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대선에서 심각한 금융위기로 고통받는 미국인들에게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승리한 민주당 버락 오바마 상원 의원. 미 정치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미 언론은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엄밀히 오바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를 둔 혼혈아다. 피부색에서 자유롭지 못한 미국 사회에서 괴상한 이름의 혼혈 소년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적잖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만하다. 부모의 이혼과 정체성 혼란 등 순탄치 않은 성장기를 보낸 오바마는 자신과 같은 약자와 소외층에 눈을 떴고, 그들을 위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큰 꿈을 품게 된다. 좌절을 희망의 노래로 엮어낸 그의 삶 자체가 미국 내 소외되고 방치된 많은 소수인종과 이민자들에게는 곧 생생한 감동의 메시지인 셈이다.
▶외로운 소년, 빈곤과 약자에 눈 뜨다=발음하기 쉽지 않은 이름인 '버락(Barak)'은 케냐 출신 유학생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축복받은'이란 뜻이다. 오바마가 태어난 지 2년이 되던 해 오바마의 아버지는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위해 혼자 보스턴으로 떠났고, 부부의 결혼생활은 결국 파경을 맞는다.
여섯 살 때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오바마는 인도네시아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병과 배고픔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접하면서 빈곤에 눈뜨게 된다. 오바마가 열 살 되던 해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다시 위기를 맞고, 오바마는 어머니와도 헤어져 하와이 외가로 보내진다. 외조부모는 그에게 듬뿍 사랑을 줬지만, 부모의 빈자리로 오바마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외로운 아이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오바마는 소외감을 달래고자 농구부에 들어가 단장이 됐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종 차별의 아픔을 맛본 그는 흑인 친구들의 거친 행동을 따라하며 방황한다. 술은 물론 마약에도 손을 댔다.
어두웠던 성장기는 그의 얼굴에 그늘을 남겼으나 한편으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고, 일찌감치 이웃에 눈뜨는 계기가 됐다. 오바마는 훗날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나는 인도네시아 아이, 하와이 아이, 흑인 아이, 백인 아이로 자라났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가 주는 양분의 혜택을 모두 받았다"고 술회했다. 이름 덕을 본 것일까. 그는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키우다=지난 79년 LA 옥시덴털칼리지에 입학한 오바마는 2학년을 마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 편입했다. 이때 그는 소수민족 거주지를 둘러보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다.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특히 케냐를 찾아, 25년 전 무심히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여행은 그를 정체성 고민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케냐의 극심한 빈곤을 목격한 오바마는 아버지가 안락한 미국 생활을 등지고 케냐로 향했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신념으로 사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진학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1990년 권위 있는 학술지 '하버드로리뷰'의 첫 흑인 편집인에 올라 정계 입문의 기초 자질을 닦는다. 91년 하버드 법학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펴낸다. 돈보다는 소외층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월가 대신 법률회사에 들어가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정계 진출의 꿈을 키운다.
▶희망의 메시지를 선점하다='일리노이 프로젝트 보트'라는 단체를 이끌면서 10만여명의 새 유권자를 선거인 명부에 등록시켜 주목받은 그는 여세를 몰아 96년엔 일리노이 주 상원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소수당의 한계에 부딪혀 많은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자 실망한 그는 99년 연방 의원에 도전하지만 4선 의원이자 민주당의 베테랑 정치인이었던 바비 러시의 벽 앞에 예선에서 무릎 꿇고 만다.
오바마는 2003년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 재도전, 막대한 자금력의 백만장자 기업인 블레어 헐을 꺾고 53%의 득표율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다. 본선에서 맞붙은 공화당 후보 잭 라이언도 인기 정치인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으나 스캔들로 중도하차하고 새 공화당 후보인 앨런 키스와 격돌한다. 키스는 오바마의 정체성을 물고 늘어졌지만, 오바마는 희망의 메시지를 업고 흑인 최초의 최고위 공직자라는 타이틀을 달며, 결국 연방 상원에 입성한다.
무명의 정치 신인을 거물급 정치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당시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존 케리의 눈에 띄어 민주당 보스턴전당대회의 기조연설을 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우리는 모두 같은 희망과 같은 소망, 같은 꿈을 가진 미국입니다"라는 연설로 극심한 분열을 겪던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호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방치된 다수의 흑인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또 정치 경력은 짧지만 호소력 짙은 명연설과 '변화'의 메시지를 내걸고 폭넓은 지지층을 다질 수 있었다.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낀 민주당원과 젊은 층 무당파는 참신하고 카리스마를 갖춘 오바마에게 열광했고, 그는 결국 미국 제44대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김영화 기자/bettykim@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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