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여행-일상-여행의 고리를 잇는, 아홉 개의 매혹적인 이야기 『여행의 이유』는 작가 김영하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순간부터 최근의 여행까지, 오랜 시간 여행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아홉 개의 이야기로 풀어낸 산문이다. 여행지에서 겪은 경험을 풀어낸 여행담이기보다는, 여행을 중심으로 인간과 글쓰기, 타자와 삶의 의미로 주제가 확장되어가는 사유의 여행에 가깝다. 작품에 담긴 소설가이자 여행자로서 바라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놀랄 만큼 매혹적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그러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던 상념의 자락들을 끄집어내 생기를 불어넣는 김영하 작가 특유의 (인)문학적 사유의 성찬이 담겼다.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그러니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그 무엇보다 우선 작가였고, 그다음으로는 역시 여행자였다. 글쓰기와 여행을 가장 많이,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쓸 기회가 많았지만 여행은 그렇지를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기억 깊은 곳에서 딸려 올라왔다. 저 : 김영하 1968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잠실의 신천중학교와 잠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한 번도 자신이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0년대 초에 PC통신 하이텔에 올린 짤막한 콩트들이 뜨거운 반응을 얻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작가적 재능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살며 여행, 요리, 그림 그리기와 정원 일을 좋아한다. 1995년 계간 [리뷰]에 「거울에 대한 명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퀴즈쇼』, 『빛의 제국』, 『검은 꽃』, 『아랑은 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집 『오직 두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호출』, 여행에 관한 산문 『여행의 이유』와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냈고, 산문집 삼부작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과 『랄랄라 하우스』 등이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만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등 해외 각국에서 활발하게 번역 출간되고 있다. |
추방과 멀미
2005년 12월의 어느 날, 그는 상하이 푸등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단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는 공항에서 항공권을, 더더군다나 편도는 사지 않는단다.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단다. 추방당하고 있었던 거란다.
"카드로 결제하실 건가요. 아나면 현금으로?"
엄중한 순간에 던져지는 이런 사소한 질문에 대해, 그 기묘한 효과에 대해, 직업적 호기심으로 생각해보곤 한단다. 예를 들어 형장에 들어서는 사형수에게 계단으로 올라갈 건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건지를 물을 수 있단다. 인간은 질문을 받으면 잡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단다. 예정된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간은 약간의 고심을 할 수 있고, 눈앞에 닥쳐온 진짜 문제를 잠시 망각할 수 있단다, 지갑에는 위안화 현금이 있었지만 그는 신용카드로 결제하기로 했단다. 한 연구에 따르면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영역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단다. 아무리 자의로 주는 돈이라 해도 빼앗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리라. 신용카드는 내 지갑에서 나와 잠깐 상대방에게 건너가지만 곧 되돌아온단다. 현금은 돌아오지 않는단다. 조삼모사가 분명하지만 꾸준히 진화 중인 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말기로 하잔다. 그는 신용카드를 건넸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도 항공권 결제가 되었고, 추방의 고통이 조금 덜어졌단다. 신용카드를 소유하고 있고 문제없이 결제된다는 것은 모국에서의 그의 신용이 멀쩡하며, 추방 같은 일을 당해서는 안 될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 같았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안 요원은 그의 지불 능력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다음 절차를 이어갔단다, 그들은 공안 요원 전용통로를 지나 형식적인 소지품 엑스레이 검사를 통과한 후 게이트에 도착했단다.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를 말없이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인천행 비행기가 탑승절찰를 개시하기를 기다렸단다.
푸등공항을 이룩한 비행기는 동중국해 상공을 지나 어둠이 깔린 인천공항에 도착했단다. 짐을 찾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단다.
"어디야? 숙소에 도착한 거야?"
"아니, 여기 인천공항이야."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단다. 놀란 것도 당연했단다. 아침에 출국한 남편이 저녁에 귀국한 것이란다. 원래 계획은 한 달 여정이었단다.
"안 간 거야?"
"아니 가긴 했는데....."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아니, 그게 말이야. 나, 추방됐어."
