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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전시회 -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전)

동선(冬扇) 2009. 2. 5. 08:32

 

오스트리아 국보급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전"을 아시아 최초로 전시.

 

(2.2 ~ 5.15,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 클림트 아시아 첫 전시회 2.2∼5.15

영화 ‘프리티 우먼’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1990년과 1991년 두 편의 영화로 예술 문외한이던 일반 관객들을 서구 음악과 미술의 심장부로 안내한다. 1990년 ‘프리티 우먼’에서 난생 처음 보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빠져들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녀가 그 다음 해 영화 ‘사랑을 위하여’에선 백혈병에 걸린 부잣집 아드님이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들을 슬라이드로 보고 미술에 눈을 뜬다. 바로 그녀를 닮은 빨간 머리의 육감적 여성들을 화폭에 담은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다. 이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와 ‘다나에’ 등은 한국에서도 연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포스터와 엽서가 됐다.

그 연인들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동아일보가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과 공동 주최하는 미술 전시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토털 아트를 찾아서’를 통해서다. 2월 2일∼5월 15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유디트Ⅰ’(1917년)과 ‘베토벤 프리즈’(1901∼1902년) ‘아담과 이브’(1901년), ‘아기’(1917년) 등 대표작을 포함해 30여 점의 유화와 드로잉 및 포스터 원본 70여 점 등 110여 점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클림트 작품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을 필두로 세계 11개국 20여 개 미술관이 작품 대여에 참여한 이번 전시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최초의 클림트 단독 전시다. 뿐만 아니라 벨베데레 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클림트의 작품을 해외 전시에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던 세기말을 대표하는 화가다. 미술사적으로는 미학과 실용을 결합해 총체적 예술(토털 아트)을 추구한 빈 분리파를 대표하는 화가이면서 화려한 황금빛 장식 표현과 파격적이면서도 과감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운명의 여인에서 악녀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팜 파탈’의 이미지를 구축한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에는 ‘키스’와 ‘다나에’, ‘물뱀’ 연작과 ‘아델레 블로흐바워 부인’ 등은 빠졌다. 그러나 미술과 공예, 회화와 건축의 결합을 시도한 빈 분리파를 대표하는 벽화 연작 ‘베토벤 프리즈’와 팜 파탈 이미지를 대표하는 ‘유디트Ⅰ’ 그리고 그의 작품으로선 이례적으로 갓난아기의 순수함을 장엄하게 포착한 ‘아기’ 및 다양한 드로잉과 포스터 작품을 통해 클림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벨베데레 미술관 부관장인 알프레트 바이딩거 씨와 클림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제인 캘리어 씨가 큐레이터로 직접 참여해 그토록 여성성을 찬미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클림트의 이율배반적 생애와 작품세계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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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분리파의 창시자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 ~ 1918)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에서 이주해 온 금세공사 에른스트 클림트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술회가 말해 주듯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장녀를 광적인 종교에 잃고 막내딸마저 병으로 잃은 뒤 남은 다섯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키워 보겠다는 양친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으로 예정된 미래를 짊어진 채 고등 공민 학교인 "뷔르거슐레"에 입학한다.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예정된 운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훗날을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라이헨베르크 국립 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아 나간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이 활동에 나선다.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장식, 피우메에 있는 리예카 국립 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이 이 세 젊은 예술가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 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등 그는 점차 뛰어난 장식 화가로 비엔나 문화계의 전면에 도드라졌다.

 

1892년 그의 둘도 없는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트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부친마저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와 함께 남은 가족과 동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도 또 내면적 위기도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소외된 채 길고 나른한 동면에 빠져 있었다. 늙고 고루한 예술가들의 횡포와 과도한 상업적 배려에 짓눌려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화단을 바라보며 진작부터 새로운 미술의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897년 '동떨어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독점적 위치를 이용하여 악화를 구축하고 있던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선임된다. [비엔나 분리파]의 정신적 수원(水源)이었던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체 없이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한 클림트는,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파종한다.

 

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하자, 그를 후원하는 한 실업가의 도움을 받아 문교부로부터 받았던 사례금을 돌려주고 그 작품들을 비엔나 대학에 서 철수시킨다.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비단 이 작품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02년 거장 베토벤을 기념해 만든 30여 미터에 이르는 대작 벽화 [베토벤 프리체]도 여론의 격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록 자국 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이렇듯 경원되고 혐오되었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는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으며,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체]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짐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그의 예술의 진가를 확인해 주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아래 속속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모네, 샤반느, 막스 클링거, 맥도널드, 매킨토시 같은 외국의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하면서 오스트리아에 모더니즘의 씨를 뿌리고 다시 그 영향을 유럽 전역으로 파급한다.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비엔나 분리파]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경향과 계급적 모호성에 대한 비난이 안팎으로 제기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난에 지쳐 있기도 했던 클림트는, 1905년 돌연 회장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침잠한다. 난장판 같은 소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그는,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그의 예술의 가장 중요한 시기, 이른바 "황금 시대"의 경작에 매달린다.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이 이 시기, 그의 주요한 소출들이었다.

 

그리고 대표작이자 "황금 시대"의 절정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 시절, 처음에는 부업이 그리고 나중엔 본업이 되다시피 한 여러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 [스토클레 저택 벽화] 같은 분리파 시절의 건축과 연관된 작업들에서도 내내 장식성은 그의 공기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런데 "황금 시대"를 종료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파 내의 반 분리파였던 아돌프 로스의 저서 [장식과 죄악]의 영향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발언이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과연 장식성에서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상수인 관능성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은 그의 최후의 그림들에서까지도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식성과 관능성,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이 '살아있는 송장'들을 그는 최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0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해 색채가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독립된 구성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재 면에서 풍경과 초상이 그의 그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일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풍의 긴 장옷을 걸치고 일년의 반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그와는 사돈지간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휴식과 명상을 즐기곤 했다.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그의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바로 아터 호수 주위의 풍광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고흐와 모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은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들을 베르타 주커칸들은 '채색된 슈베르트의 선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상화 또한 그가 풍경화와 더불어 말년에 즐겨한 작업이었다. [프리차리들러 부인의 초상] [아델 블로흐 부인의 초상] [마르가레트 스톤브로우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초상] [요한나 슈타우데 부인의 초상]등 그는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과 색채로 비엔나의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에게서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은 비엔나 상류층 부인들의 긍지이자 영광이었다.

 

자신의 삶과 그림을 둘러싼 그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가슴을 벌레처럼 파먹어 대는 그 집요한 금전적 번민에서도 벗어나 자연 속에 파묻혀 관조와 명상의 나날을 보내며,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르베, 르느와르와 더불어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비엔나 예술 아카데미]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한 그의 말년은 분명 평화로운 것이었다. 1918년은 시 마치 흑사병과도 같은 맹위를 떨치며 전 유럽을 강타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를 기습해 분리파 예술가들을 몰살시킨 해였다. 클림트는 1월 18일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다 결국 스페인 독감에 걸려 2월 6일 평생의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가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쉴레도 갔다. [비엔나 분리파]라는 '성스러운 봄'이 장엄하게 저무는 순간이었다. 클림트의 삶과 그림을 관류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그리고 언제나 현재적인 테마였다. 그가 과연 자신의 화두를 풀었는지 못 풀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풍경화에 몰두한 그의 말년의 모습에서 그저 어렴풋이 헤아려 볼 뿐이다. 완전한 사랑이란 영원히 인간의 손에 쥐어지지 않으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낡고 남루한 집 같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흠 없는 거쳐가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