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대 불문 독자의 마음을 다잡아 준 최장기 베스트셀러
★ 대한민국에 『논어』와 고전 열풍을 일으킨 올해의 교양서
★ 『오십에 읽는 논어』 15만 부 돌파 기념 리커버 출간
“이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오십의 공허와 가벼움을 채우는 논어 50수의 힘
“나의 인생을 다시 정리하게 하는 지침서!” (교보문고 cs**ng01)
“세대를 불문하고 읽으면 좋을 책.” (교보문고 ss**kdol)
“오십부터 또 다른 삶의 즐거움을 만들 수 있게 하는 책.” (예스24 c*****8)
“삶에 위안이 됩니다.” (예스24 m*****k)
“선물하기 위해 다시 주문한 책” (알라딘 k****es)
“지금까지 잘 풀렸든 풀리지 않았든 인생 2막을 준비한다면 읽어야 한다.” (알라딘 k****up)
-15만 독자들의 찬사 中-
15만 명이 수없이 읽고 쓰고 들은 『오십에 읽는 논어』가 그동안 격려해 준 독자들의 성원을 기념하여 새 옷을 입었다. 고전 중의 고전 『논어』의 주옥같은 50수를 우리 삶과 쉽게 엮어 대한민국에 고전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를 만나 보라.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음은 물론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가 ‘지천명’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뜻으로 안다. 하지만 오십이 되자마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어려우며,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천명은 하늘의 명을 깨달은 완성형 상태가 아니라 인생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오십에 인생의 후반전을 계획하고 실천하고자 읽는 『논어』는 더 깊게 와닿을 것이다.
『오십에 읽는 논어』가 특별한 이유는 『논어』의 말과 2,500년 전 공자의 지혜를 옮기는 데 머물지 않고 오십이 갖춰야 할 인생론을 공자의 가르침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십에 의혹이 없었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다고 하지만, 오십을 넘어서야 비로소 정치 일선에 나섰고 육십 중반까지 이룬 것 없이 이국을 떠돌았다. 그럼에도 좌절하기보다 학문에 정진하며 말을 글로 옮겨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 공자는 자신의 삶을 “나의 길은 하나로 꿰어 있다. 나는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지금까지 일관되게 걸어왔다(吾道一以貫之)”로 요약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찾아 헤맨다면, 인생의 절반을 지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면, 공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싶다면, 공자의 말이 삶을 성찰하는 기회와 지혜의 징검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저: 최종엽
인문학 강사. 대한민국 명강사(209호)로, 전국강사경연대회(2016)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MBC , KBC <화통>, CJB <스페셜> 등 여러 방송 강연을 비롯하여, 연간 100회 이상 인문학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인재개발교육으로 석사를 졸업했고, 평생학습으로 박사를 수료했다. 삼성전자에서 엔지니어, 인사과장, 경영혁신차장, PA부장으로 20여 년 근무했고, 현재 카이로스경영연구소 대표,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면접전문위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의 절반쯤에 읽는 《논어》는 특별하다. 50대에 하는 변화가 진짜 변화, 50대에 하는 선택이 진짜 선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고 인생이 쉽게 바뀔 거라면 애초에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논어》에서 실천 전략과 변화의 실마리를 끌어낸다면 《논어》는 전혀 다른 《논어》가 될 것이다. 어떤 파도에도 굳건히 배를 지키는 인생의 앵커가 될 수 있다.
《오십에 읽는 논어》는 오십의 흔들리는 인생을 다잡아 주는 공자의 말과 공허한 마음을 채우는 논어의 지혜를 담았다. 말과 지혜에 머물지 않고, 오십이 자신을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공한다. 오십을 다시 생각해 오십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저서로는 《공자의 말》, 《공자의 담론》, 《지금 논어》, 《원려, 멀리 내다보는 삶》, 《일하는 나에게 논어가 답하다》, 《논어, 직장인의 미래를 논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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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방황하는 오십은 공허하단다. 나만 잘하면 되고, 나만 똑똑하면 되고, 나만 성실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살자고 노력했단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두 남이 되었단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거의 남이 되었단다. 오십의 바다에 홀로 남은 섬이 되었단다. 쉼 없이 달리면 먼저 도착할 줄 알았단다. 먼저 도착하면, 더 많이 쉴 수 있고 더 즐거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단다.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단다.
오십이 되어 인생은 쉼 없이 달리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단다. 죽도록 일해도 빚 없는 인생이기가 쉽지 않았기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단다.
공주께서는 마흔에 세상의 흔들림으로부터 벗어나 불혹이 되셨다는데, 2500년 전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우리는 어찌하여 오십, 육십이 되도록 먹고사는 문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똘똘한 집 한 채에 인생이 걸려, 제대로 된 취미 생활 하나 못하면서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하는 자신이 미워진단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오십 지천명의 세대는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고 있단다. 인생의 하프타임에서 방황하고 있단다. 퇴지, 실직, 이직, 실패, 부도, 조기 은퇴, 명예퇴직, 건강 등 뭐 하나 긍정적인 게 없지만, 그냥 주저앉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단다. 새로운 도전과 선택, 변화 앞에서 머뭇거리며 주춤하고 있단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부담감은 가중되는 압박 속에서 50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단다.
숨 막히게 달려왔던 경쟁의 속도를 줄이고, 인생 후반 목표와 함께 균형 잡힌 삶, 주도적인 삶, 성숙한 삶, 공감하는 삶을 생각해야 할 시간이란다. 혹여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나였는지 아니면 타인이나 외부 조건에 있었는지 찾아야 한단다. 혹여 지금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고 싶기 때문이며, 핑계를 대고 싶다면 자신이 약해졌기 때문이란다.
내려가는 길은 쉽단다. 등산도, 공부도, 사업도,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지금부터는 내가 하지 않으면 단 한 발도 나가지 못한단다. 내가 풀지 않으면 바ㅗ 주저앉아야 한단다. 오십이 되어도 집중해야 하는 이유란다.
2500년 이상 내려오면서 <논오>맡큼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 책도 없단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논어>를 읽고 인생을 바꿨단다. 경영자는 경영 원리를, 정치가는 정치 기본을, 리더는 리더십을 배웠단다. 인생을 묻는 이에게는 담대한 삶의 원리를 알려 줬단다.
인생의 절반쯤에 읽는 <논어>는 특별하단다. 50대에 하는 변화가 진짜 변화, 50대에 하는 선택이 진짜 선택이기 때문이란다. 지금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한 분야의 책만 읽었다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면, 이제는 역으로 바꿔보는 게 좋단다.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자왈 인무원려 필유근우
자왈,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우연히 접한 낡은 <논어>에서 예상치 못한 통찰력을 얻었단다. 원려는 목표란다. 간절한 꿈이란다. 중장기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단다. 가까운 현실에 안주하다 보면 먼 미래를 잃어버릴지 모른단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도 좋지만 무한한 미래 가능성의 잠재 가치를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근심 걱정이 없는 시대는 없단다. 왕이나 백성이나, 부자나 빈자나, 고관대작이나 평민이나, 자식이 많은 집안이나 자식이 없는 집안이나 근심 걱정이 없는 시대와 지역은 없단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하루하루의 삶은 비극에 더 가깝단다. 그러니 2500년 전부터 목표와 꿈과 비전을 지니고 살아야 그나마 하루하루의 어려움을 겪어 낼 수 있다고 했던 거란다. 목표가 분명하다고 근심과 걱정이 바로 사라지지 않지만, 미래가 있고 희망이 보이면 더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인생의 전반이야 여러 제약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인생 후반은 다르단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정해 준 대로 살아야 한단다. 인생 후반은 잘해도 내 탓 못해도 내 탓이란다. '처음이라서', '미숙해서'라는 핑계를 대기가 어렵단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제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단다. 꺾이지 않을 꿈과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워야 할 때란다. 뜻이 부족해서이지 단연코 남은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단다. 눈치나 조건을 살필 필요가 없단다. 인생의 마지막 변화나 선택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스물의 미숙함, 서른의 치열함, 마흔의 흔들림도 줄어든 오십은 일관성 있는 일을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란다. 오십은 자기 자신만 생각해도 욕먹지 않을 나이란다. 수천 년을 이어온 후회와 아쉬움의 고리를 끊는 공자의 가르침은 간절함이었단다.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표가 없기 때문이란다.
오십이 가장 적당한 때란다. 그러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덮어 두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단다.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는 남겨 두는 것도 전략이란다. 현재에 집중하려면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한단다. 누군가를 만나 감정이 많이 상한다면 만남의 기회를 줄여야 한단다. SNS에 너무 많은 시간이 낭비된다면 사용 시간을 줄여야 한단다. 소통이 짐이 된다면 줄여야 한단다.
집중은 용기란다. 한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 아흔아홉 가지를 없애는 결심이 필요하단다. 55세는 30세와 80세의 딱 중간이란다. 지금까지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누군가가 아닌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단다. 지난 25년을 '나' 중심으로 살았다면, 다가오는 25년은 '가족'을 위한 삶이어야 한단다. 지난 25년 동안 시어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면, 다가오는 25년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재밌게 살아야 한단다. 지난 25년 동안 돈만 되는 일을 하며 궁색하게 살았다면 다가오는 25년은 사람을 찾아 함께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단다.
나이 오십에 <논어>를 읽고 인생이 쉽게 바뀔 거라면 애초에 흔들리지도 않았을 거란다. 하지만 <논어>가 <논어>로 끝나는 게 아닌 <논어>에서 실천 전략과 변화의 실마리를 끌어낸다면, 그때 <논어>는 전혀 다른 <논어>가 될 거란다.
어떤 파도에도 굳건히 배를 지키는 인생의 앵커가 될 수 있단다. 정약용의 <논어>처럼, 이병철의 <논어>처럼, 오십의 독서와 오십의 학습과 오십의 <논어>가 진짜란다.
1강 : 공허
공자께서는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확고하게 섰으며, 마흔에 의혹이 없었고, 쉰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 귀가 순해졌고, 일흔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단다.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되 주오 /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 주오 / 가리워진 나의 길
1980년대 후반 20대 청년 가객 유재하가 부른 노래 <가리워진 나의 길>이란다. 25세 나이로 단 한 장의 앨범만 남기고 떠난 싱어송 라이터인 그가 살아 있다면 올해로 육십이 된단다. 25세의 그 가객보다 30년을 더 살아 오십 지천명이 되고 육십 이순이 되어도, 가려진 그 길을 여전히 찾지 못하는 것 같단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그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인지도 모른단다.
공자는 서른 즈음에 사학을 열 정도로 학문적 독립을 한단다. 특히 30대 초반 주나라 주도인 낙읍을 방문하여 노자를 만난 이후 공자 사학을 찾는 제자들의 수가 급증했다고 하니, 경제적인 독립과 사회적인 독립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단다. 30대 중반에는 망명길에 오른 노나라 왕과 함께 제나라로 가서 정치를 논하기도 했단다. 공자의 40대는 '난을 일으킨 양호가 공자를 포빙했으나 가지 않았다'는 48세의 기록이 유일하단다. 공자는 사십을 불혹(不惑)이라 했단다. 불혹은 '흔들리지 않음'이란다. 특히 사람에 흔들리지 않는단다. 공자는 나이 마흔 즈음에 사람을 제대로 볼 술 하는 지혜를 갖게 된 거란다.
공자는 젋어서부터 정치를 하고 싶어 했지만, 노나라 실세였던 삼환의 저지로 오십이 넘어서야 가능했단다. 전쟁과 패권이 넘치는 각변의 춘추시대였지만 예와 덕이 살아 있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을 천명으로 생각했던 공자는, 50대 초반에 왕의 부름으로 정치에 나서게 된단다. 공자의 천명은 화평의 시대를 만드는 평화의 사도였단다. 살아 가는 이유를 스스로 정하는 것, 바로 지천명이란다. 공자는 바른 정치를 실현함으로써 평화의 시대가 가능하다고 믿었단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웃 제나라오 노나라의 실세였던 계씨의 농간으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단다. 50대 중반에서 60대 후반까지 14년여 동안 알곱 개 나라를 떠돌아 다녀야했단다. 결국 공자의 지천명은 노나라에서 실현되지 못했단다.
공자는 이순으로 대변되는 60대 대부분을 풍찬노숙 이국에서 보내게 된단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무시 속엣 60대를 보냈단다. 귀가 순해진다는 말은, 타인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고 열정과 천명을 가진 채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다는 의미란다. 천하주유에서 돌아온 68세 공자는 천명을 이룰 방법을 바꾼단다.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나라를 바꾸는 방법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기에, 방법을 바꿔 <춘추>를 쓰고 <시경>을 편찬했단다. 73세의 나이로 노나라 곡부에서 인생을 마쳤단다.
요즘 장수하는 어르신의 나이는 대략 90세 정도로 본다면, 현대인의 나이에 0.8을 곱해 2500년 전 공자와 거칠게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어 보인단다. 현대인들은 19~20세에 대학을 진학하면서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고, 30대 중후반은 되어야 비로소 독립다운 독립을 한단다. 학문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박사가 되는 나이도, 가정을 이루고 가족을 형성하는 나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나이도 마찬가지란다. 보통 30대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지만 갈등은 계속된단다. 업무에서 오는 고민과 걱정, 사람들과의 갈등과 어려움으로 흔들릴 때가 너무 많단다. 10여 년이 지나면 업무의 전문성은 높아지고 사람들과의 갈등에도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단다. 요즘 우리는 오십은 되어야 세상에 어느 정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이 된다 말할 수 있을 것 같단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사는 게 흔들리지 않는 삶인가를 두고 고민한단다. 오십이 되면 경제적인 인정에 자유로윤 몸이 되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라도 있단다. 그러나 막상 오십이 넘고 환갑이 지나도 불안한 직업과 들쭉날쭉한 수입의 흔들리는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단다. 공자께서는 마흔에 흔들림없이 졸업하고 불혹이 되셨다는데, 스마트한 우리는 어찌하여 환갑이 되도록 계속 흔들리고만 있는 것일까?? 공자께서는 마흔에 세상의 다양한 문제에서 흔들림을 졸업하고 불혹이 되셨다는데, 똑똑한 우리는 어찌하여 환갑이 되도록 먹고사는 문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춘추시대 50대의 공자가 이룬 지천명을 우리는 육십에 이뤄도 늦지 않단다. 0.8의 비율을 적용해 본다면, 63세에서 74세까지가 지천명을 이룰 나이란다. 그러니 40대의 나이라면 비로소 이립이 완성되는 시기란다. 50대라면 한창 흔들리는 유혹의 시기란다. 삶에 흔들리고 돈에 흔들리고 사람에 흔들리는 시기란다. 인생의 천명을 몰로도 문제없단다. 환갑이 되어도 자신의 천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단다. 그래도 괜찮단다. 63세부터 서서히 인생의 천명을 찾아 정하면 되기 때문이란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헛헛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란다. 그러니 지금 오십도 육십도 모두 희망이란다.
이리로 가나 저리고 갈까 /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 제 갈 길을 찾았나?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되 주오 /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애여 길을 터 주오 / 가리워진 나의 길
오십에 들리는 유재하의 노래에 희망이 있는 이유란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지만 자신의 천명에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25세의 가객이 노래한 지 30년도 더 지났지만 '가리워진 나의 길'을 누군가는 찾아내야 할 것 같단다. 그게 바로 '나'이고 '우리'이기를 바란단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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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는
"나이 사십에 미움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하셨단다.
흔히 마흔이면 뭔가를 책임저야 한다는 무게를 느낀단다.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자신의 얼굴에도 책임져야 할 것 같고, 공자님의 말처럼 불혹이 되어 돈, 사람, 믿음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줏대를 가져야 할 것 같단다. 우리나라의 평군 나이가 마흔둘이라는 통계가 있단다. 인생의 중심 마흔은, 개인에게도 사회에서도 한번은 짚고넘어가야 할 고개가 분명해 보인단다. 그래서일까? 공자도 마흔이 되어서도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더 두고 볼 것 없다고 말했단다. 마흔이 되도록 타인에게 미음받을 짓만 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적을 받는다면, 그의 인생은 별 가망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단다.
<논어> 양화편 24장에는 타인에게 미움받는 일곱 가지 유형을 분명하게 밝혔단다. 타인의 나쁜 점을 들춰 내는 사람,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사람, 용감하지만 무례한 사람, 과감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공자는 미워한다고 했단다. 공자의 제자 자공 역시 자기의 편견을 내세우며 지혜롭다고여기는 사람, 불손한 짓을 가지고용감하다고 여기는 사람, 혹독한 말로남을 공격하면서 곧다고 여기는 사람을 미워한다고 했단다. 그러니 마흔이 되도록 타인의 아픈 곳이나 헤집어 헐뜯는 사람, 상사나 윗사람들을 비방하며 자주 욕하는 사람, 자기의 잇속에는 맹렬하게 대처하면서도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못하는 사람, 과단성은 있지만 앞뒤가 꽉 막혀 융통성이 없는 사람, 남의 생각을 훔쳐 마치 평소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 예의가 없고 겸손하지 않은 것을 용기로 생각하는 사람, 남이 비밀을 들춰 내는 걸 정직함으로 아는 사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말이란다. 이들은 대개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단다. 예나 지금이나, 누가 이런 사람을 좋아할 것인가?
2500년 전 아주 아득히 먼 예사람 공자와 자공이 말했던 저 일곱 가지 중 단 한가지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면, 마흔이 지나기 전에 되돌아봐야 한단다. 누군가를 이유 없이 자주 헐뜯는다면, 누군가를 반복해 욕한다면,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릴 줄 모른다면, 매사에 융통성이 없다면, 겸손하지 못함을 용기로 생각한다면, 남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밝히는 걸 정지함으로 생각한다면 먼저 그것을 고치려 노력해야 한단다. 마흔이 다 지나기 전에 수습해야 한단다. 그래야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었을 때 어른다운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단다. 가정에서도 조직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마흔에 챙겨야 할 진짜 문제가 하나 더 있단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도 큰 문제지만, 스스로에게 미움받는 게 더 큰 문제란다. 어떤 게 스스로에게 미움받는 경우일까? 나이 마흔이 넘도록 특별한 퍼스널브랜드나 강점 없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우란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우란다.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는데, 갑자기 퇴직하라는 회사의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우란다. 늘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인생의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마는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우란다.
마흔에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타인에게 받는 미움보다 더 치명적인 고통일 수 있단다. 학교를 졸업한 후 마흔이 넘도록 짧지 않은 시간을 일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점을 만들지 못했던 이유를 시간이 부족해서라고말하는 경우가 많단다. 시간 없음이 좋은 핑계가 될 수는 있어도 그 핑계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란다. 15년 혹은 20년 경력에 걸맞은 퍼서널브랜드를 정착하지 못한 것을 외부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도 없단다. 하지만 그 역시 좋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20년에 합당한 그럴 듯한 퍼서늘브랜드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전략의 문제이기 때문이란다.
우리 인생에 있어 40대는 가장 바쁜 시기임에 틀림없단다. 직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란다. 차.부장, 팀장 직급의 책임감과 리더 역할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일 년이 지나간단다. 아이들을 어느 덧 중.고등학생이 되어 대화다운 대화조차 어렵단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어디선가 삐그덕그리기 일쑤이란다. 좌충우돌하다가 눈 깜찍할 새 지나가는 시기가 40대란다. 하루하루 버텨 내기도 쉽지 않은 현실 속에 어떻게 미래를 위한 퍼스널브랜드, 자기 강점을 만들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단다.
"나이 사십에 미움을 보이면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에 '0.8의 법칙'을 적용하면 "나이 오십에 미움을 보이면 그것은 이미 끝나 것이다"로 바꿀 수 있단다. 그렇단다. 나이 오십이 다 가지 전에 육십, 칠십, 팔십을 빛나게 할 일자리를 찾아야 한단다. 오십이 다 가지 전에 퍼스널브랜드를 장착해야 한단다. 오십의 미움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란다.
섭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께서는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고, 먼 곳의 사람은 찾아오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단다.
초나라 변방의 경대부였던 섭공이 오랜만에 초나라를 방문한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단다. 공자는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게 하는 것이 정치다운 정치라고 답했단다. 가까이 있는 백성들을 잘 돌봐 그들의 삶이 풍족해지고 즐거워지면 소문을 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드니, 나라는 점점 부강해진다는 의미란다. 춘추시대에는 나라 사이의 국경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살기 좋은 지역을 찾아 비교적 쉽게 옮겨 다니고 했단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는 우수한 지식인들이나 전략가들이 열국을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통해 등용되기를 갈구했는데, 이들이 기준도 다르지 않았단다. 어떤 나라에서 실력 있는 인재를 제대로 대우한다는 소문이 돌면 천하의 인재들이 구름같이 물려들고 했단다. 각국의 제후들은 인재를 등용하여 패권국이 되고자 했기에, 섭공이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께서 그렇게 답한 거란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란다.
"저녁 무렵에 숲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어떤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숨이 넘어가듯 울어 대며 참새처럼 수없이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마치 여려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기는 듯 비참하고 절박했다. 어랜애는 금방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나무 아래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이 이 아이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 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 톨에 울고 웃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학업을 마치면 누구나 일을 시작한단다. 빠르거나 늦기는 해도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단다. 남자나 여자나 되시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나, 미혼이든 기혼이든 독립해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만 한단다. 결혼하고 가족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면 직업은 선택인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단다. 처음엔 월세도 가슴 뛰는 행복이지만, 시간이 가며 전세가 필요한 이유가 넘쳐 나고, 자가 주택이 필요한 이유가 너무도 많아진단다. 은행 융자금이 집값의 반이 넘어도 생애 처음으로 '우리 집'을 장만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단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 없는 인생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오십이 되며 깨닫는단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아내 혼자 병원에 보내 놓고 상사 눈치가 보여 외출도 못하고 회사에서 끙끙 대고 있었던 이유,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니는 6년 동안 여섯 번의 운동회가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참석하기 못했던 이유,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도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 일주일에 단 하루 일요일도 한 달에 겨우 두 번밖에 쉴 수 없었던 이유, 휴일이면 놀러 가자는 아이를 내치고 피곤함에 잠만자야 했던 이유가 있단다. 힘들지만 월세를 지나고 전세를 지나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 그동안의 미안함과 소홀함을 다 이해받고 박수받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멋진 차와 아파트만 있으면 그동안의 소원함을 메워 줄 거라고 생각했단다.
재화만사성,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줄 알았단다. 행복에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많은 것을 희생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회사가 1순위, 가족은 2순위, 내 꿈은 3순위가 되어 나이 오십을 맞이했단다.
오십이 넘으면 재화만사성이 아니라 가화만사성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단다. 돈이 있으면 삶이 편안하기는 하겠지만 모든 게 해결되진 않는단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는 오래된 격언이 더 가까이 다가온단다. 가정이 화목해지려면 먼저 근자열이 되어야 한단다. 가장 먼저 배우자와 화목해야 한단다. 아이들과 문제가 없어야 한단다.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자매들의 우애가 있어야 한단다. 그 모두가 마음처럼 쉽지 않단다.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죽을 것 같이 보고 싶어 결혼한 사람도 수십년 화목하기가 결코 쉽지 않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 때문에 남몰래 눈물 흘릴 때가 많단다. 언제나 곁에서 지켜 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그동안의 불효에 가슴이 미어진단다. 좋았던 형제간의 우애도 유산상속의 갈등을 거치면서 서먹서먹해지기 쉽단다.
재화반사성이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반밖에 되지 않는단다. 돈이 다가 아니었다는 걸 나이 오십이 되면 알게 된단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형제는 형제대로 인생을 살아간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월급이 하느님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모두 이해한단다. 하지만 공허가 찾아오는 것 또한 사실이란다.
의 좋았던 형제들도 부모 장례식이 끝나면 서서히 갈라지는 모습을 자주 본단다. 마음속으로야 우리 형제들은 다른 집안의 형제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상속 문제가 현실이 되면 별수 없다는 걸 깨달으며 인생이 쓸쓸해진단다. 돌아서면 후회하지만 돈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자신을 보며 힘없이 삶을 되돌아본단다.
남편이 화를 내면 아내가 불편해진단다. 아내가 화를 내면 남편 역시 불편해진단다. 누가 화를 내든 아이들은 몇 배 더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화를 내며 출근하면 회사 일이 엉망이 된단다. 부부과 화목하면 가화만사성이란다. 부부가 화목하면 재화반사성이란다. 오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단다.
색과 냄새가 좋지 않거나 익히지 않은 건 먹지 않았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논어> 향당편에는 공자의 평소 생활 모습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단다. 2500년 전 모습을 마치 파노라마 영상처럼 보여 주고 있단다. 공자의 식습관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단다. 공자께서 대사구라는 고관으로 삶을 누렸던 짧은 기간의 기록으로, 공자의 까다롭지만 건강한 식습관을 엿볼 수 있단다. 당시 공자가 비교적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엔 철저한 식습관이 자리하고 있단다.
- 밥은 정제한 쌀로 지은 것을 즐겼으며, 회는 가늘게 썰어 드셨고, 쉰밥과 상한 생선, 부패한 고기는 먹지 않았단다. 빛깔과 냄새가 좋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잘못 조리되었거나 때 아닌 음식은 먹지 않았단다. 바르게 자르지 않은 음식은 멀리 했으며, 어울리는 장이 없으며 먹지 않았단다. 고기는 많이 먹었으나 밥의 기운을 이기지 않게 했으며, 술은 정해진 양 없이 마셨으나 어리러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단다. 시장에서 산 술과 포는 먹지 않았고, 생강은 물리지 않았단다. 음식은 적당하게 먹고 과식은 하지 않았단다. 나라에서 받은 제사 음식은 밤을 넘기지 않았고,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았는데, 그 이상 넘기면 상하기 때문이란다. 음식 먹을 땐 대화를 피했고, 잠자리에선 말을 하지 않았단다. 비로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공경한 마음으로 고시레를 했단다.-
당시 73세까지 정수했던 공자의 식생활을 잠깐 엿보았단다. 2500년 전에도 그렇게 까다롭게 식습관으로 관리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단다.
평균 수명은 늘어도 삶의 질은 크게 좋아지지 않는단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단다. 일상이 되어 버린 미세먼지의 습격,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황사와 모래바람, 여름엔 냉기로 겨울엔 온기로 꽉 막힌 실내 공기, 도시 매연, 전국의 강에 퍼진 녹조, 매년 더 뜨거워져 적용하기 힘든 기후, 끝을 모르는 상하 간의 갈등, 더 깊어만 가는 빈부 격차, 점점 예빈해지는 감정, 업무 스트레스와 인간관계 스트레스, 해결점이 없는 불평등한 사회 증폭되어 가는 분열, 가정 폭력과 성폭력, 광분하는 가짜 뉴스, 지식인의 부정과 사회적 리더들의 부패 등 벗어나기 힘든 스트레스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단다.
세계보건기구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의 균형이야말로 온전한 건강'이라고 정의했단다. 오십이 되면 건강의 적신호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단다. 사회적 건강의 적신호가 가장 먼저 커진단다. 오십이면 많은 이가 조직에서 물러나거나 밀려난단다. 정년퇴직까지 버틴다고 해도 육십 즈음에 결국 떠난단다. 사회적 연결에서 멀어지니 정신적 건강에도 문제가 발생한단다. 그간의 대우와 인정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스스로 격을 따지고 권위를 바라는 보수가 된단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며 정신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결국 육체적 건강까지 악화되는 악순화의 소리가 시작되기 쉽단다. 평균 수명과 평균 건강 수치가 아무리 높다 해도, 거기에서 벗어나 있다면 공허한 숫자에 불과하단다.
오십이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숙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건강이란다. 당장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 꼭 챙겨야 할 과제가 바로 건강 문제란다.
폐족이 된 이후 방황하고 있는 아들에게 다산은 편지를 썼단다.
- 파손되거나 찢어진 것을 가지고 어루만지고 다음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바야흐로 그 공덕을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여야 훌륭한 의원이라고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해야 이름난 장수라 일컫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아치의 자제들이 좋은 옷과 멋진 관을 쓰고 다니며 가문의 이름을 떨치는 것은 못난 자제라도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
인생이 오십 고개에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잘난 집안의 자손들처럼 극소수일 거란다. 부자가 부자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러니 그게 더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일 거란다.
처음부터 자신만의 길을 걸어 전문성을 높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십이 넘어서도 건강을 유지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 한 분야에 획을 그을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도 없을 거란다. 그야말로 공자께서 나이 먹는 것도 잊을 만큼 몰입하게 만든 재밌는 일일 거란다.
조직을 떠나는 요즘 50대를 다산 선생이 봤다면 '풍요롭게 인생 후반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면서 행복한 인생 후반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일 거란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여야 명의라 불리고, 위기에서 일어나 멋진 결과를 만들어 내야 훌륭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거란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부를 이루고 가문의 이름을 떨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가능한 일이란다. 준비한 것도 없이 밀려 퇴직한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된다면 기특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 거란다.
고환이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라는 역사서를 펴낸 동양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 유배지에서 18년이나 보냈지만 조선 최고의 학자로 우뚝 선 다산 정약용, 그리고 오십이 넘어 제주도 유배 갔던 추사 김정희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극한의 생활속에서도 '추사체'로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이름을 떨쳤단다.
맹무백이 효에 관하여 여쭤보자 공자께서는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한다" 하셨단다.
KBS <인간극장> '고향에 살고지고' 편에서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대소변을 못 가린다고 하더라도, 못할 거 아니지 않나요. 그걸 자식이 치워야지 누가 치우겠어요. 집으로 요양보호사가 오시지만 나는 절대 그분에게 처리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하지. 우리 아버진데, 사실 이렇게라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 봐야 10년, 그렇지 않으면 5년, 그 기간도 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가서 내가 얼마나 가슴 칠 것인지 불 보듯 뻔해요. '나를 힘들게 했얻 그때가 좋았는데...' 하며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부모님은 막 모질게 해도 그렇게 원망스럽지 않아요. 이런 대화 내용이 나온단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문상 가는 일이 부쩍 많아진단다. 직장 동료나 친구의 부모님 초상이 대부분이란다. 저자의 아버지, 어머니, 장모님께서는 모두 한해에 돌아가셨단다. 50대 초반 어느 해, 순서라도 정해 놓은 듯 여름 가을 겨울에 한 분씩 떠나가셨단다. 오십은 자신의 천명을 아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천명을 다하고 돌아가시는 어른들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때이기도 하단다. 언제나 자식이 먼저였던 부모였단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자식은 부모가 늘 먼저가 아니었음에 깊은 후회를 한단다.
몸 관리가 부실했던 제자 맹무백이 효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너무나 간명했단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아브지 않을까만 걱정한다는 것이었단다. 노라라 대부의 아들이었던 맹무백은 몸이 뚱뚱했다고 한단다. 그러니 공자께서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 효가 그리 머리 있지 않다는 것을 이른 말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첫 번째 걱정은 자식 걱정이란다. 자식이 뛰어난 특기를 갖는 것도, 훌륭한 학교로 진학하는 것도, 우등상을 받는 것ㄷ, 좋은 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그다음이란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건강한 몸을 보존하는 게 부모에겐 첫 번째란다.
<논어>에 기록된 '효'에 관한 몇 구절을 비춰 보면, 2500년 전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일렀던 '효'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단다.
- 때를 거러지 않고 부모님에게 식사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란다. 술과 음식을 부모님께 먼저 드시게 한다고 하여 효라 할 수 있겠는가? 공경하는 마음이 빠진다면 개와 말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혹여 부모의 잘못이 있을 때는 완곡하게 말씀을 드려야 하며,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해도 가능하면 그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또한 자식은 화난 얼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화난 얼굴로 일하고 있는 자식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집을 나서기 전에 어디를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를 말씀드려야 하며, 돌아와서는 잘 돌아왔다는 것을 꼭 알려야 한다. -
살신성인의 효를 칭송했던 조선 시대의 문화가 있었지만 사실 공자께서 말씀하신 효의 개념은 일상의 문제였고 누군 행할 수 있는 마음의 문제였단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이 두신 부모님 가까이서 모실 자식이 없다시피 하단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병든 부모의 경우 더욱 그렇단다. 장남 장녀도, 차남 차녀도, 며느리도 사위도, 손자 손녀도 누구하나 선뜻 나서 병든 부모,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란다. 마음이 없어서라기보다 매일매일의 삶이 무겁기 때문이란다.
