까 함부로 손으로 문지르는 바람에 새로 생긴 먼지 얼룩을 본다. 다시 눈을 감는다. 방금 본 그의 소년같은 얼굴이 고스란히, 어린 시절의 마술처럼 떠오르는 것을 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며,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정말, 오해하시지 않는다면....."

그이 목소리가 낮아진다. 

"그러니까, 당신은 처음부터.....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나요?"

 

천장에는 무늬 없는 미색 도배지가 발라져 있고, 책장에 꽂힌 책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풀벌레 소리는 멎었다. 어둑한 방의 정적에 생채기를 내는 것은 아주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들뿐이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젖은 수건처럼 축축한 바람이다. 땀이 식어 끈적끈적한 자신의 얼굴을 차가운 수건으로 씻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이 얼굴에 새로 생긴 얼굴을 쓱쓱 닦아내고 싶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허공을 더듬는 그의 눈길과 긴장한 입술을, 밤이 깊어 연하고 푸릇한 수염이 돋기 시작한 턱과 뺨 언저리를 그녀는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얼굴을 이루는 선과 점 들 속에 해독해야 할 부호나 상형문자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그 얼굴을 간결한 필선으로 옮겨 그리는 것만으로 몇 마디 조용한 말이 드러날 거라고 믿는 것처럼.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던 이른 봄, 그녀는 '상형문자'라는 제목으로 몇 편의 시를 쓴 적이 있었다. 수수한 유머가 배어나오기를 바라며 그녀는 썼다. 알파벳 소문자 a는 머리와 어깨를 앞으로 수그린 고단한 사람, 한자 光은 땅 아래로 뿌리를 뻗어가며, 땅 위로는 빛을 향해 피어오르는 관목, 우우우, 외치는 창츨 위에 나란히 맺힌 물망울들이 일제히 굴러떨어지는 형태, 속눈썹 아래로 번지다 흐르는 눈물들의 움직임,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 밝고 조요하고 순진한 시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쓴 시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차츰 그녀의 말들은 끊길 듯 말 듯 떨리거나, 끝내 토막토막 끊어지거나, 한움큼 떨어져나온 살점처럼 뭉개어지며 썩어갔다. 

 

"희랍어는 왜 배우는 건가요?"

방심한 채 그녀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본다. 땀이 차서 눅눅해진 흑자주색 머리끈 아래, 오래전의 흉터도 눅눅하게 젖어 있다.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어떤 감정도 없이, 먼 친분이 있을 뿐인 타인을 기억하듯 그녀는 그날의 자신을 기억한다. "미쳤군" 막 의식을 차린 그녀에게 어움 속의 사람이 내뱉었다. "미친 여자한테 그동안 아이를 맡기고 있었어"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그날, 희랍어로 공책에 쓴 건 뭐였나요?"

마모된 거대한 톱니의 일부를 만지듯 그녀는 자신이 입술을 쓸어 본다. 오래전에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말들이 떨며 솟아오르던 경로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떠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이 형과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할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렴,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엄 움푹 떨어져나갔다.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환한 봄날, 공원 벤치에 겹겹이 덮인 신문지 아래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 속에, 늦은 밤의 지하철, 끈끈한 땀에 젖은 어깨들을 겹치고 각기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 속에, 폭우가 퍼붓는 간선도로, 끈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의 행렬 속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들로 할퀴어진 하루하루 속에, 그토록 쉽게 부스러지는 육체들 속에,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주고받는, 뚝뚝 끊어지는 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

어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밤, 혼자 오래 있어나 몸이 아픈 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한 말이 문득 방어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해의 증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독한 취기 같은 피로가 그녀의 의식을 둔하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인 것처럼, 아주 먼 곳에서부터 토막토막 끊긴 채 울려온다.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려 애쓴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려 애쓴다.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냉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지금 들여오는 말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지독한 피로 속에서, 지독하게 어둡고 고요한 이 방에서,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그녀는 느낀다. 어떤 말도 그녀는 듣지 못했다. 어떤 타인의 내부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안개 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여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아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여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날, 그 뜨거운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던 백구는 왜 그녀를 물었던 걸까?

그것이 그에겐 마지막 순간이었는데.

왜 그토록 세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살을 물어뜯었을까.

왜 그토록 어리석게, 그녀는 끝까지 그를 껴안으려고 했을까. 

 

"내 말이 들리나요?"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책상에서 비스듬히 비치는 갓등의 빛을 받아 절반 가까이 그늘진 그의 얼굴을, 그녀는 지금 혼 힘을 다해 거너다보고 있다. 