그 무렵 그는 대학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단다. 학기 중에는 소설이 통 써지질 않았단다. 겨울방학을 맞아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보리라 결심하고 적당한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단다. 상하이 푸등지구에서 관관객을 상대로 민박을 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단다. 투자 목적으로 사들인 아파트를 마냥 놀리기는 뭐하니 관광객들에게 단기로 빌려주는 것 같았단다. 삼시세끼 밥도 차려준다고 했단다. 해주는 밥 먹으며 조용히 글 쓰다 오기에는 적당해 보였단다. 심심하면 상하이 시내에도 놀러 나갈 수 있을 터였단다. 집주인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중국공상은행을 통해 숙박비 전액을 선불로 입금하면 예약이 완료된다는 답변을 받았단다. 집은 신축이라 깨끗했고 그가 쓸 방은 화장실이 따로 딸린 안방으로 전망 좋은 발코니도 붙어 있다고 했단다. 사진으로 봐도 아주 근사했단다. 그는 한 달 숙박비와 식비 전액을 위안화로 환전해 송금했단다. 필요한 자료들을 챙기고 무료할 때 읽을 책들도 골라 놓았단다. 겨울인데다 장기여행이어서 짐의 부티가 작지 않았단다. 그는 그 짐들을 모두 끌고 만 하루도 안 돼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단다.
추방, 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내는 그가 쓰고 있던 소설의 내용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던 것 같단다. 남파된 후 북으로부터 잊혀져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간첩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란다. 후에 <빛의 제국>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 소설은 남한과 북한을 모두 경험한 주인공의 입을 통해 두 체제 모두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데, 북한 관련 이유에 민감한 중국 당국이 그의 입국을 막았을 개연성이 있다고 본 것이란다. 그런 추윽이 터무니없지도 않은 것이 <빛의 제국>은 그후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지만 유독 중국에서만은 당국의 검열 때문에 출판이 어렵다는 현지 출판사들의 전언이 있었단다.(이제는 나와 있단다)
그러나 그가 푸등공항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런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국제 정세 때문이 아니었단다. 국경을 넘는 여행자가 해야 할 너무도 기본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단다. 입국심사대에 줄을 서서 주변을 살펴보니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다른 한국인들은 모두 여권과 함께 흰 종이를 한 장씩 손에 들고 있었단다. 예감이 좋지 않았단다.
"실례지만 그 하얀 종이는 뭔가요?"
"이거요? 비자인데요."
"아니, 중국도 비자가 필요해요?"
"필요할걸요? 저희는 단체로 다 받았어요."
"중국하고 우리나라가 교류가 얼마나 많은데 비자가 필요해요?"
"그러게요. 근데 필요한 것 같더라구요."
주변을 둘러보니 겨울잠에서 방금 깨어난 곰처럼 생긴, 푸근하고 나른한 인상의 공안 요원이 보였단다. 그는 줄에서 벗어나 그에게 다가갔단다. 중국어는 전혀 모르니 영어로 물었단다.
"한국 국민인데요. 비자 필요한가요?"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단다. 그는 현지 공항에서 바로 도착 비자를 발급해주던 동남아 관광지들을 떠올렸단다. 앞장서 걸어가는 그에게 물었단다.
"여기서 비자 바로 발급받을 수 있죠?"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게 웃었단다. 그를 따라 창이 없는 긴 복도를 한참 걸었단다. 손에 손에 보온병을 든 공안 요원들이 그와 인사를 하고 지나갔단다. 그는 제복을 입은 요원들로 북적이는 사무실 한구석을 안내돼 자리에 앉았단다. 중국차 향기아 오래 환기하지 않은 지하실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한테 뒤섞여 있었단다. 그는 그의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꼼꼼하게 살펴보고 복사를 했단다. 그러더니 서류 한 장과 볼펜을 내밀며 서명을 하라고 했단다. 서류는 중국어 간체로 쓰여 있었단다. 그가 서명을 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그 서류를 가져갔단다. 그는 그가 무슨 질문을 할 때마다 예의 그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하오, 하오를 반복했단다. 그런 우호적인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금방이라도 도착 비자가 나올 것 같았단다. 다만, 모든 비자에는 수수료가 있을 텐데 왜 돈을 달라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지가 조금 꺼림칙했단다. 그는 서류를 왼손에 든 채 그를 데리고 다시 어디론가 움직였단다. 입국 심사대로 돌아가겠거니 했지만 그와 함께 나온 곳은 출국장이었단다.