늙고 병든 부모를 병원에 눕혀 놓고, 형은 동생을 동생은 형을 바라보면서 서로 핑계만 댄단다. 서로 원망하면서 눈치만 본단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외롭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게 일상이 되어 간단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2~3일 내 전광석화처럼 초상을 치르고, 삼오제도 마치기 전에 유산 싸움에 돌입한단다. 장남은 장남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그동안의 공적을 들이대며, 결국에 법적 잣대까지 들며 소리친단다. 부모와 이별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형제자매들과의 이별 아닌 이별이 시작된단다. 남보다 더한 깊은 애증의 상처가 터진 후에야 잠잠해진단다. 부모도 잃고 형제도 잃으며 그렇게 50대가 넘어간단다. 적지 않은 50대가 그 슬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단다.
전설처럼 되어 버렸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많은 이가 거행했던 삼년상의 유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논어>에서 공자와 제자의 대화를 통해 전하면,
"삼년상은 기간이 너무 길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파괴될 것이고, 3년 동안 음악 연주를 하지 않으면 음악이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햇곡식이 등장하며 나무에 구멍을 뜷고 마찰하여 새로운 불을 얻게 되는 기간이니 1주기가 지나면 복상을 그만두어도 될 것입니다. " 공자께서 "3년이 지나기 전에 쌀밥을 먹고 솜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는 편안하냐?" 라고 되물었습니다. 재아가 편안하다고 대답하자. 공자께서 "네가 편안하연 그렇게 하여라, 대체로 군자는 상중에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집 안에 가만히 있어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재아가 나가나 공자께서 말했습니다. "재아는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연후에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기에 대체로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적인 상례이거늘 재아는 태어나 3년 동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않았단 말인가?"
<명심보감>에도 이런 대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단다.
- 어린 자식의 똥오즘은 마음에 전혀 거리낌이 없으면서, 늙은 부모님의 눈물과 침이 떨어지면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데, 육칙 그대의 몸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로 그대의 몸이 만들어진 것인즉, 그대에게 권하노니 늙어 가는 부모님을 공경하고대접하라. 젊었을 때 그대 위해 살과 뼈가 닳았느니라. -
내 무모도 마음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 현실을 그냥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란다.
공자께서 "빨리하려고만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고 하지 마라, 빨리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다 보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단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거보'라는 지역의 읍재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 공자께서 정치란 빨리빨리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작은 이익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단다. 그 이유는 아주 명료하단다. 빨리하려고 하면 목표를 달성하겠지만 원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작은 이익을 돌보게 되면 큰일을 달성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시작하는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단다. 처음에는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호언장담하지만, 용두사미로 그치기 일쑤란다.
조직의 리더들도 비슷하단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 전임자를 비판하며 호기롭게 시작하지만, 전임자보다 더 초라한 모습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거나 사사롭고 작은 이익에 눈을 돌리기 때문이란다. "서두러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돌보지 말라"는 공자의 조언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란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이 대체로 그러하단다.
공자는 오십이 넘어 그토록 바랐던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단다. 처음엔 '중도재'라는 작은 읍의 읍재가 되었단다. 이후 '대사구;로 발탁되어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단다. 정치로 노라라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천명으로 받아들인 거란다. 그래서 일흔이 되어 그간의 삶을 회고하며 오십을 '지천명'이라 한 것이란다.
쉼 없이 달리면 먼저 도착할 줄 알았단다.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단다. 먼저 도착하면 더 많이 쉴 수 있고, 더 즐거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오십이 되었단다. 오십이 되어 돌아보니 인생은 쉼 없이 달린다고 먼저 도착하는 게임이 아니었단다. 먼저 도착한다고 해서 더 많이 쉴 수 있고 더 많이 즐거운 것도 아니었단다. 앞만 보고 달렸지만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단다. 원하는 쪽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되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단다. 그러던 중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 달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단다. 남들처럼 달렸ㅇ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단다.
지난 20년 동안 바다를 마음 편히 바라본 경험도, 새싹 같았떤 아이들과 함께 그 흔한 풀밭을 한번 자유롭게 뛰어 본 경험도 없단다. 열심히 일하면 다 가능하리라던 그 확고한 신념 때문에,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아내의 30대 시간이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한 채 지워졌단다. 아이들의 10대가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다. 가족과 함께해야 했던 젊은 날의 기억 속엔 별로 남은 게 없단다. 출근 퇴근 출근 퇴근하며 출퇴근을 반복했지만, 그 출퇴근조차 기억에 남는 게 없단다. 가장 젊고, 가장 아름다웠던, 그리고 가장 생생해야 했던 지난 20년의 시간이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단다. 피치 못할 일로 1년에 한두 번낼까 말까 하는 월차도 자유롭게 용납하지 못한 채 마음 졸이며 20년을 하루처럼 출근했던 이유는, 시간과 돈의 자유를 하루라도 빨리 얻기 위한 치열함 때문이었단다. 옹골차게 돈을 모아서 자유럽게 쓸 수 있는 시간을 사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시간의 자유가 생겨야 가족과 함께 즐거운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단다.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저자도 그 길을 가는 것에 어떤 의심도 하기가 쉽지 않았단다.
오십이 되어 되돌아보니, 왔던 그 길에 의문이 든단다. 그렇게 오십이 되도록 돌아보지 않고 달렸지만,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란다. 돈을 따라 뛰었던 지난 20년이 도리어 인생의 귀한 시간을 낭비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오십, 이제 방향을 고민해 본단다. 숨 막히게 달려온 경쟁의 시간, 속도를 줄이고 인생 후반의 목표를 생각해 본단다. 오십에 명예퇴직을 받아들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인생이 꺾일 만큼 치명적인 건 아니란다. 육십에 정년퇴직을 받아들인다는 게 허전하고 크고 작은 상실감을 가져올 수 있지만, 새로운 도전을 꺾일 만큼 강력하지 않단다. 오십, 육십을 넘어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해도, 미래에는 희망을 꺾을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단다. 일과 연봉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미뤘다면, 퇴직은 기회란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찬스란다. 직장 일에 열중하다 보니 책을 멀리했다면, 퇴직은 기회란다. 시간적인 여유로 마음껏 독서를 할 수 있단다. 지금까지는 먹고 사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만족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단다. 내가 만족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조금 더 장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단다. 화려한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미래는 장담할 수 있단다.
건강하게 구십까지 산다면 오십, 육십은 그렇게 고민할 나이가 아니란다. 혹여 지금까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단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살아온 20년만큼이나 긴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인생의 마지막 날만 기다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란다. 어느 노 교수의 회고처럼 큰 후회가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란다.
- 나는 존경과 박수를 받으며 60대 초반에 자랑스럽게 은퇴했지만, 90세가 되었을 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 30년의 삶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때문이었다. 육십 이후의 인생을 마치 덤으로 살았던, 희망 없는 시간이 30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
공자께서 말씀하셨단다.
"함께 배울 수는 있지만 모두 도를 행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함께 도로 나아갈 수는 있어도 모두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모두 권도를 행할 수는 없다"
대입 수험생이라면 전공과 학교 선택을 두고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단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점수에 근거해 학교와 전공을 선택한다 해도 고민이 끝나는 것은 아니란다. 학교와 전공의 중요성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스무 살의 선택이 다시는 바끌 수 없는 인생의 최종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는 것이란다. 물론 스무 살의 선택이 중요하단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모두 마뀌는 건 아니란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취업이라는 또 한 번의 인생 고민에 맞닥뜨린단다. 그동안 공들이 전공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 내기가 어렵단다. 첫 번째 직장의 중요성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전공이 같아도 가는 길은 다양하다는 것도 차차 알게 된단다. 이를 테면, 전자공학을 전공하고도 공직자가 되기도 하고 배를 타는 선원이 되기도 한단다.
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직과 이직을 생각하기 마련이란다. 일 잘하는 사람은 헤드헌터로부터 달콤한 러브콜을 받곤 한단다. 더 좋은 연봉과 조건을 들이대며 적을 옮길 것을 권유한단다. 일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라도 지금의 조직에서 떠나고 싶어 한단다.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해 보고 싶은 욕심이 들기 때문이란다.
적성이 다를 수도 있고 상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단다. 호시탐참 기회만 엿보기도 한단다. 동일 직무를 유지하면서 직장을 옮기는 이직과 그간의 직무 자체를 바꿔 가며 직장을 옮기는 전직을 반복한단다. 이직과 전직의 특징 중 하나는, 한 번 시작하면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단다. 첫 직장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함께 시작한 입사 동기들과 언제까지 함깨 동고동락할지 할 수 없단다. 10년, 20년, 30년을 함께할 수도 있지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오십, 육십에 깨닫는단다. 사십에 떠나든 오십에 떠나든 혹은 정년퇴직을 하고 떠나든 언제가든 조직을 떠나야 한단다. 사십에 떠나면 40년, 오십에 떠나면 30년, 육십에 떠나면 20년은 더 일해야 한단다. 불혹의 나이에 이직과 전직을 시작하면 몇 번을 더 옮겨야 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게 최선이라면 다른 방법은 없단다.
이직과 전직 없이 첫 직장에서 은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특히 공조직이 아닌 사조직에서의 정년퇴직이란 꿈같은 일이 되었단다. 불혹의 갈등 시기와 지천명의 50대를 지나 이순에 정년퇴직을 할 수 있다면 겉보기에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 말리는 경쟁의 연속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단다. 함께 시작한 입사 동기라 해도 업무가 다 같은 건 아니란다. 어떤 동기는 인사에서, 어떤 동기는 영업에서 시작한단다. 4년이 지났다고 모두 대리가 되는 것도 아니며, 8년이 지났다고 모두 과장이 되는 것도 아니란다. 함께 승진한 과장이라고 모두 본사에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며, 어렵게 부장 승진 동기가 되었다고 모두 임원이 되는 것도 아니란다.
기업이 매년 성장한다는 보장도 없단다. 국내외 경제 환경은 단 한해도 문제없이 넘어가지 않는단다. 그 모든 악조건을 이겨야 부장은 임원이 되고 여려 임원 중 다 한명의 CEO가 된단다. 그러니 어떤 동기는 대리 승진에 탈락해 이직하고, 어떤 동기는 과장 승진헤 막혀 전직하고, 어떤 동기는 부장 승진에 고배를 마셔 퇴직 후 자영업을 하고, 어떤 동기는 임원으로 몇 년 일하다 퇴직하고 후 사업을 한단다. 동기 중에서 단 한 명만이 권도를 잡게 된단다.
공부하는 단계, 시작하는 단계, 두각을 나타내는 단계, 최고가 되는 단계를 공자는 말했단다. 학교라는 교육 시스템 속에서 함께 배웠다 해도, 졸업 후 모둔 같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란다. 혹여 잩은 길을 간다고 해도, 모두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게 현실이란다. 혹여 여러 명이 두각을 나타낸다 해도, 모두 최고의 권위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역시 현실이란다.
모든 분야가 비슷하단다.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모두 정치의 길을 가는 건 아니며, 정치를 란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정치인으로 서진 못한단다. 훌륭한 정치인이 된다고 해서 모두 대권을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단다.
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단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가 3천에 달했다고 하지만, 그중 현자에 다다른 사람은 72현(賢), 10철(哲)을 포함한 핵심 제자 15명 전후이고 후대에 동양 5성으로 꼽히는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가 있단다.
세상에 그 누구의 인생도 헛되지 않았듯, 그 어떤 경력도 무가치하지 않단다. 졸업 후 전공과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게 잘못은 아니란다. 조직에서 열심히 일하다 이직과 전직을 하는 게 잘못은 아니란다. 과장이나 부장 승진에서 탈락한 게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단다. 임원이 되지 못하고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고 삶이 무너지지 않는단다. 원하는 길로 들어서 원하는 걸 얻고 원하는 힘을 얻어 사는 것도 좋은 인생이지만, 원하는 길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길을 찾고 또 원하는 걸 얻지 못했지만 가치 있는 걸 만들면서 힘을 얻진 못했지만 행복과 지혜를 얻었다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란다.
세상의 삶이 모두 다르지만 우열을 나타내지 않는단다. 어차피 똑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단다. 공자 시대도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어떤 위치에 몰려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가치를 만들고자 노력하느냐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만드는 기술이란다.
공자께서 증삼에게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가 "네"라고 답했단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물었단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증자가 말했단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뿐이다"
일흔이 넘은 공자가 자신의 삶을 "나의 길은 하나로 꿰어져 있다. 나는 일관된 길을 걸어왔다.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지금까지 일관되게 걸어왔다. 그것을 단 두 글자로 요약한다면. 바로 충(忠)과 서(恕)다" 이렇게 요약했단다. 공자는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일관된 도를 '충'과 '서'로 요약했단다. 자신이 맡은 일에는 충심을 다하고, 타인에게는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거란다. 충은 중심으로, 어떤 일을 할 때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마음이란다. 서는 여심(如心)으로, 상대와 내가 같이하는 마음이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충심과 성의를 다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타인에게는 배려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란다. 내충외서(內忠外恕)의 마음이란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온유한 내강외유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단다.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나의 길에는 일관성이 있다는 뜻인데, 서른의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와 오십의 '오도일이관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단다. 서른에 듣는 '오도일이관지'는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단다. 인생 청사진에 새겨질 분명한 '나의 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란다. 다가올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변경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가고 싶은 분명한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서른엔 길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단다. 길은 있으나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단다. 길은 시작되었으나 계속 가야 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단다. 취업이라는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에 치여,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어려울 수 있단다. 그리도 서른은 희망이란다. 시간을 이기는 건 세상에 없기 때문이란다. 오십에 불가능하지만 서른엔 가능한 게 바로 시간이란다. 그래서 서른에 그 길을 생각하고 꿈꿔야 한단다. 생각하고 꿈꾼다고 모두 이룰 수 있는 것 아니지만, 꿈꾸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단다.
오십에 듣는 '오도일이관지'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단다. 누구나 50여 년 살다 보면 뒤를 돌아보게 된단다.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가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단다. 일관성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대 초반에 어떻게 하다 보니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고, 쉽지 않았지만 결국에 취업하여 나름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덧 오십이 된 거란다.
지금까지의 삶과 여정이 마음에 들고 흡족했다면, 앞으로도 계속 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면 된단다. 그게 일관성을 지키는 일이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아쉽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일관된 인생을 살았다는 공자의 '오도일이관지'가 새롭게 다가오게 된단다.
열심히 살았지만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인지, 뼈 빠지게 노력하며 살았지만 누구를 위해 산 것인지, 당당하게 살았지만 누구를 위한 당당함인지, 가족을 위해 살았다지만 정말 그게 다인 것인지, 50년을 살았는데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지, 그 어떤 것도 정의되지 못한 채 흔들리는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단다. 만약 서른에 인생의 뜻을 세웠다면 20년이 지난 오십의 자신은 분명 덜 흔들리고 있을 거란다. 마찬가지란다. 오십에 '오도일이관지'를 시작하지 못한다면, 또 20년이 지나 칠십에도 계속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단다.
오십에 조급하다는 건 그래도 희망이란다. 오십에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단다. 무엇을 정한다는 건 그것 이외에 대부분은 포기한다는 말이란다. 지금까지 일관성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건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는 걸 의미한단다. 아무리 바빠도 술 마시고 싶으면 술 마실 시간을 내고, TV 볼 시간은 있어도 책 읽을 시간은 내지 않는단다. 육아에 가정생활에 대체하기 어려운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단다. 하루하루 버거운 시간을 보내며 일관성 있는 인생을 생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단다. 그러니까 오십은 더 희망적이란다.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는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란다.
오십은 시작하기 좋은 나이란다. 스물의 미숙함, 서른의 치열함, 마흔의 흔들림도 줄어든 오십은 일관성 있는 일을 지작하기에 좋은 나이란다. 어떤 일을 오십부터 칠십까지 20년 동안 계속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오십부터 구십까지 40년을 한다면 어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그 일을 하기에 오십은 정말 최고의 시기란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면 어떤 일이든 선택하여 시작하면 된단다. 경제적으로 불안하다면 지금의 경제 활동을 지속하면서 주말이나 여유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 된단다. 물론 주업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앞으로 20년 혹은 40년 동안 할 일이기 때문에 초기에 조금 덜 집중해도 큰 문제는 없단다. 중요한 건 선택에 있단다. 그래서 칠십이 되었을 때 우리도 당당하게 '오도일이관지'를 외츨 수 있길 기대해 본단다.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지금까지 일관되게 걸어왔다고.
공자께서 "싹은 트였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셨단다.
수제사였던 안연이 죽었을 때 공자께서는 "내가 이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애통하겠느냐? 슬프다.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나를 망쳐 버리는구나"고 하셨단다.
공자는 안희를 그 누구보다 아꼈고 안희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그 누구보다 앞장섰단다. 공자는 안희를 가르켜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그가 멈춘 것은 보지 못했다. 앞에서는 별말이 없어 어리석은 듯 보였으나 물러난 뒤 그의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배운 것을 충분히 실천하는 모습이 매우 현명하다"고 말했단다. 제자 중에 배우기를 가장 좋아했던 이도 안희였고, 가장 어진 제자도 안희였단다. 안희는 안빈낙도의 대명사였단다. 그런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한탄했던 것 같단다.
"싹은 트였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웠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구나"
어려서 총명했으나 커서 눈에 뜨지 않는 경우가 있단다. 입학은 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졸업은 했으나 취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단다. 취업은 했으나 승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승진은 했으나 임원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단다. 임원은 됐으나 댚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대표는 됐으나 명예롭지 못한 경우가 있단다. 사업은 했으나 5년을 넘기지 못하는 수가 있고, 5년은 넘겼으나 손해를 보는 수가 있단다. 수익은 발생하나 성장이 어려운 상황에 몰리기도 한단다. 서른에 이립은 하였으나 마흔에 불혹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고, 마흔에 불혹은 하였느나 쉬에 지천명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단다. 쉰에 지천명은 되었으나 예순에 이순이 어려운 경우가 있고, 예순에 이순은 되었으나 일흔에 마음 둘 곳이 없는 경우도 있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단다.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은 없다고 했단다.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따뜻하게 꽃잎울 피웠듯 젖지 않고 가는 삶은 없다고 했단다. 인생이 꽃을 피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싹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트이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많은 것을 이겨 내야 가능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단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건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닙니다. 인연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자신의 의지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늘의 영역으로 돌려,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옛사람들이 말했는지도 모른단다.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건 다 그만한 가치가 있단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시작에는 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란다.
사십은 꽃을 피우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단다. 가장 왕성하게 노력하는 시기,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40대가 인생의 아름다운 꽃이 될 가능성이 높단다. 경제적으로 수입이 가장 많은 시기, 가장적으로도 활기가 가장 넘치는 시기, 직장에서도 승진하기 가장 좋은 시기, 신체적으로도 활기 왕성한 나이, 사회적으로도 인정 받기 좋은 시기로 인생의 꽃을 피울 가장 좋은 시기가 바로 불혹의 40대인 듯하단다.
열매 맺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50대가 아닐까 한단다. 꽃이 핀다고 바로 열매가 맺어지는 건 아니란다. 열매는 자리고 익어 가는 시간이 필요하단다. 기다리지 않고 맺는 열매는 없단다. 이 세상 그 어떤 달콤한 열매도 다 기다리면서 익었단다. 여름과 겨울을 기다리면서 천 년 향기를 만들었단다. 기다리지 않고 맺는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역할을 다해 가는 것만으로도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싹은 트였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꽃은 피웠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무엇을 함의하고 있을까? 싹으로 트였으면 꽃을 피워야 하고 꽃을 피웠으면 당연히 열매까지 맺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을 거다. 누구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면 누구든 당연히 꽃 피고 열매 맺기를 바랄 거란다.
오십에 서서 그간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의 열매를 맛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잠깐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한단다. 이때야말로 인문학의 힘이 필요하단다. 역사, 문학, 철학, 고전의 도움이 필요할 때란다. 오십은 인문학을 공부하기에 참으로 적당한 시기란다.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란다.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책을 읽는 50대의 독서가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란다.
옛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게 역사란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가? 그게 문학이란다.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아가는가? 그게 철학이란다. 누구에게나 적용해도 좋을 오래된 지혜가 담긴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게 고전이란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 앞에서 싹은 트였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수가 있고 꽃은 피웠으나 열매 맺지 못할 수도 있다며, 공자는 안타까워했단다. 2500년이 지났지만 공자는 지천명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말하고 있단다. 꽃을 피웠으면 제발 열매까지 맺어보자고.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음에 드는 열매를 님기기 위해서라도 50대를 잘 보내야 한단다. 억울해서라도 한 번 더 힘을 내고 도전할 수 있는 나이가 50대라 한단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면 더 가치 있는 지산과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한 번 더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 50대란다.
자공이 군자에 관하여 여쭤 보자 공자께서
"먼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행하고 그다음에 타인으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라 말씀하셨단다.
<논어>에는 군자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등장한단다. 제자들의 수양과 성향에 따라 공자가 제시하는 군자의 정의가 달랐단다. 자공은 공문십철, 사과 증 언어 쪽에 특별한 재주가 있다고 평가받은 제자란다. 열국을 뛰어다니며 노나라의 안위를 위해 훌륭한 외교술을 펼쳤으며 공자 사후 제나라에서 재상을 역임했단다. 공자가 보기에 자공은 말이 행동에 앞섰단다. 자공이 군자에 관해 묻자 "자기 스스로가 먼저 실천해 본 다음 그 결과를 바탕으로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했단다.
인도의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와 함께 간디를 찾아갔단다.
"선생님, 저의 아이에게 설탕을 좀 적게 먹으라고 타일러 주세요. 저희 아이가 선생님을 매우 존경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를 것 같습니다.
간디는 잠시 생각하더니 3주 후에 다시 오면 그때 말해 주겠노라고 답하고 두 모자를 그냥 돌려보냈단다. 어머니는 좀 의아했지만 3주 후에 다시 간디를 찾아가 같은 부탁을 했단다. 그때서야 간디는 "예야, 설탕을 많이 먹으면 몸에 해롭단다. 설탕을 좀 줄이렴" 하고 말했단다. 의아스습게 생각하는 아이 어머니에게는 "사실은 저도 설탕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3주 정도 시간을 들여 줄일 수 있는가를 시험 삼아 해 보았는데, 설탕을 줄일 수 있어서 오늘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단다.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단다. 행동과 실천이 어렵지, 옳은 말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훈수는 누구나 쉽게 둘 수 있단다.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훈수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댓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본문을 쓰는 게 어려운 일이지, 본문을 읽고 자기 생각이나 비판을 몇 자 적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정책을 연구하고 수립하여 바르게 실행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 그 결과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그러니 비평과 비판을 앞세우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며, 실천과 행동을 앞세우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거란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란다. 문제로 보면 문제가 아니 게 없는 우리의 삶이란다. 하루하루 문제 없는 날이 없는 게 인생이란다. 50대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란다. 10대부터 90대까지 문제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단다. 우리의 삶은 단 한숙난도 실체가 아닌 게 없단다. 말로만 되는 삶은 단 한순간도 없단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삶이 쉽지 않단다. 쉽지 않은 삶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드는 건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단다.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이 성과를 만들기 때문이란다.
50대에게도 마찬가지란다. 오십은 인생의 하프타임이란다. 살아온 만큼 더 살아갈 수도 있는 인생의 반환점에 서 있단다. 인생 전반전의 실수를 거울 삼아 인생 후반전을 계획해야 한단다. 인생 전반이야 처음 알아 보는 경험이라, 마음대로 하는 것도 어려웠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도 만만치 않단다. 하지만 인생 후반은 조금 다르단다. 50년이라는 경험의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란다.
지난 50년이 삶을 성찰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단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뭔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삶의 원칙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동경은 있었지만 정말 열정을 가지고 몰입했던 때가 얼마나 되었는지, 지식 기반의 사회를 살아가며 학교 학습이 끝난 다음에도 어떤 평생학습을 하면서 지식과 지혜를 쌓았는지, 욕심과 품위의 갈등 속에서 어떤 교양을 유지하며 살아왔는지 성찰해 보는 시간이 하프타임에 필요하단다.
지난 50년의 삶을 되돌아보며 삶의 균형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단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균형 있게 사는 삶이며, 어떤 삶의 태도가 성숙한 삶의 모습인지를 알아야, 인생 후반에 적용해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목표에 대한 의지는 언제까지 필요한지,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어떤 것들인지, 삶의 품격을 높이는 방법에는 어떤 게 더 유효한지를 사려해 보는 하프타임이 필요하단다.
오십은 마무리를 준비하는 때가 아니라 앞으로 50년을 위한 용기를 가져야 할 때란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간절함도 필요하지만 50년이 더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도 필요하단다. 꾸준함과 반복은 성공적인 인생을 만드는 가장 오래된 비밀이란다. 인생 후반에도 마찬가지란다. 삶의 희극과 비극을 가르는 건 분명한 목표란다. 포기와 결심에도 용기가 필요하단다. 한 개를 선택하는 건 아흔아홉 개를 포기하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란다. 다시 한 번 희망의 목표를 세우고 간절히 집중하여 인생 후반을 만들어가야 할 때란다.
오십은 전략과 말이 아닌 전술과 행동이 필요한 시기란다. 목표를 선택하는 기술을 통해 미래의 강점을 선택하고, 강점을 강화하는 구체적인 전술을 통해 실천해 가야 한단다. 말이아닌 행동으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줘야 한단다.
2강. 성찰
공자께서는
"군자는 자기에게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라 말씀하셨단다.
공자보다 약 70여 년 전에 태어나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단다. 그러면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단다. 현실주의자 공자께서도 말했단다. '군자는 잘못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 노력하지만, 소인은 타인에게서 찾으려 한다'고 했단다.
리더는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으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는 말이란다. 타인을 책망하거나 원망할수록 발전은 멀어져 간단다. 스스로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점점 뒤처지게 된단다. 부부의 자리에 서면 배우자를 탓하고 형제의 자리에 서면 형제자매를 탓한단다. 팀장의 자리에 서면 팀원을 탓하고, 팀원의 자리에 서면 팀장을 탓한단다. 사징은 직원을 탓하과 직원은 사장을 탓한단다. 운전석에 앉으면 보행자를 탓하고, 보행자의 위치에 서면 운전자를 탓한단다. 선생의 위치에 서면 학생을 탓하고, 학생의 위치에 서면 선생을 탓한단다. 고객의 입장에 서면 점원을 탓하고, 점원의 입장에 서면 고객을 탓한단다. 어른은 아이를 탓하고, 아이는 어른을 탓한단다. 사람의 본능일지도 모른단다.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다면 누구 때문일까?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또한 누구 때문일까? 나이 오십에 이 질문에 대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단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만들어질 나도 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란다.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든다면 굳이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대답해야 한단다. 과연 그 원인이 나였는지 아니면 타인이나 외부 조건에 있었는지 말해야 한단다. 지금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고 싶기 때문이란다. 부모든, 형제든, 상사든, 친구든 마찬가지란다. 지금 누구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싶다면 약해졌다는 걸 의미한단다. 역시 부모든, 형제든, 상사든, 친구든 마찬가지란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단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한다면, 주지 않으면 굶어야 한단다. 일도 수입도 마찬가지란다. 주어진 일만 하다가는 언젠가 일이 없어진단다. 주는 대로 받기만 하면 언젠가는 수입이 끊어진단다. 회사 다닐 때는 주어진 일만하고 주는 월급만 받았단다. 주어진 일과 고정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불평불만이 많았다낟. 가능하면 일을 적게 하고 쉬는 시간은 늘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일이 조금만 많아져도 상사를 욕하고 동료들과 얼굴을 붉히고 했단다. 그러니 일이 손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경력이 쌓여도 업무의 전문성은 연차에 비례하지 못했단다. 가끔 업무 성과가 좋으면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했고 업무 성과가 떨어지면 동료들과 상사의 협조나 지원이 덜해서라고 생각했단다. 그런 생각과 직장 생활의 패턴이 20년이라는 기간을 거치면서 고착되었다는 것을 퇴직 후 사업할 때쯤 알게 되었단다. 열 명도 안되는 작은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면서 실감했단다. 선배들의 조언과 독서를 통해 대표이 역할을 예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의 습관과 생각을 바꾸기 어려웠단다. 조금만 일이 어긋나도 '내가 사장인데' 그정도는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하거나 해결해야지 하면서 기다리곤 했단다. 하지만 열에 여덟은 해결되지 않았단다. 그러니 겉으로나 속으로나 직원들이 미워지기 시작했고 회사 매출은 점점 떨어져만 갔단다.
정상을 돌아오기까지 충분한 수업료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단다. 결론은 간단했단다. 문제의 원인이 직원이 아니라 그에게 있었다는 거란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직원들도 움직이지 않는단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직원들은 능력의 반도 하지 않는단다. 그가 문제를 풀려고 사방으로 뛰지 않으면 직원들은 단 한 발자국도 뛰지 않는단다. 그가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직원들은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보내면서도 불평불만만 이야기한단다. 그가 전 직장에서 가졌던 생각과 행동을 그의 직원들도 똑같이 하고 있단다.
원망과 핑계가 사람의 본성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삶의 필수 요소는 아니란다. 누구를 원망하고 어떤 것에 핑계를 대는 건 쉬운 방법이란다. 쉬운 방법으로 인생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기에는 한계가 있단다. 내가 누군가의 팀원이 되든, 내가 누군가의 팀장이 되든, 내가 누군가이 사장이 되든 마찬가지란다. 사기업에서 근무하든, 공조직에서 근무하든, 임원으로 근무하든, 말단 사원으로 근무하든 마찬가지란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만든단다.
오늘 핑게와 원망을 기준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 내일의 나는 기대하기 어렵단다. 오늘 핑계와 원망을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면, 내일의 발전된 나를 기대하기 어렵단다. 오십이 되어서도 핑계와 원망을 입에 달고 산다면 칠십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란다. 내가 누구를 탓할건가? 스스로를 탓하지 않고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까?
공자께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가 먼 곳에서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아니하니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셨단다.
가끔 리더라는 틀에 넣어 자신을 돌아볼 때가 있단다. 나는 리더인가 팔로워인가? 타인을 이끌지는 못했어도 '나 하나'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시간 관리를 하면서 원했던 목표를 이루길 반복했는가? 목표를 꾸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는가? 자신의 질문에 거리낌 없는 사람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되고자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를 자문해 보는 시간이 가끔 필요하단다.
학습은, 즐거운 일이든 즐겁지 않ㅇ느 일이든 리더가 되는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단다. 사람들을 이끈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셀프 리더가 되기 위해서라도 학습의 과정은 필수란다. 배우지 않고 군자가 된 경우가 없고,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고 리더가 되는 경우는 없단다. 먼저 스스로 설 줄 아는 사람이라야 타인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란다. 배경 약한 사람이 일어설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역시 학습이란다. 성장의 기쁨을 주는 학습은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 튼튼한 뿌리와도 같단다.
리더의 두 번째 조건은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조건이란다. 리더는 누군가의 앞에 서는 사람이란다. 뜻을 모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사람이 리더란다. 사람들과의 갈등 해결이 리더의 가장 큰 역할이란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란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리더란다.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 진짜 즐거움이 시작된단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행복한 일이 된단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늘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늘 즐거운 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리더란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모두 마찬가지란다. 사람들을 모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사람이 바로 리더란다.
보통 사람은 상대가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단다. 자신은 좀처럼 타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으로부터 별것 아닌 걸 가지고도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팔뚝에 작은 완장이라도 하나 차게 되면 그 마음은 더 커진단다. 우쭐해지는 마음에 아주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상한단다. 그러니 리더로 남들 앞에 섰음에도 무시한다거나 혹여 비난까지 한다면, 서운한 마음과 괘씸한 마음이 들지 않을 리더가 얼마나 될까?