"거기서, 듣고 있나요?"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그녀는 본다. 드문드문 튄 핏자국이 이제 흑갈색으로 굳은 흰 셔츠를 입은 그가, 신중하게 발을 내디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본다. 그가 그녀보다 더 지쳐 있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다. 

 

"미안해요.

이렇게 혼자 오래 말해본 건 처음입니다"

피로를 가까스로 얼굴 뒤쪽으로 밀어놓고 그가 말한다. 허리를 수그리고, 왼손을 그녀 쪽으로 내민다. 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눈을 그녀는 들여다본다. 어둠과 빛을 구별할 수 있는 눈, 그녀의 얼굴 윤곽을 분명히 보고 있는 눈이다. 

"여기 대답을 써주시겠어요?"

더이상 허공을 더듬지 않는 눈, 오래 혼자서 말한 사람의 눈, 단 한 번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의 눈을 그녀는 본다. 

"지금, 택시를 부르겠어요?"

그녀는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입술을 떼었다가 힘껏 다문다. 그가 내민 손을 그녀의 왼손으로 받친다. 주저하는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쓴다. 

 

"아니요"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 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싱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20

세찬 빗소리에 그는 눈을 뜬다. 어둡다 창문이 열려 있다. 비가 더 들이치기 전에 창문을 당아야 한다. 무심코 안경을 찾으려고 침대 옆의 책상을 더듬다가 그는 간밤의 일을 기억해낸다. 아직 욱신 거리는 오른손의 통각을 느낀다. 

그는 맨발로 침대엣 내려와 선다. 두 팔로 허공을 더듬으며 창쪽으로, 차가운 비와 바람이 들어오는 촉으로 나아간다. 어둥느 거과 더 어두운 것을 구별하려 그는 애쓴다. 두 팔을 옆으로, 앞으로 뻗는다. 벽은 아직 멀리 있다. 라디에이터도, 창 아래 긴 의자도 아직 멀리 있다. 마침내 그이 얼굴과 팔이 습기를 느낀다. 길게 뻗어 나간 손을 문방울의 입자들이 건드린다. 더듬더음 그는 창틀의 알루미늄 손잡이를 찾아낸다. 소리내어 창문을 닫는다. 손바닥이, 손등이 흥건하게 젖는다. 세차게 쏟아지던 빗소리가 성큼 한 걸음 물러선다. 

여자가 긴 의자에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뒤척이는 움직임, 따스한 숨의 기척 따위는 없다. "첫 버스가 다닐 시간인가" 그는 소리냉 중얼거린다. 그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타인의 것처럼 건조하게 들린다. 

그는 긴 의자에 걸터앉는다. 두 손으로 의자를 더듬어, 여자가 홑이불과 담요를 한켠에 개켜놓고 간 것을 안다. 간밤에 그가 서랍장에서 꺼내준 것들이다. 개켜진 이불 위로 그는 눕는다. 어렴풋한 땀 냄새가, 어린애들이 쓰는 목욕비누 같은 사과향이 맡아진다. 그는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희끗한 것은 오른손의 붕대, 더 희끗한 것은 왼손이다. 왼쪽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지나가던 따스한 획과 점 들을, 살갗이 먼저 기억한다. 

가늘게 떨며 망설이는 손, 손톱이 지나치게 바투 깎여, 그의 살을 조금도 아프게 하지 않던 손가락, 서서히 드러나는 음절, 침이 없는 압적 같은 마침표, 서서히 밝아지는 한마디 말. 

 

"당신은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따금 나는 당신과 긴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는데.

내가 말을 건네면 당신이 귀 길울여 듣고, 당신이 말을 건네면 내가 귀 기울여 듣는 상상을 했는데.

그렇게 실제로 당신과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은 절반, 아니 삼분지 이쯤, 아니, 그보다 더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무엇인가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벙어리 사물처럼, 무슨 잔해처럼 거기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무서워지기도 했는데, 그 무서음을 이기고 당신에게 다가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당신도 문득 몸을 일으켜 꼭 그만큼 다가와 앉을 것 가기도 했는데."

"그렇게 무서운 당신의 침묵이 생각나는 밤이 있었는데. 빛이 가득 고여 일렁이는 것 같았던 R의 것과는 전혀 다른 침묵. 얼음 밑에서 두드리다 굳어버린 손 같은 침묵. 피투성이 몸 위로 쌓인 눈더미 같은 침묵. 어느 순간 그게 진짜 죽음으로 변해버릴까봐 두려웠는데. 정말 딱딱해져버릴까봐, 정말 싸늘해져버릴까봐 불안했는데"

 

어둠을 향해 그는 퍼뜩 눈을 떠본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복종하듯 다시 눈을 감고 누꺼풀 속의 어둠을 본다. 그 어둠의 속으로 거역할 수 없이 밀려드는 새벽잠에 몸을 맡긴다. 귀속으로 파고드는 빗소리를 듣는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트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찾아든, 위태하게 부서지는 꿈속에서 그는 두 사람을 본다.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다. 노쇠 때문에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백발의 남자가 묻는다. 용서를 구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말해봐, 이 냄새는 뭐지?"