그는 공안 요원은 그를 동방항공의 티켓 데스크로 데려갔단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는 곰 아저씨 공안에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단다. 공안 요원은 그가 서명한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단다. 간체로 쓰여 있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니 해독 가능한 한자들이 더러 있었단다. 그가 중화인민공화국 법률을 위반하였음을 인정하고 즉각적인 추방에 동의한다는 내용 같았단다. 곰 아저씨 공안이 그토록 표정이 밝았던 것은 그가 아무 말썽도 부리지 않고 선선히 중국 영토에서 떠날 것에 동의하고 서명까지 했기 때문이었단다. 그제야 그는 비싼 편도 항공권 값이라도 줄여볼 요량으로 아직 쓰지 않은 인천행 항공권으로 추방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그 비행기는 이미 떠났단다. 그럼 공항에서 하루 자고 내일 그걸 타고 돌아가면 안 되냐고 다시 묻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추방은 가장 빠른 교통편을 이용해 중국 영토를 떠나야 하는 거라고, 그도 이미 동의했다며 그가 서명한 문서를 들이밀었단다. 그의 짐은 자기들이 찾아서 그 비행기에 실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단다.
게이트에 도착한 그들은 그후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단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흔치는 않겠지만, 겪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의외로 최악의 기분은 아니었단다. 여행은 아무 소득없이 하루 만에 끝나고, 한 번 더 중국을 왕복하고도 남을 항공권 값을 추가로 지불했으며, 선불로 송금해버린 숙박비와 식비는 아마도 날리게 될 것이 뻔했지만(실제로 환불은 못받았단다), 난생처름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인 만큼, 소설가인 그로서는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쓰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단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피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단다. 어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는 어너 나라를 가든 식장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란다. 운 좋게 맛있으며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단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아무것나 시켜버리는 그이 버릇 때문에 피해를 보는 동행들도 없지 않았단다. 한번은 동료 작가들과 함께 폴란드에서 열리는 문학 행사에 갔단다. 바르샤바 주재 한국 대사가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는 언재나처럼 단박에 메뉴를 정하고 메뉴판을 덮었단다. 몇 명의 동료가 그가 시킨 메뉴를 따라시켰고 그는 말렸단다. 그 역시 폴란드는 처음이며, 요리도 전혀 모른다고 했단다. 그럼에도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최초의 선택을 고집한 분들이 계셨고, 그와 그분들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제의 요리를 절반 이상 남긴 채로 식사를 마쳐야만 했단다.
물론 그런 모험은 사양하고 안전하게 배를 채우고 싶을 때도 있단다. 말로 잘 안 통하는 나라에서 닭 볏(프랑스나 이탈리아)이나 타란툴라 거미 튀김(캄보디아), 박쥐 수프(인도네시아) 같은 메뉴룰 피하려면 이렇게 한단다. 메뉴판의 공간은 한정돼 있으므로 거기 올리는 메뉴를 대충 정하는 식당은 없을 것으로 가정한단다. 오래 영업한, 제대로 된 식당이라면 대체로 세계 공통의 법칙을 따를 거란다. 식당 주인이나 세프는 우선 이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이런 항목들로 분류했을 것이고, 각 분류마다 네다섯 개 정도의 메뉴를 선정한단다. 한번 인쇄하면 바꾸기 어려우니 신중하게 선택했을 것이란다. 맨 위에는 셰프가가장 자신 있으면서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던 요리를 넣는단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함부로 시키기 어려운, 담대함이 요구되는 요리들이 등장한단다. 비둘기 고기(이집트)나 잉어 부레(중국) 같은 식대료로 만든 이색 요리를 원한다면 맨 아래서부터 봐야 하고, 닭가슴살이나 쇠고기 등심 같은 무난한 요리를 원한다면 위에서부터 봐야 한단다. 셰프들이 굳이 이런 도전적인 요리들을 메뉴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다양한 손님들이 기호를 만족시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다른 식당과 차별화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실력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일 거란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비발디의 <사계>나 쇼팽의 <야상곡>같은 대중적인 곡들로만 레퍼토리를 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음식 주문에서 실페를 줄이고 싶다면 모든 분류의 가장 위에서부터 고르면 되고, 재료로는 닭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단다. 겉에 뭐가 발라져 있든, 무엇에 채웠든, 속에는 우리가 아는 그 닭고기가 있단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과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란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란다. 대부분의 여행가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그는 읽지 않을 거란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거란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햇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란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톤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어행을 떠났지만 이 섹케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과 짐승, 문화와 제도가 존제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단다.