그러니 공자께서 말하는 리더다운 리더의 주도성을 말하고 있단다. 타인이 알아주든 말든 자신과 조직의 목표를 위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단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사람을 품어 주는 그런 사람이 바로 리더란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사실 매우 특별한 일이란다. 결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정 생활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살아 보면 알게 된단다. 누군가의 자식에서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란다. 20, 30년을 다르게 살아온 남녀가 가족이 된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란다. 아이를 낳아 초등학생으로 기르기까지 들어가는 그 쉼없는 노력을 발휘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란다. 건강한 가족으로 구성된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일 역시 기적 같은 일이란다.
셀프 리더십은 나 혼자만 잘하면 되는 일이지만 가정 리더십은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란다. 세상에 어려운 게 부부 관계, 세상에 복잡한 게 부모와 자식 관계란다.
조직에서의 리더 역할은 두말할 필요가 없단다. 조직 리더십의 기본 역시 사람들 간의 문제 해결에 있단다. 나와 상사, 나와 부하, 나와 고객 혹은 나와 업무, 나와 시간, 나와 직업, 나와 미래가 그렇단다. 사람과의 문제, 업무와의 문제는 모두 리더십의 문제란다. 상사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와 갈등, 아랫사람에게 받는 감정의 상처, 고객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리더들이 풀어야 할 피할 수 없는 과제들이란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조직을 알아 가고 리더로 발전해 간단다. 혼자서 잘 해 나가는 셀프 리더도 둘 이상 모이면 해맬 때가 많단다. 혼자서 일 잘하는 방법과 둘이 있을 때 일 잘하는 방법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퇴근할 때까지 단 일분일초도 사람과 일에서 벗어나기 어렵단다. 그러니 조직에서는 정교한 리더십이 필요하단다.
우리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단다. 금요일이 지나 주말이 되면 다시 주말의 다양한 행사가 기다린단다. 주중엔 일만 하면 되지만 주말에 더 큰 고민과 갈등이 반복된단다. 어렵지만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과의 모임과 약속, 가까운 친인척의 결혼식과 직장 동료들과 연관된 경조사가 줄을 이어 대기하고 있단다. 주말에 열리는 회사 행사들도 종종 이어진단다.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과의 주말 모임, 학교 모임, 종교 모임, 운동 모임, 동호회 모임까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단다.
다양한 리더십의 힌트를 <학이편> 1장이 보여준단다. 리더로 성장하는 3단계를 말한단다. 셀프 리더, 조직 리더, 사회 리더, 국가 리더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3단계를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단다. 오십 이전에도 이후에도 필요한 단계란다. 오십이 넘어도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면 시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살펴 그들과 함께 즐거운 삶을 모색해 보고, 누군가가 나를 서운하게 한다거나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해도 연연해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모습을 상상케 한단다.
공자께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이미 어찌할 수가 없다"라 말씀하셨단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 어록은 평범한 일상의 대화가 많단다. 격식을 차리거나 잘 보이기 위해 일부러 꾸민 말이 아닌, 반복되는 삶에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들이 대부분이란다. 여지하(如之何), 이 어구 역시 마찬가지란다. 어찌해야 할까 어찌해야 할까를 늘 되뇌면서 궁리에 궁리를 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단다.
저자는 지금도 붓글씨를 쓰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단다. 논어 공부를 하면서 붓으로 논어를 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막상 붓으로 직접 써 보면 서체가 볼품 없어 바로 찢어버리곤 했단다. 숙련에 오랜 걸리는 붓글씨보다 좀 더 빠르고 쉽게 익힐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결국엔 젓가락에 먹물을 찍어 논어를 쓰게 되었단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글씨체가 완성되어, 이후 논어 강의 PPT는 모두 젓가락 서체를 사용했단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단다. 쉬운 일은 내려가는 것뿐이란다. 성공이나 발전이 아닌 실패나 몰락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단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길은 늘 어렵단다. 등산도 공부도 사업도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그러니 공자께섣 '여지하 정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 같단다. <논어>에 일관성 있게 등장하는 공자의 가르침 중 하나는 스스로 방법을 찾게 하는 거란다. 하나를 알려 주면 세 개 정도는 스스로 터득하기를 바랬단다. 직접 화법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단다.
여지하 정신은 학교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란다. 개인과 가정, 조직과 기업, 국사를 논하는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단다. 일터에서 특히 더 그렇단다. 좋은 직장과 나쁜 직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떻게 일하느냐가 더 중요하단다. 스스로 궁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직장에 다닌다 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단다.
오십에서 보는 인생 후반전도 그렇단다. 멋진 미래와 후진 미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라가 더 중요하단다. 스스로 궁리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 후반이 아무리 길다 해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단다. 사람들은 기댈 곳이 있으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단다. 누구나 믿는 구석이 있으면 나태해지기 쉽단다. 취업 준비생이나 자격증 시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치열한 경쟁의식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단다. 여지하 정신을 극도로 활용하는 시기가 아닐까 한단다. 그러나 취업에 성공해 막상 직장인이 되면 상황은 거의 180도 달라진단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단다. 조직과 미래가 안정되면 인정될수록 여지하 정신은 쪼그라져만 간단다. 더 이상의 궁리를 하지 않아도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란다. 머리 아프게 연구와 궁리를 하지 않아도 중간은 가기 때문이란다.
세상엔 파도를 닮은 게 참 많단다. 계절의 변화도 음양의 변화도 그렇단다. 감정 곡선도 인생 곡선도 그렇단다. 취업의 즐거움 뒤에는 퇴직의 아쉬움이 따르고, 승진의 즐거움 뒤에는 책임과 스트레스가 따로온단다. 인생 최고의 연봉을 받는가 싶으면 은퇴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고 퇴직으로 시간의 자유를 얻는가 싶으면 바로 건강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라온단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여러 방송국에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출연해 달라는 섭외가 쇄도하고, 다양한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즐을 잇는 꿈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단다. 어떤 사람이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5년, 10년 전부터 예리하게 칼을 갈면서 단계를 밟아 준비해 왔을 거란다.
오십이 되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보면, 정작 "어찌해야 할까? 어찌해야 할까?" 하는 여지하 정신이 필요한 시기는 조직의 일원이 된이후였다는 걸 깨닫는단다. 취업 준비 기간이 5년이나 걸렸다고 해도, 조직에서 일할 기간은 그보다 족히 네 배는 길 것이란다. 누구나 준비하는 5년엔 최선을 다한단다. 하지만 그보다 네 배나 긴 20년의 조직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단다. 물론 지각 조퇴 결근 없이 10년, 20년 근속상을 받으면서 근태 관리했던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20년 조직 생활을 하고도 오십에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단다. 근면한 것과 여지하 정신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정해진 규정을 빈틈없이 근면하게 지켰다 해도 성과나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면, 여지하 정신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단다.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마찬가지란다. 자신의 업무에서 두드러진 성가를 내지 못했다면, 공적인 일에 여지하 정신을 내지 않은 것과 진배 없단다. 자신의 업물 퍼서널브랜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사적인 일에 여지하 정신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조직에서 업무 성과를 탁월하게 내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궁리에 궁리를 했을 거란다. 출근, 퇴근 시간만 정확히 지킨다고 그런 성과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란다. 어떤 어려운 문제가 프로젝트에 걸려 있어도 꼭 해결하겠다는 각오와 궁리에 궁리를 반복했기에 성과를 내게 되는 것이란다.
여지하 정신이 있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는단다.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는단다. 핑계도 되지 않는단다. 결국은 자신이 풀어내야할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문제는 오십부터란다. 혹여 그간 여지하 정신을 무시하고 살아 왔다면 이제부터가 중요하단다. 그래도 조직에 있을 때는 여지하 정신이 부족해도 함께 묻어 갈 수 있기에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수도 있지만, 인생 후반전에는 상황이 다르단다. 이제는 내가 주인이 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란다. 내가 하지 않으면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단다. 내 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도와주질 못한단다. 힘이 들어도 내가 풀지 않으면 바로 주저않아야 한단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하는 여지하 정신이란다.
공자께서는
"고가 고가 아니면 고이겠는가, 고이겠는가"라 말씀하셨단다.
고(觚)는 고대 중국의 주나라 술잔을 말한단다. 술잔 모양을, 술 마시기 불편하게 만들 목적으로 원형이 아닌 모나게 사각으로 만들었단다. 절주를 위해 만든 그 고라는 술잔으로도 절주를 하지 못한다면, 절주를 위한 술잔이겠는가? 혹은 고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술잔에 각을 없애 사용한다면, 절주를 위한 술잔이겠는가?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고가 아니며, 둥근 모양의 술잔으로 술을 마시면서 고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말이란다.
고대인들은 술을 마심에 있어 절주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게 틀림없단다. 얼마나 술 조절이 어려웠으면 술잔을 각지게 만들어 물리적으로 불편하게 하고, 모서기가 둥근 술잔으로 술을 마시면서도 술잔의 이름을 고라고 한 걸 보면 더욱 그렇단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고향에 있는 자식들에게 편지로 훈육했는데, 한 번은 둘째 아들에게,
"네 형이 왔을 때 시험 삼아 술 한 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보다 배도 넘는다고 하더구나, 어찌 글 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좋지 못한 소식이구나. 네 외할아버지는 말술을 거뜬히 마셔도 취하지 않으셨지만 평생 동안 술을 입에 가까지하지 않으셨다. 벼슬을 그만두신 후 늘그막에 세월을 보내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수십 방울 정도 들어갈 조그만 술잔을 하나 만들어 놓고 입술만 적시곤 하셨다.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하는 흉패한 행동은 모두 술로 말미암아 비롯된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고라는 술잔을 만들어 절제하였다. 후세에서는 그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능히 절제하지 않으므로 공자는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면서도 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고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경계하여 절대로 입에 가까이하지 말거라.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장 목구멍에다 탁 털어 넣는데 그들이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데 있는 것이지.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구토를 해 대고 잠에 골아 떨어진다면 무슨 술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하기 쉽다. 주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어 문드러지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술로 인한 병은 등창이 되기도 하며, 뇌저. 치루. 황달 등 별스러운 기괴한 병이 있는데, 이러한 병이 일어나게 되면 백약이 효험이 없게 된다. 너에게 빌고 비노니, 술을 입에서 끊고 마시지 말도록 하여라"
라고 편지를 보냈단다. 천리타향 유배지에서 외롭게 유배살이를 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간곡한 편지란다.
어디 술잔뿐일까? 부모님께 들었던 일상의 기준, 선생님께 배운 공부와 생활의 원칙,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빛나는 인생의 교훈, 직장 선배나 상사들에게 들었던 직장 생활의 철칙, 스크린으로 배운 명대사들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원칙이 존재한단다. 원칙은 대체로 지키기가 쉽지 않단다.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원칙으로 정해 놓지도 않았을 거란다. 술을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절제를 하라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지키기가 어렵단다. 달콤한 설탕이 많이 든 음료나 탄수화물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절제하라는 것인데, 그것도 마찬가지란다. 한 번 들어간 회사를 평생 다니라는 게 아니라 최소 3년은 다녀 봐야 그 회사를 알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도 쉽지 않단다. 남들에게 욕듣는 게 싫으면 욕하지 말하는 것인데, 그것도 그러기가 쉽지 않단다. 남들 거만한 것이 싫으면 나도 남들에게 거만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도 그렇단다.
비단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단다. 국회가 국회의원들의 권위와 수당만 열심히 챙긴다면 그게 국회일까? 검찰이 검사들의 안위와 권위만 챙긴다면 그게 검찰이겠는가? LH가 직원들의 투기를 용인한다면 그게 LH겠는가? 세상에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의 법조문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조직화되었어도 모두에게 적용되지 못하고 선별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게 민주주의의 법이겠는가.
오십이 되면 뛰어남보다는 평범함이 행복이 더 가깝다는 걸 깨닫는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고, 억울하지도 않고, 억압받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가난하지 않게 살고 싶어한단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고, 너무 많이 슬프지 않고, 너무 많이 억울하지 않고, 너무 많이 억압하지 않고, 너무 많이 비난하지 않고, 너무 많이 가난하지 않게라도 살고 싶어 한단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는 어려움만큼이나 평범함을 지키는 게 만만치 않단다. 오십이 되고 보면 소소했던 평범함이 큰 행복이었다는 걸 알게 된단다. 비싸고 멋진 고급 승용차가 아니어도, 멋진 놀이동안이 아니어도, 아이들과 함께했던 추억들 하나하나가 행복한 느낌으로 다가온단다.
원칙을 지키는 삶, 평범함을 지키는 삶이 더 편하고 더 행복한 삶일 수 있다낟. 오십에 들어서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단다. 비로소 스스로 정한 원칙을 지키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한단다. 행복한 삶은 특별한 삶이 아닐 수도 있단다. 최고의 부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란다. 부자가 되어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면 전원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미 생복한 사람들일 거란다. 평범한 사람들은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특별한 사람들은 도리어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을 꿈꾼단다.
인생에 정해진 답은 없단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삶, 특히 스스로 정한 인생의 원칙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거란다.
공자께서는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를 알지 못하면 일어설 수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단다.
<논어>의 마지막 어구, 세 문장에는 중요한 기준이 들어 있단다. 목적 있는 삶, 바르게 사는 삶, 함께하는 삶의 원천이란다. 오십에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삶의 기준이란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공자께서는 나이 오십에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렸다고 했단다.
공자의 천명은 주나라 초기처럼 만백성이 모두 행복한 대동 사회로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걸겠다는 것이었단다. 천명을 이루고자 현실적으로는 가장 빠른 길은, 정치권으로 뛰어들어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를 개혁하는 것이었단다. 공자는 50대 초반 드디어 그 기회를 잡게 된단다. 기회를 잡은 공자는 능력을 발휘항 고속 승진 끝에 노나라 재상을 겸직한 대사구 자리에 오른단다.
부지명(不知命)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단다. 천명을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소명을 알지 못하면, 리더다운 리더로 서기 쉽지 않다는 뜻이란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정하거나 가야 할 목표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리더는커녕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단다.
부지례(不知禮)
예를 알지 못하면 일어설 수 없단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단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가기 어렵단다. 태어나 최소 3년 동안은 부모의 지극정성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단다. 두세 살 아이들도 혼자보다는 놀이방이나 어린이집의 아이들을 통하면 말문도 쉽게 열린단다. 코로나 감염증으로 인한 변화로,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게 이미 밝혀졌단다. 직장이야말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며, 사회생활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단다.
공동생활에는 기준이 필요하단다. 최소한의 충돌과 갈등은 막아야 함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란다. 다수가 오른쪽으로 통행하는데 누군가는 굳이 왼쪽 통행을 고집한다면 충돌은 피할 수 없단다. 그게 자동차 운전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줄 수 있단다. 그래서 소소한 것은 약속으로, 중한 것은 법조문으로 기준을 정리하는 거란다. 예를 알지 못하면 일어 설 수 없단다. 예를 알지 못하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거란다. 함께 지키기로 약속된 예를 지키지 못한다면 건강한 조직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기 어렵고, 리더가 되는 건 더욱 어렵단다. 자신이 중요한 것처럼 타인도 중요하다는 걸 아는 거란다. 타인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인격이란다. 예를 지킨다는 건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이란다.
부지언(不知言)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단다. 사람의 품격은 말에서 시작된단다. 말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듣는 게 더 중요하단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상대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아무리 말을 오랫동안 한다 해도뜻을 정확히 감지하기 어렵단다.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상대를 알지 못한단다. 상대가 어려운 외국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겉돌기만 한다면, 듣기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단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듯 상대 또한 나만큼이나 중요하단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상대를 알지 못하는 건 종종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낸단다.
상대의 말을 놓치면 말뿐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잃을 수 있단다. 한 사람을 잃는 건 그와 관련된 모두를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단다. 한 사람을 얻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얻는 거란다.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아는 것이란다. 그 시작에 말이 있단다. 그 시작은 듣기에 달려 있단다.
부지명: 인생의 목적은 누구에게서 받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란다. 내가 정하고 내가 믿는 거란다. 그러니 내가 정하지 않으면 나의 천명은 정해지지 않는단다. 인생의 목적이 없어도 시간과 세월은 지나간단다. 목적이 없으면 목표의 필요성도 떨어진단다. 분명한 목표가 없으면 현실에 머무르게 된단다. 재미없는 인생이 될 공산이 커진단다.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도 시간과 세월은 지나간단다. 목적이 있으면 목표의 필요성은 높아진단다. 분명한 목표가 있으면 나테로부터 멀어진단다. 현실을 극복하게 된단다. 앞서게 된단다. 재밌는 인생이 될 공산이 커진단다.
부지례: 그를 인정하면 그도 나를 인정한단다. 그에게 예의를 보이면 그도 나에게 예의를 보인단다. 가능 행동이 바르면 오는 행동도 바르단다. 그를 세우면 그가 나를 세운단다. 그게 세상 인심이란다. 내가 제대로 서고 싶으면 가까운 사람부터 제대로 대해야 한단다.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단다. 그에게 예의를 보이지 않으면 그도 나에게 예의를 보이지 않는단다. 가는 행동이 약하면 오는 행동도 약하단다. 그를 비난하면 그도 나를 비난한단다. 그게 세상 인심이란다. 내가 제대로 서고 싶으면 가까운 사람부터 제대로 대해야 한단다.
부지언: 그를 알고자 하면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단다.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이 생각을 알 수는 없단다. 그의 말을 들으려면 내 생각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단다. 내 생각으로 그의 말을 들으면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단다. 들어오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단다.
한 사람을 알면 세상을 얻고 한 사람을 잃으면 세상을 잃는 것과 같단다. 그게 배우자가 될 수도, 자식이 될 수도, 부모가 될 수도, 고객이 될 수도, 상사 부하가 될 수도, 스승이 될 수도 있단다.
공자께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고 말씀하셨단다.
춘추시대는 격변의 시대였단다. 각국의 제후들은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했단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권모술수와 비열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단다. 주나라 초기의 인의(仁義) 정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단다. 나라에 군주다운 군주가 없으니, 고위 관리들은 관리들대로 자신의 잇속만 챙기며 군주를 군주로 대하지 않았단다. 반역과 반란이 반족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착취 속 고토의 연속이었단다.
공자의 고국이었던 노나라의 상황은 심환이라고 불리는 세 가문의 횡포로 그야말로 최악이었단다. 공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인과 바른 도가 통용되는 세상으로의 변화를 위해 14년 이상을 떠돌아다니며 천하를 주유했지만 결과는 너무나 초라했단다.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춘추>를 쓰면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단다.
공자는 세상이 바르게 돌아간다는 백성들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단다.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는 말이며, 간절히 바라던 일을 이루면 더 이상의 여한이 없겠다는 뜻이었단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단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단다. 죽음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란다. 죽다 살아날 수는 있어도 죽음을 경험해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다. 누구나 죽고 싶지 않을 뿐더러 죽음을 두려워한단다.
어떤 이는 영원한 이별에 두려움을 느끼고, 어떤 이는 극도의 고통이 오지 않을까 무서워한단다. 어떤 이는 심판을 받지 않을까 무서워하고, 어떤 이는 이루지 못한 아쉬움에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단다. 그런데 공자는 도를 들으면 죽어도 좋다고 했단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인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란다. 요즘이야 자주 볼 수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이면 길모통이 언덕배기에서 자주 봤던 차갑게 식어 버린 연탄재란다. 빙판길 위에서 이리저리 채워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연탄재이지만, 지난 밤 새벽까지 주인을 위해 온몸을 하얗게 불살랐던 그 연탄재란다.
오십이 되어 반문해 본단다. 아직 연탄재처럼 식어 버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위해 그토록 뜨겁게 인생을 불사른 적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돌이켜 본단다. 배우자를 진정 뜨겁게 사랑한 적이 언제였던가. 친구를 진정으로 뜨겁게 아낀 적이 있었던가. 부모님께 진정으로 뜨거운 효도를 한 적이 있는가. 상사를 뜨겁게 보좌한 적이 있었는가. 함께하는 공동체 동호인들과 함께 진정 뜨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사랑한다는 말은 했지만 정말 여정을 다해 사랑했는가. 깊은 우정이라 말했지만 그가 외롭고 힘들 때 슬쩍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힘 빠지고 정신 혼미해진 부모니께도 평솝다 더 뜨겁게 효성을 보였는가. 앞에서는 존경한다고 말했지만 뒤에서 진정으로 상사를 따르고 보좌했는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너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오십이 되어 희망해 본단다. 타인을 향한 불평불만은 멈추고 나혼자만이라도 제대로 잘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단다. 나는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나는 나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자신할 수 없단다. 남들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살았다고 하기엔 걸리는 것들이 많단다.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살지 못했는데 바뀐다 해도 앞으로 얼마나 바뀌 수 있을까 염려가 들지만 그래도 희망해 본단다.
10년 후에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단다. 20년 후에도 마찬가지란다. 답은 명료해진단다. 단 한 번이라도 뜨겁게 살아 보자고 지금 결정하는 거란다. 타인에게 뜨거운 기쁨을 줄 수 없다면, 먼저 나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보는 거란다.
오십, 육십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거란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 조금 더 행복해진단다. 나를 염려했던 사람들로부터 안도의 미소를 보게 될 거란다. 단지 내가 하는 일에 열정을 하나 더 보탰을 뿐인데, 나로 인해 세상을 바뀌기 시작할 거란다. 그 뜨거운 열정으로 내가 즐겁고 가족이 만족하며 주변인들의 격려가 더해져만 갈 거란다.
누구 때문에 지금 내가 이 모양일까. 배우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가난한 할아버지 때문에, 남들 같은 조상을 두지 못했기에, 고향이 동쪽이라, 학교가 서쪽이라, 가방끈이 끊어져서, 태어나길 건강체질이 아니라서,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환경이 너무 취약해서, 상사를 잘 못 만나서, 함께 사는 배우자의 마음이 틀어져서, 아이들이 너무 이직적이라서 하고 생각하기 쉽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간단하 이유에서 시작된단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내가 나의 일에 열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내가 나에게 뜨겁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내가 나를 뜨겁게 달구면, 내 주변에서 차갑게 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녹기 시작한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은, 오늘 뜨겁게 살고 있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란다. 오늘 미지근하게 사는 삶은 백날을 살아도 개운하지 않단다. 오십과 육십이 기다려지는 이유 증 하나란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나이가 바로 오십 지천명이기 때문이란다. 내가 나의 의지로 뜨겁게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육십 이순이기 때문이란다.
공자께서는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 말씀하셨단다.
옛것을 익히는 온고(溫故)는 학습을 말한단다. 학습의 시작은 과거로부터 혹은 역사로부터 배우는 거란다. 교과서 역시 지나간 과거의 기록이란다. 오늘을 만든 어제까지의 지식과 지혜를 익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을 지신(知新)이라고 한단다.
1577년 가을, 황해도 해주로 내려온 율곡 이이 선생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고자 <격몽요결>을 편찬하면서,
한두 학생이 찾아와 학문을 물었는데, 내가 스스이 될 만한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처음 학문하는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고, 굳은 의지도 없으면서 그냥 배우겠다고 한다면 피차에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간략하게 책 한 권을 써서 마음을 세우고, 멈을 경계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대략 서술하여 <격몽요결>이라 이름하였다. 학생들로 하여 이것을 읽고서 마음을 씻고 즉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자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구습에 얽매여 괴로워하던 차에 이것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고자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들었단다.
<격몽요결> 첫 장인 입지장에 밝힌 대로 뜻을 세우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단다. 사람의 용모는 추한 것을 바꿔 예쁘게 만들 수 없으며, 신체는 짧은 것을 바꿔 길게 할 수 없으나 오직 심지(心志)만은 어리석은 것을 바꿔 슬기롭게 할 수 있으며 불초한 것을 바꿔 어질게 할 수 있다고 했단다. 이와 같은 뜻을 마음속에 보존하여 굳게 지켜 물러서지 않는다면 누구나 도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단다.
시작이 반이란다. 뜻을 세우면 이미 절반이란다. 나머지 절반은 온고란다. 옛것을 익히는 것이 나머지 반이란다. 지금까지 세상을 빛나게 했던 찬란한 성과는 모두 입지와 온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단다.
율곡 이이 선생이 지적처럼 일에는 바른 목적과 분명한 목표가 먼저란다. 나이 오십이 넘어 지금까지 해 온 일을 계속 하던지 혹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던지, 먼저 목표를 분명히 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단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란다. 목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목적이 바르다면 목표는 여건에 따라 수정 가능하단다. 서울에서 부산을 내려가려는 목적이 분명하다면서 4시간이 목표든 6시간이 목표든 상황에 따라 변경이 가능하단다.
다음으로는 뚜렷한 의지란다. 어떤 일이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단다. 새로운 분야를 학습하는 건 더욱 그렇단다. 새로운 사업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란다. 의지가 강하지 않다면 의지를 다지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단다. 의지 없이 일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불 없이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바로 착수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끈기가 있어야 한단다.
성인, 맹자, 성선, 요순 등의 용어가 요즘엔 매우 어색하지만 500년 전에는 일상의 용어였단다.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그 분야에서 최고를 이룬 사람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먼저 세워야 한단다. 보통 사람이나 최고를 이룬 사람이나 본성은 하나란다. 성격과 역량의 차이가 없을 수는 없지만, 참되게 알고 실천하여 지난날이 나쁜 습관을 버리고 역량을 키워 간다면 도달할 수 없는 이우가 없으니, 보통 사람이라 하여 어찌 최고를 이룬 사람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모두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요즘으로 치환하면, "사람은 모두 빌 게이트나 스티브 잡스처럼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단다. 사람은 누구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명확한 목표와 비전을 갖고 꾸준히 분발한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단다.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역량을 충분히 키우며 행실을 독실하게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으니, 굳이 타인이나 다른 조건에서 성취의 조건을 구할 필요가 없는 거란다.
무릇 스스로 뜻을 세웠다고 말하되 곧바로 공부하지 않고 미적거리면서 뒷날을 기다리는 까닭은, 말로는 뜻을 세웠다고 하나 실제로는 배움을 향한 정성이 없기 때문이란다. 입지를 중시하는 까닭은 '입지를 확고히 하면' 곧바로 공부에 착수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 항상 공부할 것을 생각하여 물러서지 않게 되기 때문이란다. 만약 혹시라도 뜻이 성실하고 독실하지 못하여 그럭저럭 옛 습관을 답습하며 세월만 보낸다면, 수명을 다하여 세상을 마친들 어찌 성취하는 바가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참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 더 행복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새로운 전략들이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지만, 과거에도 이미 그런 전략과 전술 들이 있단다.
어떻게 오십의 시기를 보내야 더 의미 있고 행복할 수 있을까? 오십을 살았던 수많은 옛사람이 이미 생각하고 도전했던 결과를 남겨 놓았단다. 책으로 사진으로 음악으로 그림으로 유튜브로 남겼단다. 찾아 보고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오롯이 내가 해야 할 일이란다.
이제는 '무엇을 온고할 것인가'만 남았단다. '무엇을 공부하고 학습할 것인가'만 남았단다. 방법은 준비되어 있으니 목표를 정하고 뜻을 견고하게 세우면 된단다. 오십이 되어도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한다. 온고 후에는 지신이 찾아 온단다. 온고지신이 되면 리더가 될 수 있단다. 내 인생의 리더를 넘어 타인의 인생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리더가 될 수 있단다. 리더를 꿈꾼다면 온고가 수월해진단다.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면 온고가 수월해진단다.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란다. 온고후에는 언제나 지신이 따라온단다.
공자께서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 라 말씀하셨단다.
유는 공자의 제자 자로의 이름이란다. 공자와 같은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보다 하홉 살이 적었단다. 성격이 거칠고 출신은 미천했지만, 용맹했으며 심지가 곧았단다. 공자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했던 친구 같은 제자였단다.
공잔는 자로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줬단다. 자신이 아는 건 언제 누구에게라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건 언제 누구에게라도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 아는 사람의 태도라는 거란다.
정보의 홍수 속에 사람들은 착각하기 쉽단다. 스치듯 한 번 들어 것을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하곤 한단다. 한 번 들은 것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다르단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고,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고 싶을 때가 있단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힘, 아는 것을 실천 하는 힘, 그 힘으로 끊임없이 개선. 개발. 혁신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여 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란다.
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말은 쉬워도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단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고, 잘 모르면서도 체면과 허세 때문에 아는 듯 행세하는 경우도 많단다. 그 결과가 본인 혼자에게 미친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 거짓의 피해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란다. 종종 사람이 죽고 사는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기도 한단다. 한사람의 잘못된 증언 때문에 감방에서 수십 년을 보낼 수도 있고, 돈의 유혹에 빠져 거짓 증언과 간증으로 온 사회가 불필요한 힘을 낭비하기도 하단다. 사실은 사실대로 보도하지 못하면서 거짓을 사실처럼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문제가 끊이지 않는단다. 누구보다 공정하고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언론에서 2500년 전 앎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언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을 뿐이란다.
나이 오십이 되어도 모르는 게 많단다.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수10년을 살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황당할 때가 많단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각자의 일에 열중하다 보면 부부 사이에도 그렇단다. 20년 이상을 함께했어도 문득문득 놀라 때가 있단다. 당연히 동의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일에 의견이 나뉠 때는 서운해지고 화가 나기도 한단다. 지금껏 믿어 온 그 사람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단다. 결국 내가 알고 잇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면 꽁지를 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게 부부인 것 같단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나오야 그나마 한시라도 빨리 화해할 수 있단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식과 서먹해지는 경우도 생긴단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된 자식과의 소통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단다. 성장해 버린 아이가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단다. 그토록 잘 따르던 아이가 언제부터인가가 말수가 적어지고 자기주장이 강해지며 부모이 말 한마다에 입과 방문을 함께 닫아버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단다. 그 어떤 전략을 써도 아주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애매한 경우가 발생한단다.
어떤 부모나 '우리 아이는 내가 잘 알아'라고 말하지만 곧 '제일 모르는 아이가 바로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어떤 기술을 써도 잘 풀리지 않는 아이가 큰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단다. 그 돌덩이는 바람을 막아주고 큰 바위로 변해 부모를 지켜 줄 것이기 때문이란다. 아이 문제로 답답한 50대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나 부모나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거란다. 지금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가는 중이란다.
천자문에 잠(濳: 자맥질할 잠)이라는 글자가 나온단다. '비늘 달린 고기는 물 아래로 잠기고'할 때의 잠이란다. 잠긴다는 뜻으로, 잠재력이나 잠수함에 쓰인단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잇는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잇는 적기가 바로 지금이란다. 30대는 30대가 가장 좋은 시기이고, 50대는 50대가 최적의 시기이며, 70대는 70대가 잠재력을 발휘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란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잠재력을 극대화하기는 쉽지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오십은 하고 싶은 일을 골라 내는 시기란다. 지난 20여 년간 해온 일 이상으로 지금부터 20여 년 동안 해야 할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해 온 경험과 기술을 십분 활용항 다시 시작해 보는 거란다. 할 수 없다면 전혀 새로운 일에 과감히 도전해 보는 거란다.
생각과 실행은 큰 차이가 난단다. 따뜻한 거실에서 TV 화면을 통해 한겨울 얼음을 깨고 물에 뛰어드는 배우를 보는 것과 실제로 뛰어드는 것은 놀랄 만큼 큰 차이가 있단다. 퇴직 전에 생각한 사업과 토직 후에 시작하려는 사업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단다.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과 지식이나 경험으로 돈을 번다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단다. 아는 것을 정말 안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단다. 30%이 지식과 경험으로 90% 이상을 알고 있다고 자만하기 십상이란다. 30%의 실력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면 나머지 70%는 돈으로 메꿔야 한단다. 그래서 직장인의 로망인 멋진 사업 경영을 아무리 잘 준비해도 3년 버티기가 어려운 이유란다. 기본이 되어야 창의력도 실행력도 빛을 발한단다. 끈기와 의지는 기본이며 자기관리는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한단다.
'아는 걸 안다'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란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란다.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알 길이 없단다. 그래서 과거를 묻는 거란다. 지나온 여정을 자세히 살펴봐야 앞으로의 여정을 예측할 수 있단다. 지나온 20년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식견을 가져야 준비할 수 있으며, 이후 20년을 제대로 갈 수 있단다.
공자께서
"덕을 닦지 못한 것, 학문을 강구하지 못한 것, 의를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불신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라 말씀하셨단다.