젊은 여자가 묘사하기 시작한다. 생생함과 열의와 정확성을 담아 매우 빠르게, 소름 끼칠 만즘 대담한 반말로.

"참나무숲이야. 뿌리들이 흙 위로 관절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와 있어. 그걸 친친 동여감은 담쟁이가 있어"

"그게 어덯게 생겼지?"

"줄기들, 비틀린 가지들....우릴 향해 달려들 것 같아. 우리 몸뚱이를 단박에 치친 휘감고 패대기칠 것 같아. 그런데 저건"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뭐가 보이지?"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차츰 떨린다.

"그렇게 ㅇ래 침묵하지 마. 추하고 무서운 것들을 나에게 숨기지 마. 무슨 일이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어?"

그의 목소리가 빨라진다. 더 떨리며 높아진다.

"말해봐 당신의 입술로, 혀로, 목구멍으로.....지금 말해. 어디 있어? 손을 줘. 제발 소리를 내"

날카롭게 가슴을 돌려내는고통이 느껴진다. 그녀의 손이 잡히지 않는다. 그 여자. 그 여자의 손이 없다. 어린애처럼 그는 운다. 퍼뜩 눈을 뜬 순간, 헌실 속에서는 꿈에서만큼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약간의 따뜻한 눈물이 빰에 흘러 있을 뿐이다. 어떤 위안도 없이 그는 다시 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 기억이다.

덮쳐오던 검은 새.

암흑에 잠겨 있던 계단.

그 끝에 번져 있던 손전등의 불빛.

다가오던 그 여자의 희끗한 얼굴.

 

소스라치며 기억에서 깨어난다.

다른 꿈속으로 들어간다..

 

이번엔 갑자기 잘 솔 수 있다.

수십 길 차가운 자하에 모여 있는 낯선 사람들.

잎에서 뿜어져나오는 더운 김.

저마다 시체처럼, 희극배우들처럼 얼굴에 칠한 새하얀 회분.

 

또다른 꿈이 도둑처럼 겹쳐 들어온다.

어둑어둑한 무대.

공연을 기다리는 객석의 사람들

점점 밝아지는 대시 더 진해지는 어둠.

이상하고 긴 정적.

영원히 시작되지 않는 공연.

 

다시 빗소.

옛 여자의 검은 얼굴.

차가운 빗방울.

우산에, 

무무잡잡한 이마에,

흥건히 젖은 손등에, 거기 부풀어오른 파스스름한 정맥에.

처음 듣는 명석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독일어가 귓속으로 파고 든다.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새파란 실타래에 싸인 낯익은 방.

이제 읽어야 할 화한 구멍들로 이루어진 수십 장의 편지.

 

그의 곁에 서늘하게 누운,

사과향이 나는 모호한 사람의 윤곽.

 

떨고 있는.

손바닥에.

마침표.

따스한.

검은 모래.

아니, 단단한 열매.

얼어붙은 흙 속에

묻어

놓은.

쉼표,

휘어진

속눈썹,

가느다란

숨소리,

속에

캄캄한

칼집

속에

빛나는

칼,

오래

숨을 참으며

기다리는, 

 

소스라치며 그는 눈을 뜬다. 일어나 앉는다. 자신이 깨어난 것이 현관 밖의 인기척 때문이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닫는다.

 

잠기지 않은 현관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쪽이 약간 밝아진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어두워진다. 누군가가 신을 벗는 기척이 들린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이만 아까보다는 창이 밝아져, 사람의 어두운 윤곽을 짐작으로 더듬을 수 잇따. 검은 형테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는 두 눈을 치뜬다. 붕대를 감지 않은 왼손으로 세차게 마른세수를 한다. 가까워진 머리카락에서 번져오는 선명한 비누 냄새를 맡는다. 갑자기 추워진 듯 그의 몸이 떨린다. 검은 형체에서 흰 것이 뻗어나온다. 그의 왼손을 잡아 펼친다. 다른 흰 것이 천천히 뻗어나와 그의 손바닥에 쓴다. 

 

안경점이 

문을 열

시간이에요.

 

촉감을 따라 그는 문장을 읽는다.