여행담은 인류이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기도 하단다. 주인공은 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난단다. 로널드 B. 토비아스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추구의 플롯'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플롯이라고 소개한단다. 주인공이 뭔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들로, 탐색의 대상은 대체 주인공의 인생 전부를 걸 만한 것이어야 한단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갈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헤맨단다. 그보다는 덜 오래된 이야기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끝내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향한단다. 주인공들은 험한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란다.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던혀 다른 것을 얻는단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란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 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에 이른단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귀환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긴 여정을 통해 그가 진짜로 얻게 된 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인산의 안위 따위에는 무심하다는 것,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단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인 이타케에 도착한단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으로 바깥 세상과의 소통에 큰 어려움을 겪는 소녀란다. 주인공은 <스타트렉>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데,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면 그 상금으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단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바람에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서는 정해진 날짜에 스튜디오에 배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난생처름으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떠나 로스앤젤레스까지 가기로 마음을 먹는단다. 불친절한 버스 기사와 도둑을 만나고 교통사로를 당하는 등 시련이 잇따른단다. 전형적인 '추구의 플롯'답게 주인공 웬디는 원래의 목적이엇던 시나리오 공모 당선은 이루지 못한단다. 대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엑 부과했던 한계를 돌파애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단다. 관객은 그녀가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기뻐한단다. 왜나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그녀가 추구하는 표면적 목표(시나리오 공모 당선)의 밑바탕에 진짜 목표(가족에게 받아들여지고 사회로 나아가는 것)가 잇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그래서 주인공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그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흐뭇해하게 된단다.
이처럼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두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단다.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 이렇게 나눌 수 있단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단다.
'추구의 플롯'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주인공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이야기가 '추구의 플롯'으로 쓰일 수 있고, 쓰여야 할지도 머른다는 것을 암시한단다. 우리는 명확한, 외면적인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단다. 이런 목표는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란다. 하와이에 가서 서핑을 배우겠다. 치앙마이에서 트레킹을 하겠다, 유럽 전역을 떠돌며 미술관을 둘러보겠다 같은 것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준비한단다.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동 수단을 검토한단다. '추구의 플롯'에서는 주인공이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란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저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단다. 적으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단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낟.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란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은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단다.
독자들이 '추구의 플롯'을 따르는 소설이나 영화, 여행기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것은 그들이 자신이 인생을 바로 그 플롯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일 거란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난 외면적인 목표들이 있었단다. 대학에 입학하기, 좋은 상대를 만나 결론하고 가정을 꾸리기, 번듯한 집 한 채를 소유하기, 자식을 잘 키워 좋은 대학에 보내기 같은 것들, 그런데 이런 외면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란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더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그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란다.
미국의 한 학자는 마이너리그 야구 선수들을 연구했단다. 야구를 시자하면서 '나는 커서 마이너리그 선수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없읐을 거란다. 모두의 꿈은 메이저리거, 메이저리그 중에서도 화려한 성적을 내고 어머어마한 연봉을 받는 소타 플레이어였을 거란다. 베이스볼큐브닷컴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신인 드래프트 결과를 살펴보면 프로 구단에 드래프트된 전체 아마추어 선수는 17,925명이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한 번 이라도 뛴 선수는 1,326명에 그쳤단다. 이는 약 7.4퍼센트에 블과하단다. 마이너리거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원래 추구하던 것과 다른 것을 얻었단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불행했을 리는 없단다. 그들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자기 인생을 살아냈단다. 경기에 출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은퇴한 후에는 코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거나 다른 일을 찾았을 거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 얻으려던 것('메이저리거 되기')보다 더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거나 최소한 얻었다고 믿었)을 거란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엎에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가 있단다. 인생과 여향은 그래서 신비롭단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란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자발적(?)으로 추방디던 그 순간, 오랫동안 세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그때에 그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사실 그때 당장 뭔가를 깨닫고 어쩌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단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상하이에 가서 소설을 쓸 거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서 뭐라고 말한다? 상하이에서 완성하기로 했던 소설은 이제 어찌할 것인가? 그런 걱정들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란다.
