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산은 모험이요, 글은 체험이다
화환, 축사, 회비 모두 사절한 행사였다. 대신, 참석자들에겐 지난 달에 출간된 <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 (이마운틴 펴냄)와 자신의 삶을 소개한 <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 (수문 펴냄) 등 2권의 책이 '공짜로' 배포됐다. 등산과 관련된 '산악서'를 낸 지 꼭 30년째를 맞이하는 원로 산악인 김영도(85·사진)씨를 위한 조촐한 잔치가 12일 서울 명동 로얄호텔에서 산악인과 친지 등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 산에서… > 를 끝으로 다시는 책을 내지 않겠다며 출판은퇴식을 겸한 이 날 행사에서 김씨는 1977년 고상돈씨가 한국 등반가로는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 등반대장으로 참가한 내용을 실은 < 나의 에베레스트 > (1980)가 처음 쓴 책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엄청난 도전과 감동으로 한국이 떠들썩할 때, 라인홀트 메스너(독일)는 6개월 뒤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그리고 다시 3개월 뒤엔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등반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었죠."
그는 지난 달까지 30년 동안 8권의 저서와 번역서 8권 등 모두 16권을 출간했다. 8000m급 14좌를 세계 최초로 등반한 독일인 메스너의 < 낭가파르바트 단독행 > 을 읽고 84년 < 검은 고독, 흰 고독 > 으로 펴낸 것이 첫 번역서였다. 그는 "메스너는 혼자 오를 때의 절망감을 검은 고독으로, 정상에 선 뒤 찾아오는 밝은 외로움을 흰 고독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제목을 붙였지요."
"책을 쓰는 일은 지식과 체험에서 새로운 것을 얻을 때 가능하지요. 지난해 마누라도 세상을 떴고, 이젠 물러날 때가 됐다고 봅니다. 다만, 후배들이 이 길을 계속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씨는 세계적인 등산 실력을 갖춘 젊은 등반가가 많은데도, 좋은 책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메스너만해도 30여 권의 책을 써내 문필가로 이름을 얻었다. 국내 최고의 등산기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점도 아쉬운 일이다.
"남들이 8000m급에 도전할 때, 6000m급의 그 어려운 에베레스트 촐라체 북벽에 도전했다가 파트너가 크레바스에 추락하자 끝내 자신의 손가락을 희생하면서 파트너를 구한 얘기를 담은 박정헌의 < 끈 > (2005)은 우리 산악계 최고의 책이죠." 대한산악연맹은 김씨의 노력으로 이 책을 영문판으로 출간하기 위해 올해 예산을 편성했다.
1924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9대 국회의원과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지낸 김씨는 이날 무료로 배포된 책값을 대기 위해 출판사에서 받을 인지세를 포기했다. 목적 달성에만 집착하고, 상업성에 찌든 등정주의를 멀리하고, 도전과 모험, 끊임없는 자신의 미답지를 향해 산을 오르는 그의 고집스런 등로주의와 희생정신이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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