 

혹시 

처방전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가 와서, 

내가

혼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그는 더 기다린다. 더 많은 말을 기다린다. 그녀의 얼굴에서, 몸에서 배어나오는 차가운 습기를 느낀다.

 

처방전이

어디 있어요?

 

왼손을 그녀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빼내며 그는 몸을 일으킨다.  책상으로 다가가려는 것이었는데, 문득, 그럴 수밖에 없는 듯, 어둑한 공기 속에 떠오른 그녀의 희긋한 얼굴을 향해 다가선다. 견딜 수 없이 떨리는 왼팔을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는다. 

투명한 테이프로 입이 틀어막힌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이 굳어 있는 것을 그는 모른다. 간밤에 이 방세서도,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녀가 잠들지 못한 것을 모른다. 뜨거운 물과 아이의 거품비누로 오랫동안 샤워를 한 뒤, 식탁 앞에 앉아 희랍어 공책을 펼핀 것을 모른다. 얼음 아래 수십 갈래 길을 더듬듯 죽은 희랍어 문자들을 적고, 견딜 수 없이 생생한 모국어 문장들을 끈질기게 이어 적은 것을 모른다.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가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색색의 우산들로 붐비는 방학식 날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즈라이트이어가 그려진 우산을, 그 아래 보이는 아이의 반바지를, 무릎에 박힌 팥알만한 갈색 점을 알아본 것도 모른다. "오늘 왜 왔어. 내일이 만나는 날이잖아" 겁내는 듯 작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것을 모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던 것을 모른다. "머리 안 가도 돼. 아무 데도 안 가고 엄마랑 있어도 돼. 같이 도망가도 돼. 어떻게 든 헤쳐나갈 수 있어."라고 말하기 위해.

 

그녀의 셔츠가 비와 땀에 젖어 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허공에 둔 채, 그는 그녀의 등을 끌어안은 왼팔에 조금 더 힘을 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세게 문을 닫으며 복도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침묵하는 그녀의 우산에 빗줄기들이 소리치며 떨어졌던 것을 그는 모른다. 운동화 속의 맨발들이 흠뻑 젖었던 것을 모른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길에서 헤어지면 기분이 더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녀가 안으려고, 팔을 붙들여고, 손을 잡으려고 하자 물고기처럼 재빨리 빠져나간, 지느러미처럼 부드러운 살갗을 모른다. 빗물이 고여 생긴 검은 웅덩이들을, 그 위로 날카로운 대침처럼 꽃히던 빗발을 모른다. 

 

닫힌 창틀 사이로 빗소리가 파고든다. 거리의 모든 도로를, 건물들을, 움푹 파이게 하고 금가게 하려는 듯 헤찬 소리다. 누군가 신발을 끌며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다시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 닫힌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言)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 조각으로 가린다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21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이 숲에 나란히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당신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 자신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요.

나도 소리르 내지 않았어요.

마침내 당신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낼 때까지,

입술 사이로

둥글고 가냘픈 물거품이 새어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

 

당신은 간절했지요.

무섭고 고요했지요.

아두웠지요.

밤이 저문 다음 찾아오는 더 깊은 밤처럼.

수압 때문에 모든 생물들의 몸이 납작해진 심해처럼.

 

한 순간 당신의 검지손가락이 내 어깨릐 살갗 위를 움직이며 썼지요.

숲, 숲이라고.

난 다음의 말을 기다렸어요.

다음의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뜨고 어둠을 들여다보았어요.

어둠 속에 희끗하게 번진 당신의 몸을 보았어요.

 

그때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었지요.

아주 가까이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지요.

 

빗소리가 멈추지 않았지요.

무엇인가가 우리 내부에서 깨어졌지요.

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수압을 견다지 못해 산산조각난 산호들 사이에서 

우리 몸은 이제 막 떠오르려 하고 있었지요.

그대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목에 팔을 감았어요.

당신의 어깨를 더듬어 입맞추었어요.

내가 더 입맞출 수 없도록,

당신은 내 얼굴을 껴안으며 작은 소리를 냈지요.

처음으로, 

거품처럼 가냘프게. 둥글게.

 

나는 숨을 멈췄어요.

당신은 계속 숨을 쉬고 있었어요.

계속 당신의 숨소리가 들렸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떠울랐지요.

먼저 수면의 빛에 어렴풋이 닿고,

그 다음부터는 뭍으로 거세게 쓸려갔어요.

 

두려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맞추었지요.

아마에 .

눈썹에.

두 눈꺼풀에.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맞추는 것 같았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

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

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올랐어요.

 

0

다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든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적을 발음하는 순간, 힘두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