짐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니 밤이 이미 이슥했단다. 왠지 택시를 타기는 미안해 공항버스를 탔단다. 아내는 아침에 출국한 남편이 추방을 당해 밤에 돌아오는 초유의 사태를 당하자 잠시 평정심을 잃었단다. 그는, 비자 받아 다시 가면 된다, 중국 비자 금방 나온다더라며 설득했지만 아내는 그러지 말라고 했단다. 자기를 추방한 나라에 왜 다시 가? 이참에 그냥 집에 틀어박혀 아무데도 나가지 마고 소설에만 집중하라고 했단다. 그러면 상하이에 간 거나 진배없다고 했단다. 추방 당하고 돌아왔다고 동네방네 떠들지도 말라고 다짐을 두었단다. 그는 시킨 대로 했단다. 두문불출하고 글만 쓰고 있자니 소설은 의외로 쭉쭉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단다. 그러다보니 사하이에서 당한 추방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은 나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다만 순서가 살짝 바뀌었을 뿐 아닌가? 원래 계획은 출국-상하이 체류-집필-귀국이었는데, 그게 출국-(극단적으로 짧기는 했지만) 상하이 체류-귀국-집필로 바뀐 것뿐이지 않을까? 결과만 보면 그렇게 봐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단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단다. 장편소설이라는 게 한 번 탄력을 받으면 작가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끌고 들어간단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정말로 집필에 저념한다면 그가 실제로 어디에서 쓰고 있는가는 거의 중요치 않으며, 때로는 아예 잊어버리게 된단다. 그는 주인공 김기영을 따라 때로는 평양의 거리, 서울 낙원상가와 코엑스 지하를 헤매느라 상하이 푸둥지구에 있는지 서울의 내 집 골방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단다.
한 달간의 '내 방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한겨울의 한 강변으로 나가 걸었단다. 마치 오랜 외국 여행에서 갓 귀국한 사람처럼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였단다. 한 선배 작가는 장편 출간에 즈음하여 가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탈고하고 밖으로 나오니 자기만 겨울옷을 입고 있더라는 말을 했단다. 매일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단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어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란다. 그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 하단다.
어행을 통해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단다. 20세기 후반을 지나며 많이 간단해졌지만 그전까지 여행은 언제나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일생일대의 고역이었단다. 영어 'travel'이 '여행'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4새기 무렵으로, 고대 프랑스 단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이 단어에는 현대의 우리가 '여행'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단다.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을 뿐이란다. 현대 영어에서는 아직도 'travai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생, 고역 등이며 'in travail'이라고 하는 '산고로 몸부림치다' 같은 의미가 된단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단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을 쳐서 '객사'라든가 '역마살'이 나오면 불길하게 생각했단다. 서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세기 이전까지는 재미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단다. 멀리 떠나는 자는 삶의 터전을 빼앗겼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단다. 종교적 열정으로 떠나는 순례도 있었지만 험난하고 고생스러웠단다. 많은 순례자들이 강도의 습격이나 질병으로 길에서 목숨을 잃곤 했단다. 그러므로 이토록 힘들고 위험한 여정을 떠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마땅했단다. 순례자는 신을 만나고, 동방박사는 구세주의 탄생을 목도하고, 길가메시는 영생의 비빌을 알아야 하고, 작가는 기가 막힌 글감을 얻어야 하는 것이란다.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것은 1996년이었단다. 그때는 아직 결혼 전이어서 집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소설가가 되겠다면 몇 년 동안 공짜밥을 얻어먹고 있었던 터였단다. 문학상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자마자 부모에게 유럽 여행을 다녀오라고, 돈은 그가 다 내겠다고 컨소리를 쳤단다. 아버지는 그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베트남에 파병된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사실상 최초라 할 수 있었고, 어머니는 그야말로 처음이었단다.
십올 일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공책을 내밀었단다.
"봐라. 다 적어 왔다."