공자에게도 근심거라가 있었단다. 첫 번째 근심을 덕(德)을 닦지 못한 것이었단다. 덕의 정의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만, 두 글자로는 신(信)과 인(仁)으로 거짓이 없고 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세 글자로 는 지(智), 인(仁), 용(勇)이란다. 지혜와 사람과 용기가 덕이란다. 두 번째의 근심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한 거란다. 여러가지 좋은 방법으로 궁리하거나 연구해 보지 못한 걸 근심했단다. 세 번쩨 근심은 의를 듣고 배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한 거란다. 마지막으로 어떤 것이 선하고 선하지 못한 것인지를 알면서도 선하지 못함을 고치지 못한 것이 근심이라 했단다.
오십에 그동안 얼마나 교양 있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 본단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면 상대를 이해하기 어렵단다. 절망을 당해 보지 않으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단다. 건강한 사람은 백혈병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환자를 이해하기 어렵단다.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보좌를 받는 사람은 사소한 일 하나를 풀어 보려고 온종일 뛰어다니는 힘없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단다.
자기는 인하지 않으면서 타인은 인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은지, 자기는 의롭지 못하면서 타인은 늘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는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타인은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진 않은지, 자기는 지혜롭지 못하면서 타인은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하진 않은지, 자기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타인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진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시간이란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 리더들도 1년이 지나도록 책 한 권 제대로 잃지 못하는 경우가 있단다. 20년 같은 일을 하고도 전문가가 못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떤 이는 10년을 일하고도 전문가가 되기도 한단다. 어떤 일을 하든 기존의 지식에 실무 경험을 추가하여 새로운 사례를 만들면서 전문성을 키워 가는 전략적인 사람들이 있단다.
학습이란 학교나 책상에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닌, 일터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서 이뤄진다는 걸 알 수 있단다. 책에서 배운 개념과 이론이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좋은 방법으로 궁리하고 연구해 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사안이란다. 어떤 직업이든 어떤 일이든 자기 일로 전문가가 된 사람에게는 그들만의 학습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봐야 할 시간이란다. 오십이 지나도 또 다른 멋진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란다.
살이오며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 또 선하게 사는 건지를 우리는 수없이 들었단다. 들을 때마다 늘 마음이 흔들렸단다. 마음은 급했지만 행동이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서른에도 그랬고 마흔에도 그랬단다. 쉰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란다.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의로운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 못되는 게 아니란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게 아니란다. 실행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란다.
천하의 공자도 의를 듣고 배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의를 실천하지 못했다고 근심했단다. 어떤 것이 선하지 못한 것인지를 알면서도 불선을 고치지 못했다고 근심했단다. 그러니 바르고 선하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단다. 어려우니 가치 있는 거란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면 누군들 그게 대수일까? 그 실행과 실천을 오십에 고민하는 이유란다. 오십이 지나도 한 번의 멋진 기회가 남아 있기 때문이란다.
오십에 닥치는 개인적인 근심 걱정은 아무래도 현직에서 물러나는 거란다. 자진해서 물러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현직에서 물러나는 주변인들을 보며 걱정이 커진단다. 자진해서 물러나는 경우보다 원하지 않아도 물러나는 경우가 더 많단다. 일에서 밀려나면 그간 별문제가 아니었던 권력과 권위, 경제와 돈, 건강과 질병의 문제가 연쇄적으로 따라온단다. 오십에 닥치는 조직이나 사회에서의 걱정거리는, 공자께서 지적했던 것처럼 교양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사람, 학습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사람, 좋은 책을 보고 훌륭한 강의를 많이 들어도 변함이 없는 사람, 좋지 못한 행동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러 구실을 붙여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이란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단다. 더 큰 문제는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는 걸나다.
오십에 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의 위치에 들어선단다. 지천명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또 한 번의 멋진 기회가 남아 있기에 되돌아보는 것이란다. 꼭 내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작은 변화를 시도해 나간다면 삶의 행복은 배가 될거란다.
공자께서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아진다"고 말씀하셨단다.
방(放)은 놓다. 내놓다. 의거하다 등의 의미로 석방, 추방, 의거 등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의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단다. 방어리(放於利)는 '이익에 의거하여'라는 뜻이란다. 이익에 의거하여 혹은 이득에 따라 행동하면, 결국 원망이나 원한이 많아진다는 뜻이란다. 맹자보다 180여 년 전에 살았던 공자는 리(利)를 그렇게 정의했단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질문한단다.
'노인장께서 천리 먼 길을 멀다 여기지 않고 오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한단다.
"어찌하여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며, 사와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니, 이런 식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취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의리를 하찮게 여기고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면 모조리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한 사람치고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운 사람치고 자기 임금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인의를 말씀하시면 되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 <맹자> 양혜왕 상편 중에서.-
맹자는 의리는 사라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패권국이 되겠다는 명리만을 추구했던 전국시대를 살았단다. 명리를 앞세우는 양혜왕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맹자는 이(利)가 아니라 인의가 먼저라고 강변하고 있단다.
오십에 '이'를 생각해 본단다. 나의 즐거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면서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욱하는 성격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는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 사람을 야박하다고 원망하진 않았는지, 남의 사소할 실수나 잘못을 보면 쉽게 노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면서, 내 질수나 잘못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진 않았는지, 내 사랑 감정은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가치라생각하면서 상대의 사랑 감정은 무시하지 않았는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단다.
법적으로도 체벌과 학대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데도 자식은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 때무에 부모위 학대로 사망에 이르는 험악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단다. 부모가 받는 스트레스와 부부 사이의 갈등을 자녀에게 폭력으로 푸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이'에 관련된 문제란다. 아이를 방치하면서도 자신은 게임과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학대하면서도 쇼핑하는 즐거움을 놓지 못하는 것이 반증하고 있단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스트레스 역시 '이'에 관련된 문제란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상사가 되면 부하 탓만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교육이나 후배 양성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면서 성과 부족에 대해서는 인신공격을 마다 않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건 자신의 실적과 성과 때문이란다. 끼어들기, 새치기, 운전도 적지 않단다. 누구나 급할 때까 있기 마련이지만 습관적으로 끼어들기를 하는 운전자를 볼 때마다 인생도 그렇게 살고 있진 않은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단다. 자기만 급하고 자기만 피곤하다고 느낀다면 더 그렇단다.
광주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많은 사람과 2021년 봄 미얀마 군부에 대항하다 죽어 간 많은 사람이 소수 권력가의 명리 속에 희생되어 가고 있는 걸 보면, 공자. 맹자의 가르침이 아직도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단다. 그런 지도자들 둔 국가의 시민은 시대를 막론하고 불행이 아닐 수 없으며 원망이 그칠 수 없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물질적.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단다. 어떻게 사는 게 더 행복한 삶인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단다. 부자로 살면서 많은 이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비난과 욕을 먹는 사람들도 있단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비난과 욕을 먹는 사람들도 있단다. 부자로 살면서 존경까지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가난하게 살면서 비난과 욕까지 들어야 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단다.
태어나면서 부귀빈천(富貴貧淺)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살아가면서 부자가 될 수도 가난해질 수도 있단다. 귀하게 되기도 천하게 바뀌기도 한단다. 노력의 문제란다. 살아가면서 칭찬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질시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단다. 선택의 문제란다. 자신의 이익만을 따를 것인가 옳고 그름의 의를 따를 것인가 선택에 달려 있단다.
나, 내 집안, 우리 회사, 우리 지역, 우리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단다. 하지만 혼자 살 때 필요한 원칙이란다. 함께사는 세상의 법칙은 조금 달라야 한단다. 이익만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원망이 많아진단다. 부자든, 빈자든 마찬가지란다. 이에는 이익이라는 의미와 예리하다는 뜻이 공존한단다. 그 이익이 누군가를 예리하게 찔러 아프게 한 결과로 만들어진 거라면 더욱 그렇단다.
혹여 오십이 되는 지금까지 사리사욕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이제 공리공욕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단다. 세상으로부터 인정과 존경 그리고 칭찬의 목소리는 더 커질 거란다. 가족과 친척, 이웃과 우리 사회로부터 들릴 거란다.
3강. 균형
공자께서
"꾸밈과 바탕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라 말씀하셨단다.
공자는 리더의 모습을, 내면의 바탕이 외변의 꾸밈을 이기면 촌스럽고, 외면의 꾸밈이 내면의 바탕을 이기면 번지례하다고 설명한단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무례와 오만을 일삼는 자가 있는가 하면, 외모의 화려함을 내면이 받쳐 주지 못하는 자도 있단다. 실력은 천재인데 행색이 초라한 사람이 있고, 행색은 영화배우 급인데 실력은 형편없는 사람이 있단다. 사람은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에 적절한 외면을 갖춘다면, 이가 바로 진짜 리더란다. 외양 디자인도 아름답고 내부 기능도 뛰어난 제품이 진짜 명품이듯 그렇단다.
우리 인생 또한 이와 비슷하단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삶, 누군가의 배우자로 살아가는 삶, 누군가의 부모로 살아가는 삶, 학교에서는 학생으로,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문'의 삶이란다. 나이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삶,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이 함께 살아가는 삶이 '문'의 삶이란다. 경쟁이 기본이 되며, 인생의 외형을 만들어 간단다.
인생을 둘로 나울 수 있다면 인생 전반은 문의 삶에 더 가깝단다. 경쟁하지 않고 인생 전반을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그러니 경쟁 속에서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는 사람도 거의 없단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인생은 원래 힘들고 괴로운 거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기도 하단다.
인생 전반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문의 삶이라면 인생 후반은 내가 중심이 되는 '질'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단다. 부모한테 받은 사랑은 반도 되돌려 드리지 못했는데 이미 부모는 돌아가시고, 사랑하는 자식 역시 모두 성장하여 각자의 제 갈 길로 떠나가게 된단다. 미운 정 고운 정 배우자만이 남아 함께 가야 하는 삶이란다. 그동안의 조직 생활이나 사회생활의 제약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는 삶이란다. 이제는 타인의 시선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단다. 기존의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살아도 된단다. 경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줄었지만 이제는 내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한단다. 질의 삶이 시작되는 거란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둔 아들이 선택할 수는 없단다. 치열한 경쟁 없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수험생들의 선택 사항이 아니란다. 아무리 준비해도 들어가고 싶은 직장을 누구나 들어갈 수는 없단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동기생 모두가 한 번에 과장이 될 수도 없단다. 아무리 기를 써도 모두 정년퇴직까지 일할 수는 없단다. 선택사항이 아니란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 전반을 살아간단다.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간단다. 치렬한 입사 시험을 거쳐 직장을 들어가 나름의 최선을 다한단다. 과정 과정마다 그 어떤 과정도 쉽게 되는 것은 없단다. 늘 최선을 원하지만 차선이 되기도 어렵단다. 최고의 대학, 최고의 기업을 원하지만 현실은 원하지 않았던 대학, 원치 않았던 회사에 들어가는게 십중팔구란다.
인생 전반을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혹은 자신의 꿈에 따라 살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물론그렇게 살아가는 대단한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어려운 도전 과제란다. 일찍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지키기 어렵고, 두뇌가 명석한 사람은 몸이 두뇌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런 전반전이 지나면 다시 한 번 기회의 시간이 찾아 온단다.
치열한 경쟁이었지만 인생 전반에 인생 후반의 의식주가 해결되는 성과를 만들었다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단다. 인생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을 많이 하지만, 대다수가 원하는 삶은 의식주가 해결된 안정된 삶이란다. 200여 년 전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 있는 제자에게,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만 뜻을 두고서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벌써 이름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금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이 살기를 원하느냐?" 라고 편지를 보냈단다.
문의 삶에 '질'의 삶이 더해져야 인생을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단다. 어떤 이는 기세등등하고 멋진 인생 전반을 살았지만 인생 후반에는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간단다. 어떤 이는 볼품없고 힘든 인생 전반을 살았지만 인생 후반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간단다. 어떤 이는 멋진 인생 전반에 이어 후반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간단다. 어떤 이는 볼품없고 힘든 인생 전반에 이어 인생 후반도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간단다. 인생 전반을 어떻게 살았든 인생 후반은 나를 위한 삶이어야 한단다. 책임지는 삶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단다.
오십 지천명,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질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단다. 이제부터는 인생에 핑계가 통요되지 않는단다. 목표와 계획을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누군가 세워 준 목표나 계획에 따라 인생 후반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단다. 혹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 될지도 모른단다.
인생 전반은 가족의 일원으로, 가족을 책임지는 책임자로,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살았다면, 인생 후반은 나를 더 성장시키는 나를 위한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단다. 그게 바로 가족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국가를 위한 일이란다. 문질빈빈(文質彬彬: 외양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가 서로 잘 어울린 모양)의 완성된 삶이고 행복한 삶이란다. 군자의 삶이여 리더의 삶이란다.
공자께서
"삼군을 통솔하는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에게서 그 뜻은 빼앗을 수 없다"라 말씀하셨단다.
춘추시대 제후국이 가질 수 있는 병력 규모인 36,000명 대군을 삼군이라 한단다. 공자는 삼군을 총지휘하는 장군을 전쟁이나 전투로 빼앗을 수 있으나, 일개 범부라 해도 그의 가슴속 깊은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말했단다.
간절한 뜻을 지닌 사람은 돈이나 출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뜻을 바꾸지도 않으며,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강한 의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뜻을 세우기가 만만치 않단다. 뜻을 굳게 세우면 육군참모총장도 빼앗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단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입학이 절실한 목표였지만, 막상 대학생이 되니 절실한 목표가 사라졌단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취업이 간절한 목표가 되었지만, 막상 사원 대리가 되면 아무런 생각이 없단다. 과장 승진 시기가 다가오면서 제발 과장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원하지만, 막상 과장이 된 이후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단다. 차장이 되어서도 부장이 되어서도 계속 반복된단다. 그렇게 인생 전반을 마치고 보니 어느덧 오십 중반이 되었단다.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 관찰사,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중요한 요직을 거쳤던 고위 관료였단다. 당대 사람들은 율곡을 고관대작으로 기억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율곡은 <격몽요결>의 저자로 더 많이 기억된단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조판서 율곡보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율곡으로 기억한단다. 율곡 이이 선생이 평생 가지고 있는 정신을 더 기억한단다.
관찰사, 병조판서, 이조판서 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단다. 율곡 이이 선생이 단지 관료로서 인생을 마무리했다면 우리는 그를 잘 기억하지 못할 거란다. 하지만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격몽요결>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기억되고 있단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고위 관료나 정치가 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다. 하지만 국민과 시민을 위한 관심과 사랑보다 자신의 입신 영달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으로만 끝난다면, 그 끝은 불 보듯 뻔하단다. 아무리 고관대작이 된다 해도 그곳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안을 거란다.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않을 거란다. 그의 마음에 어떤 뜻이 있느냐가 그를 기억하게 하지, 그의 직업이나 권력이 기억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간 사람으로만 기억하게 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단지 누구를 부모로 만났느냐의 문제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기억하는 건, 권력을 휘두르며 마음대로 편하게 살다간 생이 아니라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능력과 권력을 사용한 생이란다. 그의 시작엔 소중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단지 잘 먹고 잘 놀다 가는 게 아닌,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남기고 가겠는가를 늘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란다. 필부의 꿈이든 장부의 꿈이든 마찬가지란다. 심중 깊숙이 새겨진 의지는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단다. 장관의 자리는 빼앗길 수 있어도 그 마음속의 진실은 빼앗지 못한단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바른 뜻을 세우고 그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결국 당대나 미래에 기억되고 존경받는다는 사실이란다.
누군가에게 좋게 기억되는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란다. 공자께서도 <논어> 학이편 1장에서 이를 지적했단다. '친구가 먼 곳에서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친구가 멀리에서 온다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단다. 하나는 공간적으로 멀리에서 온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인 개념이란다. 비록 당대가 아니더라도 먼 훗날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것을 말한단다. 지금 우리가 공자를 기억하듯 훗날누군가가 우리를 좋은 뜻으로 기억해 준다면, 정말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단다.
100년 후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아야 할까요? 지난 시간ㄷ 소중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단다. 어떤 뜻을 품어야 할까? 지금까지의 환경이나 여건보다 지금부터의 여건이나 환경이 더 나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단다. 하지만 인생의 기준을 조금 다르게 보면 가능할 수도 있단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기준에서 벗어나 내가 중심이 되는 성공 기준을 만드는 거란다. 지금까지 보낸 시간만큼이나 앞으로의 시간이 더 남았단다. 인생 전반에는 자꾸 심중의 뜻이 흔들렸단다. 작심삼일이 많았단다. 심중의 뜻과 목표가 자꾸 바뀌었단다. 남들 따라가기에도 바빴고 더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라 해 봤지만, 결과는 늘 처음의 기대와 달랐단다.
이제는 꺾이지 않을 꿈을 가져 볼 때란다.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워 볼 때란다. 오십이지만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단다. 뜻이 이 희미해서 가능성이 떨어질 수는 있어도 남은 시간이 부족하여 달성하지 못할 일은 거의 없을 거란다. 그동안 다양한 목표를 세워 진행해 봤는데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방법은 딱 한 가지란다. 가치 있는 뜻에 부합되는 목표를 세워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거란다.
누구나 필부에서 버어나는 꿈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단다. 그저 그런 인생을 살기보다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단다. 분명한 뜻이 서 있다면, 일상의 반복엣 오는 매너리즘을 벗어나 자기 브랜드의 실현이 가능해진단다. 자기 브랜드야말로 필부에서 벗어나게 하는 도구가 될 것이란다.
공자께서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 라고 말씀하셨단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 짜고 단 것을 반복하여 먹는 것, 금연고 흡연을 반복하는 것, 음주 후 운전을 반복하는 것, 운동과 포기를 반복하는 것, 내 잘못은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반족하여 보이는 것, 사람들은 대부분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란다. 하지만 잘못을 고치려 노력하는 존재이기도 하단다. 그래서 희망이 있단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그 사람이 결국엔 리더가 된단다. - 최종엽 <공자의 말>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열 권을 소개해 달라고 갑자기 요청받는다면, 즉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지 않을 것 같단다. 그간 많은 책을 읽었음에도 기억이 나질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실제로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지내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단다. 오십이 되도록 가까이 두고 반복적으로 읽는 책이 열 권 정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바로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잠시 멈춰야 한단다.
책을 읽지 않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바꿔 보는 게 좋단다. 누구에게나 시간 부족이 독서를 못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로 생각하겠지만, 시간 없음은 또한 가장 그럴듯한 핑계이기도 하단다. 책 이외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매체들이 있지만, 책에는 책 고유의 기능이있단다. 다른 매체에서 얻기 어려운 정보와 통찰력, 사고의 확장을 책에서 얻을 수 있단다.
독서를 하지 않아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당장은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차이가 발생한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차이는 종종 우리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도 하단다. 세상과 단절된 고정관념으로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기도 하고, 축적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단다.
한 분야의 책만 읽어 왔다면, 이제는 바꿔 보는 게 좋단다. 지난 수십여 년 동안 전공 분야 혹은 전문 분야의 서적을 집중적을 바왔다면, 오십의 고개에서 시선을 다른 쪽으로도 확대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에도 벅찬 게 현실이란다. 반도체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기술자라면, 2, 30년 전기 전자 분야의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거란다. 마케팅 전문가로 일하는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 어떤 전문 분야도 다 비슷하단다.
전문성을 높이고 역량을 키우기 위한 전문 분야의 독서가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독서를 가미해 본다면 새로운 통찰력이 생길 수 있다는 의미이란다. 엔지니어가 인문학 책을 읽어 보면 색다른 통찰력이 생길 거란다. 마케팅 전문가가 역시 서적을 읽어봐도 마찬가지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논어>를 읽어 보면 어떤 통찰력이 생길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 왔다면, 이제는 바꿔 보는 게 좋단다. 다양한 분야의 독서로 상식 수준의 정보는 많아졌지만 업무나 일상에서 실제로 활용 가능한 역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실용 독서를 해보는 전략도 필요하단다. 만물박사가 되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분야를 조금 더 파고드는 집중돇가 자신만의 강점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단다. 세상의 수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다 읽을 필요도 없단다. 이제는 분야를 한정하여 깊게 읽는 독서가 필요하단다. 오십에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독서법이 필요하단다.
책만 읽었다면 이제는 조금 바꿔 보는 게 좋단다. 책 읽기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단다. 5분이 자투리 시간만 생겨도 독서에 몰입하여 1년에 수백 권의 책을 읽는 대단한 사람이란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분명 유익한 일이기는 하지만 혹여 수많은 책을 읽고도 어떤 결과나 셩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독서는 사치일 뿐이란다. 독서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계속 책 읽는 모습만 보여 주고 있다면, 독서가 취미이자 특기에서 머무를 뿐이란다. 오십이 넘어서도 쉼 없이 달려가는 설국열차처럼 그냥 독서에만 메달릴 거라면, 전략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거란다.
독서의 목적은 독서 자체가 아니란다. 실천이 없는 독서는 시간 사치에 불과하단다. 작은 변화라도 시작할 때란다. 읽기를 잠시 멈추더라도 실천의 길로 들어서야 한단다. 그게 진정한 독서의 길이란다.
저자는 오십이 넘어 <논어>를 읽기 시작했단다. 직장 생활 20여 년 동안 전공과 영어 서적을 제외하곤 읽은 책이 거의 없었단다. 새벽 출근과 매일 반복되는 늦은 퇴근 속에서 독서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단다. 퇴직 후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단다. 책을 읽지 않고는 비즈니스를 해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고 독서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했단다. 그러며 오십을 넘겼고 독서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단다. 어차피 세상의 책을 다 읽지 못한다면 분야를 정해 전문성을 키우는 독서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단다.
우연히 <논어>를 접했고 읽게 되었단다. 두꺼운 <논어>를 간신히 다 읽어 내니, <논어>를 풀어쓴 책이 궁금해졌단다. 여러 저자들의 책을 읽다 보니, 조금 더 전문적인 책을 찾아 보게 되었단다. 시간이 지나며 단순히 읽기를 넘어, 원문을 쓰고, 몇 구절씩 외우면서, 글까지 쓰게 되었단다. 글을 모아 책을 내고 책을 바탕으로 강의까지 하게 되었단다. 강의는 더 넓고 깊은 독서를 요구했단다.
<논어>뿐만 아니라 <맹자>, <중용>, <대학>도 읽어야 했단다. <주역>과 <시경>에도 관심이 가고 일본 학자가 쓴 논어 책과 중국 저자가 쓴 논어 책과 서양 학자가 쓴 논어 책에도 관심이 갔단다. 순자, 한비자, 묵자, 장자, 노자에 관련된 책들도 눈에 들어왔단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고전이 무엇인지를 조금 터득하게 되니 동양 고전을 지나 서양 고전들도 궁금해졌단다.
공자께서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는 유덕자인가?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인가? 오십이 넘기면서 자문해 본단다. 덕을 열 개의 단어로 풀어쓰면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 자(慈), 우(友), 공(恭), 효(孝), 용(勇)이란다. 이를 모두 아울러 덕이라 한단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예의를 지키는 사람, 지례로운 사람, 어떤 일을 해도 믿을 만한 사람, 아랫사람에게 자상한 사람, 친구 간에 우정이 돈독한 사람,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 손윗사람에게 공손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이 덕을 가진 사람이란다. 덕 있는 사람의 도덕적 기준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단다. 그러니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의로울 리가 없단다.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할까?
춘추시대 공자께서 제시한 도덕적 기준에 들기는 어렵겠지만, 이 열 가지 덕성 중에 단 한 가지라도 가졌는지 자문해 본단다. 오십에 어렵다면 육십, 칠십이 넘어서도 어려울 거란다.
잇속을 위해 만난 사람은 잇속이 사라지면 더 만날 이유가 없어진단다. 월급 때문에 출근한다면 월급이 사라지는 날 출근할 이유가 사라진단다. 그러니 월급이 300만 원이고 300만 원만큼의 노동을 하면 된단다. 일한 만큼 주고받는 게 가장 공평하단다. 하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기대는 늘 다르단다. 주는 사람은 일한 만큼의 월급을 주고 싶지만, 받는 사람은 받는 만큼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주는 사람에겐 늘 월급이 많아 보이고, 받는 사람에겐 늘 월급이 적어 보인단다. 사장과 사원의 관계가 그렇단다. 사장이나 사원이나 외롭기는 마찬가지란다. 팀장과 팀원의 관계나 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팀원은 팀장의 칭찬이나 격려에 늘 목말라한단다. 진심 어린 조언과 세심한 배려가 없음에 늘 아쉬워한단다. 분기에 한 번만이라도 팀원의 처지를 고려햐 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단다. 팀장은 어쩌면 그렇게도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할까 얄밉단다. 팀장은 팀원을 칭찬하고 싶어도 칭찬할 구석을 찾지 못해 늘 아쉽단다. 시간만 나면 개인적인 일에 집중하고 딴 생각을 하는 팀원에게 어떤 세심한 배려를 더 해야 할지 답답하단다. 분기에 한 번만이라도 팀원 전원이 의기투합하여 성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불평불만만 토로하니 갑갑하기만 하단다. 목표 달성이나 성과에는 생각이 없고, 매일 퇴근 시간만 재고 있는 팀원이 얄밉단다. 팀장이나 팀원이나 상사나 부하나 외롭기는 마찬가지란다.
부모자식 관계나 형제자매 관계도 그렇단다. 자식은 유산 상속에만 관심이 있고 부모 봉양에는 소홀하단다. 부모를 모시는 데 장남차남이 무슨 상관이냐며 형은 동생에게 미루고 동생은 형에게 미룬단다. 병들고 몸 불편한 부모를 요양원에 맡겨 놓고 자식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여행을 떠난단다. 그러면 형은 동생을 원망하고 동생은 형을 원망한단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재산 상속 가족회의가 열리면 울고불고 싸움이 벌어진단다. 내가 장남인데 내가 장녀인데 따지고 든단다. 내가 더 부모님께 잘해 드렸다고 동생들이 덤빈단다. 왜 살아계실 때 유산 정리를 깨끗하게 해 놓지 못했냐고 죽은 부모를 원망하기도 한단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면 남남처럼 서먹서먹해지고 만단다. 부모이나 형이나 동생이나 외롭기는 마찬가지란다.
성인이 된 이후 오십이 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단다. 늘 사람들과 함께였지만 외롭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었단다. 학창 시절이나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퇴직 후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지금까지 그랬다면 오십 이후에도 모습이 그려진단다. 가까운 친척들을 원망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사회를 원망하면서 힘없이 살아갈 모습이 그려진단다.
우리는 모두 셰상에 홀로 왔지만, 함께 살아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단다. 홀로 왔기에 혼자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단다. 나말 잘하면 되고, 나만 똑똑하면 되고, 나만 성실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단다. 그러니 모두 남이 되었단다. 매일 함께 먹고 함께 지낸 직장 사람들도, 형제들도 거의 남이 되었단다. 오십에 바다 한가운데 홀로 남은 섬이 되었단다. 오십이라는 나이가 될 때까지 나만 생각하며 살아온 게 문제란다. 내가 문제란다. 내가 문제였단다. 직장이 문제가 아니라, 상사나 부하가 문제가 아니라, 형이나 동생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단다.
<논어> 헌문편을 보면, 천리마는 날렵한 생김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말이 아니라 훈련과 조련으로 얻어진 덕성을 가진 말이라 한단다. 보통의 말이 천리마가 된다면, 보통 사람이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일 거란다. 덕울 키운다는 건 함께 살아가는 운명을 지닌 우리의 삶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거란다. 삶의 외로움과 외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다. 좋은 이웃을 얻는 방법은 이웃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단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단다. 형제자매의 사랑을 다시 받는 방법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단다. 선배나 고객에게 사랑받는 방법은 그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단다. 외로웠던 과거였지만 외롭지 않게 미래로 바꾸는 방법은 환경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있단다.
혹여 지금까지 나와 우리 식구만이 삶의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타인도 그 기준에 추가할 여유가 필요하단다. 지금보다 더 큰 행복과 기쁨으로 돌아갈 거란다. 인, 의, 예, 지, 신, 자, 우, 공, 효, 용 중에서 단 한 가지만 실천할 수 있어도 그럴 거란다.
번지가 지혜를 물었을 때 공자께서 "백성들이 외로움에 이를 수 있도록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그를 멀리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하고,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어려움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한다면 어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셨단다.
제자 번지는 공자의 수레를 자주 몰았단다. 공자보다 서른여섯살 어린 그는, 농사 짓는 방법을 질문하여 스승으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단다. 성품이 거칠고 이익을 잘 챙기는 인물로 표사되기도 했단다. <논어>에는 인이라는 말이 족히 100번은 넘게 등장하는데, 그중 세 번이 제자 번지의 질문이었단다.
공자의 대답은 매번 달랐단다. 번지의 상황과 수준에 맞게 가르쳤단다. 이를테면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할 때는 공경하며, 사람을 대할 때는 충심으로 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선사후득, 선난후획으로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이익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단다.
사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이란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다. 믿음과 가치에 따라 종교나 신앙을 따르되 너무 빠져들지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란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일을 대할 때는 공경하는 하음을 가지며, 함께하는 사람들을 충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이란다. 선한후획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이란다.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하고 보답은 뒤로 돌리는 사람이란다. 힘든 일이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먼저 노력하는 사람이란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단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해 상대의 단점이나 잘못을 들춰내며 일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단다.
오십에 삶의 균형점을 생각해 본단다. 공자는 마흔에 지자(知者)가 되었고, 오십에 인자(仁者)가 되었단다. 사십에 불혹이 되어 흔들림을 잡았으며, 오십에 천명을 얻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밖으로 펼폈단다. 그런 공자를 따랐던 제자 자공은 지자의 위치에 올랐고 안희는 인자의 위치에 올랐단다. 지혜로운 자공은 격변의 춘추시대를 살면서도 부귀와 공명을 이뤄 냈고, 안희는 비록 단명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공자학당 최고의 제자로 남아 동양 오성의 명예를 얻었단다. 자공과 안희의 위치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종종 공자의 개인 기사 역할을 했떤 번지에게 준 스승의 가르침에서 오십의 어진 마음을 생각해 본단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거란다. 사랑하는 마음이 인의 마음이란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렵지 않단다.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자연스럽단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늙어 가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스럽단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인의 마음이란다. 사랑하기 어려운 조건의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마음은 실천하기 쉽지 않단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이 아니라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을 깨워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바로 인의 마음이란다.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의 마음이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람을 주는 마음이 인의 마음이란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이 인의 마음이란다. 용서해 주는 마음이 인의 마음이란다. 식구끼리의 용서도 쉬운 일이 아닌네, 하물며 남을 용서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란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도 기껏해야 2,3개월에 한 번 정도밖에 인을 실천할 수 없었단다. 보통 사람들에게 인의 실천은 너무 어려운 일이란다.
오십에 인을 말하고 있단다. 오십이 되기 전에는 인을 실천할 겨를이 없단다. 오십 이후에는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인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균형 잡힌 행복한 인생이 될 거란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람을 나누는 것,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는 것, 어렵지만 인생 후반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적이란다. 어쪄면 죽음에 이르러도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거란다. 용서받기 어려운 상대에게 용서받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기쁨과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거란다. 누군가에게 그 최고의 기쁨과 사랑을 주는 주인공으로 단 한 번이라도 선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거란다.
선사후득, 인은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이익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이란다. 인은 타인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걸 말하지만, 이익은 뒤로 하고 어려운 일에 먼저 솔선수범하는 걸 말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현실은 늘 반대란다. 일하기 전에 미리 명확한 이해득실을 계산하지 못하면 멍청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곤 한단다. 어떤 이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권력과 정보를 이용해 자기 몫부터 두둑이 챙기기에 급급하단다. 그러니 인이 어려운 거란다. 보통 사람들이 근접하기에 그 벽이 너무 높을 수 있단다. 따라서 인을 행하기만 하면 시대를 막론하고 특별한 사람이 된단다.
세상에 어려운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단다. 확실한 보상도 없는 일을 선뜻 나서서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단다. 하지만 누군가 그 어려운 일을 해 준다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 될 거란다. 인생 후반에 단 한 번이라도 어려운 일을 해낸다면,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이 시작될 거란다.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건 뒤로 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 할 수있단다.
