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4개월간 파견 근무를 할 때다. 그곳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 일이 밀려 출발하는 날 새벽에야 부랴부랴 짐을싸느라 한국 음식을 하나도 준비할질 못했다. 가져가 유일한 한국 음식은 공항에서 산 튜브 고추장 한 박스. 그나마 현지 직원들과 '신기한 케첩'을 나눠 먹느라 열흘도 되지 않아 동이 나버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보글보글 끓인 한국 라면이 어찌나 그리웠는지 세계 일주 할 때는 몇 달도 괜찮더니 일이 고되서 그런지 며칠만에 한국 음식 약발이 떨어져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몸에서 '매운 기'가 빠져서 그런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해 한국 사무실에 SOS를 쳤다. 매운 기가 떨어져서 도저히 일을 못하겠으니 라면 한 개랑 둥굴레차 한 상자만 보내주면 안되겠느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소리에 우리 팀원이 바로 답 메일을 보내왔다 "먹고 싶은 것을 다른 서류와 함께 국제 특송으로 보내니 일주일이면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야호! 말만 들어도 힘이 절로 났다. 그날부터 현장에서 수천 명에게 식량을 배분하는 일을 혀 빠지게 하면서도 곧 도착할 소포 생각만 하면 힘이 불끈 솟았다. 그러기를 열흘. 느닷없이 세관에서 연락이 왔다. 도착한 소포에 동봉된 물건이 미화 90달러어치이므로 20달러의 관세를 물어야 한다는 거다. 아니, 서류에 관세가 붙을 리는 없고, 라면 한 개랑 둥굴레차 한 상자가 비싸봐야 5천 원. 그러니깐 5,6달러인데 무슨 관세가 20달러란 말인가? 허나 길길이 뛰어봐야 나만 손해다. 울며 겨자 먹기로 20달러를 낸 뒤에도 일주일이 훨씬 지나서야 소포가 내 손에 들어왔다. 아, 소포 상자 안에 얌전히 들어앉은 낯익은 빨간 라면 봉지! 이 라면 한 봉지를 받으려고 국제 특송료 8만 원에 세금 2만 원, 무려 10만 원을 지불했으니 귀하고도 귀한 라면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는 받자마자 먹어 치우려고 했지만 막상 받고보니 그 비싼 라면을 그렇게 허무하게 없앨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침대 맡에 모셔놓고 매일 보며 즐기다가 몹시 아픈 날이나 갑자기 너무나 한국이 그리운 날에 먹기로 했다. 한국 음식과 더불어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 것이 한국의 책이다. 여섯 권을 챙겨왔는데 비행기 안에서 두 권을 읽고 나니 보름도 안되어서 책이 똑, 떨어졌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어 외울 지경까지 되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영어 책을 몇 권 샀는데 인쇄 상태가 조악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견디다 못해 이번엔 친구한데 SOS를 쳤다. 사람 살리는 셈 치고 한국 책 열 권만 보내달라고. 나중에 책값과 항공 소포값에 심부름값까지 톡톡히 쳐서 줄 거라고, 읽은 책은 이곳 한국 교민회에 기증하고 갈 거니까 너도 간접적으로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친구가 즉시 보냈다는 책들은 한 달이 지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신 훨씬 나중에 부탁한 책 다섯 권이 옆 나라로 출장 온 우리 직원 손에 들려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그날로 밤을 새며 한권을 뚝딱. 다 읽었다. 영어책을 읽다가 한국말로 된 책을 읽으니 어찌나 술술 읽히는지 속이 다 시원했다. 그 책들은 내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침대 맡에 '10만원짜리" 라면과 함게 당당히 놓여 있었다.
짐바브웨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구호팀장으로서는 식량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수만 명에게 먹을 것을 전했을 때겠지만, 인간 한비야로서는 어느 비 오는 저녁, 하루 종일 쥐어짜는 듯한 복통에 시달리고 나서 드디어 고이 모셔두었던 한국 라면을 끓여 먹었던 그 순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행복감이 고스란히 밀려온다. 신기하지 않은가? 겨우 한국 라면 한 봉지, 한국 책 한 권이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앞으로도 짐바브웨에서처럼 거창하거나 특별한 게 아니라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해지기는 누워서 떡 먹기다. 지금 '내 라면 한 봉지'가 무엇인가를 알기만 하면 되니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길.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는 '라면 한 봉지'는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