여행 중에 가이드가 하는 온갖 얘기를 빠짐없이 적어 온 것이란다. 그가 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단다. 그는 부모에게 빌붙어 살아왔던 몇 년간의 생활이 공식적으로 끝났음을, 이제는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고 싶었단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부모가 그저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었단다. 아들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될 거라고 생각도 안 했던 부모에게 그가 (부모를 유럽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보란듯이 작가가 되었다는 것, 글을 팔아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던 거란다. 하지만 아버지의 '숙제 공책' 덕분에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노력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어버렸단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아버지는 그렇게 큰돈을 쓴 여행이라면, 그냥 먹고 놀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거란다. 그렇다면 뭘해야 할까? 아버지는 여행은 배움이어야 한다는 인류의 오랜 믿음을 따랐단다. 그 믿음에 /다라 여행 내내 펜을 놓지 않고 열심히 필기를 했을 거란다. 여행 안내서마다 나오는 뻔한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가끔은 글로 차마 옮길 수 없는 민망한 농지거리도 적혀 있었단다.
그것은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여행이 되었단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필기 따위 하지 않고 좀더 느긋하게 즐겼을까? 아마 알았더라도 그러지 못했을 거란다. 아버지의 그런 꽉 막힌 성격은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여행자의 태도이기도 했단다. 그 세대 한국인에게 유럽 어행은 진귀한 경험이었단다. 그 무렵의 나야 이미 유럽으로 두 번의 긴 배낭여행을 다녀온 뒤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고루하고 답답하게 느꼈졌지만 돌이켜보면 그 역시 첫 해외여행에서는 아버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단다.
그의 생애 첫 해외여행은 중국이었단다. 모두가 진로를 모색하던 4학년 2학기까지 그는 학생회에서 일하고 있었단다. 11월이 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겨울방학의 초입에 학생처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단다. 당시는 학생회의 힘이 대단해서 학생처는 거저 커다란 말썽 없이, 즉, 운동권들이 총장실을 점거한다거나 하는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가기만을 바랄 때였단다. 그는 가끔 학생처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바로 튀어나와 그를 진정시키고 사태를 해결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단다. 예를 들어 학생회 간부들에게 지금되는 장학금이 있었는데, 그 장학금 대상이나 액수가 둘어든다거나 할 때가 있었단다. 그 장학금은 개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나 운동 정파 내부의 비자금으로 쓰였단다. 공식 예산으로 근거를 남기면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단다. 그들은 그 장학금을 문건도 인쇄하고 수배자의 도피 자금도 제공하고 전단지도 만들어 뿌렸단다. 그런 돈을 줄인다는 것은 바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고, 그럴 때가 바로 그가 학생처 문을 손으로 여는 대신 발로 차고 들어가야 할 적절한 타이밍이었단다.
그는 대뜸 중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단다. 학생처 직원이 '중국'이락 말했는지 '중공'이라고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나중에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가계부에는 '영하 중공 여행'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단다. 어머니뿐 아니라 대부분ㅇ 의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서쪽에 있는 그 거대한 나라를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라고 불렀단다. 중국이든 중공이든 간에 그의 요지는, 대학생들에게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을 알려주자는 취지로 재벌 기업들이 돈을 모아 소련과 중국으로 단체여행을 보내주기로 했고, 그가 그를 추천했다는 것이었단다.
천안문 사태가 무력으로 진압된 지 불과 반녀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고,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때로부터 불과 한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단다. 사회주의 중국은 평화로운 시위대를 학살했고, 소비에트와 동구권은 급속도로 붕괴하고 있었단다. 반면 1988년의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연간 GDP 성장륭이 십 퍼센트를 넘다들면서 남한 지본주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단다. '독점재벌 해체하라'고 거침없이 오치던 학생들에게 윤리적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단다. 그 독점재벌의 돈으로 은밀히, 때로는 공개적으로 숭배하던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을 보러 갈 것인가. 하지만 그가 알기로 그 제의를 거절한 운동권은 거의 없었단다. 아직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어 있지 않던 시대에, 특히 해외 도피의 가능성이 있는 군 미필자들에게, 그런 기회는 정말 흔치 않았단다. 당시의 운동권은 마오쩌둥의 어록이라든가 그와 홍군의 대장정을 기록한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을 읽으며 사회주의 중국에 커다란 환상을 품고 있었단다. 동시에 소련의 국정교과서라 할 수 잇는 <세계철학사>로 마르크시즘을 배우고, 차르 체제를 붕괴시킨 러시아혁명사에서 군사독재 타도의 희망을 보기도 했단다. 두 나라의 혁명을 다룬 책을 여럿 읽었지만 거기에 실제로 갈 수 잇을 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두 나라 모두 우리와 지리적으로는 인접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북한만큼이나 멀었고, 실제의 장소라기보다는 <걸리버 여행기>의 릴리퍼트 같은 상상의 나라에 더 가까웠단다. 그런데 갑자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단다. 심지어 여행비도 필요 없었단다. 공짜 여행이었던 것이란다.