공자께서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에 사함이 없다고 하겠다"라고 하셨단다.
지구를 강타한 콜나 감영증과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는 또 하나의 열풍이 불어 닥쳤단다. 사라질 줄 모르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매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줬던 일명 '트로트 바람'이란다. 중장년층의 노래인 줄만 알았던 트로트가 청년들에게도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단다. 애틋하면서도 직설적이고 간절하면서도 흥에 넘치는 트로트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단다.
<시경>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으로, 춘추시대의 노래를 정리해 놓은 책이란다. 주나라 추기로부터 춘추시다에 이르는 추천 수의 노래 가사 중에, 후대에 전해도 좋을 만한 곡만 뽑아 공자께서 편집했단다. 남여 간의 절절한 사랑 노래를 비롯하여 귀족들의 노래, 나라의 큰행사가 있을 때 부른 노래, 생활과 감성에 좋은 영향을 주는 노래 등 300여 편의 노래가사 모음이 바로 <시경>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든 마음을 보듬어 준단다. 아픈 사람에게는 위안을 주고, 즐거운 사람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단다. 음악과노래는 각종 행사의 품격을 높여 주며, 흩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이게 한단다.
<시경>은 작품 형식으로 구분하여 풍(風), 아(雅), 송(頌), 부(賦), 비(比), 흥(興)으로 나눌 수 있단다.
풍은 지방을 나타내는 노래로 노나라 노래는 노풍, 제나라 노래는 제풍이라 했으며, 아는 규범과 표준에 맞게 만든 노래를 말하며, 송은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였던 노래, 부는 직접적인 표현의 노래, 비는 다른 것을 연상케 하는 비유의 노래, 흥은 기쁨이나 슬픔의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한 노래란다.
공자는 <시경>에 수록된 300수의 노래 가사를 한마디로 순수하다고 평했단다. 사무사의 사(邪)는 '간사하다, 마음이 바르지 않다. 사악하다, 품행이 부정하다'라는 뜻이란다. 즉 사무사는 생각에 사함이 없다. 생각이 간사하지 않다. 생각이 바르다는 의미란다. 개인적인 의도나 특정 집단의 목적이 들어 있지 않는 기쁨과 노함, 슬픔과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노래 가사가 바로 <시경>이라는 의미란다
남녀노소, 부귀빈천을 불문하고 늘 바른 생각만 할 수는 없단다. 자기도 모르게 나쁜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단다. 그러니 공자께서 시와 노래라는 좋은 도구를 이용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시경>을 편찬한 거란다. 특히 리더들의 생각에 사특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시경>을 지었단다. 국가나 조직의 리더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특히 더 중요하단다. 리더의 생각과 사상이 바르면 가정, 사회, 국가의 다양한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사특함이 없는 노래와 함께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공자의 숨은 전략이 <시경>에 있단다.
고려, 조선의 문무백관들은 조정이나 군영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책을 일고 시를 쓰면서 하루를 정리했단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전쟁 통에도 매일 일기를 쓰고 시를 쓰면서 가슴속에 번민을 풀었단다. 율곡 이이도 마찬가지였단다. 위로는 변화를 싫어한 왕 선조를 모시고 아래로는 힘없고 미래 없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불철주야 뛰었던 그도, 조정에서 퇴청하면 글을 쓰고 시를 쓰면서 답답함을 풀었단다. 물론 같은 관료이면서도 시 한 줄, 책 한 권 남기지 못한 문무백관이 많이 있었단다. 그들은 업무의 번민과 답답함을 술과 기생으로 해소했을지도 모른단다. 백성들은 죽건 말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절을 가지리 않은 채 자신들만의 풍류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을 거란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욕하는 줄도 모르고 다시 못올 기회를 만끽하며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을 거란다.
오십에 생각해 보니, 똘똘한 집 한 채만이라도 남겨지기를 바라며 모든 시간과 노력을 다한 지난 시간의 아쉬움이 남는단다. 노래, 그림, 책, 여행 등 그 어떤 작은 여유도 없이 집 한 채에 모든 걸 포기해야 했던 지난 시간이 너무 아쉽단다. 제대로 된 취미 생활도 하나 못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이 미워진단다.
1년에 단 하루도 개인적인 사유로 휴가를 내지 않았단다. 매년을 그렇게 보냈단다. 감기나 몸살도 가능하다면 주말이나 휴가 기간에 맞추고 싶을 정도였으니, 가족을 위한 주말 나들이는 꿈에 불과했단다.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내고 오십에 서니 답답하기만 하단다. 부부의 시간과 아이들과의 시간, 부모님과의 시간과 형제자매들과의 시간, 친구들과의 시간을 모두 그 똘똘한 집 한 채에 저당 잡히고 말았단다. 미래의 똘똘한 집 한 채에 현재의 모든 시간이 저당 잡히고 말았단다. 출근을 제외한 모든 개인적인 일이 어색했단다.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것도, 글을 쓰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머리를 기르고 싶던 일도, 청바지를 입고 싶었던 일도, 기타를 배우고 싶었던 것도, 노래를 배우고 싶었던 것도 모두 저지되었단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똘똘한 집 한 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단다.
나다움이 무엇인지 가끔 혼란스럽단다. 지금까지의 삶이 나다운 삶이었는지 나답지 않은 삶이었는지 헷갈린단다. 부모 형제들의 바람대로 살아온 건 아닌지, 선생님의 바람대로 살아온 건 아닌지, 사장님의 경영 철학과 사상들의 요구대로 살아온건 아닌지, 미디어에서 요청하는 대로 살아온 건 아닌지, 똘똘한 집 한 채만이라도 남기를 바라며 살아온 건 과연 누구의 삶인지 궁금하단다.
노래도, 그림도, 책도, 여행도, 어떤 여유도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이 누구답게 살아온 삶인지 궁금하단다. 내 삶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단다. 오십 이후에도 내 삶인 듯 아닌 듯 그렇게 게속 가야만 하는 것인지, 조금 어색하겠지만 나의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인지, 스무 살의 고민을 다시 하게 된단다. 어쩌면 2500년 전의 <시경> 속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르겠단다.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 공자께서 "너희들의 뜻을 각자 말해 보거라"라고 하셨단다. 자로가 말했단다. "수레와 말과 옷과 가벼운 갖옷을 친구들과 함께 쓰다가 다 낡아져도 유감이 없습니다" 안연이 말했단다. "선행을 자랑하지 않고, 수고로운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자 합니다" 자로가 말했단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단다.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친구들은 신의를 지키게 하고, 젊은이들은 품어 주고 싶다"
공자가 성격이 다른 두 제자에게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물었단다. 성격 급한 지로가 먼저 "저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좀 폼 나게 살고 싶습니다.최고급 승용차를 몇 대 준비하여 친구들과 함께 이곳저곳 명소를 다니며 즐기고 싶습니다.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최신 유행의 멋진 옷을 입고, 고급 호텔의 격조 있는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술과 음식을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여유 있고 즐거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의 모든 돈을 친구들과 함께 다 써버린다 해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답했단다.
안연은 자로와는 다른 소먕을 이야기 하는데, "저는 제가 좀 잘한 일이나 좋은 성과를 낸 일이 있더라도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하기에 귀찮거나 힘든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했단다.
두 제자의 포부를 들은 후 공자께서 자신의 포부를 "나는 세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우리 사회의 어르신들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싶다. 집안에서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처럼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마음 편하게 지낼실 수 있도록, 그런 여건을 만들어드리고 싶다. 다음으로는 우리와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어, 상호 간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미래 세대인 젊은 사람들을 관심과 사랑으로 포용하고 싶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미래 세대들을 마음껏 품어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라고 말했단다.
<논어>가 주는 대답은 의외로 간결하단다. 자로는 즐겁게 사는 것을 추천했단다. 안연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겸손하게 사는 걸 제안했단다. 공자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친구에게는 신의를 지키고, 젊은이들은 품어 주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단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명제가 주는 의미는 무겁지만 사람들의 삶은 무겁지 않단다. 모두가 훌륭한 삶을 살지는 못한단다. 각자의 위치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를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란다. 남들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가르는 확실한 기준은 없단다.
우리의 삶을 이등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반과 후반이란다. 대부분의 운동 경기가 그렇듯,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전반전을 마치고 나면 결과에 아쉬움이 남는단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곤 한단다. 그래서 선수들은 하프타임에 고치 곁으로 다시 모여든단다. 후반전의 전략과 계획을 듣기 위해서란다. 하프타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후반전의 결과가 크게 바뀐단다. 하프타임은 짦은 휴식 시간이라기보다 전략을 구상하여 역전극을 만들어 내는 활명수 같은 시간이라란다. 하프타임을 잘 활용하면 승리의 가능성이 올라간단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이와 비슷하단다.
인생의 하프타임은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단다. 사십이 될 수도 있고, 오십 혹은 육십이 될 수도 있단다. 서른 즈음에 시작된 전반전을 치르다 보면 어느 정도 매듭이 지어져 가는 걸 느낀단다. 그게 사십이면 사십부터, 오십이면 오십부터, 육십이면 육십부터 몇 년간을 하프타임이라 생각하고 전략을 세우면 된단다.
10분, 20분 운동 경기의 하프타임은 정해져 있지만 인생의 하프타임은 정해져 있지 않단다. 1년이 될 수도 있고 4년이 될 수도 있단다. 인생 후반의 5퍼센트 시간을 하프타임으로 쓴다면, 30년이면 1년 반이고 40면이면 2년이란다. 물론 2년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단다. 계획과 구상만 한다면 짧지 않은 시간이 되겠지만, 새로운 준비까지 생각한다면 2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닐 거란다. 그러니 딱 2년 혹은 3년을 정해 놓을 필요는 없단다.
중요한 건 인생의 하프타임을 이용하여 인생 후반을 계획해 보는 것이란다. 인생 전반을 되돌아보는 거란다. 내가 살아온 삶은 그 누구도 살아 보지 못한 유일한 삶이란다. 내가 살아갈 삶 또한 누구도 살지 못할 하나뿐인 삶이란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것도 다가올 삶을 계획해 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란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자로의 삶을 따를 수도 있단다. 안연의 삶을 인생 후반의 기준으로 삶을 수도 있단다. 공자의 뜻처럼 살아갈 수도 있단다. <논어>에서 말하는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따르지 않아도 된단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게 최고의 삶일 거란다.
잊지 말아야 할 건, 타인의 삶을 따라도 좋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지만 결정은 해야 한다는 거란다. 기준을 정해 놓고 사는 것과 무작정 살아가는 대로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란다. 기준은 정해야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단다. 항로를 정해야 항로에서 벗어나지 않는단다. 열심히 가는 것에만 집중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확률은 언제나 누구나 제로에 가깝단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세상 그 누구도 힘들지 않는 사람은 없단다. 부자도 힘들고 빈자도 힘든단다.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나 참기 어려운 건 비슷하단다. 노인도 힘들고 아이도 힘든단다. 여자도 힘들고 남자도 힘든단다.
반면 즐겁다고 생각하면 세상 그 누구도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단다. 부자도 빈자도 노인도 아이도 여자도 남자도 삶이 즐겁단다. 기준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는 데 있단다. 인생 하프타임에 해결할 가장 중요한 숙제 중의 하나란다.
공자께서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라 말씀하셨단다.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있단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란다. 이 요산요수의 출처가 바로 <논어> 옹아편 21장이란다. 락은 좋아할 요, 즐길 낙, 노래 악으로 쓰인단다. 여기서는 '좋아하다'는 뜻으로 쓰였단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 물론 즐겁다는 뜻으로도 지자의 즐거움은 물과 같다고 해석하기도 한단다. 마찬가지로 인자는 산을 좋아하니 인자의 즐거움은 산과 같다고 할 수 있단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동적이며 즐겁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정적이며 오래 산단다. 지자는 책과 배움을 가까이하여 지식이나 지혜가 많은 사람, 인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포용하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란다. 물은 활동적으로 쉼 없이 움직이는 특징을, 산은 움직임은 없으나 많은 것을 포용하며 고용한 모습을 지니고 있단다.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는 동적인 특징을 지녔단다. 마치 강물이 쉼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책이 출간되고, 24시간 쉼 없이 새로운 늇나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단다. 새로운 책과 정보를 통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선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단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공을 대표적인 지자로 꼽는단다. 그 어떤 제자보다도 활동적이었던 자공은, 새로운 정보를 늘 먼저 접하고 그 정보를 활용하여 결국 노라라 최고의 부자가 된단다. 노나라는 물론 춘추시대 열국을 다니면서 활동하는 외교가로서도 이름을 날린단다.공자의 제자 중 누구보다도 정치. 외교. 경제의 전문가로 즐겁게 인생을 살아 간 지자였단다.
지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늘 변치 않는 정 적인 인자의 마음이란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마음이 인자의 마음이란다. 부모의 바음이나 용서하는 마음은 정이란다. 사랑받은 느낌도 행복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더 행복하단다. 용서받는 느낌도 편안하지만 용서하는 마음은 더 편안하단다. 행복하고 편안한 사람이 더 건강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란다.
지자와 인자에 단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자보다는 인자가 더 성숙한 단계로 평가받는 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란다. 몸을 수편하는 것보다 마음을 수련하는 게 더 어렵단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공자의 제자 중 안회를 대표적인 인자로 꼽는단다. 안빈낙도가 일상이었떤 안회는 가난했지만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공자 제일의 제자였단다.
옛사람들은 지자요수 인자요산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단다. 어려운 때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단다.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직장인을 예를 들어 보면, 30년 직장 생활을 한다고 가정하면, 전반기 15년은 지자요수를 기준으로 삼아 보는 거란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지식과 정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단다. 쉼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학습과 정보에 민감해야 한단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모르는 게 생기 때는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야 한단다. 누구보다도 생동감 있고 활력 넘치는 파이팅을 보여야 한단다. 어느 조직이든 처음에 누구나 어색하고 궁금한 게 많단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는 조직 생활의 긴 기간을 즐겁게 넘기기가 쉽지 않단다. 이왕 할 거라면 끌려가서 하는 게 아니라 활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배우면서 해결해 나가는 게, 훨씬 즐거운 직장 생활의 기술이란다. 그게 바로 지자요수의 삶이란다.
후반기 15년은 인자요산을 기준으로 삼아 보는 거란다. 지식에서 사람으로 눈을 돌여야 할 때란다. 조직에서의 일과 성과는 기술과 장비로만 가능하지 않단다. 아무리 최신 설비에 최고의 기술을 사용한다 해도,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없단다. 일은 사람이 한단다.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단다.
조직은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단다. 누구에게나 고민이 있단다. 누구나 합당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단다. 아니 그렇게 해 줘야 한단다. 조직의 윗자리로 올라가고 있다면 인자의 마음이 필요하단다. 법과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마음 기술이 필요하단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단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도 거의 없단다.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 참고 또 참으면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그를 얻을 수 있단다. 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얻는 건 그의 세상을 얻는 것과 같단다. 한사람의 세상을 얻는 건 세상 전부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면 50세까지는 지자의 삶이, 50세 이후부터는 인자의 삶이 더 어울린단다. 지금까지 빠르고 치열하게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타인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여유와 도량을 지닌 채 살아가 보는 게 어떨까. 더 행복한 삶이 될 거란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자의 삶을 기준으로 인생 후반을 시작한다해도, 지자로서의 자세외 태도가 필요치 않은 건 아니란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면 일정 기간 다시 활동적으로 탐색하고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어떤 일을 하든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학습과 정보가 꼭 필요하단다. 그 시기가 50세건 70세건 마찬가지란다. 인생 전반을 지자의 방식으로 살아왔다면, 인생 후반을 인자의 삶을 기반으로 지자의 방식을 취해 보면 좋겠단다. 분명 효과적일 거란다.
공자께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중 선한 자에게선 선함을 따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나를 고치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단다.
"지금 젊은 사람이라면 월급의 10퍼센트만 주식에 투자해도 노후 준비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식은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고, 하루라도 늦게 팔아야 합니다.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투자한 사람이며, 10퍼센트만 오르면 팔고 10퍼센트만 떨어지면 손절매하는 건 투자가 아니라 카지노 게임입니다. 미래에 대한 투자를 뒤로 미루고, 소비에 우선순위를 두는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동학 개미 운동'의 의병장으로 불리는 메리츠자산우용 존 리 대표의 말이란다.
언제부터인가 부자를 보면 신경질이 났단다. 전후좌우 따져 볼겨를도 없이 화가 났단다. 젊은데 부자인 사람을 보면 더욱 짜증이 났단다. 노력 없이 부자가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단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잘 풀리는 걸 보면 질투와 시기심에 마음이 쓰리고 괴로울 때가 많았단다. 사촌이 딸을 사도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잘나가는 동창이나 동료들을 볼 때는 오죽했을까? 단 한 번이 누락도 없이 승진하면서 특진의 기회까지 독차지한 동료에게, 겉으로야 축하했지만 속은 얼마나 쓰렸을까? 좋은 학교를 나오 것도 아니고 뭐 하나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동료가 그랬을 때는 더욱 괴로웠단다.
아랫사람이나 후배들을 적지 않게 무시했단다. 그들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듣고 싶지 않았단다. 듣는 시늉을 했지만 제대로 듣지 않았단다. 시간이 갈수록 높아만 가는 나만의 성에 결국 포박되고 말았단다. 핑계만 늘어 갔단다. 나의 부진함은 부모, 학력, 배우자, 아이들, 건강 때문이지 나의 책임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핑계 대기에 여념이 없었단다. 상사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존경하지도 않았단다. 일 잘하는 동료를 질투하지는 않았지만 인정하지도 않았단다. 일 잘하는 부하에게 미소는 보냈지만, 진심으로 어린 칭찬이나 격려를 전하지 못했단다. 그런데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두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중 선한 자에게선 선함을 따르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나를 고치면 된다"라고 말한단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선생이 될 수 있다는 말이란다. 잘난 사람에게선 잘남을 배우고 못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반면 교사로 삼아 나를 고치면 된다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가, 가까운 가족이나 동료, 상사, 선후배들을 어떻게 대했는가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단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단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단다. 능력 있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고, 가난하고 볼품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단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단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배우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단다.
지금 원했던 것가 넘 많이 떨어진 곳에서 힘들게 살고 있다면, 그 원인은 타인에게 있지 않단다. 부자를 보면 신결질을 낸 것이나 승진한 동료를 보며 마음이 괴로웠던 건 그 부자나 동료가 아니라 나에게 원인이 있는 거란다. 상사를 무시하고 따르지 못한 건 그 상사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이유가 있는 거란다. 직장 상상가 벽이 되기도 하고 악마처럼 보일 때가 있단다. 밉상인 상사를 보며 나는 나중에 절대로 저런 상사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단다. 그때 필요한 게 바로 인내란다. 아무리 지독한 상사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단다. 그 지독한 상상도 시간이 지나 보면 자르치는 스승이 되어 있단다.
지금까지는 기술이 자신이고 영어와 학력이 자본이었지만, 오십이 넘으면 사람이 귀한 자산이 된단다. 건강한 아내, 건강한 남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귀한 존재란다. 존 래 대표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작은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경제 선생님이란다. 그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이미 스승이란다.
사람을 통한 배움이 진짜란다. 학위를 위한 학문만큼이나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게 살아 있는 공부란다. 목표를 정하면 그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단다. 실패한 사람들도 보인단다. 강의나 강연에 목표를 뒀다면 우리 주변에도 강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단다. 책을 통해 강의를 배울 수도 있지만, 강사를 통해 배우는 게 더 효율적이란다. 강의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강의를 잘하는 기술을 배우고, 강의를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못하는 원인을 배울 수 있단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단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모두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란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게 배움이란다. 특히 나이들어 누군가에게 배우는 일은 더욱 그렇단다. 내 생각을 품고 배움에 임하면 쉽지 않단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면 그 결과 역시 보나 마나란다. 마시다 남은 콜라가 반 이상이나 들어 있는 잔에 아무리 맛있고 향긋한 커피를 더한다 해도, 그건 커피도 콜라도 아닌 마시기 어려운 액체일 뿐이란다. 내 나애, 학력, 경력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면 아직 배움의 자세가 덜 됐다고 생각해야 한단다. 그런 성인 학생을 가르치고 싶은 선생님도 없겠지만 가르침의 결과도 허망할 거란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디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단다. 경공은 "좋은 말입니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답지 않아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해도 내가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단다.
공자가 30대 초반에 제나라를 방문했을 때 제나라 제후 경공을 만났단다. 경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라고 답했단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하고, 대장은 대장다워야 하며, 사장은사장다워야 한단다. 장관은 장관다워야 하고, 사무관은 사무관다워야 한단다. 임원은 임원답고, 팀장은 팀장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어야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한단다.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고, 형은 형답고, 동생은 동생다워야 한단다.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면, 국가 재정이 아무리 충분하다 해도 결국 국가 경영은 실패하고 만단다. 대장이 대장답지 못하면, 군 장비와 병력이 강하다 해도 국난의 위기에서 국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단다. CEO가 CEO답지 못하면, 기업 자금이 아무리 충분해도 그 규모와 상관없이 기업 경영은 실패하고 만단다. 장관이 장관답지 못하면,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국가 경영은 휘청거린단다. 사무관이 사무관답지 못하면, 정책다운 정책이 나오기 어렵단다. 중대장이 중대장답지 못하면, 중간부터 무너진단다. 임원이 임원답지 못하고 팀장이 팀장답지 못하면, 기업은 흔들리고 만단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답지 못하면, 가정 파탄은 시간 문제란다.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가정의 행복은 멀리 물 건너간 셈이란다.
절 권력을 가진 임금이나 대통령이라 해도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충성하는 신하나 각료를 두기 어렵단다. 혹여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다 해도 아버지는 아이들의 거울이 되어야 한단다. 자기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식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가져다 댄다면, 겉으로야 따르는 척하겠지만 속으로는 곪기 시작하여 결국엔 터지게 되어 있단다. 자식이 잘못되는 건 물론 자식의 탓도 있겠지만 부모의 탓이 훨씬 더 크다 하겠단다. 그러니 임금과 아버지가 먼저고 신하와 아들이 그다음이란다. 임금과 아버지는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세상엔 권력과 힘을 가지고도 되지 않는 게 너무도 많단다. 권력과 힘으로 일정 기간 유지할 수는 있어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단다. 가진자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권력과 힘의 영향력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단다.
기기교교(企企敎敎)란다. 기업은 기업다워야 하고, 학교는 학교다워야 하며, 종교는 종교다워야 한단다. 종교가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처럼 운영되어선 안 된단다. 학교가 기업이나 종교 단체처럼 운영되어서도 안 된단다. 기업 역시 학교나 종교 단체처럼 경영해서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단다. 기업은 선의 경쟁을 기반으로 해야 한단다. 사장이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사장다운 생각이 아니란다. 학교는 온고지신의 장이 되어야 한단다. 전통과 문화를 가르치면서도 미래를 위한 혁신적인 사고와 지식을 함양해야 한단다. 학교나 교육이 경쟁을 부추기면서 부자들의 향연이 되어서는 안 된단다. 믿음이 다르다고 다른 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단다. 믿음이 돈독하지 못하다고 해서 무시한다거나 애처롭게 생각해서도 안 된단다.
인생 후반을 어떻게 본는 게 인생 후반답게 보내는 것일까? 여러 조건이나 개인의 노력이 잘 어울려 나름 만족스럽게 살아왔고 또 달아가고 있다면, 앞으로의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까? 어느 조건 하나 제대로 맞는 게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올 수 없었고 지금 역시 불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앞으로의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까?
인생 전반은 전반답게, 인생 후반은 후반답게 사는 게 어떤 걸일까? 인생 전반의 시작은 누구나 부모의 역할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단다. 시작의 조건이 다르면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처음 살아가는 삶이기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단다.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가야 한단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잘못되고 어려워지면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한단다. 하지만 젊음과 힘이 있기에 밀고 나간단다. 그렇게 사십을 넘기고 오십을 넘기며 인생의 언덕을 넘어간단다.
인생 전반은 잘되면 내 노력 덕분이고 못되면 조상과 환경을 탓할 수도 있지만, 인생 후반은 다르단다. 잘해도 내탓, 못해도 내 탓이란다. 이제는 인생 전반이라는 예행 연습을 지나 온전히 내 의지와 목표와 도전으로 만들어지는 삶이기 때문이란다. '처음이라서, 어려서'라는 핑계가 이유일 수 없단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었다면 계속 이어가면 된단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단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지금의 50대에게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거란다. 50여 년 전 50대에겐 가능하지 못했던 시간이 우리에겐 가능해졌단다. 마음을 돌려 전략을 다시 짜면, 충분히 행복할 인생 여정을 만들어 갈 수 있단다.
4강. 성숙
자공이 물었단다.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께서는 "그것은 '서'라는 말이다. 자기가 바라지 않은 것은 남에게 베추지 않는 것이다"라 하셨단다.
평생 삶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간결한 말을 하나 알려 달라는 제자 자공의 말에, 공자는 '(恕0'라고 답했단다. 자공이 바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공자의 추가 설명이 이어진단다. 자기도 바라지 않는 바라면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단다. 내가 싫다면 타인도 싫은 것인즉, 상대가 싫어하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란다. 쉽게 말해, 욕 듣는 게 싫으면 욕하지 말라는 뜻이란다. 서는 여심(如心)이란다. 같은 마음이란다. 너와 나의 마음이 같아지는 게 바로 서란다. 그러니 서는 배려, 공감, 용서, 사랑과도 같은 말이란다. 내가 욕먹는 게 싫은 것처럼 남도 욕먹는 게 싫단다. 그러니 남을 욕하지 말아야 한단다. 스스로는 욕먹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하고, 남들에게는 혹여 욕할 일이 생긴다 해도 최대한 자제를 해야 한단다. 역으로 생각하면 바로 이해된단다. 내가 욕먹을 짓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욕할 것이며, 혹여 내가 욕먹을 짓을 했음에도 좋은 말로 이해시켜 준다면 그가 다르게 보일 거란다. 내가 욕을 하면 욕먹는 상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욕하는 나도 기분이 좋지 않단다. 내가 그를 욕해서 그가 고쳐진다면 다행이지만, 욕먹고 잘못을 고치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그럴 사람이라면 아예 욕먹을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란다. 혹여 내가 잘못했더라도 상대로부터 보기 좋게 욕을 먹었다면 오히려 원망과 오기가 발동한단다. 그러니 욕먹을 사람이 욕을 먹어야지, 욕먹을 준비가 안 된 사람이 욕을 먹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더 커진단다.
내가 욕 듣는 게 싫으면 남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단다. 내가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면 남에게도 잔소리를 말아야 한단다. 거만한 사람이 싫으면 나도 거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단다. 그런데 그게 매우 어렵단다. 욕 듣는 걸 싫어하지만 남에게는 욕을 하게 된단다. 나는 잔소리 듣기를 싫어하지만 남에게는 그게 어렵단다. 쉽지 않기 때문에 평생 조심하며 살하는 공자의 가르침이란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상대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내가 움직이면 해결된다는 점이란다. 남을 조절하는 건 어려워도 내가 나를 조절하는 건 덜 어렵기 때문이란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禦人),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배풀지 말라', 내가 주체가 된단다. 변화의 주체가 나란다.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타인은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단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을 기소욕 시어인, '자기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베풀어라'라고 쓸 수도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단다. 내가 중심이 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준단다.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은데,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나도 좋으니 너도 하라'는 건 변화의 주체가 내가 아닌 상대가 된단다.
너무 적극적이면 간섭이 될 수 있단다.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간섭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하여 집요하게 강요하면 도리어 거부감이 커진단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만 잘하면 된단다. 내가 거짓말 하지 않고, 악플 달지 않고,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된단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걸 타인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단다. 가정 교육도 종교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단다. 배려하지 않는 사랑과 교육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쉽단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를 우리가 즐겨 쓰는 사자성어 '역지사지'로 바꿀 수 있단다. 상대방의 위치에서 생각해 보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그와 반대인 경우가 너무 많단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나에겐 너그러운 잣대를 쓰고 남에겐 깐깐한 잣대를 쓰는 '나너남깐', 나는 맞고 너는 틀린 아시타비 세상이란다.
조선 중후기의 당파 싸움이 그랬단다. 상대 당은 맞는 것도 틀린다 하고, 같은 당끼리는 틀린 것도 너그럽게 용납해 줬단다. 논어는 논어대로 현실은 현실대로였단다. 정의는 사라지고 힘과 권력있는 자들의 부정한 사회였단다. 지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단다. 사회도 개인도 마찬가지란다.
오십이 되었다고 해서 없었떤 서나 역지사지의 마음이 바로 생기진 않는단다. 하지만 조금 더 성숙한 인생 후반과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마음임에는 분명하단다.
성경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에 정신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대로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동서양의 현인들이 아주 오래전에 제시했던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술, 바로 서란다. 자신의 내적 성숙함을 인정받을 수 있는 단 한글자가 있다면, 바로 서란다. 역지사지고, 사랑이란다.
공자께서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라 말씀하셨단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고 한단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이 멋진 그릇을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하며 사는데, 공자께서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고 말한단다. 군자불기, 군자는 그 쓰임새가 한정된 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란다. 군자를 리더로 바꾸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단다. 리더는 쓰임새가 한정된 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란다. 1년 전과 지금이 같다면 리더가 아니란다. 리더는 변화를 추구하며 주도하는 사람이란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개선을 시도하고, 힘들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리더란다. 어떤 일을 해도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단다. 어떤 조건에서도 변화를 끌어내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 사람이 리더, 군자란다. 울산의 명품택시 기사 같은 분이란다.
울산에 사는 명품택시 기사 한 분이 TV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단다. 다른 택시에 없는 특별한 몇 가지가 그의 택시에 있단다. 뒷자석 팔걸이 박스를 열면 누구나 씹을 수 있는 다양한 껌이 가득들어 있고, 원하는 손님은 누구나 쓸 수 있는 택시 방명록이 한 권 비치되어 있단다. 껌을 씹으며 즐거운 대화가 시작되고 목적지에 다다르며, 짦은 인연이 아쉬워 손님들 대부분은 방명록에 기록을 남기며 즐거움과 고마움을 표한다고 한단다.
인생 전반 30년은 군인으로 살았고, 인생 후반 들어 택시를 운전한지 6년이 되었는데, TV 화면 속의 그는 행복해 보였단다. 택시 운전을 하는 사람이 모두 행복하진 않을 텐데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단다. 운전이라는 직업이 자칫 단조롭고 따분한 일일 수 있지만, 일에 대한 작은 생각의 변화가 평범함 기사를 행복한 명품기사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보여 주고 있단다.
그릇 기(器)자를 자세히 보면 그릇처럼 생긴 내모가 네 개나 들어 있단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네 개 정도의 각기 다른 그릇을 만들라는 옛 현인들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듯하단다.
인생의 첫 번째 그릇은 나를 위한 그릇이란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단다. 나라와 세상을 구하는 큰 인물이 되는 것도 좋지만, 우선 가지 자신부터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단다. 먼저 자기 한 몸이라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단다. 인생의 첫 번째 그릇은 대략 30세 정도에 완성된단다. 첫 번째 그릇이 잘 만들어지면 두 번째 그릇을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첫 번째 그릇이 삐긋하면 두 번째 그릇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된단다.
인생의 두 번째 그릇은 자기를 넘어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거란다. 건전한 직업과 일을 통해 자긴과 가족을 건사할 수 잇는 조금 더 큰 그릇으로 변화를 의미한단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인생의 두 번째 그릇은 보통 60세 정도에 완성된단다. 예전 같으면 두 번째 그릇에서 인생 그릇 만들기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세 번째 인생 그릇의 시기가 기다리고 있기에 오십이 되면 세 번쩨 그럿을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세 번째 그릇은 찌그러지고 만단다.