그때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단다. 한 번만 쓰고 버리는 단수여권인데도 그나마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단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1987년까지는 50세 이상만 관관용 단수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단다. 이후 40세, 30세로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이르러서야 연령제한이 폐지되었단다. 1989년까지는 일가족의 여권 신청도 제한을 받았는데, '해외 도피 우려'가 그 이유였단다. 그는 군 미필자여서 아버지 친구 중의 한 분이 신원 보증을 서야만 했단다. 만약 그가 귀국하여 입대하지 않으면 그분이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된다고 했단다. 소양 교육이라는 것도 이수해야 했단다. 한국자유총연맹의 전신인 한국반공연맹이나 한국관광공사에 가서 '공산권 주민 접촉시 유의사항' 같은 주제의 교육을 받았단다. 주된 내용은 해외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면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간다, 북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해외에서 남한을 비판하는 동포들도 도심해야 하는데, 그들도 실은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식이었단다.(이 소양 교육은 1992년에야 페지되었단다.) 코엑스에 있는 인터컨티넨탈호텔에 모여 호텔 이용에 관한 예절 교육도 받았단다. 해외에 나가면 민간 외교관이란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말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훈화를 들었단다. 식당에서는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배웠고, 차례차례 빈 객식에도 들어가 호텔방의 구조를 익혔단다. 그런 난리를 치른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나라를 떠날 수 있었단다. 당시에는 인천공항이 지어지기 전이라 모두 김포공항으로 집결했단다. 그들을 태운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에 도착한다고 했단다.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하기 전이어서 직항 편은 없었단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그를 보자마자 그의 귀를 가리키며 물었단다.
"귀에 그게 뭐예요?"
그건 키미테라는 이름의 패치형 멀리약으로 귀 뒤에 붙이도록 되어 있었단다. 그 말고는 아무도 그걸 붙이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그가 놀랐단다. 비행기의 멀미가 대단하다던데 어떻게 다들 아무 준비도 없이 나타난 것일까? 일행들이 몰려들어 모두 그의 귀 뒤에 붙어 있는 키미테를 구경했단다.
"비행기 처음 타세요?"
이상하다. 다들 멀미를 한다던데, 그래서 비행기 좌석에는 멀미를 할 때 쓰는 봉지도 있다던데, 왜 저렇게들 태연할 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단다. 해외여행은 안 갔더라도 다들 제주도나 부산쯤은 비행기로 몇 번 다녀온 모양이었단다. 어쨌든 그의 첫 해외여행은 그렇게 키미테를 귀 뒤에 붙인 채로 시작되었단다.
중국에서의 그는, 그리고 그와 함께 여행한 운동권 '동지'들은 어떤 면에선 유럽에서 열심히 필기만 잔뜩 해온 그의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단다. 그들은 사회주의 중국에 뭔가를 배우러 간다고 생각했단다. 천안문 사태의 진실도 알고 싶었단다. 국내 언론들이 사회주의 중국을 폄훼하기 위하여 진상을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단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확신하는 젊은 청년들을 만나리라 기대했단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소망적 사고였을 뿐이었단다. 자신이 믿고 잇던 거들이 아직은 건재하리라는 희망.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 태도였단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딩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단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단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어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거란다.
'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단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오타 리호아키라는 일본인 심리학자가 1991년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단다. 그는 유독 파리에서 호흡곤란이나 현기증 같은 증상을 겪는 일군의 일본인 여행자들에 주목했단다. 파리에 대한 환상으로 여행을 떠난 일부 일본 여행객들은 파리가 자신들이 상상하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데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단다. 개똥을 치우지 않는 주인들, 메트로 개찰구를 통과하자마자 아무데나 표를 던저버리는 승객들, 외국인에게 쌀쌀맞은 점원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불쾌한 냄새들. 이런 것들은 관고아 안내책자의 아름다운 사진에서는 짐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단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멋진 환상과 그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여행의 경험이 일천한 이들은 마치 멀리를 하듯 혼란을 겪는단다. 반면 경험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단다.
그들의 중국 여행에 돈을 댄 재벌 기업들은 사회주의의 현실을 본 젊은 운동권들이 '정신을 차리'고 투항하기를 바랐을 테지만, 그들은 그들이 의도대로늘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말겠다고 은밀히 다짐하고 있었단다. 비록 사회주의 세력이 베를린장벽 등 냉전이 전선 곳곳에서 백기를 들고 투항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노태우 정권은 아직 자본주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단다. 그 증거로 그들은 그 여행에 두 명의 보안 요원도 동행시켰는데, 한 명은 국가안전기회부(국정원의 전신, 줄여서 안기부라 불렀단다) 요원이었고, 또다른 한 명은 서대문경잘서의 형사였단다. 혹시난 발생할지 모를 망명이나 훨북 같은 돌발행동을 막기 위한 게 분명했단다. 그들 이외에도 지도교수 역할로 학생처장이 동행했단다.
안기부 직원은 젊기는 했는데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었단다. 학생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은 채 그를 뒤를 조용히 따라다녔단다. 당시 대학 분위기엣 안기부 직원과 친하게 지내려는 운동권은 아무도 없었단다. 어느 과에나 선배나 동기 중에는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거나, 종적이 묘연해졌거나, 갑자기 군대에 끌려가게 된 이들이 있었단다. 그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그도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단다. 서대문경찰서에서 파견한 형사는 정보과 소속으로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늙수그레한 남자였단다. 이름 대신 그저 안 형사로 불렸단다. 처음에는 안기부 직원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정보기관원보다는 경찰이 대하기가 편했고, 용모도 형사라기보다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푸근한
편이어서 차츰 경계심이 풀어졌단다. 학생회 간부로 일하다보면 관할 경찰서, 특히 정보과 형사들과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단다. 예를 들어 시위에 나간 학생이 며칠 동안 아무 소식이 없으면 관할 경찰서 정보과의 아는 형사에게 전화를 해서 소재를 탐문하곤 했단다. 보통은 어느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거나, 즉심에 넘겨졌다거나 하는 정보를 알려주었단다. 가끔은 자신들도 함부로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어떤 기관에서 데리고 있는 것 같다고 슬쩍 함시할 때도 있었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애를 태우는 가족과 친구 입장에선 그만한 정보도 소중하단다. 반면에 그들도 가벼운 정보들을 그들에게 확인할 때가 있었단다. 예정된 시위의 규모나 장소 같은 것인데, 어차피 그들이 알려주지 않아도 현장에만 나오면 알게 되는 정보라면 그들이 상급 기관한테 깨지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훌려주곤 했단다. 그리고 너무 과격한 충돌이 일어나 학생이나 경찰관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조율하는 라인도 필요했기 때문에 학생횐 단위에서는 관할 결찰서와의 채널을 열어두었던 것이란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그는 안 형사에 대해 다른 학생들보다는 거부감을 덜 갖고 있었단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말년 형사인 그가 해외에 나갈 일은 전혀 없었을 거란다.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보안 요원 파견을 의뢰받자 승진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말년 형사로 정년퇴직을 앞둔 선배에게 일종의 포상처럼 기회를 준 것 같았단다. 그 역시 학생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하게 된 초보 여행자 처지였던데다가 하필이면 어행지가 미수교 적성 국가여서 나름 꽤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단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 카메라를 건네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단다. 셀카가 없던 시절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행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할 판이었단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를 피했단다. 천안문이나 만리장성 같은 유명 관관지에서도 그는 좀처럼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단다. 아버지뻘인 그가 그렇게 혼자 겉돌고 있는 걸 보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제가 찍어드릴까요?"
아마 상하이 루쉰공원에서였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저자는 관광지에 도착할 때마다 잊지 않고 그의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단다. 식당에서도 가끔은 그와 한 테이블에 앉아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단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서서히 긴장이 풀려 작가 보안 요원으로 따라왔다는 사실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단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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