인생의 세 번째 그릇은 지역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그릇이 되는 일이란다. 일이 봉사와 수입이 되는 품이 큰 그릇이란다. 택시 기사에서 명품택시 기사로의 변화란다. 빵만 팔던 제과점 주인에서 지역과 사회에 건강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명품 제과점 주인이 되는 거란다. 선거철만 반짝하고 마는 직업 정치인이 아닌 진정으로 지역 사회를 사랑하고 기여하고 봉사하는 지역 정치인이 되는 거란다. 지역과 사회를 위한 인생의 세 번째 그릇의 완성 시기는 75세 전후가 아닐까 한단다. 경제적인 압박의 무게를 내려놓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지역과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건, 더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드는 작업이란다.
인생이 네 번째 그릇은 국가와 인류의 행복과 안정에 큰 도움을 주는 최고의 그릇이 되는 것이란다. 국가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세계적인 작가나 가수가 되어 인류에게 큰 울림을 주는 명품 그릇을 말한단다. 누구나 가능하진 않지만 누구에게나 문은 열려 있기에, 최고의 네 번째 그릇의 의미가 있단다. 크고 빛나는 그릇을 만드는 데 나이가 절대 변수는 아니지만, 인생 후반에 육십에서 구십까지 약 30여 년을 공들인다면 인생 전반에는 불가능했던 명작을 만들 수도 있단다. 인생 최고의 걸작을 만드는 데 비교적 자유로운 인생 후반, 30, 40년은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될 거란다. 75세에 90혹은 100세는 인생의 네 번째 그릇을 마무리하는 시기란다.
1970년 타계한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옹기를 다섯 단계로 나눴단다. 생리적 욕구, 안정의 욕구, 사랑 및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란다. 그 욕구 5단계와 군자불기는 공통점이 있단다. 인생의 첫 번째 그릇이 완성되며 사람들은 생리적 요구와 안정 혹은 안정의 욕구를 성취한단다. 두 번째 그릇을 만들면서 소속과 사랑의 욕구를 충복하며, 세 번째 그릇을 만들면서 존중과 존경의 욕구를 충족한단다. 인생의 네 번째 그릇을 만들며 자아실현의 욕구가 완성된단다.
우리는 오십이 될 때까지 많은 변화를 해 왔단다. 선생님에 의해, 학교라는 교육 시스템에 의해, 진학이라는 제도에 의해, 대학이라는 과정에 의해, 회사라는 조직에 의해, 사회라는 구조에 의해 변화를 강요당했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단다. 초등학생 때의 좋지 않았던 습관이 직장인이 되어서도 나타난단다. 군대에서 고친 줄 알았던 좋지 못한 습관이 마흠이 넘어서도 반복된단다.
인생 오십에서 하는 변화와 선택이 나의 변화와 선택이란다. 눈치나 조건을 살필 필요가 없단다. 인생의 마지막 젼화나 선택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란다.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명품 그릇을 만드는 데 지천명의 선택과 변화보다 더 매력적인 건 없단다.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을 해야 한다.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총명함을 생각하고, 안색에는 온화함을 생각하고, 용모에는 공손함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는 진실함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공경함을 생각하고,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그 후에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고, 이득을 볼 때는 의를 생각해야 한다"
조선 최고의 엘리크로 꼽히는 율곡 이이 선생은 아홉 번의 과거 시험에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단다. 조건의 젊은 학생들을 위한 교과서, <격몽요결>에서 그는 학문을 시작하는 초학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으로 공자의 유규사(有九思)를 들었단다. 아홉 가지 생각을 몸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천천히 읽어보면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기본이 아니라,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오십의 우리들에게 더 필요한 지침이 아닌가 한단다.
한 번을 보더라도 분명하게 봐야 어뚱한 소리를 하지 않는단다. 명확하게 본 건 바른 판단의 기준이 된단다.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봐야 한단다. 부정적 시각의 피해자는 그가 아닌 내가 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란다. 사람을 보는 눈도, 세상을 대하는 시각도 마찬가지란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세상은 부정적으로 보인단다. 검은색 안경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검은 세상이 전부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듯, 듣는 것보다는 보는 걸 더 신뢰한단다. 그중에서도 내가 본 걸 더 신뢰한단다. 그래서 한 번 본 것에 대한 기억을 씻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단다. 내가 본 것이기에 맞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대로 본 것이라면 틀릴 수도 있단다. 어떤 생각과 어떤 눈으로 보는가가 중요하단다. 지천명에 더 필요한 보는 기술이 바로 시사명이란다.
말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했단다. 듣는 게 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할 때가 있단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말을 알지 못하면, 그들이 아무리 간결하게 말한다 해도 그들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아니, 우리끼리 이야기해도 가끔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단다. 총명하게 듣는 것에 서툴기 때문이란다. 자기 생각대로 듣기 때문에 상대의 말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단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이 될 수는 없지만, 반이라도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줄 수 있다면, 아니 반의반, 네 마디에 한마디 정도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들어 준다면 관계는 놀랄 만하게 좋아질 거란다. 상사, 부하, 고객, 부모, 자식, 선생, 학생, 그 누구와 이야기할 때라도 마찬가지란다.
불통은 잘 듣지 않고 잘 듣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단다. 말하는 사람의 편에서 그의 입장이 되어 듣는 것, 그게 바로 총명하게 듣는 것의 시작이란다. 지천명에 더 필요한 듣기 기술이란다.
서른과 마흔에서는 볼 수 없엇떤 온화하고 편안한 인상을 주는 오십의 사람이 많단다. 서른과 마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롭고 무거운 인상을 주는 오십의 사람들도 적지 않단다. 30, 40대는 혼자서 일해도 성과를 낼 수 있지만, 50대에는 사람들을 통해 성과를 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그러니 리더라면 안색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해야 한단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 자주 찾아 온단다. 더 맣은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면,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얼굴을 펴야 한단다. 얼굴을 펴야 인생이 펴진단다. 상사의 얼굴이 온화해야 조직이 살아난단다. 가장의 얼굴이 온화해야 가족의 기가 산단다 지천명에 더 필요한 얼굴 관리 기술이란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공손함이 있어야 한단다. 리더의 행동거지와모습에는 공손함이 서려 있어야 한단다. 오십이 되면 자세가 틀어지기도 쉽단다. 누구를 만나도 반말하고, 누구를 만나도 자기 자랑만 하는 지천명의 사람들이 적지 않단다. 아무리 공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도 어깨와머리가 자꾸 뒤로 꼿꼿해지는 사람들이 있단다. 잘난 사람도 볼품없지만, 못난 사람은 더욱 그렇단다. 자기보다 난 사람에게 그러는 것도 문제지만 못난 사람에게 그러는 건 더 보기 흉하단다. 지천명에 더 필요한 자기관리 기술이 바로 모사공이란다.
오십이라는 나이가 완장이 되어선 곤란하단다. 상사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대안도 없는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단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답하기 곤란하고 불필요한 질문을 해서는 안된단다. 내가 상사니까 내가 경험을 해 봤으니까, 내가 선배니까 이렇게 해야지라는 훈계조의 조언이 필요한 사람은 거의 없단다. 확실히 도움이 될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면 쉰 살의 조언은 지루한 훈계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란다.
누군가에게 입을 열 때는 신중하고 진실해야 한단다. 같은 것을 두고 오늘은 A라 하고내일은 B라고 한다면, 언사충이 아니란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나이가 더 먹을수록, 책임이 더 큰 자리일수록 말에는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단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한단다.
부모를 모시는 일에는 공경의 마음이 제일이란다. 공경하는 마음이 빠진 부모 봉양은 반려견을 키우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공자는 말했단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부모를 모시는 일은 흉이 아니나, 공경하는 마음 없이 처신하는 일은 잘 모시나 못모시나 불효이긴 마찬가지란다. 자신의 직업이나 일에 대해서도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단다. 직업과 일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단다. 직업으로 하는 일치고 세상에 하찮은 일은 거의 없단다. 비록 스스로는 하찮은 일이라 여기는 그닐도,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조중한 일로 여기고 있단다. 가치 없는 직업은 없단다. 회사에 가치 없는 일은 없단다. 그 어떤 경영자가 가치도 없는 일을 시키면서 급여를 줄까? 단지 그 일을 맡은 나 스스로가 가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란다.
일에 대한 가치 기준을 바꿔야 한단다. 평범한 일에도 존경의 가치를 더하면 가치 있는 일이 된단다. 지천명에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의 업무와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누구애게든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단다. 물어야 답이 나온단다. 우리의 뇌도 무엇인가 물어야 답을 준비하고, 상대방에게 무엇인가 물어야 대답을 해 준단다.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단다. 아이들은 질문을 하면서 성장한단다. 질문이 멈추면 창의력도 성장도 멈추고 만단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공자는 반복해서 말했단다. 오십이 되면 질문이 사라진단다. 질문은 멈추고 묻지도 않는 것에 답을 주고 싶어 한단다. 지천명에 질문이 사라지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단다. 더 이상의 흥분과 즐거움은 사라진단다. 지천명에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좋은 질문을 하는 일이란다.
화날 땐 한 템포 쉬어야 한단다. 분통 터지는 일이 났을 때 잠깐 멈추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란다. 좋은 기분에 한 번 더 참는 건 누구나 가능한 일이지만, 화났을 때 한 번 더 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무제는 그 임계점에서 발생한단다.
참기 어려운 경계점에 이르렀을 때 잠깐 멈출 수 있는 사람과 멈출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백지 한 장도 안 되지만, 그 결과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란다. 그러니 소리 한 번 지르고 지옥의 괴로움을 당할 것인가, 한 번 참고 천당의 분위리를 만들 것인가 선택해야 한단다.
얻는 게 있을 때는 올바르고 정당해야 당당해진단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것일지라도 의로운 일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니, 대가 없이 얻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단다.
노력으로 얻은 재물이야 크게 탓할 건 없지만, 노력 없이 얻은 재물이라면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단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미끼는 아닌지, 함정으로 이끄는 먹이는 아닌지 재고해야 한단다. 대가 없이 남에게 귀중한 걸 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가 없이 남에게 귀중한 걸 받는다는 건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란다.
당채꽃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네!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겠냐마는 집이 멀리 있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셨단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어찌 멀리 있겠는가?"
'당채꽃이 봄바람에 흔들립니다.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바로 바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대는 너무 먼 곳에 계시는군요'라는 노래를 듣고 "생각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지 어찌 집이 멀다고 핑계를 대는가?"라고 공자께서 평가했단다. 생각이 간절하다면 거리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공자는 당시까지 전해져 오던 수천 수의 노래중에서 300여 수의 시가를 뽑아 동양 최초의 노래 시집 <시경>을 편집했단다. <논어> 자한편에 공자께서 당시의 시를 한 수 평가한 대목이 나온단다.
앵두꽃이 봄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대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대에게 바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대는 너무 먼 곳에 계시는군요 - 2500년 전 <시경>이 편집될 시기에 불렀던 노래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 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러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영원히 먼 곳에,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 버린 사람.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 신중현 작사.작곡 <님은 먼 곳에>
떠나간 사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단다. 2500년 전의 노래나 요즘의 유행가나 이별의 아쉬움은 늘 안타깝기만 하단다.
초중고, 대학 입학과 졸업을 반복하면서 기대와 후회를 반복한단다. 다시 입학생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 잘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단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란다. 대리는 사원 시절을 아쉬워한단다. 좌충우돌하며 업무를 진행해도 어느 정도 이해와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사원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노심초사하며 소심했던 사원 시절의 시간을 후회한단다. 과장은 대리 때를 아쉬워한단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최종 책임은 과장이 지기 때문에 더 과감하게 도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후회한단다. 부장은 과장 때를 아시워한단다. 부서를 책임지는 과장으로서 다 과감하게 새로운 제품이나 제도 개선에 몰입하여 팀워크를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부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안일하게 보냈던 시절을 후회한단다.
퇴직해도 마찬가지란다. 더 할 수 있었는데 일찍 그만둔 걸 후회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지 못한 걸 더 아쉬워한단다. 명예퇴직이나 정년퇴직이나 마찬가지란다. 직장에서 보냈던 그 긴 시간의 흔적을 되돌아보면 더욱 그렇단다. 누구나 대부분 인생의 황금기를 조직에서 보내기 때문이란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더 멋진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연민을 가진단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내면서도 나의 삶이 아니 과장 눈치, 부장 눈치, 임원 눈치에 기준을 세우고 살았던 아쉬움이 남는단다.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그동안 살아온 궤적을 살펴 보면 분명해진단다. 나의 삶으로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라 해도, 평균이 삶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단다. 봄바람에 살랑대는 연한 봄꽃을 보면서 떠나간 연인이 생각나고 보고 싶지만, 이미 너무 멀리 떠나갔음에 단념으로 마음 정리를 하는 어떤 사람을 기리는 노래란다. 너무 보고 싶지만 이미 떠난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노래하고 있단다. 그런데 공자께서 그 노래를 듣고 생각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단칼에 평가했단다. 정말 마음 깊이 연인을 사랑한다면, 그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이란다. 다 핑계라는 뜻이란다.
육십이 되면 오십을 되돌아보면서 분명 아쉬워하게 될 거란다. 10년만 젊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10년 전에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게 될 거란다. 수천 년을 이어온 그 후회와 아쉬움의 고리를 끊는 방법을 우리는 공자에게 배울 수 있단다. 공자의 가르침은 간절함이었단다. 마음이 간절하면 못할 게 없다는 말이란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해법이란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방법이란다. 더 좋은 묘법이 있을 법도 한데 그게 간절함이니 속는 셈 치고 믿어 볼 수밖에 없단다. 그러니 지금 멈춰야 한단다. 핑계를 멈추고 생각해야 한단다. 지금 바쁘다는 핑계로 오십을 넘기면, 육십에는 무엇을 하든 후회할 것이란다. 그렇게 육십을 넘기면 또다시 후회하는 칠십을 맞이해야 한단다. 2500년 전 그 노래처럼.
공자께서
"열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 하셨단다.
우리 주변에도 자기 일에 집중하며 주변 사람들과 거짓 없이 믿음직스럽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지럽다 해도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단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도 그러했단다. 열 십 정도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도 공자만큼이나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은 반드시 있었다는 <논어>의 기술을 보면 그렇단다.
평범했던 공구(孔丘)가 위대한 성인 공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호학(好學) 정신이었단다. 성실과 믿음의 바탕 위에 그 누구보다 배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단다. <논어> 전체를 통해 그 어떤 자랑도 하지 않았던 겸양지덕의 공자께서도 호학만큼은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단다.
다른 건 몰라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은, 누구든 배움에 집중하면 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단다. 공자의 마을 증명이라도 하듯 17세기 조선 최고의 학자였던 다산 정약용도 회갑을 맞이하여 쓴 <자찬묘지>에서 호학을 들고 있단다.
다산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여덟 글자 '유이영오 장이호학(幼而潁梧 長而好學)이라고 기록했단다. 어려서는 영특했고 커서는 배우기를 좋아했다는 뜻이란다. 다산은 그 유명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를 포함하여 500권 이상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단다. 새로운 정신혁명을 바탕으로 접제 개혁 및 기술 개발로 국가다운 국가를 만들어 보자는 전대미문의 다산학을 만들어 냈단다.
정인보 선생은 "다산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칭송하기도 했단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학'을 완성한 것도, 조선 최고의 학자로 우뚝 서게 된 것도 바로 이 호학 정신 덕분이었단다. 세상이 빠르고 변하는 건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나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란다. 우리가 보기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보듯 먼 미래 사람들이 21세기 초반을 본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닐 거란다.
오십에 조직을 벗어나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단다. 내 돈으로 내는 세금조차 내 손으로 계산하거나 신고하기가 어렵단다. 회사나 조직에서는 경리관리 부서에서 일괄 정리를 해 주기 때문에, 세금 납부 혹은 세금 환급에 대해 개인적으로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단다.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해 보지 않은 일이기에 혼자하기가 어렵단다.
새 노트북 하나 사기도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란다. 전문 매장을 방문하면 판매원의 반강제 권유를 들으며 그가 팔고자 하는 노트북을 결국 사고 만단다. 그렇다고 온라인으로 구매하자니 속는 듯한 느낌을 거둘 수가 없어 주저하게 된단다. 결국 자식이나 주변의 젊은 후배에게 부탁하곤 한단다. 조직에 있을 때는 주는 대로 받고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기만 하면 중간은 갈 수 있었기에, 노트북 사양이 어떻게 바뀌건 상관하지 않았단다. 쓰다 고장나면 바로 수리 기사가 달려와 새것처럼 고쳐줬단다. 노트북도 노트북이지만 어떤 운영체제를 깔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구매하려니 갑갑해지는 거란다.
지금 지천명의 세대가 무난하게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빠르게 바뀌었단다. 약산의 전문성이라도 요구되는 일들은 일반인들이 직접 하기에 엄두조차 어려운 구조가 되어 버렸단다. 아무리 성실하고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두 손 두 발 묶어 놓고 전문가의 처분만 기다리는 상황이 오고 있단다. 어쩌면 전문가들의 농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길목에 서 있단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배우지 않고는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단다.
베이비부머 세대를 이은 1964년생부터 1969년까지의 세대를 586세대라 한단다. 1990년대 30대를 보냇던 1980년대 학번의 1960년대생의 286이 세월을 타니 586이 되었단다. 2021년을 기준으로 386세대는 53~58세로지천명의 한 중심에 서 있단다.
오십에도 학(學)은 필요하단다. 작게는 잡학이 필요하단다. 동네 도서관 가기, 세무서 방문하기, 세무 신고하기, 인터넷으로 주민등록등본 떼기, 밥하기, 세탁기로 빨래하기, 빨래 말리기, 전자 오븐 사용하기, 음식물 쓰레기 카드로 버리기, 동네 카센터와 친해지기, 자주 가는 치과 정하기, 프린터 잉크 갈기, 일 같지도 않은 일 잘하기, 매일 쓰레기 버리기, 변기 고치기, 정수기.공기청정기 필터 교체하기, 에어컨 예약 틀기, 스마트폰 기능 익히기, 집에서 영화 보기, 디지털카메라 사진 인화하기, 블루투스 연결하기, 자동차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업데이트하기, 온라인 쇼핑하기, 마트에서 장보기, 상속세.등록세.양도세. 절제 방법 익히기, 스마트폰으로 주식하기 등 익혀야 할 잡식이 너무 많단다. 젊은 세대에게는 일도 아닌 일이 일 같은 일로 다가온단다.
작게는 생활 잡학이 필요하지만 크게는 강점 강화를 위한 강학이 필요하단다. 공자처럼 호학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인생 후반을 빛낼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 전략적인 공부가 필요하단다. 오랫동안 한다면 그 어떤 일도 잘하게 된단다. 나이와 크게 상관없단다. 느릴 수는 있어도 한 가지를 오랫동안 한다면 누구나 잘할 수 있단다.
강학은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거란다. 그러니 일이 공부고 공부가 일이 된단다. 여행을 오랫동안 하면 여행이 일이 되고 일이 여행이 된단다. 그림을 오랫동안 그리면 그림이 일이 되고 일이 그림이 된단다. 주식을 오랫도안 하면 주식이 일이 되고 일이 주식이 된단다. 고구마를 오랫동안 키우면 고구마가 일이 되고 일이 고구마가 된단다. 그렇게 여행 전문가. 그림 전문가, 주식 전문가, 고구마 전문가가 된단다.
공자께서
"답답해하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았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밝혀 주지 않았다. 하나를 가르쳐 주었을 때 스스로 세 가지를 알아 내지 않으면 반복해 가르치지 않았다" 하셨단다.
재능이나 사상 등을 열어 주고 피게 해 일깨워 주는 걸 계발이라고 한단다. 이 단어는 공자의 독특한 교육 방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단다. 공자는 학생 스스로가 궁금한 걸 밝혀 내지 못해 괴로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하여 일깨워 주지 않았단다. 전전긍긍하지도 않는 학생에게 미리 가르쳐 봐야 조장만 될뿐 크게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학생 스스로가 잘 표현하고 싶어 더듬거리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밝혀 주지 않았단다.
<논어>는 제자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공자의 대답으로 마무리된단다. 질문하지 않으면 답을 들을 수 없단다. 제자들은 질문하면서 이미 반을 배우고 대답을 들으면서 나머지 반을 익혀, 학습이 완벽하게 된단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쳐 주고 나머지 세 개는 스스로 알아서 찾는 자세가 보이지 않으면, 공자는 제자를 다시 가르치지 않았던 거란다.
주도적인 교육이 아니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오십은 되어야 주체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것 같단다. 삼십, 사십에도 능히 주체적인 삶을 살앗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주체적인 삶은 지천명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바라볼 수 있단다. 되돌아보면 지난 20여 년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단다. 미래 20년에 비하면 지난 과거 20년은 순간이란다. 졸업과 취업, 결혼과 출산, 몇 번의 이사와 한두 번의 이직 혹은 전직, 양가 부모님들이 한두 분씩 돌아가시고, 명예퇴직이나 조기퇴직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자신감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시기가 되면 무엇이 주체적인 삶인지를 생각하게 된단다.
열심히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삶이 왜 이렇게도 헝클어졌는지 답답할 때가 많단다. 단 한순간도 대충대충 살지 않았는데 오십에 되돌아본 과거에 그 어떤 일관성도 찾아볼 수가 없단다. 타인에게는 개인의 목표와 자신을 정조준하는 일관성에 대해 많은 조언을 했지만, 정작 자신에겐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단다. 일관성이 없다는 건 주인의 삶이 아닌 손님의 삶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선택할 때도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주도적이지 못했단다. 선택은 그가 했으나 시작과 끝은 부모님과 형제들, 선생님과 성적이었단다. 그가 전공을 선택하고 그가 입학시험을 봤지만, 전공의 의미도 몰랐고 합격할 정도이 성적도 아니었단다. 전기를 놓치고 후기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과 전공이 그의 것이 되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했단다. 아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전공과 서먹서먹하기만 했단다. 4년을 공부했지만 겉돌기는 마찬가지였단다. 그러니 회사 업무가 재밌을 리가 없었단다.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인데도 늘 무거운 부담을 느끼면서 업무를 처리한다는 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란다. 3년, 5년을 반복하면서도 손에 익지 않는다는 게 늘 스트레스였단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바보 같은 처신이었단다. 일주일 혹은 한 달이 걸리더라도 마음먹고 달려들어 몰입했다면, 업무에 어는 정도는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거란다. 당시에는 그게 어려웠단다. 힘들더라도 한 번 고생해서 기술이건 방법이건 터득해 놓으면 마음고생 없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전공고 업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단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스스로 용기있게 나오지도 못했단다.
그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 부모님의 문제였고, 형제들의 문제였으며, 아내와 아이들의 문제, 그리고 그를 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문제였기에 이길 용기가 없었단다.
그가 아닌 아들의 삶으로, 그가 아닌 부모의 삶으로, 그가 아닌 남편 혹은 아내의 삶으로, 그가 아닌 사원, 대리, 고장, 부장의 삶으로 살아온 삶이기에, 그가 주인이 되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고 핑계 대고 있지만, 그 고리를 자르고 싶은 욕구는 늘 있었단다. 그러다 오십이 넘어 인생의 하프타임을 맞이하고 말았단다.
밀려온 삶이 아닌 밀어 가는 삶이 주도적인 삶이란다. 떠밀려 도착하는 곳보다는 가고 싶은 곳에 도착하는 게 주도적인 삶이란다. 가늘 길에 얻어 타고 가는 드라이브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직업 운전하여 가는 드라이브가 더 즐겁단다. 오십은 주도적인 인생으로 터닝하기에 좋은 때란다. 오십은 타인의 삶에서 내 삶으로의 노선 변경이 가능한 때란다. 열심히 살았지만 답답함이 있었다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란다. 끌려가든 끌어가든 인생의 종착역에 서면 각기 다른 평가가 기다리겠지만 밀려가고 끌려가는 삶보다는 내가 끌고 가는 삶이 더 매력적인 삼에 틀림이 없단다. 그 매력적인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바로, 스스로 답답해하고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그 어떤 계발도 어렵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란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뜻을 세우지 않아서였단다. 주입식 교육과 조직에 슨응하는 체득된 습성으로 그의 뜻을 세울 필요가 없어서였단다. 학교도 군대도 회사도 그저 시키는 것만 잘 해내면 되는 시간의 축적 때문이었단다. 주체적인 삶의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표를 두지 않아서였단다.
간절한 목표가 있어야 답답함이 생긴단다. 간절한 꿈이 있어야 달성할 방법을 찾는단다. 분명한 비전이 있어야 스스로 애쓰게 된단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계발이 가능해진단다.
오십은 자기계발하기에 적당한 나이란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게발을 시작하기에 최고의 시기란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단다. 이젠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도 욕먹지 않을 나이란다. 지금까지 '나'아닌 '당신'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당신 아니 나를 위한 삶이어야 한단다. 20대에 느낄 수 없는 여유가 있어 유리하단다. 30대에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이 있어 유리하단다. 40대에 느낄 수 없는 자유가 있어 유리하단다.
이제 당신이 좋아하는 게 아닌 내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야 한단다. 이제는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닌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해야 한단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걸 선택할 때 비로소 간절함이 생기고, 간절함이 있어야 진정한 자기계발이 가능해진단다. 자기계발이 되면 자기 주체적인 삶이 가능해진단다.
공자께서
"끝났구나! 나는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발견해서 안으로 자책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 말씀하셨단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던 제자 안회를 제외하면, 나는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고 안으로 자책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잘못하고도 이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게 진짜 잘못이다. 잘못했으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잘못은 대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유발되는 것인데, 이런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게 바로 인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군자다."
공자는 <논어>을 통해 잘못이 무엇인지를 반복하여 지적하고 가르쳤단다. 지금이나 춘추시대나 사람이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단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이 없음을 공자는 "세상이 말세로구나. 더 이상의 희망과 미래가 없구나"라고 한탄했단다. 2500년 전에도 희망을 잦기가 어려웠단다.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황무지 같은 세상에 미리가 없다며 공자는 걱정했단다. 그런데 50년 전에도 어른들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단다.
"세상 돌아가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이렇게 술수가 판을 치는데도 세상이 멀쩡히 돌아가다니!" 하고.
취업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대리 승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과장 부장 승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명예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원했던 개인 사업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하던 사업의 폐업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오십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조금 빨리 가는 것과 조금 늦게 가는 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단다.
빨리 가는 늦게 가나 문제는 을 있었고, 지금이나 2500년 전 춘추시대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단다. 그러니 지난 과거나 다가올 미래나 다를 게 없단다. 지금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지난 과거도 다가올 미래도 그저 그럴 것이기 때문이란다. 진학, 졸업, 취업, 승진, 퇴직, 사업, 폐업, 오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단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걱정해도, 세상은 쉽게 망하지 않는단다. 세상이 급격하게 좋아질 것처럼 희망해도, 세상은 금방 좋아지지 않는단다. 춘추시대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고, 지금 대한민국이 그렇단다.
안경은 잘 보기 위해 사용하는 유용한 도구란다. 안경 렌즈에는 두 종류가 있단다. 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란다. 많은 이가 타인의 단점이나 잘못은 볼록 렌즈를 통해 보고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은 오목 렌즈를 통해 본단다. 그러니 타인의 단점이나 잘못은 늘 더 커 보이고,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은 늘 작아 보인단다. 또한 타인의 장점이나 잘한 건 오목 렌즈를 통해 보고, 자신의 장점이나 잘한 건 볼록 렌즈를 통해 본단다. 그러니 타인의 장점이나 잘한 건 늘 더 작아 보이고, 자신의 단점이나 잘못은 늘 더 작아 보인단다. 타인의 잘못은 오목 렌즈를 통해 보고, 자신의 잘못은 볼록 렌즈를 통해 보려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이 있단다. 그래서 이들에겐 타인의 잘못은 늘 더 작아 보이고, 자신의 잘못은 늘 더 커 보인단다. 이들이 바로 리더다운 리더란다.
열 살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스무 살에는 연인, 서른 살에는 야심, 쉰 살에는 탐욕에 움직인단다. 과연 몇 살이 되어야 인간은 지례를 좇아 행동하게 될까? 장 자크 루소의 지적이지만, 오십에라도 도달해야 할 성숙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사람일 거란다. 지금껏 무던히도 자신을 몰아붙였던 빠름 빠름의 결과가 느림 느림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이란다. 나를 인정하듯 타인도 인정해 줄 수 있는 인생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란다. 내가 욕심이 있는 사람이듯 타인도 욕심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란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단다. 타인의 잘못은 귀신같이 잡아 내고 찾아 내지만 자신의 잘못에는 무감각하다면, 육십이 되도, 칠십이 되도 불가능하단다. 크게 아파 본 사람은 아픈 사람을 더 이해하기 쉽단다. 명퇴자가 명퇴자를 쉽게 이해하듯 슬픔을 겪어 본 사람이 슬픈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된단다.
조금 더 겸손해지라는 명령이란다. 조금 더 이웃을 바라보라는 은유란다. 조검 더 다른 세상을 보라는 신호란다. 그래야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담담히 미래를 그려 볼 줄 알게 된단다. 사람이 문제였다면 사람의 문제를 일이 문제였다면 일의 문제로 돌려, 다시 한 번 미래로 들어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선택에 따라 오십은 장벽이 되기도 발판이 되기도 한단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면 오십은 장벽이 되기 쉽단다. 사회의 통념을 잘 따르며, 적절히 거래하고, 적절히 눈감아 주면서, 이익과 편리에 섰을 가능성이 높단다. 지금까지의 방식은 머지않아 내 인생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장벽이 될 수 있단다. 지금까지 잘못해 왔다면 오십은 기회의 사다리,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단다. 한 번 더 올라갈 기회를 만들 수 있단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인생의 조던을 오십에 시작할 수 있단다.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고 안으로 자책할 줄 아는 사람을 아직까지 나는 보지 못했다"고 공자는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잘못을 도려내고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바로 오십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란다.
공자께서 안연에 대해
"애석하구나! 나는 그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보았지만 멈추는 것은 보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셨단다.
안연은 공자의 제자 중 최고의 제자였단다. 비록 공자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덕행과 인자로 최고의 인정을 받았단다. 공자는 안연을 가리켜 내가 그와 종일토록 말을 해 봐도 나의 말을 어기는 일이 없어 꼭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물러나 그의 사생화를 살펴보니 역시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연은 절대로 어리석지 않다고 했단다. 다른 제자들은 한 달에 한두 번 어진 행동을 하나 안연응 석 달이 넘도록 어질지 않은 행동이 없었던 대단한 제자로, 덕행에는 안연을 따를 자가 없었단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 역시, 자신은 하나를 들으면 둘 정도는 알지만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대단한 친구라 평가했단다.
그런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 공자는 "정말 애석하구나! 나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보았지만 멈추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려! 나의 애통함이 지나친 것처럼 보이느냐?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애통해하겠느냐?"라고 하며 진심으로 슬퍼했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단다. 매년 8월이면 부친의 제사가 돌아온단다. 논과 밭에서 일생을 보내셨고 고향에서 평생의 시간을 다하셨단다. 1924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았고 6.25 전쟁에 참전하셨단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단 한 해도 쉽게 넘어가는 시기는 없었단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장남의 무게가 평생을 구속했지만, 자식 7남매를 잘 키워 주셨고, 평생을 피땀으로 모았던 농지를 고스라니 남겨 주셨단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이 빈곤으로 시작했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은 그의 일곱 남매의 자산을 다 더한다 해도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단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아무리 준비가 탄탄하고 주면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다 해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길을 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다 해도 지켜 나가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란다. 확연히 보이는 길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미지의 길을 간다는 건 험한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과거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냈단다. 암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냈단다.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면 삶이 멋지게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많단다. 특별한 도구가 있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견고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미래는 분명 그의 것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생각으로 50년을 살았지만, 그가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했단다. 오십은 넘어야 아버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단다.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구체적인 미래가 정해져 있는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불편하게 다가오는 운명을 즐기는 것처럼 한 단계 한 단계 꾸준하게 넘었던 그 모습이란다. 50년은 살아 봐야 50년을 먼저 살아온 인생을 조금 엿볼 수 있는 것 같단다.
운명이 있다고 믿으면 운명은 있단다. 운명이 없다고 믿으면 운명 같은 건 없단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단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미래개 정해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즐거울 수 있단다. 생각하는 대로 모두 이뤄지는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라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세상일 수 있단다. 가지고 싶은 걸 갖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모두가 살아간다면, 설렘이 아니라 지루함이며 기대감의 희망이 아니라 나태함의 절망이 커 갈 거란다. 그러니 부자 아버비 밑에서 부자로 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크게 가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부자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거니와 크게 가치가 있는 일이란다. 부자로 태어나 부자로 폼나게 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가 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인생 전반을 잘 살아온 사람이 인생 후반을 잘 살아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인생 전반을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인생 후반을 멋지게 만들어 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다. 인생 전반을 잘 살아온 사람이 인생 후반을 잘 살아가는 건 그리 폼나는 일이 아니지만, 인생 전반을 어렵게 살아온 사람이 인생 후반을 멋지게 만들어 가는 건 정말 폼나는 일이란다. 그러니 오십에 가져야 할 성숙된 도구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꾸준함이란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단다. 오십의 나이에 꾸준함의 힘에 의혹을 품을 사람도 없을 거란다. 백일하에 노출된 꾸준함의 노하우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전술이 필요할 뿐이란다. 세상은 두뇌 싸움이기도 하지만 꾸준함의 싸움이기도 하단다. 인생은 머리 좋은 사람만 유리한 게 아니라 꾸준한 사람도 유리하단다. 아이큐가 높지 않아도 손재주가 떨어져도, 오랫동안 반복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단다. 어떤 일이든 오랫동안 하면 잘 할 수 있단다. 꾸준함이 대부분을 수렴하기 때문이란다.
타인의 멋진 성과가 내 경험이 되기에는 꾸준하게 반복하는 것 이상이 없단다. 하나를 꾸준하게 하려면 나머지는 모두 포기해야 한단다. 결국 매일매일의 포기가 성공을 만드는 거란다.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걸 시시때때로 포기하는, 포기의 용기가 차별을 만드는 전술이란다.
경험은 수천 년 전부터 있었지만,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타인이 경험한 것은 당신에게 통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을 위해 다시 경험해야 한다. - 18세기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공자께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 말씀하셨단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설레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하리다.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생애에 하루하루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
인생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짓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만이 두 번째 그것을 성취한다. - <인생사전>
어쩐 사람은 원하는 게 너무 많단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단다. 어떤 사람은 그런 여유 있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한단다.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는데 좋아하는 걸 찾는 게 배부른 소리라는 말이란다. 모두 맞단다. 그래서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편의 애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수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파티" 이런 노래에 위안을 받는지도 모른단다.
줄기며 사는 건 원하는 걸 얻는 것보다 더 어렵단다. 보통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란다 가깝게 사는 사람이나 멀리 사는 사람이나 다르지 않단다. 누가 봐도 원하는 걸 얻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만족을 하지 못한단다. 그만큼 욕심과 욕망은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란다.
저녁마다 산책일에 만나는 빌딩 5층쯤에 걸린 '파인만 학원', 그 반짝이는 간판을 보면서 파인만이 누군지 궁금했는데, 최근 그에 관한 기사를 읽었단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처럼 살았던 30년 전의 천재 과학자, 양자역학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열정의 과학자였단다. 리처드 파인만 교수는 성공적인 과학자로 살아온 원동력이 천재성이나 높은 목표 의식보다 '가슴 뛰는 삶'에 있었다고 한단다.
그는 제자에게 "나는 자네한테 가르친 게 없네, 혹시 자네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스스로 깨우친 것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자신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네.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자네가 지금 하는 일이 가슴을 뛰게 하는가이네. 잊지 말게, 일은 재밌으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단다.
'가슴 뛰는 삶', 듣기만 해도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말이란다. 그 눈군들 원치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란다. 혹시 취미가 직업이라면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그래서 공자께서도 3단계로 나눴단다. 먼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한단다. 어쩌면 이 1단계에서 가슴 뛰는 삶의 비결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처음부터 좋아해서 전문가가되는 경우도 있지만, 하다 보니 전문성이 생기면서 일을 좋아하게 되는 경으도 적지 않단다.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일로 직업을 삼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확률이 높지 않단다. 모두 그렇게 되질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란다.
그보다 현실적인 방법은, 싫어도 계속 배우고 익히면서 전문성을 키워 가는 거란다. 그렇게라도 잘하게 되면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단다. 그렇게라도 잘하게 되면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단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잘하면 인정받고 제대로 인정을 받으면 일에 긍지가 생길 수밖에 없단다. 일에 긍지와 자신이 생기면 더 열심히 하고 결국 일을 좋아하게 된단다.
어디서나 어떤 일이나 현실은 대개 고달프단다. 그러니 조금 싫다고 해도 계속 배우고 익히는 게 시작이란다. 처음부터 많이 싫어하는 일이라면 다른 일을 찾는 것도 방법이지만, 다른 일을 찾았는데도 계속 싫어진다면 일의 문제가 아니라 일을 대하는 사람의 문제가 더 클 수 있단다. 그러니 꼭 순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배우고 익혀 일을 정확하게 아는 게 시작이란다. 그러면 좋아질 확률이 높아지고, 좋아하는 일은 결국 즐길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단다.
지금까지 했떤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란다. 비록 즐기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좋아하는 일로 만들었다면, 살아왔다는 증거란다. 혹여 지금까지 했던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다면, 남들처럼 보통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란다. 지금까지 했던 일을 좋아하는 일로 만들지 못했다면, 많은 사람처럼 보통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란다.
어떤 이유로 삼십, 사십에는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제 해 볼 수 있단다. 삼십, 사십의 조건과 오십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오십은 또 하나의 기회란다. 인생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두 가지. 원하는 것을 얻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오십은 분명히 기회란다. 지금부터 가슴 뛰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은, 시간의 문제도 건강의 문제도 아닌 바로 지천명의 과제란다.
공자께서
"군자는 두루 대하며 편을 가르지 않지만, 소인은 편을 가르며 두루 대하지 못한다."라 말씀하셨단다.
주이불비(周而不比), 주는 보편적, 공적, 두루두루, 개방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개인적인 잇속을 넘어 타인과 화합하는 것을 말한단다. 이에 다산 선생은 "군자는 덕 있는 사람과 벗하니 언제나 마음과 정신이 친밀하여 세력으로 묶어 지내지 않는다"라고 했단다.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며, 사람 또한 그렇게 사귀는 살마을 군자라 한단다.
비이불주(比而不周), 비는 견주다. 비교하다, 겨루다, 편 가르다는 뜻으로 끼리끼리 무리 짓는 편당을 말하며, 주가 공적이라면 비는 사적을 의미한단다.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들 하고는 무리 지어 편을 짜고 행동하며 항상 개인적인 잇속만으로 교루하니 이익이 생기면 모이고 이익이 다하면 흩어지기 마련이란다. 이렇게 공보다 사를 앞세우는 사람들을 소인이라 한단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할 때 사람답게 살 수 있지만,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단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가를두고 마음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는 없지만, 공자의 기준은 주와 비였단다. '나를 먼저 생각하느냐 우리를 먼저 생각하느냐' 그게 기준이었단다.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람들끼지 모이기 마련이란다. 그런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가기 마련이란다. 문제는 사심을 가지고 편을 가르는 데 있단다. 이렇게 공보다 사를 앞세우는 사람들을 공자는 소인이라 칭했단다.
리더에겐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단다. 다르지 않다면 그냥 보통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게 좋단다. 리더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대해야 한단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겐 특별하게 대하고, 사익을 위해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은 리더로서 자격이 없단다. 개인적인 잇속을 위한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굳이 그런 사람이 리더를 하겠다고 나서면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이가 피해를 받는단다. 사람들이 피해를 받으면 그 비난의 화살이 어디를 향학 될지 불 보듯 뻔하단다. 그러니 끝내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란다.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조직을 망치는 리더의 잘못된 리더십에 비하면 보통 사람들의 개인적인 욕심은 애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단다. 리더의 편 가르기와 욕심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는 그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란다.
지천명에 새겨야 할 것 중의 또 하나가 바로 주와 비란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주보다는 비에 가까운 삶이었단다. 누구나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기에, 비의 삶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단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며,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쉽게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살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조직 생활도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였단다.
오십이 된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의도적으로라도 비의 삼엣 주의 삶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단다. 인생이 정확히 오십으로 나뉘지는 않지만, 나를 위한 삶에서 타인도 위하는 삶의 방식으로 지극히 사적인 삶의 방식에서 함께하는 공적인 삶의 방식으로도 확장시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단다. 함께 잘사는 게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안정과 국가의 안정이 개인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단다. 하지만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은 개인의 이점에 정조준되어 있단다.
오십이 넘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지역과 국가가 아닌 개인적인 목표나 목적을 위해 오십 이후를 꿈꾸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들도 비에서 주로의 전환이 필요하단다.
탕평책을 시행하고자 했던 영조가 국가의 미래 리더인 학생들에게 이른 성균관 탕평비에, '두루 대하며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며, 편을 가르고 두루 대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적인 마음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단다.
젊은이에겐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있고, 어른에겐 어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 있단다. 어른에게 더 어울리는 모습은, 함께하는 모습이란다. 내가 소중하기에 타인도 소중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함께하기 어렵단다. 함께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을 어른이 보여 주지 못하면, 그곳엔 희망이 없단다. 어른조차도 함께하지 못하는 척박한 곳에서, 어떤 젊은이가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과 공감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까?
오십의 성숙 기준은 사보다 공에 있단다. 물론 개인을 넘어 공공까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다. 그러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란다. 그렇기에 더욱 가치 있는 일이란다. 젊은이가 못하면 어른이 해야 한단다. 어른이 못하면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해야 한단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리더에서 내려와야 한단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어른에서도 물러아야 한단다. 오십에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의 정신이란다.
5강 용기
염구가 "스승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라고 하자 공자께서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는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구나"라고 하셨단다.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육예에 통달한 사람이 77명이었으며, 특히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궁중, 정치로는 염유, 계로 언변으로는 재아, 자공, 문학으로는 자유, 자하가 있었다고 한단다.
정치 관료로 이름을 얻었던 염유는 공자보다 29년 젊고 계씨의 재로 일했단다. 공자께서 염구를 가려켜, 1000호에 이르는 읍과 100대이 전차를 가진 댑 집안의 군사와 재정 정도는 무난하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제자라 할 정도로 탁월했단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단다. 염구가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께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대답했는데, 자로가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부모 형제가 건재하신데, 들었다고 어찌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단다. \
이에 제자 자화가 이상하게 여기며 "같은 질문에 어찌 답이 다릅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염구의 성격은 소심하기에 격려한 것이고, 자로의 성격은 성급하기에 억제한 것이다"라고 답했단다.
"저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기뻐하지만 그대로 실행하기에는 힘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통해서도 염구의 소심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단다. 공자께서는 "제발 안된다는 부정의 한계선을 미리 긋지 말거라" 하셨단다.
저자에게 하는 아내의 유일한 잔소리는 운동이란다. 제발 운동다운 운동을 하라는 말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유산소 운동보다는 근육 운동이 중요하니 하루라도 빨리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성화란다. 근육 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쉽지 않단다. 나름 꾸준히 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나 새로운 시작에는 늘 망설임이 있단다. 운동이 특히 그렇단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싫어해서 그런 습성이 생긴 것 같지만, 운동만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어 답답하단다.
사정이 이러니 지금까지 꾸준히 한 운동이 없단다. 아주 오래전 아내의 권유에 수영을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접영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단다. 그 후에 마라톤을 약 5년 정도 했는데, 나이 먹어 뛰면 관절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금방 그만뒀단다. 그후에 그래도 유일하게 하는 운동이 걷기란다. 매일 5킬로미터 정도를 빠르게 걷는단다. 걷기라도 꾸준히 하며 운동에 대한 나름의 위안을 받기 위함인지 모르겠단다.
핑계는 핑계일 뿐이지만 핑계라도 대면서 자리를 모면해야 체면이라도 챙길 수 있기에, 무가치한 핑계인 줄 알지만 만들어 낸단다. 나이를 먹으면 나도 모르게 핑계가 주인이 된 삶을 살아가고 있단다. 살고 싶은 삶이 없으면 사는 대로 살아가게 된단다. 원하는 게 없으면 주는 대로 받게 된단다. 주어진 삶을 살다 보면 혼자가 되었을 때 막막해지기 쉽단다. 주어진 삶이 편하기는 하단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아도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란다. 지난 수십 년의 직장 생활이 말해 준단다. 정해진 대로 하는 게 구속일 수는 있지만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단ㄷ. 작은 위안과 안정에 빠진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변화가 싫어진단다. '지금이 좋은데' 적당하게 핑계를 대면서 따뜻한 온도를 즐긴단다. 그러다 갑자기 정형이 틀에서 벗어나면 매우 당황스럽단다.
주어진 삶에서 벗어나 어느 날 갑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 어색하기만 하단다. 그토록 마음대로 살고 싶었는데 막상 마음대로 살라고 하면 대부분은 다시 안정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단다. 밖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일을 하느리 차라리 비슷한 상황에서 해 온 일을 더 하고 싶어한단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단다. 체력 때문에 자신이 떨어질 수도 있고, 경제력으로 의자가 꺾일 수도 있지만, 힘이 부족하지 않단다. 새로운 일을 해 보기도 전에 어렵다거나, 관련 경험이 없어 시작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은 누구나 마찬가지란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는 않단다. 경험이 좀 부족해도 잘해 나가는 사람이 있단다. 경험이 부족했기에 더 잘해 나가는 사람도 있단다. 핑계를 대지 않기 때문이란다. 부정의 획을 긋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세상이 모든 일엔 양면이 있단다. 좋아 보여도 모두 좋은 건 아니며, 나빠 보여도 모두 나쁜 건 아니란다.
희망은 늘 있단다. 긍정과 부정은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된단다. 희망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단다. 그러니 설사 불가능하다고 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도전해 보는 것도 포기하는 건 전혀 다르단다. 혹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라 해도 성사될 가능성은 있단다. 그러니 이와 하겠다고 선택한 일이라면 '100퍼센트 된다'고 생각해야 한단다. 말로는 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 일은 되지 않는단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까지 해서는 안 될 말이 '역부족'이라는 말이란다.
쉬운 일은 없단다. 힘들지만 배우고 극복해 가며 이뤄 내는 삶이 가치가 있고 재밌단다. 일을 해내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란다. 쉽지 않은 일을 해내는 주인공이 내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단다.
"나의 소원은 일류가 되는 것이다. 골퍼에게 이 마음이 없다면 골프를 하지 않는 게 낫다" - 골프의 제왕. 잭 니클라우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물었을 때 공자께서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셨단다. 계로가 다시 묻기를 "감히 죽음에 관하여 묻겠습니다"라고 하여 공자께서 "삶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고 하셨단다.
살면서 가끔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단다. 마음이 약해질 때나 마음이 흔들릴 때면 더욱 그렇단다. "선생님, 귀신이 정말 있습니까? 있다면 그 귀신을 어떻게 모셔야 제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이 뒤숭숭하니,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선생님, 살마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죽음은 시작인가요, 아니면 아주 영영 끝인가요?"하고 묻는단다.
자로의 질문에 공자의 대답은 간결하단다. 귀신의 유무보다 더 긴급한 게 살아 있는 지금 우리의 삶이니, 당장 긴급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현재의 삶에 더 집중하고 노력하는 게 낫다는 말이란다. 살아 있는 오늘의 삶도 잘 모르겠는데 죽은 이후의 일들이 뭐 그리 급하냐는 것이란다. 그렇다고 공자가 귀신이나 죽음의 문제를 부정하지는 않았단다.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보다 더 긴급한 삶의 문제가 있다는 거란다.
가끔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 보게 된단다. 그가 그의 일을 선택할 용기가 있었던가, 지금까지의 일들이 정말 그가 선택하고 그의 의지대로 해 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단다. 보이지 않는 신념으로 그가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그가 조종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게 된단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단다. 당연한 일이 아닌데도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다면 지금이 바로 변화할 시기라는 것이며,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면 행복한 인생을 확인하는 셈이 된단다.
미궁으로 빠질 때가 종종 있단다. 분명하지 않은 일에 관심을 가지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있단다. 사람들은 대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단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못 보가 귀를 열고도 제대로 듣지 못한단다. 내가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사항은 더욱 그렇단다. 고위 공직자가 한 말이니 맞겠지, 고위 책임자가 한 말이니 틀리지 않겠지, 신문 기자가 본인 이름을 걸고 기사를 썼으니 맞겠지, 내 마음에 드는 유튜버가 말했으니 틀림없겠지, 목사님 말씀이니, 스님 말씀이니, 전문가 말이니.....그런데 그게 정말 맞을까?
사실과 다른 게 너무 많단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짓으로 밝혀진 가치 없는 일을, 당시에는 왜 그리도 관심과 집중으로 흥분하고 열을 냈는지 알 수가 없단다. 더 황당한 건 그런 시간을 왜 보냈어야만 했는지란다. 내게는 아무런 도움도 가치도 남기지 못했던 일에 왜 그리 열중했는지 아쉬움이 클 때가 많단다. 하루의 일상 또한 정보 속에 구속된단다. 미리 등록해 둔 관심 분야의 정보가 이메일 서비스를 통해 아침마다 도착한단다. SNS를 통한 메시지 역시 정보의 탈을 쓰고 쉼 없이 찾아온단다. 스마트폰을 열면 제목조차 읽기 귀찮은 스팸 메시지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방장 눈치가 보여 탈퇴를 미룬 카톡방에는 밤새 쌓인 대화들의 숫자가 계속 올라간단다. 매일 반복되는 회원들 간의 지나친 관심과 형식적인 격려, 지나친 자랑과 은근한 홍보, 시도 때도 없이 읽어야만 하는 짜증이 일상이 된단다. SNS에 동참하지 않으면 싣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회원가입을 하고 열심히 댓글을 달았지만, 어느 틈에 족쇄가 되어 일상을 갈아먹고 있단다.
나이 오십에 똘똘한 젊은 후배나 오랜만에 나타난 친구 혹은 친척으로부터 다단계 비즈니스를 소개받기도 한단다.
"선배님, 젊은 제가 철저하게 분석해 본 결과 된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바로 존경하는 선배님입니다"
젊은 후배가 다양한 자료를 들어가며 깔끔하게 권유하는데 거부하기가 선배 입장에서 참으로 거북하단다.
"인생 2막에 이 비즈니스만큼 확실한 걸 내 지금까지 찾지 못했네,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꿈을 자네와 나누고 싶네"
10년 만에 좋은 다단계 비즈니스가 있다며 찾아온 옛 동료나 친구를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단다.
노력으로 풀 수 있는 과제에 집중하는 용기가 오십에 필요하단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덮어 두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더 열중하는 게 효과적이란다. 많은 것을 다 갖기는 누구나 어렵단다.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는 남겨 두는 것도 전략이란다. 현재에 집중하려면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한단다. 누군가를 만나 감정이 많이 상한다면, 가능한 한 그 만남의 기회를 줄여야 한단다. 그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너무도 많단다. SNS에 너무 많은 시간이 낭비된다면 SNS를 줄여야 한단다. 계정을 삭제하거나 사용하는 시간을 정해야 한단다. 소통이 득이 아니라 짐이 된다면, 그 짐을 줄여야 한단다.
현재에 집중하려면 지금 집중하는 과제가 있어야 한단다. 집중은 용기란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 아흔아홉 가지는 자동으로 정리된단다. 지금 집중하는 게 없으면 SNS에 집중하게 되기 쉽단다. 귀찮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되기 쉽단다. 일 같지도 않은 일에 집중하게 되고 관여하지 말아랴 할 일에 관여하게된단다. 그러니 목표가 용기이며 목표가 집중이란다.
공자께서
"학문은 마치 미치지 못할 것 같은 갈급한 마음으로 배움에 임해야 하며, 배운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듯 배움에 임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단다.
2500년 전 공자의 학습법은 치열했단다. 공자는 공부에 임하는 자세를 두 가지로 요약했단다. 하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갈급한 마음이란다. 다른 하나는 한 번 배운 지식은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는 마음이란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실천하는 방법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를 들었단다. 옥반지를 만들 때 톱으로 돌을 자르고, 자른 돌을 줄로 갈고, 반지 모형을 만들고자 정으로 쪼고, 모래 종이로 윤이 나게 문지르면서 갈고 닦으라는 절차탁막의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단다. 간절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공부에 임해야 한다고 공자는 말한단다. 단 1점 때문에 불합격했다면, 1점은 그저 1점이 아니란다. 100점과도 같은 1점이란다. 그만큼 갈급한 심정으로 학습에 임해야 한다는 거란다.
그는 무책임하게도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했단다. 직장에서는 후배나 부하 사원들에게 했으며, 집안에서는 아이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남발했단다. 누군가 찾아와 조언을 구할 때면 '간절함'이 레퍼토리가 되었단다. 그런데 정작 그는 간절하게 해 본 적이 별로 없단다. 간절하게 해 보지도 못한 채 그저 입으로만 잘란 채를 밥 먹듯이 했단다. 어떤 책을 봐도 간절하게 하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던 것 같단다.
그 무책임한 말을 듣고서 간절함을 가지고 일하는 후배나 부하 사원은 없단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단다. 앞에서는 선배의 말을 잘 듣는 시늉을 했겠지만, 돌아서선 바로 '너나 잘하지'라고 했을 거란다. 그러며 그들도 후배에세 '간절함' 타령을 했을 지도 모른단다.
사람들은 을 정답만 말한단다. 선배도 상사도 방송도 책에서도 언제나 바른 소리만 늘어놓는단다. 그래서 세상엔 바른 소리가 넘쳐 난단다. 사건만 터졌다 하면 교수나 전문가가 등장하여 바른 소리만 한단다. 다리가 무너지고, 아파트가 넘어져도, 대형 화재에 수재가 나도, TV 화면에는 뛰어나 전문가가 넘쳐난단다. 바른 소리를 해 대는대도 사고는 매년 넘쳐난단다.
오십에 이르니 간절함이 안으로 파고든단다. 간절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욕심이 생겨난단다. 남들이야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든, 시간이 더 가기 전에 간절함을 가지고 뜨거운 삶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단다. 행동이 아닌 말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도 한단다. 정말 부러운 것 중 하나가 인생을 뜨겁게 보낸 사람들의 모습이란다. 10년, 20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한 결과,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늘 부러움을 느낀단다. 오십에 시작했건 육십에 시작했던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그 시작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변함없이 열정을 다했다는 데 있단다.
삼십, 사십에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으면 너무 행복하겠지만, 불행히도 우리 주변에 그런 행운을 잡는 사람들이 많지 않단다. 아니 삼십, 사십에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역경이기에 오십, 육십에 이르러 열정적인 삶이 더 가치있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단다.
요즘 주변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가 하나 있단다.
"나도 열정을 불살라 가며 미친 듯이 일을 좀 해 봤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런 일이 없다는 게 문제야"
그들이 대는 이유는 거의 비슷하단다. 매달 받는 월급 때문에 열정을 불사르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단다. 당장 필요한 수입을 위해, 진행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열정을 불사르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단다. 혼자 살면 혼자 살기 때문에, 삼십이면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십이면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안두 개가 아니라서, 오십이면 당장 풀어야 할 현실적인 숙제룰 하기에도 급급해서, 육십이면 이제 너무 늦어서, 칠십이면 미래를 희망할 수 없어서 열정을 불사르는 일을 시작하지 못한단다.
오십, 남들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간절함을 이제는 본인 스스로가 가져야 할 때란다. 방법은 두 가지란다. 하나는 현재의 일에 간절함을 더하는 거란다. 다른 하나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거란다. 현재이 일에 간절함을 더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는 최상의 조건이란다. 간절함은 열정을 만드는 연료이기 때문이란다. 의무감으로 하는 일은 간절함과 거리가 멀단다. 그러니 현재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모색해 봐야 한단다.
일에 의미를 더하는 건 시들어 가는 꽃에 물을 주는 것과도 같단다. 꽃이 시들어 가는 건, 꽃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직업이나 일이 의미가 없어서 간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의미 부여를 충분히 하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단다. 비록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라 해도 의미 없는 일은 없단다.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공산이 크단다. 마음처럼 쉽지는 않지만,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방법도 가능하단다. 직업이나 경력을 바꾼다는 게 큰 결심을 요하기는 하지만, 오십에 도전해 볼 만한 일이기도 하단다. 절차탁마의 정신을 끌어낼 수 있는 간절한 일이라면 용기 내 도전해야 한단다. 한 번 더 역정을 불살라 가며 미친 듯이 일하고 싶다면, 현재의 일에 간절함을 더하던가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해야 한단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다.
공자께서
"본성은 서로 비슷한,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단다.
"가지고 태어난 천성이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무엇을 익히고 반복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라는 공자 말을 필두로 수많은 현인이 반복과 습관에 대해 지적했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일시적이 아닌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로, 탁월함은 습관으로 만들어진다"라고 말했고, 파스칼은 "습관은 습관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 합리적이라든가 올바르다는 데에서 따르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단다.
사람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사람을 만들며, 습관은 철사를 꼬아 만든 쇠줄과 같아서 매일 가느다란 철사를 엮다 보면 이내 끊을 수 없는 쇠줄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단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우리 속담 이외에도 "마흔이 지나면 사람들은 습관과 결혼해 버린다"라고도 했단다.
자신의 천성과 본성이 가장 비슷한 사람은 형제 혹은 자매일 거란다. 비슷한 천성과 본성으로 태어났지만 5,60년 살다 보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형은 성공했고, 동생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 보잔다. 형이 똑똑해서, 잘생겨서, 좋은 학교를 나와서 성공했을까? 아니란다. 형과 동생이 매일 아침 일어나 어떤 일을 반복했느냐의 차이가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차이를 만든 거란다. 세상에 반복, 습관,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단다.
지금 오십의 내 모습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단다. 마음에 든다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다. 어쩌면 대다수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단다. 일상에 기적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단다.
10년쯤 전으로 바둑돌을 복기하듯 되돌아보면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원인을 대략 알고 있단다. 사십에 오십을 그려 봤지만 수많은 선택과 흔들림의 갈등이 있었을 거란다. 그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결과가 오십임을 알고 있단다. 10년 후 육십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사십에서 오십이 되는 방식 그대로, 오십에서 육십으로 살아간다면 그 결과는 어떻까? 우리는 이미 경험했단다. 일상의 삶에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성상근야 습상원야(性相近也 習相遠也)가 답일 수 있단다.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습(習)에 있단다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 원이 또한 습에 있단다. 반복하여 익히고, 반복을 동해 배우고, 반복적으로 연ㅅㅂ하고, 복잡하면 그 어떤 것도 능하게 된단다.
어떤 것이든 버릇과 습관으로 만드는 게 습이란다. 지나간 10년이야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다가올 10년에 희망이 있단다. 지나간 10년 동안에는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고민하고 갈등했다면, 다가올 10년은 반복에 희망을 걸어 보눈 게 좋은 전략이란다.
사십에는 불가능했을지라도 오십에는 가능성이 있단다. 사십에는 일관성이 없었지만 오십엔 다르단다.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보다하고 싶은 것에 더 중심을 두기 때문이란다. 돈이 되는 일에 무게를 두기보다 오래 할 수 있는 일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란다.
오십엔 희망이 있단다. 지난 10년처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가올 10년은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된단다. 지나온 10년이 가능성의 시기였다면 다가올 10년은 확신의 시기란다.
변하지 않는 삶의 원칙 중의 하나가 바로 반복이란다. 사십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면 오십엔 한 분야의 책을 반복하여 집중적으로 읽는 전략이 더 유효하단다.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게 오십의 유효한 독서법이라 할 수 있단다.
그는 강의를 마무리할 쯤 이런 말을 하곤 한단다.
"여러분은 저의 최고의 강의를 듣고 계십니다. 동시에 저의 최악의 강의를 듣고 계시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이 주제의 강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를 고치고 내일 또 하나를 고친다면, 모레는 오늘보다 조금 더 발전된 강의읠 것입니다"
저는 50대에 딱 두 가지를 반복했단다. 하나는 회사 경영이었다고 다른 하나는 <논어>였단다. 낮에는 회사 일을 했고 퇴근 이후엔 <논어> 공부에 집중했단다. 천자문을 외우고 <논어>를 외우면서 틈틈이 글을 썼단다. 3년 만에 첫 책을 출간했단다. 출간 후에는 <논어> 강의를 시작했단다. 강의하는 시간보다 강의 자료 만드는 데 열 배의 시간이 들었단다. 몇 권의 책을 더 출간하고 인문학 강사가 되었단다. 지천명 10년의 시간이 그를 바꿔 놓았단다.
부동산 유튜버로 유명한 이의상 대표에게 사회자가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3050세대에세 한 말씀부탁드립니다"라고 질문했단다. 이의상 대표는 "지금 막막하시다면 부동산 관련 재테크 책 50권만 읽어 보시면 그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희망을 볼 수 있고 또 확신을 찾게 되고요. 그러면 내가 해낼 수 있는 열정이나 동기가 생길 거예요. 주저앉지 마시고 재테크 책 50권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답을 찾을 거예요"라고 답했단다.
공자께서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라 말씀하셨단다.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19세기 영국의 대표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한 말이란다. 그이 말대로 지금 그의 삶은 희극인지 비극인지 궁금해진단다. 원려(遠慮),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고 했단다. 멀리 생각하는 원려는 다른 말로 목표란다. 미래에 대한 간절한 꿈이란다. 명확하고 원대하며 중장기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단다.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이란다. 현실에 안주하다 보면 미래를 잃어버릴지 모른단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소확행'에 빠지다 보면 무한한 미래 가능성의 잠재 가치를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현실은 늘 어렵단다. 그 어떤 시대에도 근심 걱정이 없지 않았단다. 왕이나 백성이나, 부자나 빈자나, 고관대작이나 평민이나, 자식이 많은 집안이나 자식이 없는 집안이나 근심 걱정이 없는 때는 없었단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하루하루의 삶은 비극에 더 가까웠단다. 그러니 2500년 전부터 목표와 꿈과 비전을 지니고 살아야 그나마 하루하루의 어려움을 겪어 낼 수 있다고 했던 거란다. 목표가 분명하다고 일상의 근심과 걱정이 바로 사라지진 않지만, 미래가 있고 희망이 보이면 더 힘을 낼 수 있단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한국 의병 참모 중장 신분으로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단다. 체포 후 사형 언도를 받은 1910년 2월 14일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신 날까지, 안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교도소장을 비롯하여 간수, 경찰, 검찰, 통역, 세무관 등 여러 사람에게 붓글씨를 써 주었단다. 그중 하나가 보물 제569호로 지정된 <인무원려 난성대업>이란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논어> 위령공편의 '인무원려 필유근우'와 유사한 명문이란다. 조선 침범의 원흉을 척살하면서 32세의 청년 안중근이 가졌던 원려, 원대한 계획, 대업은 그가 순국한 지 1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단다.
사람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운단다. 해가 바뀌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책을 읽거나 인상적인 강의를 듣고 난 다음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새로운 목표를 세우곤 한단다. 하지만 작심삼일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단다. 변화와 도전으로 목표를 이루고 싶지만, 시작도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단다. 무엇을, 왜 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 없이 하는 빠른 결심이나 목표가 아무리 크고 정교하다고 해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면 빠른 포기를 가져오게 된단다. 목표가 명확해도 실행 과정엔 언제나 장해물이 있게 마련이란다.
시간 관리를 잘하려면 약속 다음의 약속을 미리 잡으라는 격언이 있단다. 어떤 일이건 마치면 사람의 마음은 풀어지게 되어 있단다. 그래서 급하지 않으면 미루게 되는데, 이때 이미 다른 약속이 잡혀 있으면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단다. 하여, 실행 과정에서 만나는 장해물을 피해 가는 방법이 바로 원려란다. 한 단계만 더 멀리 보면, 늘 가까이서 발생하는 근심 걱정 장해물을 뛰어넘을 수 있단다.
정년퇴직이 보장된 조직에서 일한다면 60대 초반까지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직장인 대부분은 50대 중반이면 소득이 확연하게 줄어든단다. 명예퇴직, 중도퇴직, 자발적.비자발적 퇴직, 재취업, 이직, 전직, 자기 사업, 동업, 생계형 창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소득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 국민연금을 기대하며 힘든 금융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단다. 60대가 넘어 국민연금 수급자가 된다고 해도 2021년 기준 평균 50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으론 턱없이 부족하단다. 빈곤한 노인으로 내몰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도 짧단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약 50%로 OECD 회원국 중 1위의 불명예를 가지고 있단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단다. 고민은 실행이나 실천할 때보다 시작하기 전 할까 말까 망설일 때 더 많이 생긴단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데 저절로 해결되는 건 없단다. 대부분의 문제는 그만한 대가를 인해해야 해결된단다. 건강도 미래도 경제도 경력도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30세부터 55세까지 25년을 열심히 살았다면, 지난 25년만큼의 시간이 더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면 80세가 된단다. 55세에 인생을 다 산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단다. 그동안 할 만큼 했으니 연금이나 기다리면서 전국 100대 명산이나 찾아다니며 인자요산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단다.
다시 한 번 원려를 소환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란다. 지난 25년 동안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면 다가오는 25년은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목표를 잡아 보란다. 미래가 궁금할 거란다. 지난 25년 동안 나만을 위해 나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다가오는 25년은 내가 아닌 가족들을 살아가는 목표를 잡아 보란다. 미래가 궁금할 거란다. 지난 25년 동안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왔다면 다가오는 25년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재밌게 시간을 보내는 목표를 잡아 보란다. 미래가 어떻게 보일까? 지난 25년 동안 돈 되는 일을 사면서 궁색하게 살아왔다면 다가오는 25년은 사람을 찾아 함께하는 일을하며 시간을 보내는 목표를 잡아 보란다. 인생이 어떻게 보일까?
원려가 있든 없든 시간은 흘러가겠지만 25년이 지난 80세의 봄은 확연히 달라져 있을 거란다. 원려는 인생을 희극과 비극으로 인도하는 깃발이란다.
공자께서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라 말씀하셨단다.
군자는 위를 향하고 소인은 아래로 향한단다. 리더는 위를 보며 살고 보통 사람은 아래를 보며 살아간단다 배움을 좋아하고 바르게 행하려 힘쓰는 리더는 날이 갈수록 발전한단다. 재물과 사익에만 마음을 두는 보통 사람은 날이 갈수록 각박하고 청박해진단다. 리더는 근본을 바탕으로 뜻을 펴 나가지만 보통 사람은 지엽적인 것에 집중해 사사로움에 마음을 빼앗긴단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려 하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고 힘쓰는 사람은, 결국 리더다운 리더가 된단다. 이익이 있으면 만나고 이익이 없어지면 헤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리더가 되기엔 아직 멀었단다. 리더는 어떤 게 많은 이에게 이익이 되고 조화로운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지만, 보통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학습과 발전보다 현실 유지에 급급하단다.
얼마 전에 고층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이사했단다. 밤이 되면 별을 찾는 횟수가 이전보다 확실히 늘었단다. 별과 별 사이 보이지 않는 인터스텔라에 어떤 공간이 숨어 기막힌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한단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대로 지구에서의 1년이 먼 우주 공간에서는 단 1시간도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없이 소중해진단다. 먼 곳의 우주인에게는 지구의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가고 갓 태어난 아기가 70대 노인이 되기까지 단 3일밖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단다.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우리의 삶, 길지만 한없이 짧게 늙지는 우리의 삶이란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살다 간 지구별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단다. 과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그렇단다.
오늘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유는 두 가지란다. 지금까지 잘 못 살아왔거나 지금부터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중일 거란다. 목표 없이 되는대로 쉽게 살아왔다면, 현재의 고통은 하달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란다. 지금 도전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상달의 길을 가고 있는 거란다. 지난 과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라면 유쾌하지 못한 일이지만, 다가오는 미래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라면 유쾌한 일이란다.
조금 더 부지런한 살마이 되고자 노력했다면, 조금 더 검소한 사람이 되력 행동했다면, 조금 더 현명해지려고 열중했다면, 조금 더 이해하려고 공감했다면 상달의 길을 가려는 모습이란다. 조금 더 편해 보려고 뒤로 물러섰다면, 조금 더 잘나 보이려고 친구들을 밀쳐냈다면, 조금 더 마음대로 사려고 책을 던져 버렸다면, 조금 더 마음껏 살려고 마음대로 했다면 하달의 길을 걸어온 거란다. 불편하게 살아온 과거가 쌓여 평안한 오늘이 되고, 편하게 살아온 과거가 쌓여 불편한 오늘이 된단다. 불편했던 상달의 길이 오늘의 군자를 만들고, 편안했던 하달을 길이 오늘의 보통 사람을 만든단다. 그러니 하루하루 불편한 인생을 살아왔다면 리더의 길을 걸어온 것이고, 하루하루 편안한 인생을 살아왔다면 보통 사람의 길을 걸어온 거란다.
지금까지 줄곧 리더의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부터는 보통 사람의 인생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단다. 리더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즐거움을 만끽하며 새로운 차원의 상달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단다. 지금까지 보통 사람의 길을 걸어왔다면, 지금부터는 리더의 인생 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들에게 오십은 새로운 인생의 이정표가 될 거란다.
내 마음대로 살아온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란다.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하달의 길을 걸어왔다는 걸 인정하는 거란다. 이제 노선을 조정하여 상달의 열차에 타보는 것이란다. 지금이 아니면 이번 생에 상달의 열차를 타 본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단다.
군자가 아니면 어때? 존경받는 리더가 아니더라도 문제없단다. 우리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모두 군자, 리더에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란다. 어제보다 조금 나온 오늘,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만 있다면 곧 상달의 길이란다. 경제적인 부를 가진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길을 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건 좋은 조건이지만, 조건이 좋다고 해서 항상 유리하진 않단다. 경제적인 여유가 더 좋은 삶으로의 여정에 장해가 되는 경우가 그렇단다. 지금의 가난함도 상달의 길을 가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단다. 빈곤이 오히려 득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란다. 가난을 동기부여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단다.
축적의 삶보다 나누는 삶이 상달의 여정이란다. 가진 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리더의 삶이란다. 이미 가진 것에 더해 더 많이 가지려 노력하는 습성이 흔한 모습이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걸 나누는데 오십은 가장 적당한 시기란다. 타인과 돈을 나눠 가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경험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없단다. 남들이 보기에 쉽게 얻어진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세상에 쉽게 이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하여 사소한 그 어떤 것도 타인과 나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란다.
공자께서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다음이고, 곤장에 처해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다음이며, 곤장에 처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급이 된다"라 하셨단다.
공자는 배움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4단계로 나눠 정의했단다. 천재나 영재로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을 가장 상급이라 했고, 배워서 아는 사람을 그다음 등급이라 했으며, 어려움과 곤경을 배움으로 극복해 내는 사람을 그다음 등급으로 들었단다. 가장 마지막 등급은 아누리 곤경에 처해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라 했단다. 그러면서 공자 본인은 상급이 아니라 스스로 배워서 터득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라 칭했단다.
아버지의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20대 중반에 이미 석박사가 되거나 판검사가 되는 사람은 상급, 1등급이란다.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학업 과정을 장학금으로 마친 후 최고의 조직에 안착한 사람은 그다음 등급, 2등급이란다. 보통 실력으로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조직에 들어가 모든 간계를 빠트림 없이 겪으면서도 그 수많은 곤경을 피랄 길이 없어, 피를 토하는 각오로 석박사와 MBA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다음 등급, 3등급이란다.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면서도 제대로 된 평가나 보상도 받디 못하며, 죽을힘을 다해 일은 하지만 배움을 멀리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 가장 하급, 4등급이 되고 만다고 할 수 있단다.
1등급의 사람들은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쉽단다. 석사, 박사, 판사, 검사 타이틀이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페어플레이와 거리가 먼 부자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쟁을 거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모범을 보이면 좋을 만한 사회의 리더들이 자기들만을 위한 불공정의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2등급의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 3등급의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란다. 그러니 우리가 염려하는 건 1, 2, 3등급의 사람들이 아니란다. 공자가 염려했던 이들도 1, 2, 3등급의 사람들이 아니었단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도 스스로 잘해 나간단다. 그들은 이미 사회의 주류가 되어 가고 있단다. 주류가 되어 다양한 편익을 독점하며 기회를 선점하고 있단다.
문제는 4등급 사람들이란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단다. 공자가 가장 염려했던 바로 그 영역의 사람들은, 한 발만 삐긋해도 천길 벼랑으로 떨어질 것만 같이 위태롭단다. 책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인데 책을 가장 멀리한단다. 공부가 가장 필요한데 공부를 가장 멀리한단다. 가장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도리어 1, 2, 3등급의 사람들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적지않단다.
되돌아보면, 저자도 회사 재직 시절에는 제대로 끝까지 읽어 낸 책 한 권이 없었단다. 늘 바쁜 건 아니었지만 머리와 몸은 늘 바쁜 상황에서 벗어나질 못했단다. 손에 책을 잡을 만한 여유가 생기질 않았단다. 원래 직장인은 그렇게 사는 것으로 알았단다. 승진에서 떨어져도,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해외 연수의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학 성적이 저조해 놓치고 말았지만, 그러려니 했단다. 그러면서도 남들보다 안정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위안을 가지고 있었단다. 위기가 올 때마다 역량을 키울 기회도 함께 왔지만 매번 기회인 둘 몰랐단다.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단다. 바쁘니까, 좋은 직장에 달 다니고 있으니까, 졸업장으로 이미 역량을 인정받았으니까, 쉬기도 하고 아이들과 놀기도 해야 하니까, 특별히 공부할 것도 없으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니까, 편하게 살아도 시간 되면 승진할 테고 매달 월급은 들어올 테니까, 책을 멀리할 이유는 차고 넘쳤단다.
되돌아보면 등급 상승의 첫 번째 기회를 바람에 날려 버렸단다. 승진에서 떨어진 게 기회였고, 낮은 어학 점수가 기회였고, 남들 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니까 기회였고, 편하게 출근만 해도 승진할 수 있어서 기회였고, 편하게 지내도 매달 월급이 들어와서 기회였던 거란다. 최상의 조건에서 공부만 조금 더 해놓았다면, 1년에 책 열 권만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거란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단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연장을 쓸 때가 있음녀 써서 안 될 때가 있고, 서로 켜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둘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 <성경> 전도서
해가 났을 때 젖은 볏짚을 말려야 한단다. 이번 생의 전반전은 재수가 없어 4등급에 몰리게 되었다고 해도, 아직 인생 후반전은 아니란다. 전략적인 하프타임을 보낼 수 있다면 후반에는 등급을 올릴 수 있단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때란다.
저자는 그 시기를 회사 퇴직 후에 보냈단다. 40대 붕반, 퇴직 후 맞이한 환경은 회사의 따뜻한 울이 아니었단다. 그래도 한편 다행스러웠던 건 막 끓기 시작한 냄비에서 뛰쳐나온 개구리의 모습이었던 거란다. 그로부터 5년 이상 하프타임을 보내면서 곤이학지(困而學之)의 시간을 보냈단다.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경제 활동을 하며 미래를 준비했단다. 아이디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정을 통해야만 결과를 만들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단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두 번은 넘어진단다. 넘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늘 그다음이 문제란다. 왜 넘어졌는지, 왜 곤란함을 겪었는지 생각해야 한단다. 공자의 지적처럼 그런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 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아쉬운 일도 없기 때문이란다.
공자께서
"생각 없이 배우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한다" 라고 말씀하셨단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두 가지란다. 하나는 일반지식, 다른 하는 전문지식이란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일반지식에 가깝단다. 넓고 얕은 지식으로 일반상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단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은 전문지식이란다. 넓이보다 깊이가 있는 지식으로 돈이 되는 지식이란다. 교육 역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단다. 하나는 새롭거나 필요한 지식을 알려 주는 것, 다른 하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잠재력을 끄집어 내는 거란다.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 교육과 직상인 혹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 교육은 다릅니다.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학교 교육과 새로운 지식이 공급보다는 경험으로 축적된 개인의 잠재 역량을 계발시키는 성인 교육은 방법이 다르단다. 그러니 10대의 학습법과 50대의 학습법은 달라야하는 게 당연하단다.
'직장에서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50대가 자영 사업을 시작하는 건 곧 상장 폐기될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과 같다'는 타이틀로 방송을 했던 전문 유튜버가 있단다. 그는 퇴직 후 급한 마음에 프랜차이즈나 자영업을 시작하기보다 그간의 전문성을 살려 전문 직종의 자격증 예컨대 주택관리사, 전기설비사, 전문요양사, 감정평가사, 요리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단다. 50대는 50대에 맞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란다.
10대에 하는 공부는 의무에 가깝지만 50대에 하는 공부는 용기가 필요하단다. 그간 자신의 직업을 통해 굳어진 고정관념을 허무는 용기가 필요하단다. 사람이 직업을 선택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서 직업이 사람을 만들고 일이 인생을 결정한단다. 양털처럼 부드러웠던 사람이 고슴도치 털처럼 뻣뻣해지는 것도 그와 수십 년을 함께한 직업과 일 때문이란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수치에 밝은 사람도, 영업 업무를 수십 년 하고 나면 수학.과학의 치밀함은 사라지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게 된단다.
50대의 공부엔 용기가 필요하단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란다. 망설임과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공부와 함께 찾아오겠지만 이번 생에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그것을 잡을 용기가 필요하단다. 용기 있는 자가 미임을 얻고, 용기 있는 자가 행복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단다.
학이불사(學而不思), 불편함 속에서도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50대의 공부는 전문성을 높이는 성인 학습이 주가 되어야 한단다. 생각 없이 공부해서는 안 된단다.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단다. 어떤 목적을 위한 공부이며 독서인지를 분명하게 정해야 한단다. 어떤 분야의 전문성이 왜 필요한지를 꼭 알아야 한단다. 인생 후반전은 그것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미래 방향과 목표를 정함에 있어 현재 모습을 고려할 필요는 없단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평균 이하의 상황이라 해도 상관없단ㄷ. 성공하면 지금의 초라함이 더없이 좋은 감동 스토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분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전문지식이 필요한가, 그것만 정확하게 뽑아 낸다면 50대의 공부는 이미 반 이상 선결된단다.
그는 오십에 인생 후반전 목표를 강의로 잡았단다. 그간 강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을 해 왔었기에 전문 강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다시피 했단다. 강사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역량을 키워야 하는지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없었지만, 강의하는 인생 후반을 꿈꿨단다. 조금 무모하지만 결심하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고개를 들었단다. 강사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 정말 강사가 되고 싶은가? 먹고 살 정도이 수입은 가능할까? 그가 강의를 한다고 하면 그동안 그를 알았던 사람은 뭐라고 할까?
불안함과 가능성이 공존하면서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인생 후반에 그가 오랫동안 할 수 있눈 일로 강의를 해 보자고 결정했단다. 목표가 생기면 조준은 누구나 가능하단다. 안정된 마음으로 조준을 연습하면 정조준도 가능하게 된단다.
목표를 정하면 바로 준비 단계로 들어가야 한단다. 목표를 정해 놓고 실천하지 않은 건 목표를 정한 게 아니란다. 옹골차게 시작하지 못하고 하루 이틀 계속 지연하면 실현할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단다. 말로는 목표를 정했다 해도 사실이 아니란다. 그렇게 엉거주춤 시간을 보내면서 목표를 달성한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단다. 배움 없이 고민만 하면서 특별한 결과를 바라고 있다면 오만에 불과하단다.
그가 인생 후반의 목표로 '강의'에 두었다고 결정하니 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단다. 강의 주제가 시원치 않았고, 남들 앞에 서는 강사로서 번듯한 학력이 부족했단다. 그때까지 전자공학 학사라는 학력이 부족하다고느낀 적은 없었지만, 강사로서 전자공학 학사는 밖으로 드러내 놓기엔 왠지 자신감이 떨어졌단다. 그래서 장기적은 포석으로 석박사라는 목표를 잡았고, 바로전공과 학교를 알아 봤단다. 학위를 받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시작하면 끝은 분명 정해질 것이라 믿고 결심했단다.
시작하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을 살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경력과 다소 다를지라도 해 보고 싶은 걸 해보겠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오십은 분명 또 하나의 기회란다.
오십은 새로운 걸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란다. 학이부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생각 없이 배우면 그 끝이 허망하게 되고 배우지 않고 고민만 하고 있으면 인생이 위태롭게 된다는 공자의 명언처럼 오십은 공부다운 공부, 내 인생의 공부를 시작하기에 최적의 시기란다.
현재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사태가 회복되기까지 아마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내하고 기다리면 반드시 나아지리라는 것을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 윈스턴 처칠
공자께서
"후배들이 두렵나니 어떻게 장래의 그들이 오늘날의 우리만 못할 줄로 아는가. 그러나 사오십 살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크게 두려워할 바는 없다"라 말씀하셨단다.
후배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 정도 되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나을 수도 있기에, 후배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단다. 그래야 나도 자만하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단다. 하지만 후배의 나이가 사십, 오십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후배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적어도 나이 오십까지는 뭔가 잘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노력하라는 뜻이란다.
자식 역시 마찬가지란다. 자식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 정도 되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나을 수도 있기에, 자식을 소중하게 다뤄야 한단다. 하지만 자식의 나이가 사십, 오십이 되어도 명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오십까지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 독려하고 가르쳐서 가문을 훌륭히 이을 수 있게 노력하라는 뜻이기도 하단다.
나는 나의 어머니 아버지보다 잘 살고 있을까? 그분들의 50대보다 지금의 나는 과연 잘해 나가고 있을까? 가문의 재건을 위해, 집안을 제대로 보존하고 견사하기 위해, 내가 하는 언사나 행동이 아버지 어머니보다 잘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평생 농사만 지은 농부였단다. 품앗이 농사로 늘 바쁘셨지만, 농산기 때는 40, 50리 떨어진 곳에서 건축용 나무를 구매해 다시 40, 50리 떨어진 안성이나 평택까지 가져다 이문을 조금 남기고 파는 장사를 했단다. 소 마차를 끌고 수십 리를 돌아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늘 달콤한 빵을 한두 개씩 사다 주셨단다. 그 빵 맛에, 저녁이면 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는 늘 들떠 있었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버지가 쉬는 모습을 단 하루도 본 적이 없었단다. 농번기에는 밤에나 겨우 검게 그을린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단다. 겨울에는 나무 장사에 바쁘셨고, 비 오는 날에는 새끼 꼬기에 바쁘셨단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청마루엔 늘 가득히 펼쳐놓은 푸석푸석한 고추 더미가 기다리고 있었단다. 온 식구들이 메달려 마른 고추의 꼭지를 따고 있는 마루엔, 고추의 매운 공기가 떠나질 않았단다. 꼭지를 따낸 고추는 배를 반으로 갈라 햇볕에 바짝 말린 후 고추방앗간에서 빨갛고 고운 고추가루로 만들어진단다.
어머니는 그 고춧가루를 머리에 이고 평택과 안중으로 팔러 다니셨단다. 중국 음식점과 식당에 단골로 방문 판매를 하셨단다. 고춧가루 자루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 그와 동생들을 데리고 갔던 적도 여려 번 있었단다. 가끔 사 주시는 짜장면 맛에 빠져 어머니가 무순 일을 하고 계시는지는 잘 인지하지 못했단다. 다섯, 여덟, 아홉 살 아이들 셋을 데리고 터덜거리는 시골 버스로 두 시간도 더 되는 먼 길로 장사를 나가셨단다.
농번기의 어머니는 너무나 바쁘셨단다. 스무 명이나 되는 식구의 집안 살림은 물론 낮에는 밭으로 논으로 단 한군간의 쉬는 시간을 본 적이 없단다.
<명심보감> 입교편에, '독서는 집을 일으키는 근본이요. 이치를 따름은 집을 잘 보존하는 근본이요, 근면과 검약은 집을 다스리는 근본이요. 화목과 순종은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근본이다' 나오는 어구란다.
그의 부모와 그는 불과 한 세대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1000년 이상 내려온 <명심보가>의 저 어구가 그의 부모 세대에는 말없이 실현되고 있었단다. 배움으로 치자면 자식 세대의 반도 미치지 못하셨지만, 그분들의 삶은 자식의 삶보다 100배는 더 멋졌단다. 비단 그의 부모만이 아닌 50년 전에 삶을 살아 낸 모든 부모가 그러했단다.
지금 오십이 되는 그는 자식들에게 늘 독서 하는 모습과 궁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지, 순리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진 않은지, 조금 힘들다고 아이들처럼 불평과 불만만 내 보이고 있진 않은지, 빨리 가려는 욕심 때문에 비리에 말려 들지 않은지, 조금 더 의연한 자세로 삶을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단다. 부모로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진 않은지, 모법을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바름과 사랑으로 늘 이끌어 주고 있는지 자문해 본단다.
이 어구는 후배나 지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단다. 지금의 나에 관한 공자의 인생 마지막 경고란다. 오십에도 뭔가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무서운 경고란다. 물론 오십이라는 숫자를 지금은 육십 혹은 칠십으로 늘려 적용해야겠지만, 지금의 오십 세대에게 주는 공자의 경고임에 틀림없단다. 그래서 오십의 사니는 지간 삶을 되돌아보기에 아주 적당한 시기란다 미래를 계획해 보기에도 아주 적당한 때란다. 혹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혹여 지금까지의 삶이 원칙을 저 버린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혹여 지금까지 부지런히 살아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혹여 지금까지 낭비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혹여 지금까지 자기주장만 강하게 설파하면서 살아왔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혹여 지금까지 피해의식 가득한 삶을 살아왔다면, 생각을 바꿀 때란다.
오십은 다시 한 번 출발해 보기에 절대로늦지 않은 시기란다. 오십은 칠십이 되기에 아직도20년이나 더 남을 때이기 때문이란다. 서른에 오십을 바라보는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란다. 오십은 용기를 내기에 절대로 늦지 않은 나이란다. 모법을 보이며 훌륭히 살다 가신 우리의 부모들만큼 우리도 멋진 삶을 자식들에게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시간이 오십이기 때문이란다. 시작하기에 아주 적절한 나이가 바로 오십 지천명이란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관하여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단다. 이에 공자께서 "너는 왜 나에 대하여 분발하면 밥 먹기를 잊고, 즐거움에 걱정을 잊으며, 늙음이 닥쳐오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 말씀하셨단다.
공자께서 50대 후반,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할 때 초나라의 변방인 섭지방을 지나고 있었단다. 섭지방의 수장인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관해 은근히 물었단다. 아마도 섭공은 공자에 관해 평판 조회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란다. 이에 자로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단다. 이 사실을 나중에 들은 공자가 자로에게 "우리 스승은 배움에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몰입하고, 그 몰입의 즐거움에 일상의 근심 걱정까지 잊으며, 세월 가는 것과 늙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단다.
관심 두는 일은 시작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열정적인 군자라 말해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 공자의 반응이었단다. 섭공이 도움으로 향후 토나라에서의 정치를 꿈꿨는지도 모른단다. 결국 섭공의 큰 도움은 없었다만, 이 공자의 말을 통해 공자의 열정적인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단다. 공부에 몰두하다 밥때를 놓치기는 부지기수란다. 학문으로 원하는 바를 얻으면 그 즐거움으로 다른 걱정은 모두 사라지고, 노녕의 쇄약해져 가는 건강 위협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공자의 자술이란다. 학문의 열정, 일의 열정, 어떤 것에 몰입하여 열정적으로 살아간 공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강론 중이던 신부님이 신도들에게 "지옥 가고 싶은 분 있으시면 손들어 보세요"하고 질문을 했단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단다. 그러나 이번엔 "그럼 천당 가고 싶은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자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단다. 바로 "그럼 지금 바로 천당 가고 싶은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단다."그러니 지금 여기가, 천당보다 낫습니다. 지금 여기서 잘 살아야 합니다."
사형 집행 한 시간 전, 사형수의 간절한 마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만일 어느 높은 절벽 위나 그렇지 않으면 겨우 두 발로 서 있을 정도로 비좁은 장소에서 절벽과 바다와 영원한 어둠과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갇힌 채 살아야 한 대도, 사방 한 자밖에 되지 않는 장소에 평생토록, 천 년이든 만 년이든 영원히 서 있어야만 한 대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그래도 낫다는 거야, 살고 싶다. 사고 싶단 말이야. 어떤 식으로 살더라도 살고 싶다. 이보다 더한 진실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묘사했단다.
미국 NBC의 인기 프로인 <아메리카 갓 탤런트> 무대에 오른 어느 마른 체구의 가녀린 여인은,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이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폐와 간 그리고 척수로 전이된 암과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존 확률이 2퍼센트입니다. 그런데 2퍼센트는 0퍼센트가 아닙니다. 저에게 2퍼센트는 대단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개했단다.
그녀가 무대에서 부른 노래의 제목은 <It is okay>였단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노래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은 감동의 눈시울을 붉혔단다. 이날 제인 마르크제프스키는 '골든 버저'를 얻어 준결승에 진출하며 생방송 출연권까지 획득했단다.
노래 : It is okay https://youtu.be/CZJvBfoHDk0 |
공자의 시간이나 우리의 시간이나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단다. 2500년 전 공자의 시간은 소중하고 지금 우리의 시간은 덜 중요하지 않단다. 그 누구의 시간도 모두 소중하단다. 사형 집행 한 시간 전 사형수의 시간이나 2퍼센트의 생존 확률을 가진 제인 마르크제프스키의 시간이나 공자의 시간이나 지금 50대의 시간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란다. 천당보다 나은 이곳에서의 시간은 모두에게 소중하단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도 간절하고, 누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에게는 일분일초가 그토록 소중하고, 누구에게는 한 달 1년이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십 지천명, 어떤 일을 해야 밥때도 잊을 정도의 열정을 가지게 될까? 어떤 일을 선택해야 근심 걱정도 잊은 채 일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해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늙어 가는 것도차 느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를까?
나폴레옹 힐은 그의 명저 <성공의 법칙>에서 그 이유를 '열정'에서 찾았는데, '열정이란 어떤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열정은 행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사람과 열정과의 관계는 증기기관차와 증기와의 관계와 같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방전된 배터리와 같다'고 말했단다. .
사람들 대부분은 열정적으로 살고 싶어 한단다. 다만 환경과 조건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단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멋지고 뜨겁게 살아 보리라 생각한단다. 왜 아니겠는가? 단 한 번뿐인 삶인데, 단 한 번뿐인 인생인데, 단 한 번뿐인 지구별 여행인데 누군들 한번 멋지게 뜨겁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평생 남들에게 박수만 쳐 주며 살고 싶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좋은 환경과 기회는 오지 않는단다. 기회는 만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단다. 무작정 기다리는 건 답이 아니란다. 오십에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가 바로 그것이란다. 아직 시간을 마음대로 계획하고 사용할 수 있는 오십의 시기에 용기를 가져야 한단다.
우리가 공자처럼 될 수는 없지만, 사형수의 마음처럼 갈급할 수는 없지만, 제인 마르크제프스키처럼 간절하지는 못하지만 시작해야 한단다. 용기를 가져야한단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한단다. 언제부턴가 잊고 있던 '열정'의 배터리를 채워야 한단다.
나오며
잘 다니던 대기업을 왜 중간에 나왔을까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20년 직장 생활을 하고 40대 중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나왔단다. 마침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표를 제출했단다. 퇴직금과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을뿐 어떤 구체적인 준비도 없이 바로 명예퇴직을 했단다.
사람들에게 둘러 댔던 퇴직 이유는 그럴듯했단다. 이제 더는 그가 아니 남의 인생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고. 어재 더는 회사 대표의 꿈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고, 이제 더는 타인의 목표달성을 위해 들러리 서고 싶지 않다고, 이제 더는 선택당하지 않고 그가 그의 꿈고 미래를 선택하며 살고 싶다고 했단다.
하지만 퇴직 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우아하고 품위 있는 그의 삶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달 들어와야 하는 월급이 더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단다. 사라진 월급 봉투의 힘과 매달 어김없이 들어가는 생활비를 보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단다. 퇴직 전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이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걸 목도했을 때, 그의 인생이 예상에 없던 궁한 상태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단다.
목표를 정했단다. 처음으로 조직의 목표가 아닌 개인의 목표를 세웠단다. 하나는 인생 후반은 강의하면서 살자였고, 다른 하나는 급여가 적더라도 시간 여유가 있는 경제 활동을 하자였단다.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직장인의 삶에서, 그 돈만큼 시간을 만들어 더 가치 있는 것에 쓰기로 했단다. 강의를 준비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더 쓰고자 결심했단다.
목표가 생기자 프리랜서 헤드헌터로 일을 시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단다. 실적 베이스로 수당을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헤드헌터 회사로서도 부담이 없고, 그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단다. 엔지니어 출신에인사 채용 경력은 전문 헤드헌터가 되기에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단다. 고정급이 없는 수당제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열심히 하면 해결 가능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바로 출근했단다.
이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단다. 지난 20여 년 그렇게 지겨웠던 출근이 더 이상 지겹지 않았단다. 출근 거리가 훨씬 멀어졌지만 힘들지 않았단다. 프리랜서 형태의 근무 조건으로, 출퇴근 시간이 어느 정도 자유로웠단다. 지각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게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그때 깨달았단다.
곧이어 몇 가지 변화를 시도했단다. 시간 관리와 시간 경영이었단다. 매달 수입도 올리고 잘나가는 강사로 서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을 직장인이었을 때처럼 쓸 수는 없었단다. 당장 먹고살 생활비와 미래 준비에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단다.
다른 하나는 독서였단다. 직장 생활 20여 년 동안 읽었던 책보다 퇴직 후 1년 동안 읽은 책이 더 많았단다. 업무도 익혀야디, 책도 읽어야지, 사람들도 새로 사귀어야지, 먼 거리 출최근도 해야지, 시간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헤드헌터로 어느 정도 실적도 올리고 업무의 안정감도 들었을 때 대학원을 생각했단다. 40대 후반은 늦은 나이가 분명했지만, 프리랜서 강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 인적자원개발, 즉 HRD로 석자를 하고 평생학습으로 박사를 공부했단다.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단다.
블혹을 지나 지천명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시도를 하나 했단다. 당시 헤드헌터 회사를 직접 경영하고 있었고, 박사 공부를 할 때인데, 점심 시간에 사무실 근처 잠실 석촌호수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단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천자문>은 의외로 재미가 있었단다. 그래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논어>를 읽기 시작했단다. 2년 정도 지났을 때 논어 책을 한 권 출간했단다. 시간을 관리하고 경영하게 되면서 <블루타임>을 출간할 수 있었단다.
학위 과정이 끝나자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매주 토요일 강의를 하게 되었단다. 드디어 고정 강의가 생긴 것이란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주중에는 가끔 가의나 강연을 다니고 주말에는 학교 강의를 하게 되니 강의도 점점 더 재밌어졌단다.
50대 중반에는 한국강사협회에서 주관하는 전국강사경진대회에 참가해 금상을 받기도 했단다. <논어>를 주제로 한 책을 몇 권 더 쓰게 되었단다. 대학 강의와 함께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주로 하게 되었단다.
지천명이 끝나고 이순에 들어섰을 때, 그는 헤드헌터 회사를 정리하고 온전히 강의만 하는 강사로 바뀌어 있었단다. 40대 중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열다섯 권의 책을 출간했단다. 1년에 100번 이상 인문학 강의를 하는 강사가 되었단다. 15년 전 명예퇴직 후 궁지에 몰렸을 때 직장인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에 감사하고 있단다. 지천명의 시기에 '천명'을 찾은 것 같아 감사하고 있단다.
인생의 하프타임 오십에 서서 천명과 지천명, 변화의 의미를 생각해봤단다. 다시 한 번 인생의 소중한 꿈을 생각하며 인생 후반의 목표를 점검해 봤단다. 공부다운 공부를 통해 자신의 강범을 강화하여 인생의 기회를 만들어 가는 단계를 살펴봤단다. 행동고 도전에 필요한 요소들을 점검하며 오십의 공허를 행복한 삶으로 바꾸는 전략과 전술을 논의해 봤다낟.
2500년 동안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논어와 함께 지난 오십을 되돌아 보며 미래의 오십을 설계해 보면 좋겠단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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